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6:16-24/빼앗을 수 없는 기쁨
231015 주일설교
1. 소소한 기쁨
공자는 논어 첫머리 ‘학이 편’에서 인생삼락 곧 인생에 세 가지 기쁨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공부, 둘째는 멀리서 찾아온 친구 그리고 셋째는 타인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저는 요즘 손주를 보는 순간의 기쁨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손주자랑하시는 교우들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그렇습니다. 최근 한 교우께서 ‘요즘 삶에 기쁜 일이 없다’고투덜대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분께 공자의 말을 전해드리면 어떨까 생각해 보니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논하는 소위 대가나 지혜의 스승들 글을 읽으면 대부분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추천합니다. ‘한결같이 부, 성공, 지위와 같이 모두가 바라나 대부분 손에 넣지 못 하는 것이 아닌,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일상에서 얻는 기쁨을 찾으라’고 권하는데그 이상의 것은 없는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뾰족한 답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는 인생을 위로할 진정한 기쁨은 어디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있다고 답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기쁨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것이 기뻐할 이유가 되고 또한 일상의 기쁨을 넘어선 압도적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그 기쁨은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지, 과연 그것이 진정 삶의 의미가 될 만한 것인지 오늘 본문이 답을줍니다.
2. 고난을 이기는 기쁨
요한복음 16장 중반부는 지난 주에 이어 여전히 예수님의 고별설교의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마주할 고난을 거뜬히 이길 수 있는 힘이 기쁨에서 나온다고 출산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엄마는 너무나 잘 이해하는 비유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하지만 새생명이 주는 기쁨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고통을 잊게 만들고도 남습니다. 신앙에는 압도적이고 넉넉한 기쁨이 있어서 마주하는 온갖 고난을 이기게 만듭니다. 그 기쁨이 정확히 어디서 오는지를 20절에서 이어서 설명하십니다.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이는 바로 최후의 만찬에 이어 벌어질 예수님의 체포, 고문, 십자가 처형사건을 마주할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놀라고 충격을 받고 울고 애통하지만 대제사장 무리는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않아 제자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이 무엇일까요? 22절입니다.
(요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실 때 제자들은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은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기쁨이야말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압도적인 기쁨입니다.
3. 빼앗을 수 없는 기쁨
주님의 부활이 압도적인 기쁨이 되는 이유는 부활이 예수님의 모든 메시지가 진리임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선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제자들은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을 만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을 받았고 근심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예수님을 통해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실 때 그의 누이인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하는 이깟 고난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그 부활과 영생의 소망 앞에 다 사소하고 부질없는 근심거리일 뿐입니다. 1000억불 로또를 맞았는데 100불 교통티켓이 다 무엇입니까? 그 천 억불 로또보다 더 큰 것이 이 부활의 기쁨입니다. 천 억불 로또 맞아봐야 다 쓰지도 못 하고 죽을터이고, 그 돈 때문에 자식들이 원수되고 망할지도 모르는데 기쁘기만 할 것입니까? 하지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은 빼앗을 수가 없는 압도적 기쁨입니다.
작은 기쁨은 쉽게 빼앗습니다. 맛있는 식사가 주는 기쁨은 형편없는 서비스 때문에 금방 빼앗깁니다. 하지만 건강하고 예쁜 손주를 얻은 기쁨은 쉽게 빼앗길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과 영생의 소망은 영원히 빼앗길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런 압도적인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2차 전도여행 중 사도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일거리를 뺏겼다 여기는 점집사장들에게 고소를 당해 모욕을 당하고 옷을 벌거벗기운 채 많이 매질을 당하고 마침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땅굴에 족쇄를 채운 채 던져졌습니다. 춥고 배고픈 채 벌레와 쥐떼가 들끓는 지저분한 곳에 기약도 없이 억울하게 갇혀 있으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아마 울고 절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까요?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들 마음에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3장을 보면 1차 전도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이 그 지역 유지들을 선동해 바울 일행을 박해하고 그 지역에서 쫓아냈습니다. 이 역시 얼마나 불쾌하고 모욕적인 일입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게 그 곳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전도하러 갔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 마음에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에게는 이런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성령님이 주십니다. 이것은 어떤 고난이나 위협이나 비방도 빼앗을 수 없는 압도적인 기쁨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바울과 실라는 이 기쁨 때문에 선교사로 순종하였고 이런 기쁨 때문에 고난도 거뜬히 이겨냈습니다. 이런 기쁨이야말로 예수믿는 기독교인에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런 기쁨이 없는 삶은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
미국과 한국에 마약이 이렇게 문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홈리스야 아무 기쁜 일이 없어서 그렇다지만 돈도 잘 벌고 성공한 사람들도 적지않게 마약을 한답니다. 왜입니까?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 기쁨을 아는 사람은 유사품에 유혹받지 않습니다. 참 기쁨을 아는 사람은 헛된 부귀영화를 쥐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참 기쁨을 아는 사람은 헛된 욕심과 죄악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런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요,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 하고 이 기쁨을 모르고 사는 이는 불행합니다. 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넘치지시를 축복합니다.
