20220515 세미한 음성 붙들기 / 고전 14:12

20220515 세미한 음성 붙들기 / 고전 14:12

고전 14:12/세미한 음성 붙들기

220515 주일설교
1. 왜 못 듣는가
최근 성경공부 중 한 교우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최근 부흥회를 인도하신 이은상 선교사님께서 설교 중 말씀하시기를, 작년에 친척인 우리 교회 부목사님의 전화를 받았는데 ‘하나님이 너 뉴저지장로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될 거다.’라고 하셨잖아요. 선교사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우리는 왜 못 듣나요? 하나님이 그 선교사님께만 특별히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사실은 우리도 그 분처럼 다 듣고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자녀에게 인자한 음성으로 말을 거십니다. 우리는 듣고도 들은 줄을 모른 것입니다. 새들백교릭회 릭 워렌 목사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교사, 환경 그리고 느낌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목사의 설교나 교사의 성경공부를 들을 때 혹은 주변상황이 나 사람들의 권면이 우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느낌에는 이미지, 잔상, 아이디어, 깨달음, 확신이 포함됩니다.
앞서 소개한 선교사님들은 바로 이 느낌을 붙들어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듯 귀에 대고 음파를 일으켜 고막을 진동시켜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신비한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예외적입니다. 대부분은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에 감정의 파동을 일으켜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은상 선교사님이 그러셨지요? 전화통화 중 하나님이 ‘뉴장에 가서 말씀을 전하게 될 거다’고 하셨는데 이걸 말할까 말까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면 내가 말 안 해도 다시 연락이 오겠지’ 하고 말하지 않았더니 정말 전화가 오더라고 말입니다. 만약 귀에 그 말씀이 고막을 울리는 음성으로 들렸다면 뭣하러 연락이 오는 것을 기다려 확인하려 할까요? 귀에 들리는 음성이 아니라 마음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느낌, 이미지,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을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호렙산에서 그 음성을 기다릴 때 크고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하나님은 그 중에 안 계셨고 큰 지진이 있었지만 안 계셨고 큰 불이 있었지만 역시 안 계셨습니다. 그 후 세미한 소리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에 세미한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사사기를 보면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할테니 미디안 진영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겠다고 양털 위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또 기도하여 확인합니다. 왜 확인할까요? 우리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큰 바람과 지진과 불처럼 똑똑히 들리면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그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세미한 느낌, 통찰, 아이디어로 들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모두의 마음에 세미한 음성으로 계속 말씀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똑같이 세미한 음성을 듣고도 선교사님들은 그것을 잘 캐치해서 분별해 내는데 우리는 왜 잘 못 합니까? 우리가 다 거듭난 성도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전제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열심히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귀를 기울이도록 교회가 많이 격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첫째 귀를 기울이기 않기 때문에 잘 못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마치 노래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노래를 할 수 있지만 더 잘 하는 이와 덜 잘하는 이가 있습니다. 왜 어떤 이는 노래를 더 잘 합니까? 첫째 타고난 이들이 있습니다. 이건 우리의 선택이 아니니 어쩔 수 없습니다. 둘째 연습하여 실력을 키운 이들입니다. 좋은 선생에게 배우고 부지런히 연습하면 할수록 점점 노래를 잘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모두가 들을 수 있지만 더 잘 듣는 이가 있습니다. 왜인가요? 첫째 영적 감수성이 더 뛰어난 이들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논리적인 사람, 기억력이 더 좋은 사람, 힘이 더 센 사람이 있는 것처럼 영적 감수성이 더 뛰어난 이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단풍숲을 보고도 우리 대부분은 ‘와, 정말 아름답다’하는 탄성이 전부인 반면 시인은 ‘창조주의 붓이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메마른 땅에 촉촉히 그려놓았다’는 노래를 부릅니다. 똑같이 굶주리는 아이들을 보고도 우리 대부분은 ‘아, 정말 마음이 아프다’하고 끝나는 반면 ‘주께서 저들에게 내가 가진 오병이어를 나누어 주라고 하신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영적 감수성이 뛰어난 이들입니다.
