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05 일꾼을 보내 주소서 / 마 9:35~38

20140105 일꾼을 보내 주소서 / 마 9:35~38

일꾼을 보내 주소서 / 마9:35-38

 

섬김형 인간

프랑스 낭시대학 행동생물학연구소의 디디에 드조르라는 연구자가 ‘동물의 사회행동’이라는 책에서 쥐들을 대상으로 한 재미있는 실험을 소개합니다. 쥐 여섯 마리를 섬처럼 고립된 곳에 두고 사료통을 건너편 섬에 두어서 헤엄을 쳐 가져와야만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것입니다. 그랬더니 쥐들의 역할이 서로 의논이나 한 듯 아주 선명하게네 부류로 나뉘더라는 것입니다. 처음 두 마리는 헤엄쳐 가서 먹이를 가져와 먹는데 다른 두 마리에게 먹을 것을 뺏기는 피착취형입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인 다른 두 마리는 헤엄치지 않고 기다렸다가 헤엄쳐갔다온 두 마리의 먹이를뺐어 먹는 착취형입니다. 다섯 번째의 한 마리는 헤엄쳐 먹이를 가져 오지만 힘이 세서 뺐기지 않고 혼자 먹는 독립형입니다. 남은 여섯 번째 한 마리는 헤엄쳐 가지도 않고 뺏지도 못 하고 다른 쥐들이 먹을 때 흘리는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천덕꾸러기형이더랍니다. 스무 개의 그룹을 만들어 같은 실험을 했더니 모든 그룹의 쥐들의 역할이 이와 똑같이 나뉘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각 그룹의 두 마리씩 착취형 쥐들만 여섯 마리를 묶어서 실험을 했더니 다 착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도 똑같이 역할이 나뉘더랍니다. 반대로 피착취형 쥐들을 여섯 마리씩 묶어서 실험을 했더니 이번에도 똑같더라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느 사회, 어느 국가나 할 것 없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있고 독립적인 이들과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쥐들의 사회에 없는 유형이 인간사회에 있습니다. 그들은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자원을 스스로 나누어주는 이들입니다. 이들을 저는 섬김형 인간이라고부르겠습니다. 이 섬김형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살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위해서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왜 섬기는가

이런 유형을 쥐들의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간사회에서도 이런 유형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동물들의 사회와 달리 왜 인간사회에는 섬김형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이유를 오늘 본문 35-36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 9:35) 예수께서 (갈릴리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주님은 고생하는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셔서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원치않는 죄와 고난으로 신음하시는성도 여러분, 주님의 긍휼을 누리시길 축복드립니다.

인간들에게는 다른 동물과 달리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긍휼의 마음이 있습니다. 왜 인간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에 의하면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긍휼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그러므로 이런 긍휼의 마음이 회복됩니다. 이 긍휼의 마음이 우리를 섬김형의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새벽기도도 두어 차례 섬기신 적이 있는 아프리카 케냐의 이동관 선교사님이 쓰신 책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 책에는 이동관 선교사님이 예기치 않게 선교사의 길에 접어 든 두 사건이 소개됩니다. 한 번도 선교사가 되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던 신학교 시절의 이동관 전도사님은 아프리카 케냐에서 1년동안 견습선교사로 섬길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기린과 초원이 뛰노는 낭만적인 아프리카를 상상하며, 이것은 동물의왕국이 남긴 후유증인데, 덜컥 지원을 합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이 디딘 아프리카 땅의 현실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현지인 교회의 레베카라는 초등학교의 어머니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했더니 어머니는 에이즈에 걸려 뼈만 남은 채 죽어가는데 아버지는 두 다리가 없는 장애인으로 팔로 걸어다니더라는 것입니다. 장차 이 어린 여자아기가 어떻게 살까 생각하니 막막했습니다. 얼마 후 네 살짜리 여자아이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여자 아이가 초죽음이 된 채 누워있었습니다. 분노가 치밀어올라서 어쩔 줄을 몰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막 화를 냈더니 현지인 의사가 말하기를 ‘흥분하지 마라. 이런 일은 이곳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가슴이 먹먹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사건들은 1년 동안의 견습 선교사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7년 후 이동관 목사님은 그의 발걸음을 케냐로 옮겨지금은 케냐의 오지 마을에서 교회를 세우고 빈민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동관 선교사님을섬김형 인간으로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목자 없는 양

섬김형 인간들은 다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불쌍한 이들은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이들만이 아니고 선교사만이 섬기는 이는 아닙니다. 어떤 이들이 불쌍한 이들입니까? 본문 3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 9:36)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목자 없는 양들 즉 이끌어 주는 이들이 없는 이들이어서 불쌍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은 이끌어 주는참된 목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늑대와 같은 거짓 목자들에게 이끌려 다니거나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의 목자가 되어이리 저리 방황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위해, 어디로 향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 채 헤매고 다닙니다.