4. 영원히 샘솟는 기쁨
그러나 마귀는 성도가 이 기쁨을 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기쁨을 뺏으려 합니다. 어떻게든 빼앗기 위해 고난과 유혹으로 흔듭니다. 유사품에 맛을 들여서 진짜 기쁨을 잊어버리도록 만듭니다. 기쁨을 줄 것처럼 돈, 쾌락, 성공, 지위, 인기로 유혹하여 헛된 것을 좇게 만듭니다. 이 전략은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많은 성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기쁨을 잊고 살아갑니다. 이런 위협을 잘 아셨기에 주님은 성도가 다시 기쁨을 회복할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쁨을 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3절 전반부입니다.
(요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구하지) 아니하리라…
그 날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이 땅에 더 이상 계시지 않은 때입니다. 이 때에는 육체로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기에 그 어떤 것도 묻거나 구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에게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곁에 있던 열두 제자 뿐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제자가 예수님 바로 곁에 있는 것같은 은혜를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예수님이이 땅에 계실 때 그 분 곁에 늘 머무르고 그 분의 은혜와 능력을 입을 수 있는 제자는 극히 소수였습니다. 열두 제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높은 경쟁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마가복음 2장에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 사람이 너무 몰려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하려고 친구들이지붕을 뜯어서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8장은 예수님이 갈릴리로 돌아오시자 무리가 모여들어 서로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다고 했고 모두가 서로 예수님을 만지거나 만나거나 모시려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9장은 대도시 여리고의 세리장인 삭개오조차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나무에 올라가야 했고 그가 예수님을 집에 모신 것은 커다란 화제거리요, 시기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요 12장에는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제자 빌립에게 요청하고 빌립은 안드레에게 말하고 빌립과 안드레가 함께 예수님에게 가서 만나실 수 있겠느냐고 여쭙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마치 여러분이 아이폰을 쓰다가 문제가 생겼다고 아무리 애플사에 전화해도 CEO 팀 쿡을 만날 수 없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더이상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도움을 받기 위해 이 어려운 경쟁의 관문을 통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 어디에 있든, 어떤 민족이든, 남자든 여자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당신을 만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어떻게요? 바로 이것이 16장 7절에서 당신이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요 16:7)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님)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이제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의 심령에 들어와 계심으로 모든 제자들의 마음이 성전이 되고 모든 제자들은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23절 하반부 이하가 주는 약속입니다.
(요 16:23)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제는 성령님의 인도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모든 제자들이 세상 어디서든 응답을 받습니다. 기도를 통해 과거에는 지붕을 뚫고서야 뵐 수 있었던 예수님을, 무리를 비집고 들어가도 옷자락만 겨우 만질 수 있었던 주님을, 나무에 올라가야 얼굴을 겨우 볼 수 있었고 측근 제자들을 거쳐야만 겨우 만날 수 있었던 그 주님을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만날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그 응답이 Yes 일 때도, No 일 때도 있지만 응답하지 않으시는 일은 없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친밀한 아바 아버지로,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일 뿐 아니라 숨기는 것이 없는 친구요, 하나님의 가족의 큰형님, 큰오빠로 만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통해 성도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기쁨을 회복합니다. 이 지속적인 기도생활은 우리의 기쁨이 지속되게 만들어 주는 은혜입니다. 이 기도생활의 기쁨은 우리가 모든 고난과 유혹을 넉넉히 이기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생활을 통해 여러분의 삶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처럼 풍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영혼의 뿌리를 통해 끊이지 않는 기쁨과 소망과 은혜와 평강을 공급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노래합니다.
(사 12: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쉬지않고 기도의 무릎을 꿇는 자녀들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의 생수를 날마다 길러내 마실 수 있습니다. 이 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에서,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날마다 길러올려 마시고 살아나는 성도가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