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6 어떤 자유인가 / 눅 15:1-3, 11-20

20221106 어떤 자유인가 / 눅 15:1-3, 11-20

눅 15:1-3, 11-20/어떤 자유인가

221106 주일설교
1. 신앙은 자유를 구속하는가
예전에 한 젊은이를 전도하는데 교회에 못 나오는 이유를 이렇게 대는 것입니다. ‘교회 가면 술, 담배도 끊어야 하고 못 하는 것이 너무 많아요. 자유를 구속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많은 현대인이 하나님을 사람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못마땅해 회초리를 들고 감시하는 감시자처럼 생각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주로 ‘하지말라’는 것이고 교회는 다른 사람이 행복한 것을 못 마땅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심지어 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오해입니다만, 기독교인 중에도 신앙 때문에 자유를 구속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더 큰 이익을 거둘 방법이 있는데 하나님이 신경쓰입니다. 가슴 설레는 진짜 사랑을 만나고 보니 배우자는 진짜 사랑이 아닌 것 같은데 성경말씀이 걸립니다. 성경을 읽으면 회개해야 할까봐 왠지 읽기 싫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보셨다면 오늘 본문의 둘째 아들의 행동이 잘 이해될 것입니다.
2. 거짓 자유의 결말
3주째이자 마지막으로 탕자의 비유를 살펴봅니다. 큰아들, 아버지에 이어 오늘은 작은아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일찍 물려달라고 요구하여 받은 후 기다렸다는듯 아버지 집을 떠나 먼나라로 가 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합니다. 그의 행동은 아버지의 존재와 그 권위 아래서 사는 삶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내 줍니다. 아버지는 그가 꿈꾸는 자유로운 삶의 족쇄였습니다. 할수만 있으면 그 족쇄를 풀고 자유로운 삶,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삶을 그는 원했고 기회가 오자 조금의 주저함 없이 그 자유를 향해 내달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자유의 결말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14절 이하입니다.
(눅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눅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행복을 지켜준다고 인간이 믿는 돈, 지위, 건강, 인간관계 등은 금방 바닥납니다. 그리고 인생의 흉년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노화일수도, 질병일수도 혹은 파산이나 다른 고난일수도 있습니다. 그 때서야 인간은 자신의 궁핍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여기저기 손을 내밉니다. 이 아들이 손을 내민 곳은 돼지를 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혐오하여 근처에도 가지않는 이방인에게 빌붙어 역시 혐오하여 손도 대지 않는 돼지를 치며 생존을 꾀합니다. 그는 더이상 추락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한 지경에 이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찾으려는 안전과 복지는 결코 굶주림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유와 복지를 모두 잃어버리고 오히려 죄악의 노예상태로 전락하고 멸망만 기다리며 삽니다.
3. 자유의 울타리 
이 아들의 처지는 자유를 목매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처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도대체 이 아들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그처럼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무지한 이 아들도 우리도 모두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자유를 구속하는 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유를 구속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언가로부터의 자유가 있고 무엇을 향한 자유가 있습니다. 전자를 소극적 자유, 후자를 적극적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소극적 자유는 해로운 것으로부터 안전할 자유입니다. 구속으로부터 자유,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등이 있습니다. 적극적 자유는 복지를 누릴 자유입니다. 결혼할 자유, 공부할 자유, 일할 자유 등이 있습니다. 두 가지 자유 모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습니다. 구속과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사회에 속해야 하고 튼튼한 국가경제의 우산 아래 있어야 하고 훌륭한 의료시스템을 구축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정과 공부와 직업을 가질 자유를 누리려면 사랑을 받아주고 사랑해줄 가족이 있어야 하고 좋은 교육시스템을 갖추어야 하고 좋은 일자리와 동료가 있어야 합니다. 국가, 사회, 법률, 시스템, 공동체, 동료는 모두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는 울타리입니다. 이 울타리를 성가시다고 뿌리치고 나가면 곧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잃고야 맙니다.
이 모든 자유를 보호하는 울타리의 정점에 바로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과 그 율법은 우리가 이 땅에서 모든 종류의 안전과 복지를 누릴 자유를 지키시는 울타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유를 구속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금하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자유를 구속하는 함정입니다. 죄와 악은 우리의 구속하고 멸망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율법을 주셔서 자유를 지키십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선악과를 주신 것입니다.
