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6:25-33/세상을 이기는 믿음
231022 주일설교
1. 성인호칭기도
“천주의 성모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미카엘 천사님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천주교 장례미사 등 여러 미사에서 들을 수 있는 성인호칭기도문의 일부입니다. 천주교에서 드리는 탄원기도로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성모 마리아와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천사들이 들어가고 성 요한 등 사도들, 성 요셉 등 순교자, 사제 등이 들어가는 꽤 긴 기도문입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이 좀 이해하기 힘든 기도문입니다. ‘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데 마리아나 천사, 성인, 순교자들에게 기도드리는가? 이것은 우상숭배 아닌가?’ 이에대해 천주교인들은 답하기를 ‘마리아나 천사,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다. 개신교인들도 목사에게나 동료 신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지 않는가? 우리도 먼저 하늘나라에 가있는 이들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도를 들어주소서 라고 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라고 하지 않는가?’라 합니다. 듣고보면 수긍이 갑니다만, 그럼에도 100여 명이 넘는 이들의 이름을 매번 언급하며 기도문을 낭독 하느라 이십 분이 넘게 걸리는 것을 보면 ‘과연 단순한 기도부탁이라 볼 수 있는가, 그냥 그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왜 다른 이들에게 기도부탁하느라 그 시간을 쓰는가, 그들이 가진 특별한 공로가 하나님 앞에 기도응답을 받는데 더욱 효과적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개신교인은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선조들이라도 그들에게 기도부탁을 하기 위해 시간을 이렇게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아주 명확히 등장합니다.
2. 대면하는 하나님
본문은 지난 주에 이어 예수님의 고별설교의 일부분으로 지난 주 메시지에 이어집니다. 지난 주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승천하신 후 모든 제자들에게 허락될 특별한 은혜를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제자이든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들으심으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복입니다. 이 것은 예수님 곁에 있던 열두 제자만이 누릴 수 있던, 주님과 친밀한 관계로 묻고 들으며 구하고 응답받는 특별한 복을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제자들이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복을 제자들이 누릴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26절을 보면 승천 후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는, 명령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제자들 대신 아버지께 구해주신다는 말씀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요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예수님이 먼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 알았어. 잠깐 기다려.’ 하나님께 가셔서 ‘아버지, 뉴저지에 사는 김집사가 좀 살려달라는데요. 들어 주시면 안 돼요?’ 이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구조라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멀리 두고 보는 것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바로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십니다. ‘직접 말씀드려. 나의 아버지이시고 너의 아버지셔.’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아버지라 부르며 그 영광을 보고 묻고 구하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3. 친밀하신 하나님
이 얼마나 놀라운 친밀함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가르침입니까! 세상조직의 사장, 회장, 장관, 부서장 하나를 만나려고 해도 전화통화도 어렵고 만나기는 더 어렵고 천신만고 끝에 만나도 잠깐이면 나와야 하고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만물의 창조자, 온 우주의 주인을 만나는데 낮이나 밤이나, 백악관에서나 교도소에서나, 재벌이나 홈리스나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대고 나가기만 하면 만날 수가 있습니다. 1분이고 1시간이고 하루 종일이고 언제까지나 그 분과 머물러도 되고 밤새도록 묻고 듣고 대화해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속된말로 소나개나 다 창조주를 만나겠다고 나서도 예수님은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 분 앞으로 인도해 주시겠다니 이 얼마나 엄청난 진리입니까!
