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2:20-33/천둥소리만 듣다
121002 주일설교
1. 황소개구리
1990년대 한국에 계셨던 분들은 황소개구리 사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미 동부가 원산지인 이 커다란 개구리는 고소한 맛이 좋아 식용으로도 쓰입니다. 한국에서는 1973년 새마을운동 농가소득증대사업의 일환으로 일본에서 들여왔지만 생각만큼 수익이 나지 않자 양식업자들이 하천에 풀어놓아 버렸습니다. 덩치가 크고 먹성이 좋은데 천적은 없었던 황소개구리는 엄청난 속도로 번식하며 닥치는 대로 토종어류, 양서류를 먹어치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천과 호수, 저수지마다 황소개구리가 그득하여 황소처럼 시끄럽게 울어대자 급기야 1997년 환경부는 이를 생태계교란종으로 지정하고 언론은 공공의적으로 홍보하며 황소개구리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포상금을 주고 군인, 공무원, 지역주민들을 동원하고 대대적인 언론캠패인을 하고 어떤 저수지는 황소개구리를 없애려고 아예 물을 다 빼내고 새로 채우곤 했지만 번식속도를 쫓아갈 수가 없어서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000년 대 접어들면서 황소개구리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한국하천의 최강자 가물치가 등장했습니다. 미국에 황소개구리가 있다면 한국에는 가물치가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한국의 가물치는 미국하천에서 괴물물고기로 불리며 생태계교란종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K-fish입니다. 미국사람들이 K푸드에 맛들이듯이 가물치가 US푸드인 황소개구리 알과 올챙이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가물치를 필두로 뱀, 백로, 왜가리 등 토종생물이 닥치는 대로 먹어대자 어느 새 황소개구리의 개체수가 줄어들어서 이제는 다른 개구리처럼 ‘겸손하게’ 한국토종생태계 한 자리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것입니다. 수량이 풍부한 하천에는 자정작용이 있듯 균형잡힌 생태계는 외래종의 위치를 조정해 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다만 그 조정시간이 수십 년씩 걸릴 뿐입니다. 자연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당장 오늘내일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조급하고 불안해 견딜 수가 없지만 자연은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그러나 훨씬 더 정교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사람은 자연 앞에서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할까요?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면 자연의 창조자 앞에서는 더욱 겸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급한 우리의 시간과 크신 하나님의 시간이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차원이 다른 시간대가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과 인내를 배우도록 가르치십니다.
2. 하나님의 때
지난 주 설교에서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배웠습니까? 아무리 용을 쓰고 몸부림을 쳐도 사람의 바람과 계획은 다 무산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그 하나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하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유월절을 지키러 온 헬라인들을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당시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해 율법과 유대교의 높은 수준의 가르침을 접하고 유대교에 입교하기 위해 율법을 배우고 지키는 삶을 살던 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직접 만나보려고 빌립을 찾아왔고 빌립은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에게 이들을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헬라인들이 모든 이방인의 대표로 자신에게 나온 것이며 이 사건이야말로 당신이 고난을 겪고 부활의 영광을 얻을 때가 된 것의 증거라고 선언하셨습니다. 23절입니다.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는 지금까지 주님의 태도와 사뭇 다릅니다. 주님은 계속 당신에게 그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요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 7: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이랬던 예수님이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계속 이 때를 기다려오셨습니다. 이 기다림은 예수님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눅 12:50을 보십시오.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그럼에도 예수님은 인내를 가지고 사람들의 오해와 비방, 위협을 견디며 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오셨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이 인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 때는 우리의 때와 반드시 다릅니다. 오목이나 두는 바둑초보와 조훈현 9단이 그리는 결정적 수가 같을 수 없고 바닷가에 모래성을 짓는 아이의 그림과 100층 고층빌딩을 짓는 건축가의 설계도가 같을 수 없듯 우리가 최선이라고 여기는 때와 하나님이 최선이라고 여기시는 때는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사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생각의 격차, 수준의 격차를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때보다 하나님의 때가 더 적기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지금 응답되지 않고 여러분의 바람이 지금 이루어지지 않아서 조급하고 불안하고 답답해하는 분들이 계신지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때보다 훨씬 좋은 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인내와 평안 가운데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3.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음을 선언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하나님의 뜻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지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방법도 우리의 생각과 사뭇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공’입니다. 우리가 돈을 벌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교회가 크게 성장해서, 자녀들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어서, 언론에 얼굴을 장식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린다.’ 솔직히 방점이 성공에 찍혀있습니까, 하나님께 찍혀 있습니까? 하나님은 포장지이고, 내용물은 성공이 아닙니까? 얼마나 이 세상의 방식과 닮았는지요? 그렇기에 아무리 우리가 입으로 하나님, 하나님 노래를 불러도 진정한 울림이 없습니다. 세상사람들도 다 압니다. 포장지는 다르지만 내용물은 자기나 우리나 성공만 목매는 인생이란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도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24-26절입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의 방법은 성공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죽으셨고 생명을 얻기 위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땅히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죽음과 버림입니다. 그럼 죽는데 어떻게 살고 버리는데 어떻게 얻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신비이고, 이런 신비가 가능한 것이 하나님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께서 이런 신비, 기적을 가능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살고 버림으로 얻는 순종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만 가능합니다.
살기 위해 성공하고 얻기 위해 움켜쥐라는 세상의 외침과 죽음으로 살고 버림으로 얻으라는 그리스도의 부름 중 어느 음성에 응답하느냐가 곧 오늘 우리가 어디에 속한 사람이냐를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4.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은 세상의 음성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심으로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보여주셨습니다. 27절을 보면 예수님에게도 십자가의 순종은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 12: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요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시고 버림에서 건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예수님에게 다시 십자가를 감당할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음성을 못 듣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29절입니다.
(요 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십자가의 길을 순종하여 갈 수 있는 이들은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제자뿐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이들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설교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잉크흔적일 뿐이요, 설교는 시끄러운 천둥소리일 뿐입니다. 주님 바로 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천둥소리로 듣고 교회에서 설교를 시끄러운 소리로 듣는 이들만큼 불행한 이가 없습니다. 사막에서 목말라 죽었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나이아가라폭포 밑에서 목말라 죽었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초당 7천 톤씩 이리호수의 깨끗한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데 말입니다. 오늘날 폰마다 성경이 들어있고 교회마다 온라인마다 설교가 쏟아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 하고 그저 시끄러운 천둥소리처럼 들리고 만다면 이것이야말로 나이아가라 폭포 밑에서 목말라 죽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의 귀에는 이 설교가 무엇으로 들립니까? 하나님의 음성입니까? 시끄러운 소리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죽음으로 살고 버림으로 얻는 하나님의 길에 순종하심으로 영생의 길 가시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