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6 모든 민족의 소망 / 룻 1:14-22

20230716 모든 민족의 소망 / 룻 1:14-22

룻 1:14-22/모든 민족의 소망

230716 주일설교
1. 당신이라면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나오미가 모압을 떠나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의 앞날을 생각하여 자신과 동행하지 말고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서 재혼하여 잘 살라고 두 번이나 강하게 권합니다. 결국 큰며느리 오르바는 돌아가지만 룻은 그럼에도 나오미를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딸이나 여동생이 있다면 혹은 여러분이라면 이 상황에서 두 며느리 중 어느 쪽을 권하고 선택하시겠습니까? 지난 화요일 일꾼모임에서 질문했더니 7:1의 압도적인 비율로 오르바를 선택하겠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도그럴것이 안전한 부모의 집과 재혼의 가능성을 모두 포기하고 누가봐도 고생길만 훤한 극빈층으로 전락하는 삶을 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모르긴해도 모압에 있던 룻의 부모도 결사반대를 했을 것입니다.
2. 참된 사랑 
도대체 왜 룻은 이런 어려운 선택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룻에게 이런 희생을 가능케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를 14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룻 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דבק).
붙좋았더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다바크(דבק)는 창세기 2장에서 남자와 여자가 연합한다고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דבק)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즉 룻이 나오미를 따라나선 것은 부부의 연합을 만들어내는 사랑만큼이나 뜨거웠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연민이나 긍휼을 넘어서 한 인간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리킵니다. 룻의 마음에 가득한 나오미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대목이 세 번째로 나오미가 룻에게 돌아가라고 권한 후 한 답변에서 드러납니다. 이 룻의 답에서 어머니란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를 세어보십시오.
(룻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8번입니다. 현대정신의학의 시조라 할만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무의식 중에 내뱉는 단어를 분석하는데서 시작합니다. 반복해 말하는 단어는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가득 차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룻의 마음은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자신의 필요와 의지와 요구보다 어머니의 그것을 더욱 앞세웁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들려주신 어리석은 부자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의 말에 무슨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보십시오.
(눅 12:17) (그 부자가) 마음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눅 12: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나’를 6번 반복합니다. 그의 마음엔 자기가 가득합니다. 룻의 마음에는 자기보다 어머니가 가득합니다. 룻과 같은 마음을 고린도전서 13장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고전 13:5) (사랑은) …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 늙고 가난한 어머니를 붙좇는 사랑, 어머니로 그 마음이 가득한 사랑,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어머니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은 죄인인 우리를 영적 신부로 삼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동시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명하신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신 그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우리 주님이 이런 사랑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3. 믿음의 열매
이런 참된 사랑은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룻 1:16) …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당연히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에 관해 깊이 알고 신앙고백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어머니의 신앙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처음 교회 올 때 성경에 대해 박식해서 신앙고백을 하고 온 것이 아니지 않던가요? 아내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혹은 친구와 지인에 대한 신뢰 때문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주님을 만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습니까?
룻의 이 사랑과 믿음은 유대인들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던져주었을 것입니다. 사실 멸시받던 이방인에게서 택함받은 선민 이스라엘 못지않은 때로는 그보다 더 큰 사랑과 믿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성경이 강조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4. 이방인에게도 주시는 은혜 
예수님이 들려주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만난 이를 긍휼히 여겨 위험과 손해를 무릎 쓰고 사랑을 베푼 이는 경건하다 자부하는 이스라엘인이 아닌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가버나움의 한 이방인 백부장은 자기 가족도 아닌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와서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자 그는 예수님이 말씀만으로도 하인의 병을 고치시는 권위와 능력을 가졌다고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이 놀라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모압사람 룻과 사마리아인과 로마인 백부장 등의 이방인들에게서 이런 사랑과 믿음이 발견된다는 것은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결코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을 향하여 흘러가는 강물처럼 구원역사가 퍼져간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창 12:3) “… 땅의 모든 민족이 너(아브라함)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5. 차별없는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택하심과 긍휼은 결코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로마인 백부장 고넬료의 회심사건을 통해 깨달은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행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행 10: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냐, 이방인이냐를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겉으로 보이는 인종, 성별, 지위, 출신, 국적 등도 따지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직분, 경력, 학력, 재능 등 그 무엇도 따지지 않으십니다. 모든 이들에게 차별없이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역시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이방인으로 구성된 오늘날의 튀르키에, 소아시아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하나님은 룻의 마음에도, 가버나움의 백부장, 백부장 고넬료의 마음에도 착한 일 곧 사랑과 믿음의 씨앗을 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씨앗이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의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이 선한 일이 룻의 마음에서 사랑과 믿음으로 자라나 마침내 그녀를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가게 만드셨습니다. 룻의 손자가 이새요, 증손자가 다윗왕입니다. 또한 다윗의 후손에서 인류를 위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십니다. 이방여인 룻에게서 메시야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구원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한 일은 기적같은 구원의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룻의 후손으로 나신 예수님은 모든 민족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며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롬 15: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6. 소망이신 그리스도
모든 민족의 소망이 예수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인도, 백인도, 흑인도, 히스패닉도, 아시아인도, 아프리카인도 모두 예수님을 만나야 소망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룻의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오늘 이 시대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외적 조건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를 긍휼로 택하셔서 사랑과 믿음 안에서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로 만드시고 받으십니다. 이 구원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이를 때까지 반드시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능력과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님의 은혜, 성령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자랑과 교만, 미련한 모든 일을 내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는 권합니다.
(히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든 민족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바라보고 사랑과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