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5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이 / 요 17:1-16

20231105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이 / 요 17:1-16

요 17:1-16/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이

231105 주일설교
1. 전쟁같은 인생 
미국이 가장 오랜 기간 치른 전쟁은 무엇일까요?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부터 2021년 8월까지 20년간 치른 아프가니스탄 전쟁입니다. 미국 군인 110,000명이 참전해서 2,448명이 전사한 이 전쟁에는 한인의 자녀들도 약 적지않게 참여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이 전쟁에 참전한다면 그를 위해 어떤 기도를 드리시겠습니까? 당연히 먼저는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안전하게 전장에서 돌아오기를 밤낮없이 기도하시겠지요? 거기에 더해 해야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의 마음도 충격과 고통을 잘 이겨내고 건강하게 회복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PTSD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때문입니다. 몸이 상하지 않았다고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적국과 아군이 눈 앞에서 죽어나가는 전투를 거듭하면 그 마음도 총에 맞은 몸처럼 큰 상처를 입습니다. 보통 참전군인의 5-10%가 이 증세를 앓아 심각한 우울증, 불면증, 대인기피증, 죄책감, 자살충등 등에 시달립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자녀들만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전쟁터보다 별로 안전하지 못 합니다. 질병, 실직, 진학실패, 사별, 이혼, 괴롭힘, 왕따, 사기, 차별 등의 지뢰를 밟는 이들은 마음이 큰 충격을 받고 PTSD를 종종 겪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위해서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지뢰를 밟고 PTSD를 겪는 이들은 오늘 주님의 기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은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에서 설교를 마치신 후 제자들을 위해 드리신 기도의 첫 단락입니다. 4복음서는 모두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예수님의 기도를 기록하는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와 요한복음이 각각 다른 기도를 소개합니다. 먼저 앞선 세 복음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기도를 기록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최후의만찬장에서 제자들을 위해 드리신 기도를 기록합니다. 두 기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로서 아주 짧게 기록한 반면 최후의만찬장의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로서 훨씬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왜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까? 그들은 잠시 후 그들이 상상도 못했던 충격적인 사건을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눈 앞에서 가룟 유다가 데리고온 대제사장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심문받고 십자가에 달려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묻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고 두렵고 충격을 받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이 강하지 못 하다면 마음과 믿음이 완전히 무너져내려버릴 것입니다. 바로 그들을 위해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가 주는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PTSD를 겪는 이들에게 어떤 위로를 주실까요? 
2.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이들
첫째 인생의 전장을 지날 때 하나님의 눈은 여러분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요 17: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세상이 아닌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세상이란 예수님을 거역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당신의 제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맡기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6절입니다.
(요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아버지께 속한 사람, 아들에게 맡긴 사람을 어떻게 압니까?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눈을 그들을 주목하십니다. 입학식에 가면 더 똑똑하고 잘나고 예쁜 수백 명의 학생이 있지만 여러분의 눈은 오직 한 명에게만 향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속한 이, 당신의 자녀들을 주목하십니다. 세상에 불의가 만연하면 할수록 더욱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의의 길을 가는지를 주목하십니다. 대하 7:14을 보십시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세상의 운명은 악인들에 의해 흥하고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세상에 있고 그들의 심판은 엄중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며 많은 이들이 악에게 넘어갈 것을 경고하시면서도 절망하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인이 남아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항상 의인을 향하고 계십니다. 의인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세상에 악이 왜 이렇게 많은지, 불의한 이가 왜 이렇게 많은지를 보며 한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지,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뿐 아니라 세상의 운명도 여기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무리 세상에 악과 거짓이 흥해도 늘 말씀을 지키며 의의 길을 감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길 축복합니다. 
3. 성도가 바라보아야 할 것
둘째 인생의 전장을 지날 때 여러분은 눈앞의 참상이 아닌 그 너머의 승리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참상을 마주할 제자들이 바라보아야할 영광을 기도하십니다. 본문 1-5절에서 예수님은 다섯 번이나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1절입니다. 
