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우리 교회의 발자취 | Chapter 2 The Church History
1. 창립기(1972-1979) | Early Period
(1) 태동기(1972-1973)
교회 창립 예배 – 장영춘 목사를 중심으로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막 10:1)
1972년 8월 13일(주일).
한인들이 삼삼오오(三三五五) 차를 몰아 어느 공원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사일러스 칸딕트 공원(Silas Condict Park)-허드슨(Hudson) 강 건너 서쪽, 모리스 카운티(Morris County)의 키넬런 보로 ((100 Kinnelon Rd., Borough of Kinnelon))(Borough of Kinnelon)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그곳을 찾아 나선 이들은 거의가 뉴저지 저지시티에 거점을 둔 한인들이었다. 여기서부터 루트(Route) 23번 N을 타고 3, 40분 차를 몰아 가면 키넬런 로드(Kinnelon Road)를 만난다. 그 길을 타고 서쪽으로 3/4 마일쯤 가면 우측에 카운티 공원인 사일러스 칸딕트 공원이 나온다. 오히려 지금의 우리 예닮원이 있는 오클랜드(Oakland)에서는 더욱 가까운 거리에 있다. 호수가 있어 낚시도 할 수 있으며, 등산로를 따라 등산을 즐길 수도 있다. 붐비지 않고 조용한 이 공원은 물오리가 밀고 가는 잔잔한 호수, 광활한 잔디밭,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숲, 완벽한 피크닉 시설-언제나 평화스러워 보이는 아름다운 공원이다. (2002. 5. 5. 본 역사편찬위원 현지 답사)
모인 무리는 장영춘 ((장영춘: 현 뉴욕 퀸즈장로교회 담임목사. 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 교장, 미주 크리스천신문 발행인·사장 등을 겸직하고 있다. 뉴욕교협 회장(4대)과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총회장도 역임했다.)) (사진 1) 목사와 곽영철 ((우리 교회 창립예배에서 예배 인도를 담당했던 곽영철 집사는 현재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소재하고 있는 중앙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사역하고 있다. 우리 교회 해외선교부에서는 5년째 그의 사역비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김지수 ((김지수 집사에 대해 양호식 장로는 말한다. “그는 나와 ROTC 동기로 친구이다. 그가 어느 날 내게 ‘공원에 가보자’고 제의하여 따라갔다. 그것이 우리 교회 창립예배였다. 원래 그는 한국서 신용산교회에 출석했다. 당시 신용산교회에는 장영춘 목사가 전도사로 있었고, 장미은(장목사 부인)사모, 안순익(이성남 부인), 김지수 등이 한 교회 학생회에 출석했다”(2002년 4월12일 녹취).)), 김지윤, 이성남, 오안순 ((오안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본 제단을 섬겨오며 생존해온 역사의 산 증인. 1977년 12월 4일 시무권사로 취임. 현 은퇴권사.)), 장영애, 최진섭 가정 등 20여 명이었다. 감격의 첫 예배를 공원에서 드린 것이다.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나님이시지만, 한국에 계시던 하나님이 먼저 여기에 와 계신 것 같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찾아와 우리를 불러 모으셨구나!-그런 유의 생각으로 그들의 마음은 떨렸으리라.
공원 이름의 ‘사일러스(Silas)’는 신약 성경(행 15 : 22-35)에 바울과 함께 사역한 ‘실라’의 바른 발음 표기이고, ‘사일러스 칸딕트(Silas Condict)’는 뉴저지에서 생존했던 인물이다.
첫 예배를 드린 공원이름 자체가 의미가 있다면 있었다. ((모리스 카운티 관련 인터넷 자료를 참조했음)) 전기한 대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 사일러스(실라)는 초대교회 선지자로서(행 15 : 32) 바울과 함께 사역했던 사실도 의미가 있거니와, 사일러스 칸딕트(1777〜1861)도 뉴저지 초기 장로교인이자 정치인으로 뉴어크(Newark)에서 태어나 1795년 프린스턴을 졸업했고 카운티 치안판사, 뉴저지 주의회 의원, 연방의원 등으로 활약했다.
