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8 최선의 삶과 최악의 삶 / 요 13:21-30

20221218 최선의 삶과 최악의 삶 / 요 13:21-30

요 13:21-30/최선의 삶과 최악의 삶

221218 대강절4주 최후의만찬
1. 최악의 삶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일 중 하나는 이단, 사이비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단, 사이비가 공포스릴러영화의 단골소재인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심심찮게 이단, 사이비에 빠진 이들이 패가망신하거나 착취에 시달리거나 범죄에 연루된 뉴스도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간접적으로나마 이런 일을 겪은 이를 보십시오. <영상1> 신천지 교인을 2019년에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했는데 3년 만에 얼마 전 10만 명이 새신자교육을 수료했다고 대구에서 행사를 가졌습니다. 최소 30만 명 이상이라는 의미인데, 대부분의 교인이 기성교회 신도였다는 점이 충격적입니다. 영상에 등장한 이는 교회에서 자란 신실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녀는 신천지에 빠졌던 이 기간이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였다고 합니다. 신앙인으로 왜 이런 상태로 추락하는 것일까요? 반면 신앙인이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요한복음이 답을 들려줍니다.
2. 주님을 근심시키는 삶
다시 요한복음,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교훈을 들려주신 주님은 이제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십니다. 유다는 그야말로 신앙인의 최악의 삶의 모델입니다. 이런 삶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신 크게 근심시킵니다. 유다로 인해 괴로워하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21절입니다.
(요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왜 이렇게 괴로우셨을까요? 당신과 유다 모두로 인해 괴로우십니다. 제자 중 하나에게 배신당하니 얼마나 괴루우셨겠습니까! 동시에 유다가 겪을 운명을 생각하니 또 괴로우셨습니다. 막 14장입니다.
(막 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또한 주님은 유다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마귀에 대해 분개하셨습니다. 비슷한 마음은 예수님은 성전이 대제사장의 탐욕으로 시장으로 바뀐 것을 보시고 분개한 나머지 상인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불의는 괴로움을 낳습니다.
작년 한국에서 16개월된 아이 정인이가 양부모의 학대로 목숨을 잃은 사건이 터진 뒤 시민들은 빈소에 찾아 눈물을 흘리고 양부모에 대한 엄정한 심판을 요구하며 법정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들은 왜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고 분개합니까? 불의로 고통받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는 종종 이런 불의 앞에서 안타까움과 분노를 함께 느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마음의 괴로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불의를 무너뜨리는 의의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러므로 성도의 위로요, 예수님이 성도의 소망입니다.
3. 어둠에 갇힌 삶
열두 제자에 뽑혔던 유다는 도대체 왜 주님을 근심시키고 멸망에 이르는, 불행한 운명에 놓였습니까? 27절입니다.
(요 13:27) (떡)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떻게 사탄이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었습니까? 이런 일은 하루 아침에 벌어지지 않습니다. 가랑비에 옷젖듯 오랫동안 조금씩 조금씩 일어납니다. 13:2을 보십시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처음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만 넣었습니다. 이 때 아직 유다는 그 생각을 분별하고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생각을 품고 묵상했습니다. 악한 생각은 뿌리뽑지 않으면 잡초처럼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죄는 자랍니다. 악한 생각도 자랍니다. 생각일 때는 씨름할 수 있지만 싸우지 않으면 어느 새 생각이 의지로 굳어집니다. 그러면 거절할 수 없는 상태 곧 사탄이 들어와 조종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런 상태를 30절은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이 밤은 유다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는 빛이 없는 어둠 곧 앞뒤좌우,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갇혀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십니다. 요 11장입니다.
(요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밤에 다니지 않고 낮에 다니도록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눅 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음주운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졸음운전입니다.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의 생명까지 위협합니다. 우리의 영이 잠들어 있으면 마귀가 우리에게 생각을 집어넣는 것도 모르고 마침내 사탄이 마음에 들어와 의지를 장악하는 것도 모릅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최악의 삶입니다. 이단, 사이비에도 넘어가고 형제, 자매를 미워하고 비방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주님을 괴롭게 하는 삶입니다. 이런 어둠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고 빛에 거하시길 축복합니다.