(요 17:1) …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질 때가 되었으니 죽음을 이기고 부활, 승천하게 하셔서 아들이 영광을 받음으로 아버지께서 또한 영광을 받으소서’ 하는 내용입니다. ‘영화롭게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독사조’는 영광스럽게 하다, 경의를 표하다 하는 뜻입니다. 이 영화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개선장군을 백성이 나가 환영하며 찬양하는 것과 같습니다. 월드컵 우승을 한 국가대표선수들이 시상대 위에 세우고 환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2절, 이 일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유는 자녀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3절, 이 영생은 양적으로는 영원한 삶이지만 질적으로는 하나님과 그 아들과 연합하는 영적 삶을 가리킵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절, 예수님은 이 구원을 다 이루어 아버지를 기쁘게 하셨습니다. 
(요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절, 그러므로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머물던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기도하십니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전의 육체와 다른 영적 육체로 부활하여서 영이신 하나님에게로 가도록 승천하게 하옵소서 즉 영광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겟세마네동산의 기도와 달리 최후의만찬자리에서 제자들이 다 듣도록 이 기도를 드리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 영광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혹독한 시련과 크나큰 충격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시련을 이기는 길은 무엇입니까? 눈앞의 시련이 아닌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뒤에 올 부활과 승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걱정과 두려움을 압도하는 소망과 담대함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도 롬 8장에서 권합니다.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이 아닌 영광을 바라보라는 당부입니다. 작은 고난을 통해 주실 크나큰 성숙과 거룩함과 영광을 바라보면 고난이 무너뜨리지 못 하는 믿음과 담대함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구하시는 이 영화로움이야말로 우리 성도가 바라볼 최고의 상입니다. 구원은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단계를 거칩니다. 칭의는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신분이 단번에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는 사건입니다. 성화는 바뀐 신분에 걸맞는 거룩한 삶으로 서서히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영화는 마침내 주님의 날에 주님과 같은 영의 몸을 입고 부활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칭의를 경험했고 성화를 경험중이지만 영화는 아직 경험하지 못 했고 바라만 봅니다. 이 영화야말로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 영화의 사건으로 입게 될 새 몸을 고린도전서는 노래합니다. 
(고전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이 영화의 사건을 바라보셨고 우리보다 먼저 부활과 승천으로 영화롭게 되셨습니다. 히브리서입니다. 
(히 12:2) …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도 이 영화의 사건을 바라보도록 기도하셨고 오늘 우리도 이를 바라보도록 명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이 영화로움을 바라보심으로 눈 앞의 시련을 넉넉히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4. 성도가 지켜야 할 것
셋째 인생의 전장을 지날 때 여러분은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지금까지 당신이 제자들을 지켜오셨다고 고백합니다. 
(요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다른 제자들을 말씀과 기도로 지켜내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에게 속아넘어가 예수님을 팖으로써 자신이 멸망의 자식임을 드러냈고 실제 멸망했습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서 이미 예견된 일입니다. 이제 당신이 승천하시면 그 후에는 아버지께서 친히 제자들을 지켜주시기를 11절에서 기도드립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왜 그들을 지켜야 합니까? 14절을 보면 그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미움받고 시련을 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겪는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15절,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 당황치 않고 악에 빠지지 않기를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거짓과 유혹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넘어뜨려 믿음을 잃고 죄와 악에 빠지게 만들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계속 바로 이런 제목으로 기도해 오셨습니다.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잃지 않으면 다 가진 것입니다. 믿음을 잃지 않으면 바다도 건넙니다. 믿음을 잃지 않으면 광야도 통과합니다. 믿음을 잃지 않으면 전쟁도 이겨냅니다. 믿음을 잃지 않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반면에 다른 것을 다 얻어도 믿음을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유한한 것을 얻으려고 영원한 믿음을 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을 만난 형제, 자매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잃지 않도록 절제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십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이는 악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이는 믿음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때에 모든 것을 잃더라도 믿음을 끝까지 붙드는 주님의 자녀가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