동명인 그의 아버지(1738〜1801)도 18세기 미 대륙의회 뉴저지 대표였고 삼촌인 루이스 역시 주의원, 연방하원의원을 두루 맡았다. 그의 외손자 오거스터스 윌리엄 커틀러 마저도 주 상원의원, 연방하원의원을 거쳤다. 이들 모두가 장로교인들이었다. 칸딕트 부자는 둘 다 모리스타운 제 1장로교회 묘지에 묻혀 있다.
그런 뜻깊은 이름을 가진 공원에서 우리 ‘뉴저지한인장로교회’가 태어났으니, 별다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진 2. 우리교회가 창립예배를 드렸던 최근의 사일러스 칸딕트 공원
The first worship service of the church at the Silas Condict Park
사일러스 칸딕트 공원(사진 2)은 1964년 9월에 모두 265에이커 위에 조성된 광활한 공원이었다. 이 광활한 곳에서 한 한인교회가 웅대한 비전을 품은 아기로서 고고(呱呱)의 울음을 내지른 것이었다.
잉태의 고통은 필연적임에도, 본 교회가 순산된 요인이 있다. 그해 7월부터 주님께 믿고 간구한 바의 결실이었다. 새 교회 설립에 뜻을 같이하는 장영춘 목사, 이성남-안순익 집사 내외, 오안순 집사, 이성희 집사(오안순 집사 사위), 최진섭 집사 등이 기도 모임을 가져온 것이었다.
30년 전 교회창립 당시, 뉴저지 한인 동포(당시는 ‘교포’ 또는 ‘교민’이란 말을 많이 썼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거리에서 한국인끼리 서로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더구나 한글 간판은 찾아 볼 수 없던 시절이다. 뜻이 통하는 동포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소규모 그룹이 형성되고, 이들이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가정제단 형식의 예배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런 모임이 커져가면서 뉴욕과 뉴저지에 한둘씩 한인교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민자들과 유학생으로 구성된 한인교회는 예배처소인 동시에 이민생활과 직업 관련 뉴스를 나누기 위한 정보센터요, 개인의 소식을 교환하는 만남의 장소였고, 나아가서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기관 역할도 했다.
이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한뜻을 나누는 교우들이 모여, 현존하는 뉴저지 두 번째 한인 교회인 본 교회가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태평양을 건너온 같은 핏줄들의 애환과 망향 같은 그리움을 달래주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진정 여기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시작은 미약했으되 그 불씨가 타오르는 활화산이 되어, 뉴저지는 물론 미국 아니, 전 세계를 향한 천국 확장의 초석으로 이루어져갔다.
때마침 본국에서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 60주년을 맞고 있었다. 바다 건너에서나마 어떤 의미성을 더해준 것이었다. 1972년 9월 24일에 열린 총회창립 60주년 기념식에 초청 받은 주한 미국대사 필립 하비브는 축사(통역: 심우천)를 통해, 한·미 교회 유대강화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한국장로교 100년」 /김웅호(金雄虎)편/목양사 215쪽))
…본인이 기억하기로 한국에 온 최초의 미국 선교사는 장로교회의 후원으로 온 의사 ‘호레스 N. 알렌’ 박사였습니다. 알렌 의사는 한국에 온 후 한국에서 미국정부를 대표한 유명한 사람으로서 수년간 봉사했으며, 사실은 알렌 의사가 살던 집에 오늘날 제가 살고 있습니다. 지난 90년간 알렌 선교사 외에 많은 유능하고도 헌신적인 선교사들이 한국의 기독교회가 튼튼히 자활할 수 있도록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과연 옳다. 그렇다면 90년이 지난 그 즈음에는 우리가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할 때가 당도한 것이 아닐까? 이런 차제에 우리 교회가 문을 연 것은 그만큼 막중한 사명을 지고 태어난 것이라 하겠다.
첫 예배 광경
앞에서 밝힌 대로 준비 기도 모임이 있어왔는데 거기에서 정한 것일까?
