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2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 / 요 9:13-23

20220612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 / 요 9:13-23

요 9:13-23/입으로 시인하는 신앙

220605 주일설교
1. 박해받는 기독교인
여러분의 배가 난파되어 망망대해에 떠있는 조그만 보트에 올라탔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살 길은 어떻게 하든지 이 작고 위태로운 보트에서 끝까지 버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보트 위의 사람 대부분이 극단적 무슬림이고 그들은 보트를 가볍게 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바다에 던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을 가려내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 노려보며 예수를 저주하라고 시킵니다. 자, 여러분은 예수를 저주하고 배에 남겠습니까,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바다에 던져지겠습니까? 생각할 시간을 드려야겠지요? 있을 법하지도 않은, 그런 살떨리는 예를 드냐고요?
CNN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15년 4월 15일 리비아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던 고무보트 위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슬림 난민들은 배에 탄 기독교인 난민을 가려내어서 모두 12명을 바다에 던져 살해했습니다. 그들의 만행은 보트가 이탈리아 해양경찰에 발견된 후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받는 일은 초대교회 때의 역사 속 사건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박해받는 기독교인을 돕는 Open Doors 선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2022년 현재 세계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는 시대입니다. 북한,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등과 같이 가장 극심한 박해가 벌어지는 나라에서 살해위협 속에 사는 기독교인은 3억 6천만 명으로 전 세계 기독교인 7명 중 1명에 이릅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신자 10명 중 2명이 아시아 신자 10명 중 4명이 이런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2021년 한 해 전세계 순교자는 5,898명으로 전년보다 1,000명 이상 증가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오늘도 예외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이 고백의 무게를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 고백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2. 신앙고백의 위협
지난 주에 이어 요한복음 9장의 시각장애인 치유사건을 읽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치유하신 시각장애인의 이웃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 제정일치사회였던 구약시대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종교지도자일 뿐 아니라 공무원, 경찰, 판사  경우에 따라 의사의 역할까지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를 구성했던 바리새인들도 사두개인들과 이런 역할을 맡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는 노동을 한 것을 문제삼으며 죄인으로 규정하고 이 치유받은 이에게도 그를 죄인으로 규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바람과 달리 치유받은 그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답하자 이번에는 그의 치유사건을 믿지 못 하고 그의 부모를 불러 자초지종을 따집니다. 그의 부모들은 증언을 거부하고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합니다. 그 이유를 22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미 예수님 당시부터 시작된 기독교인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는 AD90 얌니아 회의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회당예배에서 낭독하는 19개의 기도문에 ‘이교도 저주문’을 넣음으로 공식화되었습니다.
“유대교를 떠나간 배교자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게하라…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은 즉시 멸망할 지어다. 그들은 생명책에서 지워질 것이다…”
이렇게 회당에서 쫓겨나고 유대교에서 출교되는 것은 오늘 우리가 단순히 다니던 교회를 더 못 다니는 수준이 아닙니다. 우리야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에서 살기에 다른 교회를 가도 되고 교회를 안 가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와 완전히 결합되었던 유대사회에서 출교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매장된다는 뜻입니다. 가족에게서 쫓겨납니다. 그를 쫓아내지 않으면 가족 전체가 사회에서 쫓겨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곧 어떤 경제적 수단을 소유하거나 상속받지 못 한다는 의미입니다. 회당에 참여할 수 없으면 사회적인 신분, 직업, 지위를 모두 박탈당합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가족과 직장에서 쫓겨난 후 가진 모든 동산, 부동산을 압류당하고 신분을 빼앗겨 미국에서 추방당하는 정도와 유사합니다. 그런 일을 당한 유대교 사회에서 이 기독교인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독교 공동체의 보호를 받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음과 동시에 공동생활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행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물론 이런 공동생활이 전에 누리던 안락과 풍요를 결코 보장해 주지 못 했습니다. 그들은 신분과 삶의 질의 추락, 가족과 이전 공동체 상실의 고통을 직면했습니다. 이는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시련 중 하나입니다. 이런 시련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이 무너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과 그 분이 주시는 생명이 그들이 잃을 모든 것보다 더 귀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희생과 상실을 무릎쓰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노라는 확신과 헌신 끝에 나온 것이 예수님을 입술로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3. 구원에 이르는 믿음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도 시인해. 됐지? 이 풍요롭고 안전한 땅에서의 우리 믿음과 고백이 틀린 것은 아니나 성경이 말하는 그 깊이와 무게를 제대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순간 의지하던 모든 것에 미련을 내려놓는 것이요, 입으로 시인하는 순간 북한과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서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고백의 엄중함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으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이 풍요롭고 안전한 미국땅에서 하는 고백에 무슨 희생과 포기가 필요합니까? 믿음이 필요합니까? 깃털처럼 가벼운 것 아닙니까? 이렇게 가볍고 희생없고 무책임한 고백에 대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다같은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 한 교우가 질문했습니다. 우리는 행함의 열매 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나요? C.S.루이스는 ‘행함으로 천국에 이를 수 없지만 행함없이 이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믿는다면 생명은 고사하고 하루 아침의 골프/즐거움/안전함/재정적 손해/체면손상도 감수 못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과연 저 보트 위에 있다면, 북한과 아프간에 살아야 한다면 과연 우리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있을까요? 오늘 여러분의 신앙고백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4. 소망의 주 예수님
참되고 온전한 믿음에서 한참 멀기만 한 우리들의 소망은 어디 있습니까? 본문의 주인공 눈을 뜬 이를 보십시오. 그는 육의 눈도 멀었지만 영의 눈 역시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짓이긴 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 씻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느꼈을 심정을 요한복음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엿볼 수 있는 비슷한 사건이 있습니다. 엘리사를 찾아온 한센씨병환자였던 아람 장군 나아만을 엘리사는 만나주지도 않은 채 요단강에 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고 보냅니다. VIP로 대접받는데 익숙했던 그는 화가 나서 훨씬 크고 깨끗한 강이 얼마나 많은데 흙탕물이 흐르는 요단강 따위에서 씻으라고 하느냐고 격분합니다. 그냥 떠나려는 그를 종들이 만류해서 속는 셈 치고 들어가 보았더니 그의 몸이 치유되었습니다. 치유와 구원은 요단강물의 효력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순종하는 자세, 믿음에 달린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시각장애인은 천만다행으로 나아만 장군처럼 대접받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멸시받고 천대받고 명령 듣는 데 익숙한 이였습니다. 그는 화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순종하였더니 눈이 뜨였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 역시 속는 셈 치고 반신반의하면서 먼 길을 내려갔을 것입니다. 불완전한 믿음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아무튼 순종함으로 믿음의 여정의 첫 걸음을 잘 내디뎠습니다. 치유를 경험한 그는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품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요 9:17)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부족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교만한 바리새인보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던 그의 부모들보다 훨씬 순수한 믿음이었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에 더해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인정하는 고백의 믿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참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9장 후반부 35절 이하를 보십시오.
(요 9: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출교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요 9: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요 9: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 9: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는 주님을 만나 그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마침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참된 신앙고백을 하는 믿음, 출교와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기있는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약하디 약하지만, 비겁하고 무지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듣고 믿고 순종하며 간구하면 주님은 겨자씨만한 우리의 믿음을 수많은 새들이 와서 쉬는 커다란 나무같은 믿음으로 성장시켜 주십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숨겼던 아리마대 요셉이 그랬고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그랬습니다. 생명의 위협은 고사하고 작은 손해와 희생도 용납하지 못 하는 우리들의 연약한 믿음도 주님의 한없는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으로 온전한 것으로 자라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 은혜를 의지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허락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