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시대적 배경

#1-01 시대적 배경


#0-02 편찬사

목차

#1-02 교단적 배경

1부
우리 교회가 태어난 배경 | Chapter 1 The Background of our Church’s Founding

1. 시대적 배경 ((이 부분을 본 역사편찬위원회 조종무 집사(현 뉴욕 ‘라디오서울’보도본부장)가 썼음을 밝혀둔다.))  | Historical Background

70년대 : 냉전 체제로부터 데탕트 ((detente: 프랑스어로 ‘국제 긴장 완화’를 뜻함.)) 로 우리 뉴저지장로교회가 창립된 1970년대 초기는 세계적으로 중대한 변혁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50년대와 60년대를 특징지은 냉전체제가 수그러들고 미국이 중공과 국교를 트면서 72년부터 ‘죽의 장막’이 서서히 걷히는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소련도 71년 니키타 흐루시초프 총리의 사망을 계기로 자유세계와의 협조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데탕트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소련연방을 지탱하던 위성국들도 조금씩 독립 의지를 보이던 때이기도 하다.
한편 존 F.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깊숙이 빠져가던 미국은 60년대 말엽 참전이 확대되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국내에서 반전여론이 고조돼 격렬한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등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자, 70년대 들어 엄청난 인명과 재산피해를 내고 마침내 철군 결정을 내린다.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이것을 ‘패전’이라고 불렀다.
전쟁이 끝나면서 경제가 급속히 악화돼갔다. 물가 상승에 기인한 노조의 요구대로 임금이 인상되면서도 물가가 덩달아 뛰어올랐고, 막대한 전비는 물론, 중동국가 협약으로 인한 유가(油價) 인상 등으로 인플레 율이 12%까지 뛴 적도 있었다. 1973년 10월에 닥쳐온 에너지 위기는 특히 석유 소비량이 세계 으뜸인 미국인들에게 환경자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었다. 석유를 비롯한 자원이 지구상에 무한정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 같은 변화 속에, 미 정가에서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재선 음모에 따른 ‘워터게이트’가 엄청난 스캔들로 확대되어 결국 그의 사임을 몰고 왔다. 닉슨은 압도적인 표 차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재 집권기 절반(2년)도 채 못 채우고 스스로 물러나는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 이 사건은 베트남전쟁 패배와 함께, 정부와 국가기관들에 대한 불신풍조를 낳았다.