그토록 맘에 드는 공원을 선정한 것도 그렇거니와 누군가가 A4용지 크기의 주보를 준비해 가지고 나왔으니 말이다. 상단에 ‘주일예배순서’, 그 아래 줄로 ‘1972. 8. 13.’ ‘사회. 곽영철 집사’라 쓰였고, 그 부분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왼쪽에는 순서가, 오른쪽에는 찬송가 가사가 적혀있었다. 물론 손으로 쓴 것을 복사한 것이지만 정성껏 썼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주보 한 장씩을 받아들고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야외 취사용 식탁에 앉았다.
곽영철 집사의 인도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묵도, 기원, 찬송의 순으로 이어졌다. 우리 교회가 한 공동체로서 첫 번째 부른 찬송가는 ‘찬송 21’로 되어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로는 43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이다.
당시의 가사를 여기 적는다.
1.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은 주 여호와 나를 도와주시네
너의 발이 떨리잖고 주가 깨어 지키네
이스라엘 지키신 이 졸며 쉬지 않도다
2. 하나님이 너를 지켜 우편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너를 상치 않겠네
네게 화를 주지 않고 혼을 보호 하시며
너의 출입 영영토록 보호하시리로다
가사가 주는 의미가 크기도 하지만 맘껏 크게 불러댔다. 이어서 부른 찬송 ‘하나님의 진리 등대’ ‘참 아름다워라’도 그러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하늘 높이 계셔도 못 들으실 분이 아니시건만!
미국인들이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눈물을 찍어내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김지수 집사가 감격의 대표기도를 올렸다. 장영춘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였으니 제목은 ‘벧엘로 올라가자’ 이었다. 설교 전에 ‘특찬 (특별찬송)’의 순서가 있었으나 누가 담당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후로 성가대가 조직되기 전까지 서경숙, 곽영철, 김현성, 김현덕, 김지수 등이 특별찬송을 담당하였다.)
창립예배에서부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헌금순서를 가졌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처음 발을 딛고 감사를 드렸던 ‘청교도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훈, 최진섭 집사가 헌금위원이었다.
제직회 구성
초대 담임목회자 장영춘 목사는 행정과 조직력에 있어 특별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이었다. 일례로, 창립예배를 드리자마자 바로 다음 주일 제직회를 구성했으니 말이다. 하기야 기왕 뜻을 같이하는 교우들의 공동체라면, 중지를 모을 기구의 조기 구성은 당연할지 모른다.
제직회 구성과정상 아이러니도 없지 않았다. 한국에서 이주해 올 때 이명증서 ((“교인은 이주하거나 기타 사정으로 지 교회를 떠날 때는 6개월 이내에 소속 당회에 이명 청원을 하여야 한다.”(미주한인장로회 헌법 제2편 ‘정치’ 제15조 ‘교인의 이명’) 참조.)) 같은 서류를 챙겨 온 교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 목사가 제안했다.
“우리 교회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제직이 필요합니다. 과거에 어느 교회에서든 무흠(無欠)하게 집사직, 권사직, 장로직을 시무하였다면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인정해야 되겠습니다.”
별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창립예배에 참석했던 다음 사람들을 직분자로 인정하여 제직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제직회장 : 장영춘 목사
제직 : 곽영철, 김지수, 김지윤, 이성남, 오안순, 장영애, 최진섭(이상 전원 집사)도합 여덟 명이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대홍수 때 방주에 오른 노아의 여덟 식구와 같은 숫자였다.
제직회가 구성된 그 다음 주 9월 3일에는 첫 제직회를 열어, 정기 제직회는 매월 첫째 주일에 모일 것과 임시 제직회는 제직회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언제라도 소집할 수 있는 것으로 결의했다.
창립예배를 드린 이후의 초창기에는 산적한 문제들로 인해 거의 매주 제직회가 교회당에서 모였다. 그러던 10월 31일 임시 제직회를 이성남 집사 집에서 갖더니, 장 목사 집을 비롯한 각 가정에서 순회 회집을 하기도 했다. 여름철에는 버겐카운티 파크(Bergen County Park) 등 야외공원에서 모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장시간 숙의하면서 제직간 친목도 돈독해질 수 있었다.
당시 몇 안 되는 제직이지만 모일 때마다 호명을 하여 회원을 점명케 하고 기록도 철저히 남기게 한 것으로 미루어, 장영춘 목사의 준법정신과 행정력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회계보고도 매월 정기 제직회 때마다 서면으로 작성하여 보고하도록 못박고 있다.
