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0 누가 감사하는가 / 눅 17:11-19

20221120 누가 감사하는가 / 눅 17:11-19

눅 17:11-19/누가 감사하는가


221120 추수감사주일
1. 행복의 비밀
아마 추수감사절을 맞아 이들만큼 감사하고 기뻐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상> 지난 12일 우크라이나군은 남부 요충지 헤르손을 수복했습니다. 주민들은 감격에 겨워 거리로 몰려나와 국기를 흔들며 춤을 추고 군인들을 환영하고 음식을 가져다 주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며 군인들을 껴않곤 했습니다. 잃었던 땅과 자유와 안전을 되찾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폐허가 된 땅에서 그들이 되찾은 것과 비교도 할수없이 큰 안전과 풍요와 번영을 늘 누리는 우리는 당연히 그들보다 훨씬 더 기뻐하고 더 행복한 것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누리는 것에 기뻐하기보다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평안하기보다 불안해하고 행복하기보다 불행하다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입니까? 우리가 누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행복은 더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감사의 능력은 단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놀라운 복을 가져다 줍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 기도하고 순종하는 믿음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만난 열 명의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을 기록합니다. 열 명 모두 저주와도 같은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으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19절입니다.
(눅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나병고침과 구원 중 어느 것이 큰 복입니까? 육체가 치유받은 것은 큰 복임에 틀림없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막지 못 합니다.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니 비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열 명 모두 예수님을 만났는데 왜 9명은 몸이 치유받는 것에 끝나고 한 명만이 거기에 더해 영생을 얻는 복을 누립니까?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나머지 9명은 아무런 믿음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9명도 분명 두 가지 믿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간구하는 믿음입니다. 12-13절입니다.
(눅 17: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거기에 더해 둘째로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14절입니다.
(눅 17: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분명 예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들의 몸은 여전히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 상태로 제사장에게 가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미친 놈 취급은 물론 돌에 맞아 죽을수도 있었습니다. 나병환자가 마을에 들어가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가는 도중에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간구하는 믿음과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들은 육신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머지 한 사마리아인에게 있었던 세 번째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3. 감사하는 믿음
(눅 17: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를 돌립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감사하는 믿음을 찾으시고 높히 평가하셨습니다.
(눅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아홉 명은 왜 돌아와 감사하지 못 했을까요? 치유받은 순간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가족을 만나러 달려가느라 치유하신 주님은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으려다보니 그들이 경계하는 예수님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 치유가 마침 나을 때가 되어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곤 예수님께 굳이 감사해야 하느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진작 치유받아 마땅했는데 온갖 고생을 다하고 이제 치유받은 것에 불만을 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감사하기를 잊어버렸기에 치유는 받았으나 구원은 받지 못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 삶에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절박하기에 부르짖어 간구하고 응답을 위해 순종도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그만 주님을 잊어버리고 세상 즐거움을 찾아 달려갑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경배하는 삶으로까지 나가지 못 합니다. 그 결과 또 다시 고난을 만나야 주님께 나와 간구하고 순종하고 해결되면 세상으로 달려가는 삶을 반복합니다. 구원의 삶으로 들어오지 못 합니다. 이런 종교생활은 어느 종교에나 다 있습니다. 불교인도, 무슬림도, 무속인도 다 답답하며 나와 간구하고 해결되면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정도는 합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돌아와 감사한 유일한 이는 사마리아인입니다. 유대인들이 개보다 더 경멸하고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조차도 감사할 줄 아는데 정작 유대인 중에는 한 명도 감사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부르는 민족이름 유다란 말 뜻이 ‘찬양하라’입니다. 태생부터 찬양하도록 부름받은 이들이 한 명도 감사하러 온 이가 없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다.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의 입에서 감사와 찬양이 아니라 저주와 비방이 가득 쏟아져 나온다면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까요!
4. 예수님께 감사하는 믿음
구원의 삶은 감사와 경배의 삶인데 무엇보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 나와 경배하고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앞이어야 합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감사의 삶도 있습니다.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지혜와 겸손을 타고난 이들은 남들보다 더 매사에 감사하며 살곤 합니다. 그런 감사의 태도는 그에게 행복과 품위를 더해 줍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구원을 주지는 못 합니다. 아무리 다복하고 품위있는 귀족같은 삶이라도 죄와 사망의 멍에를 풀 능력은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생명을 가진 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땅을 판다고 다 우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물근원이 있는 곳이어야만 우물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수가 있기에 거기서 파면 생수의 우물이 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의 떡이 있기에 거기서 구하면 생명의 떡을 먹습니다.
예수님께 감사하는 믿음은 구원의 삶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 구원의 삶은 그에게 더 큰 감사를 선물합니다. 그것은 고난을 포함한 모든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이런 선물을 받고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엡 5:20)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참믿음은 좋은 일은 물론이지만 고난도 감사합니다. 십자가로 영생을 주신 예수님 때문에 어떤 일에도 감사치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권면했습니다.
(살전 5:18)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영생의 선물을 주신 분 안에 있으면 어떤 일도 감사치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 이런 고난도 못 당한다 하겠는가! 주님은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을 원망하며 감사치 못 할 일이 있겠는가! 이렇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성도에겐 고난에도 감사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5. 고난 중에 감사하는 믿음
여러분, 살다보면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그 때 감사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캐나다 큰빛교회의 임현수 목사님은 북한선교를 열심히 하던 중 2015년 북한에 억류되어 종신노동형을 선고받고 2년 반을 투옥되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 고된 노동으로 온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보다 더 목사님을 힘들게 한 것이 욕설과 저주였습니다. 24시간 감시원이 붙어서 목사님을 감시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곁에서 입에 담을수없이 추한 욕설을 쉬지않고 하더랍니다. 이 반동분자 간나새끼부터 해서 세상에 이런 욕설이 다 있었나 하는 별별 욕설을 쉬지않고 귀에다 쏟아놓는데 한 달 정도 듣다보니 정신적 스트레스로 몸이 반응을 하는데 쉬지않고 설사와 복통을 몇 개월하여 몸에 있는 물이 다 빠져나가고 빼빼 마르더랍니다. 이런 고난과 모욕을 어떻게 견디셨을까요? 감옥에 갇히던 날 너무 억울하고 기가막혀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기도하는데 히 3:1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아, 예수님은 얼마나 억울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나를 위해 당하셨는가! 깊이 묵상하던 중 마음에 원망이 사라지고 다시 감사가 시작되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당할 자격이 있다고 여겨주시는 듯 하여 감사하고 고난 중에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평안을 누렸습니다. 이 감사와 평안으로 2년 반을 견디고 마침내 석방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믿음입니까?
(벧전 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2:20) …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추수감사절이긴 한데 무엇 감사할 것이 있어야 감사하지, 온갖 상황이 어려운 것 뿐인데 무엇을 감사하나, 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것이요,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감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예수님보다 더 큰 선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생명보다 더 큰 감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치르신 죄의 값, 대신 당하신 고난의 십자가보다 더 큰 감사의 이유는 없습니다. 이 감사는 고난도 막을 수 없는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상황을 뛰어넘는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감사입니다. 돌아온 사마리아인이 드린 감사, 임현수 목사님에게 있던 감사, 이런 감사가 여러분에게도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