민권운동으로 인한 소수인종 지위 향상

70년대는 아울러, 미국 내 민권 신장으로 소수인종의 지위가 대폭 향상된 시기였다.
소수계 민권운동은 이미 60년대에 흑인들이 앞장을 섰는데, 그 주도자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였다. ‘뉴프론티어’(New Frontier)로 대표되는 케네디 집정기와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로 대표되는 린든 B. 존슨 대통령 시절의 주요 정책을 민권 향상과 사회복지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 흑인 민권운동의 자극제 구실을 했다.
1960년 2월,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보로에서 백인들만 출입이 허용된 식당에 거절당한 흑인 학생들이 농성을 벌인 일이 있었다. 백인 고객들의 출입을 막으며 계속된 농성에 견디다 못한 식당 측이 결국 손을 들고 흑인들의 출입을 허락했다.
이를 계기로 흑인들의 성토와 파업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심지어 일부 백인 학생들도 참여했는데, 이때 조직된 학생 비폭력 조정위원회는 식당뿐 아니라 백화점, 교회 등을 상대로 대대적인 캠페인을 전개한 끝에, 1백여 도시에서 차별대우가 폐지되는 극적인 성과를 얻었다.
이 무렵 킹 목사는 앨라배마 주 버밍엄 시의 인종차별 법규를 반대하는 저항 행진을 이끌었다. 1963년 8월28일 민권운동 지지자 약 20만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들어 ‘자유와 직업을 얻기 위한 워싱턴으로의 행진’이란 구호 아래 시위를 벌였다. “내게는 꿈이 있다(I have a dream)”는 킹의 명언은 이때 나온 것이다.
그해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지만, 그가 생전에 제안했던 민권법안이 1964년 통과됐다. 이 법의 통과는 소수계에 역사상 가장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가 됐고, 다소나마 인종장벽도 허물어졌다. 전에 없던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흑인들은 민권향상의 굼뜬 속도와 불충분성에 계속 불만을 표했다. 특히 북부 빈민촌에서는 높은 실직률과 주택난, 취약한 학군, 정부관리들의 부정부패 등으로 반감이 쌓여가자, 로스앤젤레스, 뉴저지 뉴어크, 패터슨, 워싱턴DC, 볼티모어, 신시내티, 디트로이트, 시카고 등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줄이어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흑인계 대다수는 폭거(暴擧)보다는 평화롭고 온건한 방법을 지지했다. 특히 킹 목사는 폭동에 계속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불행히도, 1968년 백인의 흉탄에 암살됐다. 킹 암살사건은 또 한차례 폭동을 몰고 와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많은 도시가 파괴됐다. 약탈과 방화로 도시상가가 잿더미가 돼버리자,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피신한 것은 물론, 폭동 재발이 두려워 상가로 복귀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폐허화 돼버린 상가마다 ‘렌트’(RENT)사인이 나붙자, 때마침 가발이라는 좋은 아이템을 개발해 낸 한인들 중에는 손쉽게 대도시 노른자위 상가에 진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얻어진 상점들은 가발업이 사양기에 접어들자 재빨리 다른 품목들로 바꾸기도 했으나, 상당수는 아직 한인들 간에 인수, 운영되고 있다.
민권운동의 승리는 70년대 들어 미 원주민·히스패닉·아시안 계에도 영향을 미쳐, 발언과 지위, 권리 향상의 길이 점차 열려갔다. 한마디로, 소수민족이 미국사회에서 발뻗고 살수 있는 시절이 된 것이다.

이민법 개혁으로 연 2만 명씩 합법이민

60년대에 개선되어 70년대에 꽃핀 미국의 정책이 있다면 이민법 개혁이다.
케네디–존슨 때의 획기적인 이민정책 갱신으로 세계 각국에서 이민물결이 넘실대며 흘러 들어왔다. 개혁이민법은 케네디 집권기인 1963년에 입안됐던 것으로, 그의 사후에 통과돼 후임자인 존슨 대통령이 65년 10월 3일 뉴욕 항 ‘자유의 상’ 앞에서 서명함으로써 발효됐다.
그때까지 적용되던 이민법은 1952년 개정된 출신지 쿼터제로 당시까지 입국해 있던 국가별 이민의 적당한 퍼센티지를 할당하는 내용이었다. 한국인들은 당초 연간 100명 수준의 이민쿼터를 배정 받았었으나, 새 이민법 통과로 연간 2만 명으로 상향됐다.
‘하트-셀러 법’이라고도 불린 새 이민법은 미국 이외의 지역을 둘로 나눠, 한국·중국·일본·필리핀 등이 포함되는 동반구에는 연17만, 유럽을 포함한 서반구지역에는 12만 명을 수용키로 하고, 국가 당 2만 명을 넘지 않게 한 것이 내용의 골자였다. 한국인은 그때부터 연2만 명이 상한선이 됐다.
이에 따라 60년대 말부터 가속화된 한국인의 미주이민은 70년대 들어 피크를 이루었고,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등 대규모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5년 개정된 이민법은 1976년까지 지속됐다.