부서 조직
당시는 아직 당회가 조직되어 있지 않아 당회장이 임명권을 발동하지도 못했겠지만, 제직회의록에 의하면 각 부서장을 제직회에서 선출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민주주의적 운영이라고나 할까.
미국에서는 차가 없으면 “발이 없다”고 표현하리 만치 자동차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교인들의 발이 되어줄 ‘교통부’가 필요했다. 우선적으로 긴요하고 필요 불가결했던 부서였다. 매주 “차편이 없으신 분은 교통부장 이성희 선생님께 말씀드리세요”라는 광고가 전화번호와 함께 매주 나갔다. 물론 차비는 무상이고, 이성희 선생도 무보수였다.
아울러 교우들의 친교를 위한 회우부(會友部)의 존재 역시도 절실했다.
당시 제직회의록을 들춰보면, 1972년 8월 20일 제직 선임과 더불어 부서조직을 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서 책임자는 제직이 아닌 평신도가 맡았다는 것도 눈여겨볼 일이다.
1. 다음과 같이 제직회 임원을 선출하였음.
서기: 곽영철 집사
회계: 김지수 집사
2. 본 교회 운영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부서를 두고 그 책임자는 다음과 같이 선출하였음.
봉사부 책임자: 김동훈 선생
교통부 책임자: 이성희 선생
회우부 책임자: Mrs. 조풍작(박정실)
임시 예배처소 마련
첫 예배를 공원에서 드리긴 했으나 주일예배를 계속 공원에서 드리기에는 너무 분위기가 산만하다고 느꼈다. 매주 야외예배를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날씨가 추워지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어차피 교회란 건물을 필요로 하며 건물 자체를 교회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임시 예배장소 ((33-37 Warner Avenue, Jersey City, NJ))(사진3)를 저지시티에 마련하여 창립예배 다음 주일인 동년 8월 20일부터 10월 8일까지 거기서 예배했다. ‘임시 예배 처소’라 함은 향후 예배장소를 시코커스(Secaucus)에 얻는 것을 목표했기 때문이다.
사진 3. 1972. 8.부터 그해 10월 중순까지 임대하여 예배드렸던 저지 시티 소재 재림 루터교회
The church’s worship service at the Redeemer Lutheran Church in Jersey City, August of 1972 through October in the following year.
‘뉴저지 한인장로교회’—교회명칭 제정
설립예배를 드린 지 1개월 남짓, 교인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교회 명칭 건이 화제가 되곤 했다. 그러던 9월17일 예배 전, 임시 제직회를 소집하고 중의를 모아 교회 명을 ‘뉴저지 한인장로교회(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New Jersey)’로 정했다. 예배 후 전 교인의 총의에 붙이니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지역을 크게 잡아 주(州) 이름을 넣고, 다민족이 모여 사는 미국 속에서의 ‘한인’이라는 자긍심을 내포시키고, 교파도 묶어 표현했다. 지금은 엇비슷한 교회명칭이 많고 별스런 이름도 있지만, 한인 교회가 몇 안 되던 당시, 손쉬운 ‘작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너무 평범하다할지 모르나, 한인들은 물론 미국인에게도 영어로 의미전달하기가 손쉬운 명칭이다.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사람들’이 이 이름을 들고 나아갈 때 기쁨이 넘칠 것이며 기적이 일어날 것이고, 하늘에는 영광이 가득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르는 교회로, 영원히 빛을 발하리라는 기대가 모아진 것이었다.
교회설립 사실과 함께 교회이름을 한인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제직회 일동 명의로 신문지상에 광고도 게재했다.
제직 추가 인준
앞에서 밝혔듯, 기존 직분자는 본인 자술을 토대로 제직회에서 인준키로 했었다.
1972년 10월 1일 정기 제직회에서 차성옥 권사와 유상현 집사를 만장일치로 추가 인정, 제직은 도합 10인이 됐다. 차 권사는 본 교회 과도기 첫째 권사였다.
한편, 그해 11월 15일자로 이병학 집사를 제직회에 추가했고 같은 날 이성남 집사를 재무회계로 선임, 회계담당을 이원화하여,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재정 운영을 기했다.