둘째는 듣기를 원하여 계속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면 분명 더 잘 듣습니다. 선교지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하나하나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사역도 생활도 쉽지 않습니다. 주님을 더 의지하고 주목하고 간구하고 응답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인도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되기에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 애씁니다. 그러니 마음에 떠오르는 작은 느낌 하나도 놓칠 수가 없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는 이가 어떻게 무신경하게 세미한 음성을 흘려버립니까? 그렇게 듣기 시작하면 점점 더 세미한 음성이 뚜렷하게 들립니다. 점점 더 잘, 자주, 편안히 듣습니다. 초보자는 조그만 탁구공을 라켓에 맞추기도 힘들지만 반복해서 연습하면 저 구석에 정확히 드라이브를 꽂아넣듯이 말입니다.
반면 한국과 미국, 이 번영한 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배고프면 사먹고 아프면 병원가고 다리 아프면 차타고 심심하면 TV보고 더 심심하면 골프치러 가면 됩니다. 직장이나 사업 뿐 아니라 교회사역도 매뉴얼이 다 있어서 매번 하나님께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설교와 성경공부와 유투브와 기독교컨텐츠가 쏟아져 나와 하나님 음성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굳이 세미한 음성에 귀기울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의 음성듣는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10년 동안 라켓을 잡지 않으면 공을 맞추기도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미국 사는 우리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풍요와 안락의 거센 바람소리에 귀가 멀어 주님의 음성 듣는 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3. 격려하지 않았기 때문
하나님의 음성을 잘 못 듣는다고 느끼는 둘째 이유는 음성듣기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격려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장로교파 중 보수적 교단은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종결되었기에 오늘날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적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단은 다소 중도적이어서 개인적 음성듣기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성경과 그 해석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다고 믿습니다. 장로교단이 이처럼 개인적 음성듣기에 부정적이거나 한계를 명확히 두는 이유는 종종 그런 음성듣기가 주관적이고 신비적으로 흘러서 교회의 덕과 질서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느낌은 객관화가 안 됩니다. 성경처럼 기록으로 모두가 공유할 수도 없고 설교처럼 성경과 신학으로 검증할 수도 없습니다. 그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오직 그것을 설명하는 이의 해석과 표현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러다보니 건강하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의도적 왜곡 혹은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 혹은 자신의 욕망을 구분하지 못 해서 생기는 비의도적 왜곡을 걸러내지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제가 예전에 섬기던 청년부에서 한 형제는 제가 아는 경우만 네 번에 걸쳐 다른 자매에게 각각 하나님이 그 자매와 결혼하라고 명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색이 되어 저를 찾아온 자매의 말을 듣고 형제의 말을 들어보니 하나님께 배우자를 간절히 기도하던 중 꿈에 그 자매와 결혼식을 올렸고 자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예이지만 이런 일이 종종 교회에서 발생합니다. 예배당 증축을 놓고 기도했는데 한 교인이 하나님이 증축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답하고 다른 교인이 증축하지 말라고 하셨다 답한다면 누구 말을 들어야 합니까? 두 사람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십니까? 둘 중 하나만 가짜입니까? 그 가짜는 어떻게 분별할 것입니까?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이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는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이런 모순에 직면하기에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두는 장로교 전통에 속한 교회는 개인의 음성듣기 경험을 적극적으로 격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4. 덕을 세우도록
그러나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음성듣기는 성도의 놀라운 복이요, 권세요, 특권이자 은총입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 없듯이 부작용이 있다고 하여 음성듣기를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안전한 울타리를 세우면 됩니다. 그 울타리가 은사사용에 관한 지침을 주시는 고린도전사 14장에 나옵니다. 12절과 40절을 보십시오.
