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우리 교회의 발자취 | Chapter 2 The Church History
(2) 격동기(1974-1975)
임대교회의 서러움
물론 세를 얻어서 예배를 드리기에 더욱 그 서러움이 컸을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지켜야 할 공중도덕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세를 놓고 있는 미국교회에서 말을 하기 때문에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1974년 벽두부터 주보에 이런 경고가 3주 연속으로 실렸다.
본 교회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여러분들께서 아래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출입문을 언제나 닫읍시다.
2) 전깃불을 절약합시다.
3) 어린이를 잘 단속합시다.
4) 교회기물에 어린이가 손대지 않도록 합시다.
5) 다과나 휴지를 어지르지 맙시다.
6) 전화사용을 삼가 합시다.
목자와 양들 – 그 견해 차
새해 예산을 세웠다.
지금껏 월 50달러 내던 교회당 사용료를 100달러로 올려 낼만큼 교세가 확장됐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인수도 늘고 헌금도 차고 넘쳐 성가대 가운을 구입하는 등 교회가 경제 안정권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즈음 장 목사 부인이 아기를 출산했는데 기존 책정된 출산관련 경비(제직회의록에 ‘산비’로 표기) 375달러를 교회 재정에서 지출함은 물론, 산후 경비 전액도 교회에서 부담할 수 있었을 정도로 재정 여유가 있었다. 교우부에서는 교인들의 생일을 파악하여 예배 후 친교시간에 모든 교우와 더불어 축하 시간을 갖는 등 성도의 교제가 두터워 갔다.
그러던 1974년 2월 17일이었다. 임시 제직회에서 장영춘 목사와 임수식 장로가 난데없이 ‘교회 이전(移轉)’ 안을 내놓았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곳엔 한인들이 별로 없습니다. 앞으로도 한인들이 밀집될 만큼 이리로 이주해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인들이 많고 또 계속 밀려들게 될 곳으로 교회를 옮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목회자로서 더 많은 양 무리를 구원해 내야 한다는 생각은 당연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서 물고기가 많은 곳에 그물을 내리겠다는 것이 목회자의 뜻이요 하나님의 명입니다. 그렇다고 한 마리의 양을 버리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함께 교회를 이전하자는 것입니다. 뉴욕 퀸즈 플러싱으로 말입니다. 멀고 가까운 것이 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몇몇 제직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는 대부분 생활터전이 이곳 뉴저지입니다. 생업도 고려되어야 하고 아이들 교육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역적으로 멀면, 피곤한 이민생활에 더욱 스트레스가 쌓일 뿐입니다. 여러 여건상 불가한 일입니다.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긴 시간 토론을 한 뒤 찬반을 물어, 결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무기명 투표로 결정하자는 문종구 집사의 제안에 이성남 집사가 동의, 유상현 집사가 찬성하여 안건이 채택되자, 무기명 투표에 부쳐졌다. 결과는 찬성 1표, 반대 10표, 기권 5표였다.
결국 교회이전을 제안한 임수식 장로만 찬성표를 던진 셈이 되었고, 나머지 제직 전원은 기권 또는 반대를 하였다. 부결되고 말았다.
장영춘 목사의 사임
바람직한 목자로 부각돼온 장 목사는 양떼와의 견해차를 드러냈다.
교회 이전이 부결되자, 장 목사는 부득불 사임을 표명하며 목회방침을 끝내 이루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요 받은 바 은사라고 했다. 사표는 1974년 2월 23일(토요일) 임수식 장로 사회로 열린 임시 제직회에서 전격 수리됐다. 양귀숙, 정말순 집사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제직회 서기 곽영철 집사가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했다.
성도들은 섭섭한 마음과 눈물,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하루아침에 목자를 잃은 양떼는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갓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성장 기대치로 막 부풀어가던 우리 교회가 이렇다 할 타당한 이유 없이 목자를 앗긴 첫 케이스였다. 이뿐 아니라 70년대를 격동기로 수놓을 숱하고 기나긴 난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영춘 목사와 더불어 교회가 설립된 지 정확히 1년 6개월 10일만의 일이었다.
임시 설교목사들을 초청하다
목자 잃은 양떼. 그들은 제 ‘먹이’를 제가 찾아야 했다. 스스로라도 먹을거리를 찾지 않으면 어찌되겠는가?
아직 우리 교회가 노회에 가입되어 있지 아니한 상태이기에 노회로부터 임시당회장을 파견 받을 수도 없는 터이었다.
우선 제직회 조차도 임수식 장로가 이끌어 갈 수밖에 없었다. 임시 제직회장직을 맡은 것이다. 임시 설교목사를 부르는 일도 제직회의에서 결정됐다. 3월 10일(주일) 길웅남 목사 초청, 3월17일(주일) 최찬영 목사 초청— 이런 식이었다. ‘임시’라는 단어가 난무했다.