기도, 기도, 기도
교회를 설립하기 전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창립 이후에도 절대적인 것은 오로지 기도 였다. 그들의 기도가 지금의 우리 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그 면모를 당시의 주보에서 익히 알 수 있다.
저희들의 모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시기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시며 배가운동에 힘씁시다.
새 예배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다함께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저희 교회가 꼭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하루 한번씩 교회 위하여 또 특별한 사정에 처한 교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온 교우가 믿음과 사랑으로 한 가족이 됩시다. 그리고 새 집회처를 물색 중이오니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찬송가 마련이 급선무
당시 이민자들에게는 한글로 된 성경과 찬송가가 별로 없었다. 한국에서 집사쯤 되었었던 교인들에게나 있었을까 하는 정도였다. 여느 한인교회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한국에서는 교회에 나가지 않던 사람들도 이민을 와서는 곧잘 교회를 찾아들곤 하였다. 이들에게 성경과 찬송가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렇다고 지금과 같이 한국 책방이 가까이 있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찬송가가 준비되기 전까지는 찬송가 가사를 주보에 계속 게재해야 했고, 교인들이 익숙히 외우고 있는 찬송가를 골라 불러야 했다. 학생들의 교과서보다도 더 귀한 영혼의 교과서를 구하는 일이 급선무가 아닌가. 이 일을 조속히 해결하려면 교회에서 성경과 찬송가 일괄 구입을 위하여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야만 했다. 이는 김동훈 선생 가족이 찬송가 구입을 위하여 창립주일 그 다음 주일에 $50을 특별 헌금한 것이 태동이 된 것이다.
9월 2일 한국에서 성경, 찬송가가 배에 실렸다. 10월 29일부터 성경과 찬송가가 교우들에게 저렴한 가격(성경 3불, 찬송가 2불)으로 배부되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초대 교회가 이러 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교회를 섬기며 앞장서는 것이다. 장목사는 교회 일이나 신앙문제 또는 심방을 원하시는 교인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해 달라는 주문을 전화번호와 목사관 주소를 곁들여 계속 주보에 싣는다. ‘서슴지 말라’는 것에 매력을 끈다.
찬송가 구입에 써달라고 헌금을 하고, 차편이 없어 교회에 나오는 데 불편한 교우들의 운송을 솔선 자원하고, 오안순 집사의 경우는 헌금 주머니를 손수 만들어 내놓았다. 성가대와 교회학교 교사를 자원하는 등 자기 탈렌트를 오직 주께 바치는 것이었다. 또한 병상에 있는 교우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으레 찾아 위로하고, 새로운 교우를 열렬하게 환영하는 등 사랑이 넘치는 모습들이었다.
매주 돌아가며 다과를 준비해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기도 하였다.
사진 4. 1972. 10. 부터 5년 여 동안 임대하여 예배드렸던 우리 교회 세 번째 예배 처소 제일개혁교회. 지금은 한인교회인 생명샘 교회가 세를 얻어 예배 드리고 있다.
The third past location of the church at the First Reformed Church, which is currently being occupied by the Fountain of Life Korean Church.
교회 건물 새로 임대
그해 10월 시코커스의 미국인교회인 제1개혁교회(The First Reformed Church)15)(사진 4)
예배당을 새 예배처로 정식 임대, 이전하여 15일 주일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 일이 조속히 이루어지도록 온 교인이 합심기도 해온 터이고 주님이 응답하신 결과였다. 먼저 임대해 쓰던 미국 루터란교회 측은 월 사용료 40달러를 요구해와 장 목사에게 재조정을 일임하여 월 20달러를 제안했지만 타결되지 못하던 차에, 시시비비를 잊게 된 것도 다행이었다.
우리의 선배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어 이 아담한 예배당을 저희 모임을 위하여 제공하여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리며 특히 본 교회 목사님을 비롯한 온 교우께 진신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는 열심히 모이고 깨끗이 사용하도록 각자가 협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새 교회당으로 옮긴 지 한 달 여만에 설립이래 첫 번째 추수감사 시즌이 다가왔다.
