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8 이순신은 구원받았는가 / 롬 5:17~19

20190728 이순신은 구원받았는가 / 롬 5:17~19

롬 5:17-19/이순신은 구원받았는가

190728 주일설교 성경변증6
영아의 구원
이순신은 구원받았는가. 오늘 제목이 여러분의 흥미를 끌리라 생각됩니다.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일꾼모임에서 나온 질문에 답을 해보고자 합니다. 한 교우의 사춘기 아들이 신앙에 대해 폭풍질문을 쏟아놓는데 답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태어나자마다 혹은 태중에서 사망한 아기들은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는 것입니다. 오래 된 난제 중 하나인 이 질문에 대해 단순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답들이 있습니다. 
첫째 영아는 순수한 상태이므로 모두 천국에 간다. 이 답은 기독교의 원죄교리와도 충돌하지만, 그렇다면 죄의식이 생기기 전에 빨리 죽을수록 영원의 관점에서는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하다는 결론에 이르니 유산이나 낙태를 옹호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둘째 복음을 듣지 못 하고 죽었으니 지옥에 간다. 이 답은 복음을 들을 기회도 주지 않고 지옥에 보내다니 불공평하다는 도전에 직면하는 동시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자녀를 잃은 부모라면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셋째는 복음을 들을 기회도 판단할 능력도 없는 상태였으니 천국도 지옥도 아닌 아예 창조 이전의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역시 성경에 근거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 어려운 난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영아의 구원여부는 좀 더 큰 문제의 일부입니다. 아기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고 듣더라도 판단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가진 이는 아기 외에도 많습니다. 이순신은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요?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못 한 오지에 사는 부시맨은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신적 장애를 가져서 복음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 하는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들을 모두 unreached people 미접촉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복음에 접촉하지 못 한 이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요? 
 
믿음으로 인한 구원
이 문제에 가장 밝은 빛을 던져주는 책은 역시 로마서입니다. 롬 2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문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롬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전 유대인들이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 한 이방인들은 모두 그들의 행위를 판단할 기준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과 양심입니다. 이 율법과 양심은 그러나 그들을 구원할 근거가 되지 못 하고 다만 그들의 행위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고발하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혹은 양심)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따라 살든 양심으로 살아가든 모두 의로움의 기준에 미달할 뿐입니다. 그들은 그럼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하나님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얻는 것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이에대해 롬 4:3은 답합니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 했지만 하나님을 믿은 것을 곧 그리스도를 믿은 것으로 하나님이 여기셔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이 원리를 그대로 이방인에게 적용하자면 그리스도를 믿은 것으로 인정할 만한 그 어떤 방식이 이방인에게도 있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아브라함을 포함한 구약의 신도들이나 역시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결단할 기회도 갖지 못 했던 이순신 같은 미접촉인이나 모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인정할 만한 그 어떤 과정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선택으로 인한 구원
이 때 믿음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믿음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은혜입니다. 이 역설을 시 33편이 잘 설명합니다. 
(시 33: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즉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셔서 은혜를 베푸셨기에 그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선택의 은혜가 먼저고, 믿음이 나중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자 은혜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렘 1:4) 여호와의 말씀이 내(예레미야)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렘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믿기로 결단하여 구원받은 이들은 그들의 믿음이 공로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구원받았고, 예수님을 믿음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그들이 택함을 받았다는 증거였다는 말입니다. 이 원리가 똑같이 예수님 오시기 전의 구약성도들이나 예수님의 이름을 듣지못한 unreached people 비접촉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를 힘입어 구원받을텐데 그 증거로서 예수님을 믿은 것과 같은 것으로 인정될만한 그 어떤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것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고 이순신의 경우 우리가 모르는 어떤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럼 조선시대에 살다간 사람, 오지에서 살다간 사람 혹은 복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하는 장애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단 말입니까? 그 방식이 무엇인지 분명히 성경은 밝히지 않기에 저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가능성을 우리 교단이 받아들이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한 구원
제 10장 3항 전반부입니다. 
‘택함을 받은 영아는 어려서 죽는다 할지라도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구원을 받는다. 이 성령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또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역사하신다…’
영아는 분명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고 그 이름을 듣고 결단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시는 은혜를 입은 이가 있고 그는 구원을 받습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택하신 성부의 뜻을 받아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말입니다. 성령의 이 자유로운 역사하심에 대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3:8) 바람이 임의로(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령님이 한 영혼을 택하시고 중생시키시고 구원하시는 역사는 당신 뜻대로 자유롭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택하심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마저 이렇게 덧붙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택함을 받은 사람들도 말씀의 전도를 통해서 외적으로는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중생하고 구원을 받는다.’ 
‘말씀의 전도를 통해서 외적으로는 부르심을 받지 못 한 사람들’의 부류에는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시대의 사람들, 지역의 사람들 혹은 이해할 능력이 안 되는 장애인 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내려봅니다. ‘영아를 포함하여 복음을 들어보지 못 한 unreached people 미접촉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정받는 어떤 믿음을 인정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인한 구원
이런 결론에 다소 당황하신 분들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아니 그럼, 예수님의 이름 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말씀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사도행전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베드로 사도의 설교가 행 4:12에 이렇게 인용됩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온통 죽음의 권세로 가득 찬 이 땅에 하늘과 통하는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질 수 있도록 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 죽음의 땅에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은 누구도 예외없이 바로 그 예수님의 공로 덕분에 쏟아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자유로이 부어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택함받고 성령님에 의해 거듭 났다는 증거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그 이름을 고백하고 그의 제제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지역에서는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인정될 만한 믿음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성령님이 인정하실만한 어떤 믿음이라고 할 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 하고 고백하지도 못 한 이라 할지라도 역시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부어지는 선택과 중생의 은혜를 입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구원과정은 온전히 선택하시는 성부님, 중생시키시는 성령님 그리고 죄사하시는 예수님의 역사에 의해 주장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의를 쏟아놓으셨고 성령님은 그 의를 세상에 베푸시고 그 의를 힘입는 모든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듣든 듣지못하였든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얻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갖지 못 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의 장례를 종종 주관합니다만 함부로 그 분의 구원여부를 선언하지 않습니다. 슬픔을 당한 유가족을 배려한 예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로이 선택하시고 중생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제가 감히 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권과 자유의지
여기에 오래 된 신학적 질문이 떠오르는 분들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듣지도 못한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선택하시고 은혜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구원이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하지도 않은 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면 그럼 믿기로 선택하는 우리들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럼 우리가 굳이 저 오지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답은 다음 주에… 
오늘은 자격도 없는 우리 죄인들을 시대와 지역과 인종을 가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 선택하시고 중생시키고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목청높여 찬양하는 것으로 마쳐도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할렐루야,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