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4 섬기는 교회 / 막 10:35-45

20220904 섬기는 교회 / 막 10:35-45

막 10:35-45/섬기는 교회

220904 주일설교
1. 고객이 된 교인
목사이자 심리학자인 로버트 랜달의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무엇을 원하는가’란 책은 그의 전공을 십분 살려 교인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분석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주장하기를, ‘현대인은 이해받고 싶은 욕구, 소속하고 싶은 욕구, 의미와 희망을 찾고 싶은 욕구 그리고 돌봄받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교회가 이런 욕구를 채워줄 때 사람들은 기꺼이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다.’고 합니다. 이 책의 주장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언듯 들으면 틀린 것이 하나 없는 구구절절이 맞는 말입니다. 아니, 깊게 생각해 봐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전혀 모르겠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들리는 이유는 이 주장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매년 숱하고 쏟아져 나오는 비슷비슷한 목회지침서 중 하나인 이 책의 주장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전형적 사고방식입니다. 소비사회라 불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자, 고객을 왕으로 대접하는 곳입니다. 고객은 모든 것의 중심입니다. 고객이 생각하고 바라고 욕망하는 바를 가장 잘 이해하는 회사가 성공하고 이해하는 정치인이 지도자가 됩니다. 한마디로 이런 생각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결코 교회가 닮아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 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현대교회가 얼마나 세상풍조에 물들어 있는지를 이 책과 이 책에서 감동을 받는 교회 지도자, 교인들이 잘 보여줍니다.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인은 교회라는 기업이 잘 대접하여서 교회로 몰려와 헌금하게 만드는 고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선택할 때 무엇을 고려하셨습니까? 2주 전 사경회에서 강사님이 지적하시기를, 이민자들이 교회를 고를 때 고려하는 세 가지가 이러했습니다. 따뜻한 교제, 감동적 예배, 자녀교육 프로그램. 정서적 필요를 교제로 채웁니다. 영적 필요를 예배로 채웁니다. 자녀교육의 필요를 교육부 프로그램으로 채웁니다. 이런 필요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불만이 터져나옵니다. 이 교회는 왜 이렇게 차가워? 새교인에게 관심이 없어. 예배는 왜 이렇게 지루해. 교육부는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어? 익숙하지 않습니까? 왜 이 식당 음식맛이 이래? 이 가게는 왜 이렇게 더워? 이 학교는 아이들 교육을 이렇게 시켜? 바로 대접을 받으러 식당과 가게, 학교를 찾는 고객의 자세입니다.
대접을 받고 필요를 채우려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는 세태야말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엄하게 경계하셨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세태를 경계하셨습니까? 성도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2. 섬기러 오신 주님
오늘 본문은 제자들의 다툼으로 시작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을 따로 찾아와 왕이 되시면 자신들에게 총리와 장관자리를 주십사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들은 열두 제자 중에서도 일찍 부름받았을 뿐 아니라 그 어머니가 예수님 일행을 열심히 대접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여겼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들은 나머지 열 제자들이 화가 났습니다. 선수를 빼앗겼던 것이 분했습니다. 그들은 아마 공평하게 경쟁해서 총리와 장관직을 차지해야 하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비겁한 수를 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제자와 나머지 열 제자 사이 갈등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입니까? 모두의 마음에 예수님을 따라다닌 대가로 높은 자리를 얻으리라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모든 다툼은 바로 이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은 교회에 있으나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있으면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다툼을 일으킵니다. 이건 2+2=4인 것처럼 콩을 심은 곳에 콩이 자라고 팥을 심은 곳에 팥이 자라듯 자명한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욕망에 사로잡힌 마음을 버리라고 꾸짖으셨습니다. 43-44절입니다.
(막 10: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는 세상과 같아서는 안 된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 으뜸이 되기를 바라라. 그러기 위해서 세상에서는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 제자공동체는 세상과 다른 가치를 좇으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이 그렇게 악하고 어리석은데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나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좇는 것입니다. 45절입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3. 예수를 바라보라
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보좌에서 지극힌 낮은 이 땅에서도 가장 낮은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대속물이 되어 고초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죄인들을 위한 가장 큰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믿는 제자들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 섬김의 주님을 매일 바라보고 좇는 이들을 성경은 제자요, 성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거듭난 성도입니까? 예수님을 좇는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입술로 주여, 주여 하는 것 말고 진짜 증거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고 그 뒤를 좇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죽기까지 복종하려 하지 않는 이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누구입니까? 십자가까지 내려가서 죽으신 예수님이십니까? 높은 자리, 부유한 자리, 성공한 자리에 올라가서 살아서는 세상영광을 다 누리고 죽어서는 천국티켓까지 보장받은 남부럽지않은 성공한 기독교인입니까? 많은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세상풍조를 좇으며 후자의 삶을 바라고 좇아갑니다. 부활의 영광은 바라지만 십자가의 고난은 바라지 않습니다. 교회에 이 욕망에 발맞춰 십자가 없는 부활을 외치며 고객들을 끌어모읍니다. 넓은 길, 편한 길, 멸망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꿈꾸는 이들이 되지 않으시기를 축복합니다.