필그림(Pilgrims)이 드린 첫 번째 추수감사절과도 같은 들뜨고 신나는 한마당 감사의 축제를 열었다. 그 감사의 정도는 당시 자체행사 내용이 웅변해 준다.
한국식 감사주일인 11월 19일 온 교우가 한자리에 모여 감사예배를 드린 데다 미국식인 11월 넷째 목요일(23일)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몽땅 교회에 모여 감사의 기쁨을 만끽했다. <감사의 밤>이 1, 2부로 나뉘어 1부 감사의 만찬, 2부 감사의 간증·찬양·시와 수필 낭독 등으로 이어져 밤이 깊도록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표 3)
첫 번째 맞는 성탄절 축하 행사로는 주일이자 성탄이브인 12월 24일 저녁 7시, 갓 조직된 성가대가 선을 보였다. 몇 안 되는 대원들이었지만, 찬양이 무르익어 가면서 다들 은혜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여기저기서 ‘아멘’과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국 땅에서 한인들끼리 주님의 나심을 축하한다는 것—그것은 감격 그 자체였다.(사진 5)
지휘는 이성남 집사가 맡았다.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음악 전공자 못지 않은 실력과 재질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초창기 멤버로서 이 일 외에도 많은 봉사를 기도와 믿음으로 감내해 내니 은혜가 충만했다.
12월 25일에는 오후 12시 30분에 본 교회당에서 성탄축하예배를 드렸다(사진 6).
1972년의 기타 활동
이제 교회명칭도 확정됐고 제직회를 비롯한 각 부서의 ‘조각’(組閣)도 끝난 셈이다. 이미 예배장소도 마련됐다. 미약하나마 형식상으로는 거의 모든 게 갖춰졌고, 남은 것은 본격적인 활동 및 활성화였다.
헌금 주정헌금 및 월정헌금을 책정, 9월 예배 때부터 드리되 제직이 솔선 수범키로 했다.
배가운동 교인 배가 운동을 하면서 전 교인이 힘쓰기로 했다. 구역제를 도입, 구역별로 총력과 열성을 기울였고, 새 동포를 발견하면 밤을 낮 삼아 무조건 즉시 심방하고 강권하여 우리 교회에 나오게 했을 정도다. 그뿐인가. 누군가 이민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면,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비행기에서 첫발 내리는 공항까지 달려가 이민 보따리를 챙겨주고 교통편도 제공하곤 했다. 낯설고 물 섧고 말 설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며 최선을 다했다. 하나같이 전도자가 되어 교회로 이끌었고, 새로 등장한 교우에겐 있는 친절을 다 베풀었다. 당시를 표현하는 어느 교인은 “그 때는 새 교우가 나타나면 업어 나르다시피 했다”고 회상한다.
교회행사 교회 행사를 활성화하여 한인들의 흥미를 북돋우는 동시, 고국을 떠나온 그들의 향수 달래주기도 교회가 맡아, 중추절 전후의 주일 같은 경우 ‘추석야외예배’ 겸 야유회를 갖기도 하였다.
회우부 매주일 다과를 준비하여 예배 후 친교모임을 갖고, 성도의 교제와 정보 교환 등을 기했다. 어떤 이들은 “그때 그 시간이 즐거워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지금도 술회한다. 다과 준비는 자진해서 했고, 단 매주 5달러 어치를 넘겨선 안 된다고 제직회의록에 적고 있다. ((1972년 10월1일 자 <10월 정기 제직회> 회의록 참조.))
주일 대예배 시에는 거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안내위원을 2명씩 선정, 입구에 배치했다. 새로 나오는 교우에게 관심과 친절을 베풀어 주보도 배부하고 좌석을 안내하며 예배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
교육 주일학교는 아직 조직이 미흡하고 교사로 일할 적임자도 없는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장 목사의 부인(장미은 사모)이 어린이들을 맡아 돌보면서 교육도 담당하게 된다. 그러던 중 주일학교 운영을 사모 혼자서 이끌기에 역부족이어서 유치부와 유아부로 나눴다. 그러나 유치부는 교사가 충원될 때까지 당분간 보류하고, 유아부는 여 집사들과 아기 엄마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해 나갔다.
