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2 개선의 날 / 마 21:1-11

20230402 개선의 날 / 마 21:1-11

마 21:1-11/개선의 날

230402 종려주일
1. 폭식증과 착각
현대인에게 점점 증가일로에 있는 질환으로 섭식장애가 있습니다. 10대와 20대가 압도적으로 많고 여자가 남자에 비해 4배 이상 많은 대표적 섭식장애로는 거식증과 폭식증이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거식증은 음식을 거부하는 증세이고 폭식증은 과도하게 먹는 증세입니다. 둘 다 정신적 문제와 관련이 깊은데 이 중 폭식증은 위장이 음식으로 차있는데도 포만감 대신 배고픔을 느껴서 계속 음식을 섭취하는 증세입니다. 이 때 느끼는 배고픔은 사실 생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입니다. 공허감, 외로움, 거절감, 실패감, 상처 등으로 인해 생긴 정서적 굶주림을 육체의 굶주림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착각은 당연히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우리 삶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는 착각은, 물론 거식증이나 폭식증이 전부가 아닙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착각도 있습니다. 그 착각을 오늘 본문이 경고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내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고난주간이 이어지고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이 한 주간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 절기입니다. 이 절기에 일어난 일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영원히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사건입니다. 이 핵심사건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씁니다.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기독교 복음은 바로 이 핵심사건을 뼈대로 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는 시간순서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 죽으심과 부활이란 핵심사건을 먼저 중심에 놓고 거꾸로 공생애와 탄생사건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는 바로 이 죽으심과 부활이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주간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복음도, 복음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한 주간을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주일로 지키며 매년 묵상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다집니다. 우리도 내일부터 6일간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를 하며 주님의 한 주간의 행적을 따라가며 묵상합니다.
2. 예루살렘의 개선행렬
이 한 주간의 시작은 바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건입니다. 며칠 전부터 예루살렘 안팎에 사는 대중에게 들불처럼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오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베다니에 도착하셨다! 그는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심지어 죽은 이를 살리신다. 죽었다 살아난 베다니를 본 예루살렘 사람만 해도 족히 수백 명은 넘었습니다. 그야말로 선지자들이 예언한 오실 메시야가 아닌가! 오매불망 우리가 기다려온 그 분이 아닌가 말이다!
바로 이 날 그 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고 예루살렘과 감람산 너머 벳바게와 베다니에 사는 이라면 그 누구도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몰려든 인파의 얼굴은 하나같이 근래에 본 적이 없는 희망과 기대의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실은 나귀가 감람산 언덕에 나타나자 대중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이다! 나사로를 살리신 이!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신 이, 물 위를 걷고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이! 몰려나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둘러싸고 성문까지 밀고 밀리며 행진했습니다.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의 개선행렬이었습니다.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오는 것은 구약시대 왕의 개선행진 모습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성문에 도달하자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땅에 깔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중은 대부분 겉옷이 한 벌 뿐이었지만, 그래서 옷을 벗어 속옷을 입은 몸이 드러났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옷으로 길을 메울 수 없자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땅에 깔고 손에 들고 흔들며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종려나무가지를 베어서 길에 깔고 손에 들고 흔드는 것 역시 구약시대 왕의 개선행렬의 모습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는 외침 역시 왕과 장군들에게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이 열광적 분위기 속에 그들은 모두 기다리던 메시야, 로마 황제와 그 앞잡이 헤롯 왕을 물리치고 마침내 이스라엘에 독립과 자유를 가져다줄 왕이 오셨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의 기대대로 과연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본문 5절이 스가랴서를 인용하여 선언합니다.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진정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개선행렬은 어디로 향해야 했을까요? 사람들을 이끌고 그대로 로마군이 주둔한 안토니오 성채로 향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먼저 헤롯궁으로 쳐들어가 로마의 앞잡이 헤롯왕과 그 당을 물리쳐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혹은 로마에 협조하는 대가로 온갖 특권을 누린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을 처형하고 혁명을 시작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예수님은 궁전이 아닌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기셨고 그 곳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몰아내신 후 백성을 가르치시고 해가 지자 베다니로 돌아가 쉬셨습니다.
대중은 어리둥절 했습니다. 혁명은 어디로 갔습니까? 언제 침략군을 몰아낼 것입니까?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다시 돌아와 저들을 몰아낼 것입니까? 그 날 밤 예수님께 열광했던 대중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 흥분과 이런 저런 질문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3. 속박과 착각
대중은 왕을 기다렸고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중이 생각한 그 왕이 아니었습니다. 대중은 자신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을 개선시켜 줄 왕을 기다렸습니다. 로마를 몰아내고 다윗 시대와 같은 전성기의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줄 제 2의 다윗을 기다렸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처럼 자유와 해방과 복지를 주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폐기된 희년을 회복시키는 것이라 선언하셨습니다. 희년은 자유와 해방, 복지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와 해방과 복지는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요, 참된 것입니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자유요,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영생에 속한 복지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필요하다고 깨닫지도 못 했고 필요를 느끼지도 못 했던 자유와 해방과 복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과 슬픔, 굶주림이 로마의 속박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말도 아닙니다. 로마의 속박은 그들의 겪는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그들이 겪는 고통의 일부였습니다. 사실 타민족을 속박하는 로마도 속박당하여 고통받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를 속박하는 고통의 진짜 원인은 더 근본적인 데 있었다는 말입니다. 정서적 굶주림을 배고픔으로 착각하는 폭식증환자처럼 사람은 눈에 보이는 속박이 고통의 원인인 줄 알기에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지 못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착각을 깨우치기 위하여 성전에 가셔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목요일까지 예수님이 계속 해 가르치신 이유도 이것입니다.
그들을 묶고 있던 진짜 무거운 속박, 총과 칼을 써도 벗을 수 없고, 압제자도, 피압제자도 모두 묶인 속박, 배운 자도, 가진 자도, 품위 있는 자도 벗을 가능성이 없는 이 절망의 속박은 무엇입니까? 바로 죄와 죽음의 속박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며 그 대가로 영원한 멸망,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속박으로 속이고 빼앗고 의심하고 미워하고 비방하며 살아갑니다. 죽음의 속박으로 근심하고 우울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살아갑니다. 정확히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다가갑니다. 우리는 죄의 속박과 죽음의 증세에 묶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실을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치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그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금요일 새벽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의 속박을 깨뜨리셨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의 속박을 깨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것이 맞습니다. 속박을 깨뜨리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과 복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개선행렬은 그러므로 이 날 무지한 백성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 성 황금문을 통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자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저주하는 군중에 떠밀려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실 때야말로 진정 승리하신 왕의 개선행렬이 될 것이었습니다.
4. 진정한 개선행렬
이 날 호산나 부르며 열광한 대중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해 열광합니다. 주일 아침마다 나와서 찬송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야요, 왕이요, 구세주라고 외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복과 생명을 주신다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왕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의 청구서를 해결해 주시고 자녀의 학교와 직장을 해결해 주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걱정거리를 해결하여 행복을 가져다 주시는 왕이 아니신가요? 그렇다면 우리도 이 날 황금문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언제라도 주님께 등을 돌리고 못박으라고 외칠 지 모르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깨우치시려고 이 한 주간 성전에 드나드시며 부지런히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 가르침에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는 자는 우리의 문제가 청구서와 진학과 취업, 병과 걱정거리가 아니라 우리의 죄와 악과 무지와 탐욕과 허영임을 깨닫고 죽음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진정한 개선행진에 참여하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찬송, 호산나 외침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에 울려퍼지는 참된 찬송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