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25-35/위로와 평안의 샘
221215 성탄주일
1. 위로가 필요한 때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이 땅에 내려오신 성탄절입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성도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일터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한 중년 여집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어린 아이 둘을 집에 두고 직장을 갔는데 집에 불이 나서 큰 아이는 목숨을 잃고 둘째는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졌다는 것입니다. 큰 아이 장례를 치르고 자신도 죽으려 했습니다. 주변에서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위로를 하는데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고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났습니다. 폐인처럼 지내니까 어느 교우가 수련회 꼭 한 번 같이 가자고 해서 참석했는데 거기서 기가막히게도 화재로 두 아이를 다 잃은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만 잃고도 못 살겠는데 두 아이를 다 잃고 어떻게 살았냐고 하니까, 시간이 약이고 하나님 은혜로 어찌어찌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권사님을 부둥켜안고 한참을 눈물을 펑펑 쏟고 나니까 그제서야 마음에 위로가 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이는 진정한 위로를 전하기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느 정신과의사의 글을 읽었는데, 환자가 난치병에 걸렸다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고 상담을 할 때 자신도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경험상 이런 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의사로서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정신과의사를 현대인의 사제라고도 합니다. 이는 인간에게는 진정한 위로의 언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지치고 힘들고 위로가 필요합니다. 3년의 팬데믹과 세계적 경제위기, 전쟁과 이상기후에 개인적 고난도 끊이지 않는 우리가 인간의 언어에서 위로를 얻을 수 없다면 진정한 위로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2.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난 지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어머니 마리아의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가 겪은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 가족은 메시야를 기다리던 나이많은 선지자 시므온을 만납니다. 그가 왜 메시야를 기다렸는지 25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기다리던 메시야는 곧 이스라엘에 위로를 주실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위로가 필요하며 메시야는 어떻게 이스라엘에 위로를 주실까요?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위로가 무엇인지 이사야서가 진작 이렇게 예언해 두었습니다.
(사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은 어떤 위로를 받았으며 또 받을 것입니까?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노역이 끝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노역으로 내몬 죄악이 모두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값을 다 치렀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악이 해결되어야 노역이 끝난다는 점입니다. 많은 해결책이 원인인 죄악을 방치한 채 증세만 완화시키기에 근본적인 문제해결, 해방, 참된 위로가 거기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과인 노역을 끝내실 뿐 아니라 원인인 죄악도 해결하심으로 진정한 위로를 주십니다.
이 위로는 그들이 애굽의 종살이할 때 받았습니다. 430년 만에 해방받은 그들은 가나안땅으로 인도함 받아 하나님의 돌봄 가운데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건설할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런 위로를 그들은 바벨론 포로기가 끝날 때 또 받았습니다. 70년 만에 포로에서 귀한환 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과 성벽을 새로 건설하고 하나님 나라를 장차 건설할 꿈을 꿉니다.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소식이야말로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위로였으며 당시에도 가장 바라고 기다리던 위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압제 아래 놓였습니다. 당대 최강의 제국 로마의 군대는 무자비하고 가혹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수입에 가혹한 세금을 떼고 부패한 헤롯과 탐욕스러운 대제사장마저 동족을 수탈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한 번 애굽의 노역, 바벨론의 노역을 끝장낼 해방의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 메시야의 오심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위로가 될 것입니다.
3. 참된 위로의 메시야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위로를 주러 오신 분입니다. 다만 시므온이 기대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만이 아니라 온 세상 인류에게 위로를 주러오셨습니다. 시므온은 로마의 노역 아래 놓인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넘어 죄악의 노역 아래 놓인 모든 인류를 해방하러 오셨습니다. 애굽, 바벨론의 종노릇도 고통스럽고 로마의 종노릇도 비참하지만 인간을 더욱 큰 고통과 비참함에 몰아넣는 것은 죄악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는 우리의 영을 악의 노역 아래 놓습니다. 죄악의 바벨탑을 쌓는데 동원됩니다. 죄악의 압제에 시달립니다. 죄책감과 불안감, 근심과 두려움, 자기비하와 모멸감에 늘 짓눌려 살아갑니다. 마침내 죄의 값으로 영원한 멸망의 구덩이에 빠집니다. 이 압제를 벗어날 길이 없었던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우리를 건져내셨습니까? 바로 성탄에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겪는 죄의 노역을 대신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가 줄 수 없는 참된 위로를 주십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죄악을 해결하셨습니다. 죄악의 결과인 죄의 노역을 끝내셨습니다. 해방된 백성, 구원받은 자녀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이제 영원히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위로를 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난치병에 걸릴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를 잃을 수도 있고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이런 죄의 노역마저도 장차 완전히 소멸되고 극복될 소망을 주셔서 거뜬히 이길 수 있도록 진정한 위로를 주십니다. 사도 요한의 비전입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담대히 선포합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가 겪을 가장 큰 고난, 우리를 가장 위협하는 원수가 곧 사망입니다. 그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무너졌습니다. 사망은 패배습니다.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도 사망을 이기고 부활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만날 것입니다. 어떤 고난도 거뜬히 이길 것입니다. 매일 매순간 이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위로와 해방을 주시는 메시야 예수님이 이 성탄에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이는 진정한 평안을 누립니다.
4. 평안을 주시는 메시야
시므온의 노래가 가르쳐 줍니다.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주님의 구원을 본 사람은 진정한 평안을 누립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만민에게까지 비취는 구원의 빛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위로와 평안은 어디에서 옵니까? 문제가 해결되고 아픈 것이 낫고 바라는 바를 이루고 돈을 더 벌면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나요? 잠시 동안의 위로요, 불안하기 짝이없는 평안입니다.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주시는 메시야 예수님을 기다리고 맞아들이십시오. 예수님만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영원한 평안이 이 성탄에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일터에 흘러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