(고전 14: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전 14: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은사가 그러하듯 하나님 음성듣기도 교회의 덕과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덕을 세우기 위해 신중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음성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도 속삭입니다. 요한복음은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파는 생각을 집어넣었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행을 반대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꾸짖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사탄 마귀가 우리 마음에 생각을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어떤 느낌, 생각이 떠오를 때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인지 신중하게 분별하고 확신이 없을 때는 교회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확신이 드는 경우에도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나는 믿는다’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화자의 무오함이 청자의 무오함을 보증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듣고 해석하는 우리는 불완전하여 종종 편견과 욕심에 의해 왜곡합니다.
둘째 덕을 세우기 위해 타인에게는 격려를, 자신에게는 꾸짖음을 적용해야 합니다. 덕을 깨뜨리는 많은 경우 반대로 합니다. 칭찬은 자신에게 하고 비난을 타인에게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더러 회개하라고 하셨어. 똑바로 살아.’ 형제 눈에 티끌을 빼려하지 말고 자신의 눈에 들보를 빼라하신 주님께서 왜 그에게만은 형제의 허물을 비난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비난과 정죄의 욕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은 아닐까요?
5. 질서를 세우도록
셋째 질서를 세우기 위해 교회의 지도를 따라야 합니다. 종종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교회의 지도를 무시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인양 주장하고 행동하여 질서를 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선교에서의 율법의 역할을 놓고 격론을 벌인 후 지도자인 사도 베드로와 장로 야고보의 중재안을 대부분의 회중이 받아들임으로써 2천 년 선교역사를 지탱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얻는 진리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이 결정을 당시 모든 로마제국의 교회에 편지로 보내면서 사도들은 쓰기를 ‘교회와 성령은 이렇게 결정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토론과 의견수렴을 통해 내린 결론을 성령의 결정으로 인정하였고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성도, 모든 교회가 질서를 따랐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에 기초하고 종교개혁의 성과를 따라 당회와 제직회와 공동의회라는 치리회를 두고 있습니다. 이 대의정치기관을 통해 내린 결정을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교회는 순종합니다.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 장로를 세울 때 우리는 헌법과 내규가 정한 합당한 절차를 따릅니다. 이 질서를 통해 객관적이고 합당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음… 이 목사가 담임이야, 이 성도가 장로가 되야 해 라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기도하면 우리 마음에 이런저런 느낌, 이미지, 아이디어, 확신이 떠오르지만 그런 경우에도 공동체 전체의 뜻이라는 질서에 순복합니다. YWAM 설립자인 로렌 커닝햄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란 책에 그들의 경험이 소개됩니다. 새로운 스텝을 받아들이거나 새로운 사역을 시작할 때 8명의 리더들은 모여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는 각자의 생각을 나눕니다. 음… 나는 이 스텝의 이런 장점이 우리 사역에 필요하기에 하나님이 그를 고용하라고 말씀하신다고 믿어. 8명이 한 마음이 되면 그들은 바로 결정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4명, 4명이 갈릴 때가 있습니다. 토론을 많이 하고 다시 기도합니다. 그러면 6명과 2명으로 생각이 바뀝니다. 그러면 다시 기도하는데 대부분 2명이 생각이 바뀌어 만장일치가 됩니다. 어떤 경우 2명이 끝까지 생각이 안 바뀝니다. 그러면 헤어지고 다음에 다시 모여서 기도하고 토론합니다. 대부분은 두세 번 기도회를 하면 만장일치가 됩니다. 뭘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묻고 듣고 나누고 토론하여 공동체를 통해 검증받고 공동체의 결정을 하나님의 결정으로 받아들여 순복합니다.
이것이 덕과 질서를 세우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숙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성도의 놀라운 복이요, 특권이요, 권세입니다. 이 복을 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욱 훈련하고 연습하여 잘 들어야 합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교회의 덕과 질서를 세우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를 받는 복된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