4. 최선의 삶
반면 최선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판단 말인가 궁금했습니다. 다들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물어보라고 했지만 베드로조차도 예수님의 표정을 보고는 질문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이런 질문도 거리낌없이 할 법한 제자 요한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23-24절입니다.
(요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요 13: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요한은 제자들 중 가장 어렸고 지위나 영향력도 크지 않았지만 분명히 수제자 베드로보다 예수님과 더 가까웠습니다. 예수님 바로 곁에 앉아서 식사할 만큼 사랑을 받았고, 친밀해서 어떤 질문도 거리낌없이 드릴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신뢰를 받았기에 다음 날 십자가에서 주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바로 이 제자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도에게 최선의 삶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친밀한 삶입니다. 예수님께 무슨 기도든 거리낌없이 드릴 수 있는 친밀함,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는 친밀함, 사탄이 아닌 예수님이 그 안에 있고, 그는 예수님 안에 있는 친밀함, 예수님이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는 친밀함, 마르다처럼 일에 지치지 않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그 음성 듣기가 제일 행복한 친밀함. 이런 친밀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5. 주님과 친밀한 삶
이런 친밀함은 절대 하루 아침에 얻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만난 이가 수십 년 사귄 친구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 가능합니까? 오늘부터 친밀하자고 한다고 친밀해 집니까? 친밀함이 깊어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매일 주님을 바라보고 매주 예배를 드리고 매년 주님을 떠나지 않고 동행하며 순종하는 이들에게 허락되는 친밀함입니다. 부부의 친밀함, 부모와 자녀의 친밀함은 그러므로 인생의 엄청난 축복입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은총입니다.
친밀함은 고난을 겪으며 더 깊어집니다. 힘겨운 시간을 함께 견딘 부부, 친구, 동료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이해하지 못 하는 깊은 친밀함을 누립니다. 고난은 우리의 이기적 본성의 껍질을 깨뜨리고 경계를 너머 타인을 수용하게 만듭니다. 고난을 주님의 은총으로 견딘 이 역시 더욱 친밀함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은총입니다.
이런 친밀함이야말로 성도의 최고의 복입니다. 요한이 수제자 베드로보다 더 친밀했듯 주님과 친밀한 성도는 목사, 장로, 선교사보다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친구입니다. 선천성 뇌성마비장애를 가진 송명희 시인이 하루는 찬양을 듣다가 문득 너무 억울했습니다. ‘주님, 저도 이 사람들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하고 멋진 춤으로 찬양하고 이웃을 섬기며 전도하고 싶습니다. 왜 저는 꼼짝도 못 하고 방구석에 누워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울면서 원망하였습니다. 그 때 성령님의 음성이 그녀의 마음에 너무나 똑똑히 울려퍼졌습니다. ‘명희야, 너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기쁘게 하는 아이란다. 그들은 사역하고 봉사하느라 너무 바빠서 나를 잘 찾지 않아. 하지만 너는 24시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항상 내게 말을 걸어주지 않니? 너만큼 나와 깊이 교제하는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냐?’ 그 음성을 듣고 너무나 감격하고 감사한 나머지 지은 찬양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 한 음성 들었고 나 남 받지 못 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6. 빛으로 나오는 삶
주님께 나와 이런 친밀함을 누리는 삶이야말로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삶, 진리의 빛 가운데 거하는 삶, 가장 복된 삶입니다. 잠에서 깨어 주님을 바라보는 삶, 어둠에서 나와 빛 가운데 거하는 삶, 유다의 자리를 떠난 요한의 자리로 나가는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앞서 신천지에 빠졌던 이도 그 어둠에서 벗어나서 진리로 나아왔습니다. <영상2> 그녀는 영적 잠에서 깨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 왔습니다. 이는 로마서가 우리에게 강력히 권고하는 바입니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성 어거스틴도 이 말씀을 읽고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회개하였고 마침내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다면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빛 가운데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선의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