예수님 이전에 이후에도 어떤 신도, 어떤 신앙도 이런 친밀하고 가까운 신과 인간의 관계를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시대 모든 종교에서 신은 두렵고 어렵고 멀리 있었습니다. 사제나 왕족과 같은 특별한 이들만 다가갈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신에게 다가가려면 그의 호의를 받기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고 대가를 지불해서 만족시켜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다못해 결혼식장에를 가려고 해도 예복을 입지 않으면 환영받지 못 하고, 동호회 모임 하나를 참석하려고 해도 회비를 내지 못 하면 참석이 안 되는데 하물며 신에게 가서 환영받으려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며 얼마나 큰 자격을 갖추어야 하겠습니까? 모든 종교가 이런 대가지불과 자격을 요구합니다. 그러니 감히 힘없고 자격없는 자들에게 신은 저 멀리 계시고 감히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 친히 다가오시는 목자같은 하나님,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처럼 당신이 더 애닳는 하나님, 죄인을 아들이라 부르시며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같은 하나님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이 대가지불도 할 수 없는 죄인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목자처럼, 아버지처럼 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직접 십자가에서 모든 대가를 대신 치러서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시고, 죄인에게 의인의 자격을 주셔서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화해시키시고 성령으로 인도하셔서 그 분 앞에서 친밀한 돌봄을 받도록 만드셨습니다. 고린도후서를 보십시오.
4. 화해케 하신 하나님
(고후 5: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이 모든 화해의 역사를 누가 계획하였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복을 주십니까? 27절은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 때문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요 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제자들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하나님은 기쁨으로 받으셨고 동시에 그들을 친히 친밀하게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런 사랑을 누리셨고 이제 그 친밀한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신다고 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그리고 그 관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마리아나 천사나 성인들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처럼 누구나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며 놀랍도록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묻고 구하고 듣고 응답받으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는 성도에게 놀라운 기쁨을 지속적으로 선물합니다. 이런 친밀한 복을 매일 매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5. 착각하는 제자들
그리스도인이면서 이 복을 누리지 못 하는 이들은 있다면 그보다 불쌍한 인생이 없을 것입니다. 마치 은행에 돈을 수 천억을 쌓아두고 홈리스로 사는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홈리스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만찬석상에 앉았던 당시의 제자들은 그랬습니다. 25절입니다.
(요 16:25) “이것을 (지금까지는)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성령님이 오실)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예수님은 이 진리를 아직 이해력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비유로 가르치셔야만 했고 승천 후 성령님의 도움으로 제대로 이해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같은 이유로 마태복음 13장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이런 영적 원리를 주로 비유로 가르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비유는 본 뜻을 이해 못 해도 쉽게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에 성령님이 영적 원리를 깨닫게 하실 때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시간이 꽤 지난 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재현해서 가르치거나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29-30절을 보면 제자들은 그 때가 지금이고 자신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미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 16: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요 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자신들이 이미 제대로 믿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1절에서 그들의 믿음이 착각이라고 꼬집으십니다.
(요 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너희가 정말 나를 믿는다고? 그것은 닥쳐오는 시련에서 너희를 전혀 구원하지 못 하는 믿음이다. 32절 전반부입니다.
(요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6. 임마누엘의 하나님
이 제자들처럼 자신이 제대로 알고 믿는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이들일수록 쉽게 넘어집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하지 않습니다. 자신 곧 자기를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성도에게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존재입니다. 배가 얼마나 튼튼하고 안전한지는 바다가 고요할 때가 아니라 폭풍우가 몰아칠 때 증명됩니다. 이처럼 믿음의 참됨은 시련의 때에 증명됩니다. 인생의 폭풍우가 칠 때면 참 믿음이 증명될 때임을 깨닫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더욱 자신하지도, 자랑하지도, 자만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이기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32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요 16:32) …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너희가 나를 다 버리고 혼자 둘 것이지만 나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늘 많은 제자들에 둘러싸여 계셨지만 그들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장입니다.
(요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요 2: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왜입니까? 그들을 싫어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연약한 인간일 뿐임을 아셨기에 그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은 그만큼 크게 실망하고 상처받습니다. 그들이 실망시키고 상처주는 이유는 반드시 악해서가 아니라 모두 연약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오직 하나님이 함께 계심만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참평안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32절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야말로 너희에게 참 평안을 줄 것이다. 세상의 환란을 이기는 힘을 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나도 십자가의 고난을 이겼다. 나도 너희와 함께 한다. 이 믿음으로 너희도 세상을 이길 것이다. 그러므로 담대하라!’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믿음, 친밀하게 동행하는 믿음,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야말로 세상을 이깁니다. 예수님도 이런 믿음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셨고 제자들 역시 이런 믿음으로 박해와 시련을 이겨내었고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라야 세상을 이깁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