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1 사랑하는 교회 / 마 18:21-35

20220911 사랑하는 교회 / 마 18:21-35

마 18:21-35/사랑하는 교회

220911 주일설교
1. 사랑의 원자탄
초기 한국교회 위대한 순교자로 존경받는 손양원 목사님의 별명은 사랑의원자탄이었습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공산주의자 반란군 안재선은 예수쟁이란 이유로 손목사님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을 총살하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목사님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지내다가 어느 부흥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다시 기운을 차렸습니다. 아들 죽인 원수 안재선이 사형선고를 받자 목사님은 적극적으로 구명활동을 벌여 사형을 막고 자신의 양아들로 받아들여 데리고 살았습니다. 가족도 목사님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양아들이 된 안재선은 손목사님의 바람대로 신학을 공부하였지만 ‘누가 자신같은 목사의 설교를 듣겠느냐’며 평신도로 살다가 아들에게 자신 대신 목사가 되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안재선의 아들 안경선 목사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목회를 하다가 2020년 아프리카 부른디 선교사로 떠나 할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처럼 한센씨병 환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도대체 어떻게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원수는커녕 작은 상처를 준 가족, 친구, 이웃도 용서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에서, 일터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얼굴을 똑바로 보기 싫은 이들과 마주쳐야 하는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2. 어떻게 가능한가
먼저 어떻게 원수사랑이 가능한가를 생각해 봅시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이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랑할 대상이 절대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사랑할 주체에게도 사랑의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어떻게 생각해도 원수사랑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원수사랑이 가능하다고 하십니까? 성도에게 그 사랑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과 용서받은 죄인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자신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짐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답은 비유입니다.
어떤 이가 왕에게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5천 억의 갚을 수 없는 수준의 빚을 졌지만 왕의 긍휼로 거저 채무변제를 받습니다. 그가 후에 자신이 면제받은 빚의 5만 분의 1인 천 만원을 빚을 자신에게 진 친구를 만났지만 긍휼을 베풀지 않고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이 사실을 안 왕이 화가 나 그에게 베푼 채무변제를 취소시키고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비유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성도는 자신이 이미 무한한 용서를 받은 이이므로 이웃도 용서할 의무가 있다는 점입니다. 용서는 하는 이의 너그러움이나 받는 이의 자격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명령을 받을 때 사람을 봅니다. 그래서 용서가 안됩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능합니다. 본문 33절입니다.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용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가 아닙니다. 용서는 죄인이 하나님께 은혜를 갚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은혜를 입은 성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은혜입었음의 증거입니다. 끝까지 용서를 거부하는 이는 하나님께도 용서받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마시고 우리가 입은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시기 축복합니다.
3. 어떻게 사랑하는가
다음으로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수준의 사랑을 기대하시는지 정확히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입니다.
(눅 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분명 원수사랑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원수사랑은 손양원 목사님 같이 특별한 분만 아니라 평범한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럼 원수사랑은 어떻게 합니까? 원수를 보면 손주 얼굴 보듯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것은 분명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35절입니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예수님이 예를 들어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입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사랑과 원수 위한 기도가 나란히 병렬이 되어 나옵니다. 무엇이 먼저일까요? 무엇이 먼저라 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긍휼히 여기기 시작하면 기도가 나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를 시작하면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긍휼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하셨고 스데반 집사도 이렇게 하였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억지로 가서 웃으며 ‘사랑합니다’ 하고 ‘용서합니다’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영혼을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럴 마음이 안 생겨도 순종으로 기도하면 긍휼이 마음이 따라옵니다. 원수를 좋아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도를 시작하면 됩니다. 성령님이 일하심을 신뢰하고 기도로 순종하시기를 축복합니다.
4. 사랑의 결과 
이렇게 순종하여 사랑과 용서를 결단하고 기도를 시작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기적같이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까요? 당장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결과를 이유로 결단을 망설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내가 용서한다고 저 사람이 바뀔까요? 용서하는 나만 바보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면 제자들의 이런 고민을 주님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똑같은 명령을 하시는데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문맥이 묘하게 다릅니다. 누가복음은 회개하는 이를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눅 17:3) “…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그런데 오늘 본문엔 ‘회개’를 조건으로 내걸지 않습니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용서에는 여러 가지 상황과 방식이 있습니다. 공적인 처벌을 면제하는 것에는 회개의 조건이 반드시 따릅니다. 오늘 본문의 전문맥도 이를 명시하고 있고 어느 교단 할것없이 모든 교회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적 관계에서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고 긍휼히 여기는 것은 원수의 회개 없이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성도의 사랑과 용서는 인간의 너그러움으로 일어나거나 인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회개하든 말든, 너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용서하라’고 주님이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녀들의 거룩입니다. 누가복음 6장을 다시 보십시오.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하나님은 자녀들이 당신을 닮기를 원하시기에 사랑과 용서를 명하십니다. 사랑과 용서는 그러므로 성도의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물론 용서가 무척 아플 수 있습니다. 원수에게 받은 상처와 고통을 생각하면 그를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 정말이지 아프고 견디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아들 예수님을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실 때에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 주님의 은혜를 아는 이들만이 그러므로 자신이 아프면서도 원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기적입니다. 사랑과 용서는 성도에게 큰 대가지불을 요구합니다. 동시에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상과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하십니다.
5. 성도의 순종
2006년 10월 2일 펜실베니아주 랭케스터 카운티 니켈마인스의 아미시스쿨에서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자신의 딸이 태어나자마자 사망하는 아픔을 겪고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던 찰스 칼 로버트가 행복한 모습의 아미시 소녀들을 보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총을 들고 난입한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5명의 소녀를 죽이고 5명에게 중상을 입히고는 자살하였습니다. 총기사건이 일어난 당일 충격을 받은 찰스의 집에 아미시 교인들이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살한 찰스와 그 가족을 비난하는 대신 그들도 피해자라며 위로하였습니다. 가족 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찰스의 장례식을 가득 메운 것도 아미시 교인들이었습니다. 아미시 교인들은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하는 기도를 늘 암송하며 실천하라고 가르치고 실제로 순종합니다. 때로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순종하겠노라고 고백하고 실천합니다.
주기도문이라면 우리도 그들 못지않고 잘 알고 늘 암송합니다. 아미시 교인들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인 듯 합니다. 그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한 분도 예외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