정치불안과 보릿고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농가 생활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음력 )) –어두운 고국 현실

이민의 드센 물결은 모국 상황이 여러모로 좋지 못해 일어나는 자연현상에 가깝다. 생활고나 사회불안 속에서는 누구나 여건만 된다면 이민 보따리를 싸기 마련이다. 한인들의 미국이민이 붐을 이룬 1970년대 한국의 상황은 과연 어떠했을까?
군사정권으로 특징지어진 196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추진하려는 집권층과 이를 저지하려는 반(反) 군사독재 투쟁세력으로 인해 정치와 사회가 극도로 불안해졌다. 70년대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노동자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 실미도 특수군 난동 사건, 대연각 호텔 화재 등은 그런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72년 10월 17일, 박대통령이 특별선언문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이른바 유신헌법이 태동한다. 그해 11월 국민투표를 실시해 유신헌법을 확정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소위 ‘체육관 대통령’이 등장했다.
유신을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가 확산되고, 해외에서 반 유신체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던 야당지도자 김대중씨가 일본에서 한국 정보기관원들에게 납치됐다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한일관계에 마찰을 일으켜 국무총리가 친선사절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박 정권의 3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아래 경부고속도로 건설, 해외수출신장, 새마을운동 정착 등 긍정적인 열매도 없지 않았으나 장기적인 희망을 던져주기에는 미흡했다. 아직 산업화에도 이르지 못하던 시절, 국민들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며 주림과 고통 속에 지내고 있었다. 말하자면, 정치·사회·경제 어느 면으로든 국민이 만족하고 살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럴 즈음 활짝 열려진 희망의 땅 미국의 이민문호는 한국인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시켜줄 기회로 성큼 다가왔다.

아메리칸 드림 안고 미 대륙으로

이 같은 시대상황 속에 이민을 결심하기에 적합한 여건이 갖춰지던 70년대를 맞아 조국을 떠나온 수십만 한인들은 대도시 주변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태평양 연안으로는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새너제이 등에, 동부인 대서양 연안에는 뉴욕을 비롯하여 워싱턴, 볼티모어 등에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뉴욕 퀸즈의 플러싱, 뉴저지의 저지시티는 당시 한인들이 밀집하기 시작하던 지역이다. 저지시티는 저지시티 메디컬센터에 근무하는 수많은 한인 의사와 간호사들, 가족들이 거주하기에 편리했다. 주는 다르지만, 뉴욕 맨해튼이 바로 헛슨 강 건너에 있어 패스(PATH) 트레인으로 10여분이면 닿을 수 있는 교통상의 편의도 좋은 정착 조건이었다.
새로 형성되는 이민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교회가 들어선 것도 이 무렵이었다. 강 건너 뉴욕에는 1921년에 이미 감리교 계통인 뉴욕한인교회가 처음으로 설립돼 해방 전 거주자들과 유학생들의 안식처 역할을 해왔고, 해방 후로는 최초로 1963년 5월 뉴욕 브루클린에 브루클린한인교회(현 뉴욕한인중앙교회)가 세워졌다.

뉴저지사상 최초의 한인교회는 통설과는 달리, 일찍이 1966년에 설립됐던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앞서 뉴욕한인중앙교회를 설립한 백예원 목사를 중심으로 러더퍼드(Rutherford)에 세워진 뉴저지한인교회가 그것이다. ((뉴욕한인중앙교회사(2000년) 70, 73쪽 참조. ‘뉴저지한인교회’: 융희 백예원 목사 고희기념문집 ‘의의 길로 걸어가며’(기념문집출판위원회, 성광문화사, 1994년) 99, 530, 544, 556쪽)) 그러나 당시 미국성서공회(ABS) 뉴욕지부 행정감독관을 겸직했던 백 목사가 목회에는 미력이었던지, 이 교회는 1974년 사실상 와해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밝혀지는 대로 속속 바로잡아, 바로 기록되고 기억돼야 할 것이다.
저지시티 한인인구가 4〜500명 선에 달하면서 한인 커뮤니티가 제법 커가던 1971년 4월10일, 장로교 계통인 뉴저지 제일한인교회가 설립되고, 박재영 목사가 시무하게 됐다. 뉴저지사상 두 번째 한인교회요, 현존하는 최초의 한인교회다.
이듬해인 1972년에는 (현존) 제2호 한인교회로 우리 교회가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