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8 우리 중의 하나님 나라 / 눅 17:20-21

20230618 우리 중의 하나님 나라 / 눅 17:20-21

눅 17:20-21/우리 중의 하나님 나라

230604 1-2부 예배
우리가모이는이유
할렐루야, 우리 주님의 놀라운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하십시다. ‘주님이 당신을정말 사랑하십니다.’
2주 전에 미얀마의 이은상 선교사님을 방문하고 왔습니다. 미얀마는 주류인 버마족과 100여 개가 넘는 소수민족 사이의 내전이 지금도 계속 되어 있어서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설립한 세계로선교대학 졸업생들의 사역지 중 수도 양곤 북부의 소수민족난민촌이 있습니다. 이 곳의 교인들은 여러 분쟁 지역에서 피난온 소수민족들입니다. 난민촌 한 가운데 세운 교회는 여러 소수민족과 버마족이섞여 있습니다. 그들은 밖에 나가면 서로 반복하고 심지어 피를 흘리는 적대적 부족인데 이 곳 교회에서는 어떻게 한 가족이 될까요?
우리 교회 성도들은 모두 인종도, 출신지도, 성별도, 개성도 다릅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지내면 피곤한 일도 많이 생깁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마주쳐야 합니다. 각자 하고 싶은 대로 못 하며 살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함께 모입니까? 왜 함께 예배하고음식을 나누고 교제합니까? 각자 예배만 드리고 사람들 만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히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오히려 힘써 모이고 서로 돌아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가르칩니까? 교회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온 세상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가서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 하고 같은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스데반의 박해를 통해 강제로 교회를 예루살렘 밖으로 흩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성도로 부름받는 데는 남여의 구별이 없습니다. 인종의 구별이 없습니다. 언어의 구별이 없습니다. 국적의 구별이 없습니다. 빈부의구별이 없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의 구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의 공동체만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모든 차이와 구별을 넘어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참된 하나님 나라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의새창조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차이와 구별을 뛰어넘은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요? 아무리 하나님 나라라고 해도 어떻게 아무런 구별도, 차이도 없이 함께 산단 말입니까? 그 답은 예수님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예수님은 우리의 몸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고전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그 몸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다 하였습니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남녀의 구분이 없는데 인종과 국적과 다른 구분이 있겠습니까? 부활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으로 새 몸과 마음으로 부활합니다. 그 때 우리는 각자의 고유한 개성이 남아있지만 이 땅에서 서로를 구분짓고 차별을 만들어 내던 모든 차이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유한 존재이지만 모두가 존귀한 존재로 부활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라는 한가지 공통점으로 인해 더불어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으로인한하나님나라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믿는 이들은 오늘 이 땅에서 비록 서로 다르지만 연합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미리 살아보는 예행연습입니다. 이는 마치 공연을 앞둔 배우가 부지런히 연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습한 배우만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칩니다. 이는 마치 운동선수가 올림픽을 앞두고 부지런히 연습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연습한 선수만이 좋은 성적을 거둡니다. 이 땅의 공동체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에서도 연합한 삶의 풍요로움을 제대로 누리기 힘듭니다.
또한 이 땅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진정으로 소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진정 올림픽을 기대하는 이는 게으르지 않고 연습합니다. 어떤 선수가 부지런히 연습하지 않는다면 그는 올림픽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가하나님 나라를 진정으로 바라고 기대한다면 그 나라의 방식을 좇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나라의 방식은 모든 차이와 다름을 넘어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리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만 모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 인종이 다른 사람, 언어가 다른 사람,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과 함께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원수인 바울이 교회의 가장 헌신적인 선교사가 되듯 심지어 원수까지도 용납하고 더불어 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더불어 살고, 사랑하며 살고, 용서하며 사는 연습을 부지런히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전혀 기다리지 않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곳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눅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바리새인들도, 제자들도 기다리던 하나님 나라는 어느 장소나 시기에 임하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예수님은 그들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 안에 있다는 것은 inside you 곧 마음이 평안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는 불교에도 있고 힌두교에도 있고 명상과 요가에도 있습니다. 원어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번역한 영어성경은 among you 곧 ‘너희들 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그들 사이가 다른이들 사이와 무엇이 다릅니까? 눅 11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눅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에게 있는 어둠을 몰아내면 즉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을 주로 삼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너희들 사이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예수님을 통해 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모셔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그 자녀로사는 삶이 하나님의 나라란 뜻입니다. 이 삶이 그대로 이어져 재림시에 하나님 나라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들어왔고 그 나라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이 삶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삼은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좇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의미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처럼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오셨습니까? 한 분도 빠짐없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