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4:1-12/당신을 위한 고엘
230924 주일설교
1. 땅을 주시는 하나님
3주만에 룻기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룻기의 하일라이트로 기업무를 것을 약속한 보아스가 실제로 기업무르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먼저 기업무르기의 배경을 잠깐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으로 모세의 인도를 받아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땅에 정복하였습니다. 이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누가 토지를 차지할 것인가였습니다. 그 답은, 하나님이 명하신 제비뽑기를 통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토지를 받는다였습니다. 제비뽑아 전체 가나안땅을 열두 등분해 열두 지파에게 나누어주고 각 지파는 그 땅을 다시 제비뽑아 각 가문별로 나누었습니다. 고대의 농사는 개인이 짓기에 너무 힘겨운 노동이었기에 가문 전체가 협동할 수밖에 없었고 토지를 가문별로 분배하여 소유케 한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은 모든 백성이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자신이 속한 가문을 통해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이가 없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이상사회로 출발했습니다. 모든 국가가 소수의 부유한 지배층과 다수의 빈곤한 피지배층으로 나뉘었던 고대왕국과 비교할 때 이스라엘은 놀랍도록 평등하고 발전하는 사회의 기초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이런 평등한 토지소유구조는 공동체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한 핵심요소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이런 복되고 부강한 나라에서 살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2. 모든 땅의 주인
고대국가와 근대국가까지 이상사회를 꿈꾸는 사회치고 이스라엘만큼 평등하지는 못 했지만 토지개혁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한반도만 해도 삼국시대가 그랬고 조선이 그랬고 해방직후 남한과 북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자들의 토지독점이 시작되며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런 위협에 직면할 것이 틀림없었기에 하나님은 평등한 토지소유구조를 깨뜨리지 못 하도록 안전장치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토지소유권과 희년이었습니다.
먼저 토지를 하나님의 소유라고 선언하셔서 모든 땅주인은 사실 임대인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토지의 소유구조, 사용방식 등을 모두 참소유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토지가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임대인인 이스라엘 백성은 그 토지를 팔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투자를 위해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야 한다든지 혹은 빚을 못 갚아 땅을 빼앗긴다든지, 가족이 먼 땅으로 떠나서 토지를 관리할 수 없다든지 하는 상황이 생기기에 이럴 때는 타인에게 임대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즉 돈을 받고 땅을 넘기더라도 이는 판매한 것이 아니며 임대한 것이고, 이는 희년을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5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쥬빌리 곧 희년이 돌아오면 임대기간이 끝나서 원래 주인에게 아무 조건없이 돌아오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임대할 때 받는 돈은 희년이 돌아오기까지 남은 햇수를 땅의 사용가치에 곱한 금액이었습니다. 50년 주기로 돌아오는 희년까지 20년이 남았고 이 땅을 경작해서 거둘 수 있는 수익이 연 만 불 정도라면 20만 불을 받고 넘기는 것입니다. 30년이 남았다면 30만 불을 받는 식입니다.
3. 은혜로운 희년
50년마다 희년을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느 사회든 인구는 늘기마련이지만 땅은 늘지 않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땅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한 번 판매한 땅이 영원히 구매자의 소유로 남으면 그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땅을 잃어버린 집안은 갈수록 비싸지는 땅을 되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결국 빈익빈 부익부으로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사회적 갈등과 분노가 점점 커집니다. 이를 제어하지 못 하면 요즘 문제가 되는 묻지마폭행, 묻지마살인이 등장합니다. 도무지 탈출할 수 없는 빈곤의 늪에 갇힌 이들이 사회를 향한 분노를 무작위로 누군가에게 쏟아놓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에서 제어하지 못 하면 분노가 집단화되면서 시위, 폭동, 반란, 혁명, 전쟁 등으로 기존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이런 양극화와 사회붕괴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놀라운 제도가 바로 희년입니다. 50년 약 1.5세대마다 찾아오는 희년으로 토지의 독점이 제어되어 불평등이 해결되고 분노의 김이 빠집니다. 희년 문자 그대로 기쁠 희자를 써서 기쁨의 해입니다. 노예된 신분이 자유민으로 해방되고 잃었던 가문의 토지를 되찾으니 얼마나 기쁜 해입니까? 당연히 모든 가문이 자신들의 토지를 소유함으로 소수에게 독점될 때보다 생산력이 올라가고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의욕도 크게 높아져서 지속적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하나님은 토지제도와 희년제도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탐욕과 폭력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세심한 돌봄의 손길인지요!
4. 재기의 기회 고엘
물론 희년만으로 복지의 구멍을 모두 메울 수는 없었습니다. 땅을 잃은 가족은 희년이 될 때까지 남은 기간 빈곤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을 위한 구제책이 바로 오늘의 주제 기업무르기입니다. 룻기는 여호수아시대에 바로 이어지는 사사시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사사기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흉악한 죄악이 얼마나 벌어졌는지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그런 암흑기에도 하나님의 법을 좇아 살아가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룻기는 증언합니다.