합동찬송가를 개편찬송가로
이런 과도기에 사뭇 과감한 일이 발생했다. 합동찬송가를 개편찬송가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1974년 3월 3일 정기 제직회 때였다.
돌이켜보면, 한국교회는 1백년이 넘는 역사 중 1893년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최초의 한글찬송가가 출판된 이래 여러 개의 과도기 찬송가를 거쳐 1949년 1월 (합동)찬송가를 발행하여 모든 교파들이 같이 사용하도록 했었다.
그러나 1950년대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양분된 뒤인 1962년 예장 ‘고려’측과 ‘합동’측 등 일부 장로교단이 ‘새찬송가’를 출판했다. 이어서 1967년 장로교(통합·기장 측), 감리교, 성결교, 한국기독교연합회 등의 공동작업으로 (합동)찬송가를 개편한 ‘(개편)찬송가’를 펴낸 것이다. (((합동)찬송가, 새찬송가, (개편)찬송가 머리말 참조.))
찬송가 교체가 채 이뤄지지 않았을 당시에는 양쪽 찬송가에 함께 수록된 곡을 부를 경우, 예배인도자가 “합동 ○○장, 개편 ××장”이란 식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주보에도 두 찬송가를 동시에 썼다. 그러던 우리 교회도 시대적 부응에 발맞추어 점차 합동찬송가를 개편찬송가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 달부터 개인용 찬송가를 구매해 바꾸기 시작했고 교회 비치용 찬송가도 구입했다.
이는 한국 보수교파에 속해있던 장 목사가 본 교회를 떠나면서 비교적 조속히 발생한 반사적인 현상으로 추정된다.
후임목사 청빙을 위하여
1974년 3월 17일 (주일) 오후 2시15분 제직회 서기 곽영철 집사의 사회로 임시 제직회가 열렸다. 임시회장을 맡아온 임수식 장로는 그날 불참했다.
장 목사 이임이래 교회에 대한 관심을 잃었음인지, 닥쳐올 난국을 예감했음인지 교인출석수가 줄고 있었다. 교회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는 표현이 옳을지 모른다. 제직회 참석 상황도 저조하여 출석 12명에 결석이 7명이나 됐다. 그 동안 동요와 술렁임이 없지 않았다는 증거다.
어쨌거나 목회자 초빙이 급선무였다. 그때까지 초청하여 설교를 들은 몇몇 목회자 중 한 명을 청빙하자고 중의를 모았다. 김규환 장로가 최찬영 목사를 담임목회자로 모시자고 제안했고 김지도 집사의 동의, 이성남 집사의 재청으로 표결에 붙여 가결했다.
최 목사에게 뜻을 전달하고 청빙을 시도하는 일의 제반 문제는 김규환 장로에게 일임했다. 목회자 사례비는 월 600달러, 전화·교통비 100달러 수준에서 하기로 했다.
이렇게 임시 제직회에서 결정된 지 일 주일, 급 물살을 타고 다시 임시 제직회를 열게 됐다. 역시 서기 곽영철 집사가 진행을 맡았다. 김규환 장로가 최찬영 목사를 모셔온 것이다. 사회자가 과정 보고를 요청하자, 김 장로는 그간 최 목사를 모셔오기까지의 전말을 설명하고 최 목사를 소개했다. 최 목사는 “주님의 뜻으로 믿고 담임목사로 열심을 다해 봉직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라고 인사했다.
사진 8. 제2대 담임 최찬영 목사 근영
The latest photograph of the 2nd senior pastor of the church, Rev. Chanyoung Choi
제 2대 최찬영 목사 부임
다시 날기 위한 몸짓
여전도회와 청년회 발기위원 선정
최찬영 목사 사임
제 3대 장승칠 목사 부임
계획목회를 갈파하다
장승칠 목사 사임
총원 | 가(可) | 부(否) | 기권 | 2/3선 | 비고 | |
1차 | 44명 | 20명 | 10명 | 14명 | 30명 | 부결 |
2차 | 41명 | 27명 | 10명 | 4명 | 28명 | 부결 |
3차 | 39명 | 23명 | 13명 | 3명 | 26명 | 부결 |
뉴욕교협이 태어나다
계획목회를 갈파하다
장승칠 목사 사임
총원 | 가(可) | 부(否) | 기권 | 2/3선 | 비고 | |
1차 | 44명 | 20명 | 10명 | 14명 | 30명 | 부결 |
2차 | 41명 | 27명 | 10명 | 4명 | 28명 | 부결 |
3차 | 39명 | 23명 | 13명 | 3명 | 26명 | 부결 |
뉴욕교협이 태어나다
제 4대 임근하 목사 부임
전술한 대로, 장승칠 목사의 소개를 받아 제 4대 임근하 목사를 맞게 됐다.