최근에 한국의 한 시민단체가 6세 여아가 당한 성폭력 사건기사에 댓글로 악플을 단 이들을 처벌해 달라고 법정에 고발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적지않게 많은 이들이 그 댓글을 달기를 성폭생범이 부럽다거나 동성애는 되는데 소아성애는 왜 안 되냐거나 혹은 그 외에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희롱의 글을 올렸습니다. 이무지하고 악한 사람들은 왜 이런 것입니까? 그들을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진리의 빛을 비춰줄 선한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한 이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삶은 자유롭고 거칠 것이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고생하며 기진하는 인생입니다.

설교 서두에서 인용했던 쥐 실험에서 실험자들이 실험 후 쥐들의 두개골을 해부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가장 스트레스가 많아서 쭈그러든 뇌를 가진 쥐가 어느 것이었을까요? 바로 헤엄을 치지 않고 다른 쥐의 것을 빼앗아먹기만했던 착취형 쥐였습니다. 거짓과 불의에 속아사는 인생은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스트레스와 고통이 많은 인생, 고생하며 기진하는 인생입니다. 결국은 심판에 떨어질 것을 본인도 알고 그 두려움에짓눌려 사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치유할 일꾼이 필요한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 학교 교사로 섬기시는 집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영어도 잘 못 하는데 교사가 부족하다 하여요청을 받고도 망설이던 끝에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듣고 떠들기만 하는 청소년 아이들이 이 집사님의 진지한 태도에 관심을 보이더니 나중에는 이런 저런 질문들을 폭풍처럼 쏟아내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사람은진화된 것이냐, 창조된 것이냐, 공룡은 어떻게 설명하느냐, 동성애는 왜 안 되냐,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냐… 이 집사님이 나름대로 유투브를 비롯해 이 곳 저 곳에서 자료를 준비해서 서툴지만 진지하게 설명했더니 아이들이 그 답을다 듣고 이해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영어도 그렇고 따로 시간을 내어서 봉사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누군가그 아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결국 답을 찾지 못 한 아이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 아닌가 하는생각에 계속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우리 교회의 어두운 등잔 밑에 숨어있는 목자 없는 양입니다. 청소년기에 고민,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의 가르침이 충돌할 때 느끼는 혼란, 가정과 학교에서 겪는 어려움 등을 가지고 신음할 때 아무도 가르쳐주고 돌봐주고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들이야말로 고생하며 기진하는 목자 없는 양입니다. 그리고 교사들은 그들을 돌봐주어야 하는 목자이자, 섬김형 인간입니다.

 주님의 일꾼이 되라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요! 거기에 비해 그들을 섬길 일꾼들은 얼마나 적은지요!그래서 37-3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 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후 즉시 무엇을 하셨습니까? 10장 1절입니다.

(마 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마 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후 직접 제자들을 추수할 일꾼으로 보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할 일꾼이 필요하다고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곧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추수할 일꾼으로 섬기겠다는 결단과 순종을 의미합니다.구역에서, 부서에서, 선교회에서, 교육부에서 섬기는 일꾼으로 응답합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지역사회에서 그리고 선교지에서 추수할 일꾼으로 응답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응답하기 위해 2014년의 표어를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정했습니다. 우리 뉴저지장로교회의 모든 교우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일꾼으로 쓰임받기 위해 부지런히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훈련과 성경공부, 새벽기도와 수요, 금요기도회를 통해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둘째는 일꾼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모든 교우들이 한 곳 이상에서 섬겨야 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성장하지 못 합니다. 섬기지 않으면 우리는성장할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주님을 닮은 성도로 성장하는 이유는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섬김으로 마지막 때에 추수하는 일꾼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