교통부 교통부에서는 차편이 없는 교인들의 운송을 책임지고 분담, 주일이면 이른 아침부터 몇 행보씩 예배 후 늦게까지 계속적으로 운행했다.
교회관리 교회를 관리하고 늘 청결을 유지할 일꾼을 세웠다. 양호식 선생 ((양호식: 30년간 한결같이 본 교회를 섬겨왔다. 1986년 11월 시무장로 장립. 2002년 현재 건축위원장. 안순익 집사는 그를 “뉴저지 장로교회의 열매”라고 표현했다(2002년 4월 2일 녹취).))과 김현성 군이 이 일을 맡아 열성적으로 봉사했다.
첫 성례식과 성찬식 우리 교회로서는 첫 성찬식과 세례식을 갖은 날이 1972년 12월10일 주일이다. 학습과 세례의 문답을 시간을 정하여 실시했으니 12월 9일(토요일) 학습 2:00-2:30, 유아 세례 2:30-3:00, 어른 세례 3:00-3:30 이었다.
그해 마지막 제직회 12월 3일 그해 마지막 제직회가 열렸다. 설립된 지 고작 넉 달 반 정도였지만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창립된 그해 마지막날인 12월 31일은 마침 주일이었다. 그 주일 주보에 의하면 지난 주 12월 24일 주일에는 뉴저지 최초 한인 교회(교회명: 뉴저지한인교회)를 1966년에 설립한 백예원 목사 부부와 이정희 씨, 한숙희 씨, 곽신형 씨가 ‘손님으로 오신 분들’이라고 적혀있고, 그 밑으로 연말을 지내며 감사의 메시지도 실었다.
지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에 내려주신 크신 은혜와 축복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면서 아울러 저희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혹은 간절한 기도로, 혹은 헌신적 봉사로, 혹은 물질적 봉헌으로 이바지하신 여러분께 아울러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새해엔 더욱 크신 은혜와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앞장 선 장 목사
장영춘 목사는 그야말로 모든 일에 앞장서 불철주야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정석기 지음 ‘세계 속의 한인교회(Ⅲ)’(쿰란출판사) 220〜223쪽 참조.))
어느 교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모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에 장 목사가 급히 세 살 난 장남을 차에 태우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자동차 시동을 끄고 아들을 차안에 둔 채 부랴부랴 들어가 산고(産苦) 중인 교인을 데리고 나왔다.
순간 사건이 터진 것을 깨달았다. 아들녀석이 아빠가 없는 사이에 기어드라이브를 켰다가 다른 차를 박아버린 것이었다. 경찰이 출동하는 등 긴박한 상황이었다.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 목사는 신분을 밝히고 겨우 사정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는 진통 중에 있는 임산부를 차에 태우고 맨해튼으로 차를 몰았다. 간호사 출신인 그 여인은 남편이 출장간 사이 산기가 차 심한 진통을 겪고있었던 것이었다.
그 임산부는 맨해튼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차안에서 전신을 뒤틀며 비명을 질러대더니 그날 병원에서 순산했다.
1973년 여명이 밝다
이웃돕기
초기 첫 번째 장로
예배의 참 모습
우리가 ‘창립’을 했다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결국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로 했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그러기에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던 일이다. 당시 예배의 한 모습을 소개한다.(표 4)
성경의 페이지를 적어주어 찾기에 편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찬송가를 한 예배에 네 번씩 불렀고 이성남 집사는 지휘를 담당하면서도 특별히 독창을 자주 하여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선사하였다. 경건한 예배를 지향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유의 사항을 주보에 싣기도 하였다.
경건한 예배 진행을 위해 아래 기록된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하시어 이행하여 주시기룰 바랍니다.
1. 예배를 정시에 시작할 수 있도록 각별히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먼저 오신 분부터 앞자리에 앉으시기 바랍니다.
3. 예배는 가능한 한 무언으로 진행 하겠아오니 미리 주보를 보신 후 다음 차례를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4. 그 날에 부를 찬송가 장수와 성경말씀 등은 예배시작 전에 미리 찾아 표시하여 두셨다가 제때에 지체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다.
5. 별 표시(*)가 있는 곳은 기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