1975년 7월 20일 예배 후 자리를 옮겨 본당 회의실에서 온 교우(47명)가 모여, 제직회 서기 차종철 집사 사회로 임시공동의회가 열렸다. 사회자가 “이미 제직회에서는 임근하 목사를 본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기로 만장일치 가결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임 목사에 대한 소개 말을 한 뒤 거수 표결에 부쳤더니 전원이 찬성했다.
장 목사가 있을 당시 공동의회에서 부결됐던 안건이 왠지 그가 떠난 후 가결된 것이 어쩌면 미묘한 반응이기도 했다.
다시 태어나려는 몸부림
1975년 7월 27일 새로 부임한 임 목사도 온유한 인품에 말씀이 감동적이었다.
새로 부임하는 목사마다 모종의 비전을 갖고 옳은 방향으로 이끌려고들 했다. 임 목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임한 그날, 임시 제직회를 소집했다. 교회 예배시간을 새로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종전 여름 동안 오전 11시 30분에 드리던 예배를 8월 둘째 주일인 10일부터는 12시 30분으로 환원키로 했다. 그간 태만해진 주일학교 교육도 재활성화에 들어갔다. 당분간 각 제직이 학생들을 윤번제로 맡아 책임 관리케 했다.
8월 첫째 주: 홍무승 집사/둘째 주: 이성남 집사/셋째 주: 곽영철 집사/넷째 주: 양호식 집사/9월 첫째 주: 차종철 집사/둘째 주: 이성희 집사
한편, 다가온 교회창립 3돌 때는 기념예배를 드리고 자축연으로 부인회에서 냉면을 준비하되 교회재정 80〜100달러 선에서 해결하기로 하였다. 75년 8월 3일 정기 제직회에서는 구역을 편성하여 구역별로 해당 구역원들의 교통편을 책임지도록 하고, 구역 편성은 임근하 목사와 차종철, 오안순, 곽영철 집사에게 일임했다.
이처럼 열기가 달구어질 때 교인들의 친목이 곁들여지는 법이다. 9월 7일 정기 제직회에서는 그 다음 주일에 야외예배를 갖기로 하고 준비위원들(양호식·이성희·이성남·문덕기·곽영철)을 선정했다. 결정한 바로 다음 주에 시행할 수 있은 것은 그만큼 연락이 잘된 때문인지 식구가 단출해진 것인지, 늘 준비돼 있은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주보(예배 순서지)를 만들어 예배 시에 사용했는데, 초를 먹인 원지(原紙)를 소위 ‘가리방’이라는 줄판 위에 놓고, 철필로 긁어 쓴 후 등사판(mimeograph)에 밀어만든 구식 주보였다. 일정시대 때부터 많은 이들에게 향수(?) 어린 인쇄문화였다.(표 7)
목회자 주거이전 문제가 불거지다
임 목사의 부임으로 교회 걱정거리가 잦아들 만 하자, 목회자의 주거지(뉴욕 퀸즈)가 멀다는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임 목사가 교회 부근으로 이사오기를 일부 교인들이 원했던 것이다. 임 목사는 “가정 사정으로 이사 오기 곤란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11월 2일 제직회는 이 일을 원만히 수습하기 위한 위원들(차종철·이성희·이성남·양호식·곽영철)을 뽑아 일임했다. 일말의 불안스런 조짐이었다.
1975년의 그 외 일들
교회는 일꾼이 필요하다. 그해 안에 안수집사 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당장 급한 목회사역을 보필하기 위해서는 장로보다 안수집사를 먼저 뽑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시각에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계획은 종내 이뤄지지 못했다. 그 즈음 교회 구석이 다소 어수선했다. 성가대 가운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어 비치용 캐비닛과 아울러 교회학교용 흑판도 1개 구입했다. 구입은 서광진 집사25)가 맡아했다.
성탄절이 다가왔다. 12월25일 오전 11시 모두들 교회당에 모여 축하예배를 드린 후 이성희 집사가 준비한 떡국을 나눠먹었다. 각 가정에서 준비해온 선물들을 교환하는 순서도 가졌다. 교인수가 단출했기에 가능한 행사였던 것 같다.
연말에는 여러 봉사자들에게 사례하는 기회도 가졌다. 임근하 목사, 지휘자 이성남 집사, 반주자 김혜옥 선생, 교회학교 교사인 원혜숙, 서태호 선생 등에게 이었다.
신년 기도회 및 예배를 1월 1일 0시부터 4시까지 드렸다. 합리적인 재정운영을 위해 처음으로 차기(1976) 회계연도를 위한 예산위원(차종철·이성희·양호식·김정권·서광진)을 선임했다. 특이한 것은 일반 교우들도 예산심의 때 나와서 발언할 수 있게 허락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