보아스는 3장에서 룻에게 약속한 대로 기업을 무르기 위해 4장에서 성문 앞에서 장로들을 청하고 자신보다 나오미와 더 가까운 친척을 만납니다. 가까운 친척이 우선 기업무를 권리와 의무를 져야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재판정의 역할을 했습니다.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은 십년 전 흉년을 피해 가족과 함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할 때 땅을 누군가에 팔았을 것입니다. 그는 땅 판 돈을 들고 모압에서 흉년도 피하고 돈도 불려서 고향으로 돌아와 그 땅을 스스로 다시 사들일 즉 무를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치못하게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이국땅에서 죽고 들고간 돈도 바닥나 그의 아내와 작은 며느리만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극빈층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던 나오미에게 룻을 통해 기업무름이란 소망이 생겼습니다. 부유한 친척 보아스가 나오미 집안의 땅을 물러준다면 빈곤에서 벗어날 것이요, 만약 며느리 룻과 결혼해 아들을 낳아준다면 가문도 다시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5. 고엘의 희생
3-4절에서 보아스는 자신보다 더 나오미에게 가까운 천척에게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의사가 있는지 묻습니다. 1절은 그를 아무개라고 부르니 우리도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룻 4: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무를 권리를) 팔려 하므로 (룻 4: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3절의 판다는 뜻은 죽은 엘리멜렉이 판 땅을 나오미가 다시 물러 되찾아올 힘이 없으니 그 무를 권리를 가장 가까운 친척인 당신에게 맡기려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개는 그 권리를 위임받아 엘리멜렉의 땅을 무르겠다고 답합니다. 그의 생각에 이는 엄청난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되사는데 적지않은 돈이 들겠지만 그 땅을 돌려받을 엘리멜렉이 죽고 없으니 고스란히 아무개의 것이 됩니다. 보통 남의 땅을 돈주고 임대해도 희년이면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데 무를 권리를 얻어 그 땅을 사면 엘리멜렉이 죽고 없으니 돌려줄 필요 없이 영원히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껏해야 나이든 나오미가 죽을 때까지 돌보는 것 정도가 추가부담일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큰 이득입니까? 그러자 보아스가 5-6절에서 그 권리에 큰 의무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그의 입장이 갑자기 바뀝니다.
(룻 4: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룻 4: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아무개는 나오미의 며느리 룻의 존재를 생각지 못 했던 것입니다. 고엘의 의무는 기업무르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가 된 여인과 결혼해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의무도 있습니다. 만약 젊은 며느리 룻에게서 아들이라도 나오면 그 아이는 죽은 엘리멜렉의 아들로 족보에 올라가고 자신이 산 땅은 그 아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결국 경제적인 면만 보자면 큰 손해를 보고 나오미와 룻 좋은 일만 하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아무개는 무를 권리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그 의무를 담당하겠노라고 나섭니다.
6. 아무개와 보아스
아무개는 가까운 친척이지만 나오미의 삶과 복지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며느리 룻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 하고 있었던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손해보지 않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익만이 중요한 인생이었습니다. 세상은 아무개로 가득합니다. 모두가 아무개로 살아갑니다. 그 길은 넓지만 멸망의 길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그저 아무개라고 부릅니다.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없다는 뜻입니다.
반면 보아스는 큰 손해를 보아야 하는지 잘 알면서도 스스로 나서서 기업무를 의무를 집니다. 왜입니까? 그는 룻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젊은 여자의 육체를 원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습니다. 아내를 여럿 두는 것이 흠이 아니던 시절 부유한 그는 얼마든지 이런 큰 부담을 지지 않고도 젊은 여자를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룻을 현숙한 여인인 동시에 신실한 인간으로 사랑했습니다. 또한 나오미를 긍휼히 여겼습니다. 이웃을 위해 사랑의 의무를 지도록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즉 사랑과 희생과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성경은 보아스라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어떻게 이런 사랑과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남의 땅에 종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택하여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이란 존귀한 이름을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 주시고 그 땅에서 복지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은혜로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율법은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돌보시려는 토지법과 희년법과 고엘법과 같은 은혜의 법이 가득합니다. 이 모든 행하심과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성품을 잘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노래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녀는 그 율법에 가득한 사랑과 믿음, 은혜와 긍휼의 성품을 닮는 복된 사람으로 변합니다. 보아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7. 우리의 고엘 예수 그리스도
나오미와 룻에게 보아스가 고엘이 된 것처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고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한 고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잃어버린 우리의 생명을 되찾아 주셨고 잃어버린 우리의 낙원 하나님 나라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빌립보서는 고엘되신 예수님의 희생을 노래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야로 묵상하고 그 분의 마음을 품는 이는 이 시대를 위한 고엘이 됩니다. 이 세상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나오미와 룻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에겐 보아스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심한 아무개가 될 수도, 긍휼의 보아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시대를 위한 보아스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개입니까, 보아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