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2 영광의 비전 / 요 13:31-38

20230122 영광의 비전 / 요 13:31-38

요 13:31-38/영광의 비전

230115 주일설교 요한복음
1. 영광스러운 패자들
텍사스주는 원래 멕시코 영토였습니다. 1836년 텍사스독립전쟁 후 미국영토가 되었습니다. 이 독립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가 바로 알라모전투입니다. 텍사스 주민 186명은 알라모요새에서 열 배가 넘는 1,800명의 멕시코군을 맞아 후퇴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원전사했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텍사스주민들은 격분한 나머지 너도나도 자원하여 독립군에 입대하여 ‘Remember the Alamo, 알라모를 기억하라’고 외치며 결사항전에 나섰습니다. 결국 텍사스주민들의 기세에 눌린 멕시코군은 많은 병력과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연전연패한 끝에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샌안토니오에 있는 알라모국립공원의 이 요새유적은 텍사스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이 전투는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져 미국인에게 자부심을 고취시켰습니다. 186명의 전사자는 국립공원 안 박물관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전투에서 패했고 모두 죽었습니다. 왜 미국은 패한 전투와 전사한 이들을 이토록 기리고 존경해 마지 않는 것일까요? 그들의 희생이 독립이란 고귀한 이상실현의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기고 사는 것이 영광이요, 지고 죽는 것은 수치라고 여기지만 종종 그 반대의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역설을 이해하는 핵심원리입니다. 지고 죽어서 오히려 영광을 얻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그것입니다.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가룟 유다가 나가고 난 직후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13장 후반부인 이 부분부터 시작해서 17장까지 예수님의 고별설교와 기도가 이어집니다. 유다가 나가기 전과 후의 예수님의 어조가 확실히 다릅니다. 유다가 나가기 전에는 가르치시는 중간중간 너희 중에 깨끗지 않은 자가 있다, 내가 택하지 않은 자가 있다, 나를 팔 자가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침통한 분위기가 흘렀으나 나간 후에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비장함 가운데 영광에 대한 기대와 순수한 기쁨이 말씀에 묻어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이제 제자들을 어떤 삶으로 인도하실지를 가르치십니다. 이는 곧 주님이 우리를 어떤 삶으로 인도하시는지도 깨닫게 해줍니다.
2. 영광의 삶으로 
첫째는 영광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31-32절입니다.
(요 13:31) 그(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요 13: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두 구절에 영광을 네 번이나 언급하십니다. 인자 곧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동시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만드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리합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으로 세상죄를 모두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 무릎 꿇고 그 분을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부활시키고 승천시키셨습니다. 부활과 승천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모든 약속이 진리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과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역시 아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영광의 삶으로 초청받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사람의 제일되는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현대인은 이런 믿음을 낯설어 합니다. ‘왜 인간이 신을 위해 살아야 해? 자신을 위해 살아야지?’ 이 생각이야말로 비극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살면 역설적이게도 행복을 누리지 못 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위해 살면 하나님이 그를 복되게 하십니다. 이런 역설을 만드는 비밀이 바로 사랑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이 관계가 진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신이 행복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한 사람의 가정은 바로 모두가 불행합니다. 배우자가 불행하고 자녀도 불행하고 그 자신도 불행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 결혼한 사람의 가정은 모두가 행복합니다. 배우자도 행복하고 자녀도 행복하고 당연히 그 자신도 행복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구하는데 오히려 자신이 더 행복해지는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수치스럽고 실패했다 여길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높이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영광스럽게 만드십니다. 이런 영광의 삶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3. 사랑의 삶으로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33절입니다.
(요 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이 말씀에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심으로 떠나신 후 예수님 없는 세상에 홀로 남을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애정이 묻어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없는 세상에서 작은 자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오해받고 비난받고 박해받기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고난과 순교를 당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들을 위해 예수님은 여러가지 특별한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 중 한가지가 바로 이어지는 34절입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의 계명을 주심입니다. 구약성경 내내 선포되었던 사랑이 왜 새계명입니까? 옛계명이 아니던가요? 그 이유는 그 사랑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마지막까지 사랑하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13장 1절로 돌아가 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받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 그들은 세상을 이깁니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 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들을 세상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렵습니까? 왜 세상은 교회를 미워하고 공격합니까? 왜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지 못 합니까? 세상을 이기는 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죽어도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이깁니다.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함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변화된 삶으로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36절입니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베드로는 지금은 그 길을 좇아가지 못 하지만 성령을 받은 후에는 좇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이를 이해하지 못 하는 베드로는 헛된 만용을 부립니다. 37절입니다.
(요 13: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문제는 그는 자신의 결단을 지킬 힘도, 용기도 없다는 점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빈털털이가 자신을 도와준 고마운 친구에게 반드시 재벌이 되어 좋은 집과 차를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재벌되는 것이 벼락맞을 확율보다 낮다는 것을 모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38절입니다.
(요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신학자 톰 라이트는 이 구절을 번역하며 ‘예수께서 미소를 지으셨다’로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진심도 아셨지만 베드로의 연약함도 아셨습니다. 그가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여종의 시선도 견디지 못 하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킬 힘도, 서로 사랑할 힘도, 주님을 따를 힘도, 십자가를 질 용기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은 웃으십니다. 재미있어서 웃으시고 아쉬워서 웃으시고 동시에 우리의 변화될 미래를 아시기에 웃으십니다. 예수님의 미소에는 분명 기대와 소망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 13:36) …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후에는 따라오리라! 성령님이 오셔서 너를 사로잡으시면 너는 실패자 베드로, 배신자 베드로, 겁쟁이 베드로가 아니라 위대한 교회의 반석 사도 베드로가 되어 죽기까지 나를 따라 십자가를 지리라. 그 때에는 고난당함으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고 십자가로 복음을 전파하고 순교로 부활을 증거하리라. 후에는 따라오리라!
바로 이것이 주님이 여러분을 향한 비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비록 약하지만, 실패하지만, 어리석지만 성령님이 너희를 인도하시면 후에는 변하리라, 강하리라, 승리하리라. 주님이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시고 기도하시고 성령을 주시고 변화케 하십니다.
주님의 이 비전을 품고 여러분 자신을 보고 또 형제, 자매를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나는 약하지만, 지금은 너는 넘어지지만 후에는 우리가 모두 변하리라. 우리가 모두 승리하리라. 우리가 모두 강하리라. 이 믿음으로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주님은 영광스럽게 변화시킵니다. 주님은 이런 영광의 삶, 사랑의 삶, 변화된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이처럼 복되고 영광스러운 초청이 어디 있습니까? 백악관에서 초청을 받는다 한들 이보다 영광스러울 수 있을까요? 이런 초청을 거절할 어리석은 자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식탁에 앉으십시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십시오. 영생의 삶이 여러분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