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3 누가 탕자인가 / 눅 15:1-3, 25-32

20221023 누가 탕자인가 / 눅 15:1-3, 25-32

눅 15:1-3, 25-32/누가 탕자인가

221023 주일설교
1. 주인공은 누구인가
오늘 읽은 본문은 유명한 ‘집떠난 탕자’ 비유의 배경과 결말부분입니다. 대부분의 교우들이 기억하는 비유 내용은 오늘 읽지 않은 가운데 부분입니다. 한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하게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그를 용서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정말 감동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비유의 배경이나 후반부 결말은 대부분 잘 모릅니다. 그 결과 비유를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 해 진짜 메시지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먼저 비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비유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탕자인 둘째 아들, 그를 용서한 아버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못 마땅한 첫째 아들. 셋 중 누가 주인공일까요? 이 답을 얻으려면 비유의 배경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배경에도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1-3절입니다.
(눅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여기 멸시받는 세리와 죄인들이 있고 그들을 따뜻하게 영접하는 예수님이 계시고 이 모든 것이 못마땅해 수군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두 부류 중 누가 들으라고 하셨습니까? 불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아닙니까? 비유 밖의 세 부류와 비유 안의 세 사람을 서로 대응시킬 수 있다면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누구와 대응될까요? 바로 큰아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비유는 세리와 죄인들을 따뜻이 맞아들이신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들으라는 말씀이며 그 비유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큰 아들의 모습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현실에서는 매주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들을 말씀일까요, 교회 밖에서 방황하는 불신자들이 들을 말씀일까요? 네, 바로 큰아들처럼 집을 떠나지 않는 우리가 들을 말씀입니다.
2. 큰 아들
그럼 큰아들의 상태는 어떠한지 25-28절을 보십시다.
(눅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큰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곧 방황치 않고 열심히 충성봉사합니다. 그런데 그는 동생이 돌아온 것이 기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환대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에 몸담고 열심히 봉사도 하지만 천국잔치에는 들어가지 않고 천국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왜 이런 상태에 있습니까? 29절입니다
(눅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는 자신의 충성봉사에 대가를 받지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공로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의 예배생활, 봉사, 헌금, 선교, 희생을 차곡차곡 마음의 노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보상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땅히 자신에게 구원, 성공, 건강, 자녀의 복, 장로, 집사, 권사자리를 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공로의식과 보상의식을 묶어서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모든 종교를 지탱하는 뼈대입니다. 인간이 세우는 공에 걸맞는 은혜를 신이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인간의 의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와 아무 상관이 없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가치있으며 인간의 모든 의를 다 합쳐도 그 무가치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와 비할바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롬 1:17입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초대교회에나 오늘날 현대교회에서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인간의 의가 하나님의 의를 대체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얼마나 수고했는가를 자랑하고 그러니 마땅히 장로, 집사, 권사가 되어야 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면 교회의 주인인양 행세하며 세도를 부리는 것이 마땅하다 여깁니다. 복음은 사라지고 기독교를 수많은 종교 중 하나로 전락시키는 율법주의의 오염된 교회입니다.
3. 율법주의
신앙의 동기수준 중 가장 저급한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보다 조금 나은 것이 보상이고 그보다도 조금 나은 것이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동기는 모두 세상 모든 종교가 사용하는 것이요, 율법주의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동기로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것이 율법주의와 복음의 차이입니다. 큰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은 이유, 보상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여서 섬긴 것이 아님을 자신의 말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기대만큼 보상을 받지 못 하자 그는 화가 났고 아버지를 사랑하거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천국잔치 따위에 관심도 없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이 비유의 제목은 그러므로 ‘집떠난 탕자’가 아니라 ‘집 지키는 탕자’가 맞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는 이 큰아들처럼 교회 지키는 탕자는 없습니까? 열심히 교회봉사는 하는데 천국의 기쁨은 없고 천국잔치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으며 수고만큼 대접받지 못 해 화가 난 사람들 말입니다.
율법주의가 얼마나 깊이 우리 삶에 스며들었는지를 측정하는 또 하나의 척도가 여기 있습니다. 바로 형제, 자매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30절입니다.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동생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동생을 동생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홍길동입니까? 동생을 동생이라 부르지 못 하고… 동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의 시선을 정죄와 비난으로 가득 채웁니다. 고개를 들어 교회를 보니 하나같이 문제투성이입니까? 이 사람도 문제, 저 사람도 문제, 이 부서도 문제, 저 부서도 문제… 나홀로 의인인 것 같지 않습니까? 주머니에 자를 넣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측정해보고 문제투성이라고 탄식하지 않으시나요? 율법주의 바이러스에 깊이 물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살벌해집니다. 서로 정죄하는 사람들로 가득해집니다. 복음이 충만한 교회는 그 반대입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이 교회에서 가장 문제는 나지, 나라도 바르게 살자, 나같은 인간을 모른다 하지 않고 이 교회가 받아주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런 교회는 죄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줍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받아주었듯이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율법주의가 가득한 교회입니까, 복음이 가득한 교회입니까?
4. 성도의 복
성도의 진정한 복은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하나님과 항상 함께 있는 것,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복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녀는 그 모든 것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택하셨습니다. 사랑을 누리며 거룩하고 흠없는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은혜를 누리며 그 영광을 찬송합니다. 이것이 영생의 삶, 구원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모르니까 우리는 염소새끼에 목을 맵니다. 염소새끼가 더 좋습니까? 그럼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구원과 영생과 거룩과 은혜의 삶이 더 좋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가지면 다 가지는 것입니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이 복을 알면 세상의 복은 배설물처럼 여깁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배설물을 너무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물내리기 전에 배설물 때문에 행복해서 못 견디고, 물 내리기가 아까워 바들바들 떨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은 더 많은 염소새끼를 얻는 수단이 아닙니다. 영생보다 염소새끼가 더 소중하다면 우리는 천국잔치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세상으로부터 지탄받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5. 복음의 삶
성도가 율법주의의 눈가리개를 벗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면 그제서야 진정한 복음의 사람이 됩니다. 복음의 사람이 된 증거는 이웃과의 관계가 새로워진다는 점입니다. 32절입니다.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죄인을 긍휼히 여깁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기쁩니다. 천국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회복된 세상의 삶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기쁨입니까? 염소새끼입니까, 그리스도와 동거하는 행복입니까?
아버지의 호소를 듣고 큰아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그도 작은 아들처럼 뉘우치고 천국잔치에 들어갔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화를 내며 천국잔치 밖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비난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이것은 큰아들의 선택을 오늘 우리에게 맡겼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결정하십시오. 천국잔치에 들어갈지, 밖에서 버틸지, 교회를 천국으로 만들지, 지옥으로 만들지. 여러분의 응답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