4. 참자유를 주시는 분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마음대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며 선악과를 왜 못 먹게 하느냐고 하나님의 금하신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먹게 하신 것은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모두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동산에 나무가 몇 그루나 있었을까요? 동산이 얼마나 크고 풍요로웠을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딱 만 그루만 있었다고 가정합시다. 하나님은 9,999그루의 나무열매를 주시고 단 한 그루의 나무열매만을 금하셨습니다. 왜요? 나머지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먹고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 그루의 자유를 얻기 위해 한 그루를 금하신 것입니다. 이를 생각해 보면 아담이 한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단 한 그루를 얻으려다 만 그루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거스리고 누리려는 자유의 대가가 이것입니다. 하나를 얻으려다 모두를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누리도록 하나를 금하셨습니다. 그 하나는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자유를 지켜주는 안전띠입니다. 번지점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날개도 없는 우리가 허공에서 자유낙하의 짜릿함을 안전하게 즐기려면 안전띠는 필수입니다. 왜 내 다리에 이런 거추장스러운 줄을 묶는 겁니까? 난 이런 줄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 거예요.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교통법규가 거추장스럽지 않던가요? 규정속도가 있고 신호등이 있고 stop 사인이 있으니 더 빨리 가지 못 하여 얼마나 성가십니까? 그러나 이런 법규와 사인과 차선이 없으면 더 느려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선교지를 가면 중앙차선도 없고 교통경찰도 거의 없는 지역이 많습니다. 그런데서는 차가 미국보다 훨씬 느립니다. 왜요? 언제 다른 차가 튀어나오고 끼어들지 모르기에 사방을 살피며 저속운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고가 날까봐 훨씬 더 긴장되고 실제 더 큰 사고가 더 자주 발생합니다. 집을 사려는데 은행이자가 얼마나 부담스럽고 각종 법규와 세금은 또 얼마나 성가십니까? 다 없었으면 좋겠지요? 그러면 집도 없어집니다. 세금과 법규로 시장을 관리하는 정부가 없고 이자받고 돈 빌려줄 은행도 없으면 정부와 은행을 의지해 집 지을 건축회사도 없고 화폐의 신뢰도 땅에 떨어져 살 돈도, 살 집도 없이 경제가 붕괴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세상에서 굶어 죽을 자유만 남습니다.
5. 참자유로 가는 길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한 그루를 버리고 만 그루를 얻는 자유와 복지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는 모든 복되고 유익한 것을 무엇이든 할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
여기 진정한 자유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를 얻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예전에 한 교우께서 사업을 하다가 사정이 어려워져서 부득이 직원들을 내보내고 마침 학교를 졸업한 딸을 대신 사무실에 불러다 일으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사장이 자신과 직원의 관계가 완전히 변하더랍니다. 전에 직원들은 컴퓨터로 딴 짓을 하다가 사장이 나타나면 얼른 화면을 바꾸고 일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사장이 두려운 것이지요. 그런데 딸은 사장이 나타나도 천연덕스럽게 인터넷쇼핑을 하며 신경도 안 쓰는 것입니다. 사장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월급이 한두 주라도 늦을라치면 자신과 직원들 사이에 긴장이 흘렀습니다. 서로 불편했습니다. 딸은 몇 달은 못 줬는데도 아무 불평이 없습니다. 어차피 아빠 회사가 자기 회사인데 돈이 거기 있으나 여기 있으나 다 우리 돈인데 뭐… 이런 식입니다. 이 딸에게는 두려움도, 구속도 없습니다. 아빠를 향한 신뢰와 사랑이 있습니다. 아빠도, 딸도 얼마나 회사가 편한지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참자유를 누리라!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런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분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 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예수님은 십자가로 마귀의 종되었던 우리 죄를 모두 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유로운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아들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으며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아래 나가는 이는 죄와 악으로부터 참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는 의를 행할 참 자유를 얻습니다. 바로 이것이 탕자가 깨달은 결론입니다. 17절 이하입니다.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참자유와 복지와 행복과 생명이 내 아버지에게 있구나! 아버지를 떠난 결과는 멸망이구나! 그는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지난 우리의 삶이 죄악의 노예된 삶, 돼지우리에서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려던 비참한 삶이었던 것을 깨닫고 종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에 삶을 맡기기로 결정하고 돌아가는 이들을 하나님은 형용할 수 없는 은혜와 긍휼로 맞아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그 아버지에 집에서 참 자유와 생명을 누리는 이는 얼마나 복된지요! 오늘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돼지우리에서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발버둥치고 계십십니까? 아버지의 집에서 벌어진 천국잔치를 누리고 계십니까? 천국잔치 테이블의 여러분의 자리가 비어있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