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5 계획 너머에 있는 것 / 요 12:9-19

20220925 계획 너머에 있는 것 / 요 12:9-19

요 12:9-19/계획 너머에 있는 것

220925 주일설교
1. 사라지지 않는 불안
한국의 종교인 통계를 보면 인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통계연도가 달라 오차는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목사가 약 14만, 승려가 4만 7천 그리고 신부가 1만6천 명 정도인데 비해 무당과 역술인 소위 무속인은 등록자만 2016년 약 60만 명에 이릅니다. 무속인의 특성상 한국의 대표적인 두 개 무속인단체인 대한경신연합회와 한국역술인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비회원을 더한 추산치는 최대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는 2006년에 비해 10년 만에 두 배 넘게 성장한 결과입니다. 21세기는 소위 과학과 진보의 시기가 아니던가요? 종교는 소멸할 것이란 예언이 쏟아지는 이 시기에 무속인이 이렇게 느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아마도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더 느는 사람들의 미래에의 불안, 염려,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건강과 직장, 가정과 자녀의 미래가 궁금하고 어렵게 될까봐 불안합니다. 미국의 경기, 금리동향, 주식동향, 부동산동향도 궁금하고 11월의 중간선거결과도 궁금하고 바이든이 재선할지, 트럼프가 다시 나올지도 궁금하고 한국의 다음 대통령도 궁금하실 겁니다.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과연 우리 인생과 자녀와 가정과 이 나라와 이 시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불안과 염려는 떠안고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본문말씀에게 물어봅시다.
2. 순례자들과 대제사장의 계획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었던 베다니 식사의 다음 날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기대와 계획을 가진 것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부류는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모여든 순례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확신하고 예수님을 앞세워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해방을 되찾으리라고 계획했습니다. 그 확신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길에 있던 베다니에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고, 적지않은 이들이 직접 베다니로 내려가 예수님과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나사로는 베다니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유지였고 그의 죽음과 되살아남은 나사로 본인 뿐 아니라 장례식장에 모여들었던 베다니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습니다. 18절을 보면 베다니 주민들과 예수님을 믿은 이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를 전했고 예루살렘에 구름처럼 모여든 순례자들 사이에는 ‘이 분이 그토록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해방을 가져다줄 왕이 아니냐’는 기대와 믿음이 퍼졌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개선장군을 환영하듯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13절을 보면 호산나 곧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영접하였습니다. 과연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졌을까요?
또 한 부류의 사람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예수님과 나사로를 죽여서 혁명의 불씨를 꺼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되살아난 이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어나자 예수님을 죽이고자 마음먹었습니다. 대중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뭉쳐 반로마저항세력으로 뭉치기라도 하면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고 자칫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이 위협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듣고 나사로를 보러왔다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더욱 늘어나자 그들은 나사로마저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큰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몰려든 순례자들의 규모와 지지세를 보고는 그만 기가 질려버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시도는 성공했을까요?
3. 제자들의 깨달음
결론은, 순례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계획은 다 실패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로마를 몰아내기는커녕 로마군병들에게 잡혀왔고 실망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폭도로 돌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대제사장과 함께 예수님을 로마군병에 넘겨 죽이는데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려던 기득권은 AD 70년 전쟁으로 예루살렘과 함께 잿더미에 묻혔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전하는 제자들로 인해 교회가 온 세상으로 퍼져갔습니다. 모두의 계획이 다 실패했다면 도대체 누구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까? 그 답은 바로 제자들의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당시에는 상황이 어디로 흘러갈지 도무지 몰랐던 제자들이 마침내 진실을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16절입니다.
(요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요 12:15) 이는 (슥 9:9에)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도, 순례자들이 예수님께 열광한 것도, 순례자들을 열광시킨 나사로를 살리신 일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을 제자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그제서야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일부러 지체하신, 그 이해할 수 없던 주님의 행동의 의미도 깨달았습니다. 11장으로 돌아갑니다.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나사로를 그냥 고치지 않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리셔서 제자들과 순례자들이 믿도록 만들게 하시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입성 뿐 아니라 나사로의 살리심, 그 이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부터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에 의해 오래 전부터 준비되었고 준비된 대로 진행되었고 계획대로 이루어졌음이 드러납니다. 이 모든 일을 준비하고 진행하신 이가 누구입니까?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4. 일하시는 하나님
순례자들도, 바리새인들도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다 자기 계획이 있었지만 이 모든 일의 준비도, 진행도, 결말도 여호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되었습니다. 모든 눈에 보이는 일 뒤에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일은 사람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힘모아 죄악을 만드는 인간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 아래 놓여 있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 중이고 그 뜻대로 완성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미얀마에서도, 한국에서도, 여기 미국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의 모든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돈을 버냐, 못 버냐, 원하는 학교, 직장에 가느냐, 아니냐에 집착하고 거기에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합니다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 판단과 반대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의 성공과 실패가 영원한 성공과 실패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진리를 쉽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숲 안에서는 숲을 못 보고 산 속에서는 산을 못 보듯 삶의 한 가운데서는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도 나중에야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떠올리고 이 순간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았습니가? 창세기를 보면 요셉도 자신이 형들의 악행으로 노예로 팔린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후에야 떠올리지 않았습니까?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우리도 지금 당장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괴롭고 힘들고 슬프고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에 우리 생각과 기대를 넘어서는 의미와 가치가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있음을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5. 신뢰하는 성도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청동)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러므로 지금 다 이해하지 못 해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선하시고 전능하신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14살도 안 되었을 소녀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기도하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10)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은 가르치신 대로 당신도 기도하셨습니다.
(마 26:39) … 기도하여 이르시되 “…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또한 우리는 삶의 의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조금씩이라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말입니다.
(시 119:125)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중하고 겸손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미래가 불안하고 염려하고 갈피를 잡지 못 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과 담대함을 누립니다. 겸손하고 신중하게 매순간을 감당합니다. 마침내 승리의 길을 갑니다. 여러분은 오늘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보이지 않지만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