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4 광복의 대가 / 딤후 1:7-8

20220814 광복의 대가 / 딤후 1:7-8

딤후 1:7-8/광복의 대가

220814 광복절기념주일
1. 박관준 장로
1939년 3월 24일 금요일 오후 1시경 일본제국 국회의사당에서 신종교법안이 심의되던 찰나 2층 방청석에 앉아있던 65세의 박관준 장로는 25세의 아들 박영창 전도사, 32세의 안이숙 선생과 함께 ‘여호와의 대사명이다’라고 외치며 신사참배항의서한과 경고성명서 뭉치를 의장단상을 향해 던졌습니다. 세 사람은 순식간에 달려온 경찰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40여 일간의 모진 취조를 당한 후 한국으로 강제송환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신사참배반대운동을 멈추지 않던 박장로는 다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취조를 당한 끝에 광복을 5개월 앞둔 1945년 3월 13일 형무소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박장로는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5천 여명, 주기철 목사와 함께 순교한 50여명의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박장로와 함께 국회의사당에서 항의서한을 투척하고 옥고를 치렀던 그의 아들 박영창 목사는 LA에서 목회를 하다가 지난 2015년 아버지를 따라 주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한국의 엘리야로 불린 박장로가 순교 전 옥중에서 남긴 한시는 참 성도의 고백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인생 일대에 한 번 죽음이 있으니(人生有一死) 어째 죽을 때 죽지 않으리요(何不死於死)
그대 홀로 죽을 때 죽었으니(君獨死於死) 죽었어도 천추에 죽지 않었도다(千秋死不死)
죽을 때가 와서 죽지 않으면(時來死不死) 살아 즐거움이 죽음만 못하리라(生樂不如死)
예수께서 나 위해 죽으셨으니(耶蘇爲我死) 나도 예수님위해 죽으리라(我爲耶蘇死)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을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기를 오히려 기뻐한 그는 진정 의를 위해 고난받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복의 대가
오늘은 77주년 광복절 기념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 안녕과 복지는 우리 주님의 한없는 은혜입니다. 또한 선조들의 값진 희생의 대가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또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요!
얼마 전 저희 집 큰아이 평화가 내년에 대학을 결정하고 나면 친구들과 한국에 놀러간다며 뭘해서 돈을 모을까 궁리하는 것입니다. 저희 집 아이 뿐 아니라 요즘 중고등부 아이들의 로망이 방학 때 한국에 놀러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어렸을 때도 상상도 못 하던 일입니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한국사회의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성공 덕분입니다. 해방 후 전쟁의 잿더미에서 비약적 경제성장을 거듭하여 국내총생산 GDP 기준 세계 191개국 중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1인당 국민소득도 인구 5천 만명을 넘는 나라 중에서 세계 6위에 이릅니다. 이 뿐 아니라 군사, 문화, 의료 등 각 분야에서도 한국의 발전속도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은 이제 당당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우린 이민자로 살지만 여전히 조국의 발전상에 큰 혜택을 봅니다. 마음의 자부심은 당연하지만 타인종이 우리를 보는 시선도 크게 달라집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평가할 때 뼈대있는 가문에서 교육받았는가를 중요하게 여겼듯 국제사회에서도 선진국 출신이냐, 아니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이런 복된 삶은 당연히 선조들의 크나큰 희생을 대가로 지불한 결과입니다. 거저 얻는 복은 없습니다. 죄와 악으로 병든 세상에서 자유와 평화, 안녕과 복지는 절대 공짜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복의 삶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주 착각합니다. 오랫동안 안전한 땅에서 인류 대부분이 누리지 못 하는 평화와 복지를 누리다 보니 이것이 정상이고 고통과 결핍이 예외인 줄 압니다. 그래서 건강하다가 갑자기 아프거나, 부유하다가 가난해지거나, 평화롭다가 다툼을 겪으면 마치 겪지 말아야 할 상황을 겪는 것처럼 놀라고 당황하고 억울해 합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착각입니다. 일찍이 인류의 현자들은 인간 삶의 기본조건은 결코 안전이 아니라 위협이며 복지가 아니라 고통임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시작된 불교는 ‘인생은 고해’ 즉 고통의 바다라는 대전제 위에 시작합니다. 이 사실은 이 복된 나라 최강제국 미국에 사는 현대인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상담가이자 뉴욕타임즈최장기베스트셀러 기록을 가진 스캇팩의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첫 문장을 ‘Life is difficult’ 삶은 참 어렵다로 시작합니다. 이 안전하고 풍요롭고 복된 나라에서조차 삶이 어렵다면 다른 나라들에서는 도대체 어떠하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의 삶은 어려운 것이 정상입니다. 쉬운 것이 예외입니다.
3. 성도와 고난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기본인 세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도의 삶이 세상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이는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삶과 같습니다. 물살을 타고 내려가기는 쉬운데 거슬러 올라가기는 몇 배나 힘이 듭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가기는 쉬운데 거슬러 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참 성도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바울은 또 갈라디아지방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행 14:22) “…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 걱정, 근심, 염려에서 다 해방되는 삶을 기대한다면 이는 반쪽 진리입니다. 분명 참 믿음의 삶은 세상 염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만 반면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의를 위한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복된 성도의 삶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참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되고 이 삶은 의를 위한 박해를 예약합니다. 박해받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박해를 받습니다. 전혀 박해가 없다면 그것은 의를 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시련이 찾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정상입니다. 아무 고통이 없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아픈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고 경제가 어려운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고 가정에 갈등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고 교회에 시련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십시오. “왜 한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이제야 고난이 오는구나. 정말 다행이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정말 그렇게 반응했습니다. 회심과 헌신을 강조한 18세기 그의 복음전도사역은 형식화된 신앙을 고수하던 영국국교도로부터 많은 비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말을 타고 순회전도를 다니던 어느 날 밤 늦게 이웃마을로 들어가다가 그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그 누구도 그를 욕하거나 돌을 던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안한 마음에 말에서 내려 엎드려 기도하려는데 그 마을사람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빌어먹을 웨슬리, 우리 마을에서 꺼져라”하고 소리치더랍니다. 그제서야 그는 “주님, 오늘도 제가 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 맞군요. 주님을 위해 욕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4. 고난을 대하는 믿음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세상염려를 내려놓는 대신 하나님 나라 위한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피장파장 아니냐, 고통의 총량은 똑같은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주님을 위한 고난은 세상 염려근심과 달리 우리에게 참 복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면 하늘에 놀라운 상이 예비되기 때문입니다. 이 상은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비교할 수 없이 더 놀라운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막내 진리에게 아무리 큰 돈을 상상해보라고 해도 세계 최고의 부자 제프 베조스의 껌값에도 미치지 못 하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큰 상을 상상하든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주실 가장 작은 부스러기 상조차도 미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억울해 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기꺼이 그 고난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골 1:24) 나는 이제 너희(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성도들에게도 고난받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벧전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교회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늘의 상을 기대하고 기뻐하며 기꺼이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이의 마음가짐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권합니다.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원수도 미워하지 않는 사랑과 고난을 견디기 위한 절제의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는 것이야말로 참 성도의 모습이요, 우리 선조들에게 진 빚을 갚는 성도의 모습이요, 다음 세대에게 복음과 복지를 물려줄 참 성도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과 교회로 인해 받는 고난이 무엇입니까? 우리 선조들의 그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고난입니까? 그조차도 견디지 못 하겠다면 과연 우리가 참 성도라 할 수 있을지요? 우리에게 본받을 선조를 주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 후손들에게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