4. 섬기는 예배
예수님의 섬기는 마음을 품어야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 혹은 service라고 합니다. service는 예배가 곧 봉사요, 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배에서 누구를 섬깁니까? 당연히 예배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종종 예배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사람을 섬깁니다.
목사를 섬기는 예배가 종종 있습니다. 목사의 언변, 카리스마에 집중합니다. 목사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번 집회는 어느 어느 유명 목사님이 오십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한 번 들어보세요. 우리 목사님은 이런 치유은사, 저런 예언은사, 이런저런 일에 탁월합니다 라고 광고하며 교인을 끌어모읍니다. 집회가 끝나면 목사가 박수를 받습니다. 영광을 누립니다. 누가 service를 받았습니까? 목사입니다.
반면 교인들을 섬기는 예배가 종종 있습니다. 목사는 교인들이 듣기 불편한 죄와 심판과 경고는 다 발라냅니다. 듣고 싶은 위로와 희망과 축복의 메세지를 듬뿍 뿌려넣습니다. 교인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기대 앉아서는 설교를 품평합니다. ‘목사님, 오늘 은혜 있었어요.  아이, 오늘은 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낸 헌금이 좀 아까웠어요. 아, 에어컨이 왜 이렇게 약해요? 아, 오늘은 간식이 좀 아닌데… 우리 교회는 왜 이런 서비스 안 합니까? 저쪽 교회는 하던데…’ 누가 service를 받았습니까? 교인입니다.
모두 사람을 섬기는 service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service가 아닙니다. 참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목사도 하나님의 종이요, 교인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섬기는 자가 어떻게 편안하게 앉아서 자신이 좋은 것을 누리기를 원하며 자기 원대로 듣고 싶고 말하고 싶고 대접받고 싶어한단 말입니까?
목사도, 교인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service하려고 이 자리에 모여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르게 전했는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응답하고 순종하는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까 두려워하며 전심으로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될까 온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순결하게 드리는 향기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배를 마치며 목사님 설교 잘 하네, 내가 은혜 받았네 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분이 좋으셨을까,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 궁금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할까 고민하며 돌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러분은 이 예배에서 누구를 섬기십니까? 사람이 아닌 참 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5. 섬기는 공동체
교회는 마땅히 이처럼 섬기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모든 이들이 섬김의 자리에 나오지는 못 합니다. 왜입니까? 이 진리를 모르는 이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믿음이 강한 이는 섬김받기보다 섬기는 것이 더 기쁜 일이요,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임을 아는 이들입니다. 이를 모르는 이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이고 이들은 약점이 많습니다. 그들은 섬김을 받으려 합니다. 높아지려 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깁니다. 그 약점은 공동체의 짐입니다. 마치 공동체란 배에 물이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배가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물을 퍼내는 이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물을 퍼내는 섬김입니까?
육체적 섬김이 있습니다. 여러 부서에서 봉사합니다. 헌금합니다. 수고를 마다 않습니다. 세상 어느 조직을 가든 대개 2080법칙이 적용됩니다. 20%의 고객이 80%의 매출을 올리고, 20%의 직원이 80%의 수익을 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20%의 성도가 50%의 봉사와 헌금을 책임집니다. ‘아, 그랬어? 왜 내가 20%에 속해서 손해를 봐야해?’ 오해마십시오.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면 80%에 속하신 것입니다. 20%에 속한 이들은 대게 그렇게 원망하지 않습니다.
정서적 섬김이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끊임없이 비난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갈등을 일으킵니다. 믿음이 강한 이들은 그들의 비난과 원망을 인내하며 용서하며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을 섬깁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평화를 이루며 인내하며 자비롭게 여기며 온유하며 마음을 절제하는  모든 것이 정서적 섬김입니다. 강한 자의 사명입니다.
영적 섬김이 있습니다. 집에서도 아이들을 저지르고 어른들은 치웁니다. 아이들은 먹고 어른들은 먹입니다. 아이들은 떼를 쓰고 어른들은 달랩니다. 교회에서도 믿음이 약한 자들이 일으키는 문제를 성령이 역사하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섬기는 어른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물의 기도, 말씀에의 순종,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 영적 섬김입니다.
우리 주님도 죽기까지 순종하시므로 하나님을 섬기셨는데 그 제자되겠다는 우리가 이런 섬김, 이런 희생, 이런 수고도 하지 않으면서 어찌 주님을 감히 따른다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누구를 섬깁니까? 우리 자신을 섬깁니까? 우리 주님을 섬깁니까? 오늘 우리는 섬김받으러 교회에 옵니까? 주님을 섬기러 교회에 옵니까? 우리 주님처럼 죽기까지 순종하여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참 성도, 참 제자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