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우리 교회의 발자취 | Chapter 2 The Church History
2. 중흥기 | Restoration Period
80년대 국내외 배경과 정황 ((시사와 직결된 부분은 인터넷 자료 다수를 참조했음.))
미국을 비롯한 세계가 1980년대에 들어섰다.
십진법에 익어온 서구문화는 한 세기를 뜻하는 센추리(century)와 함께 10년 주기(週期)를 뜻하는 데케이드(decade)도 강조한다. 사실 한 데케이드가 무슨 새 징검다리도 아니고, ‘80’이란 숫자가 달력을 장식한다해서 당장 달라질 것도 없지만, 연대 구분에 편리하고 긴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미국은 10년 단위로 센서스(인구조사)도 실시한다.
80년대는 미국이 국제 평화와 신보수주의의 시대를 연 데케이드라고 할 수 있다. 1981년 민주당 카터 행정부가 레이건 행정부로 배턴을 넘겨줌으로써 공화당 대(代)가 재개됐다. 라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 제40대 대통령은 84년에 재선돼 닉슨 대에 워터게이트로 흔들리던 공화당의 디딤돌을 굳히면서, 89년에는 부통령이던 조지 부시에게 다시 정권을 대물림해, 90년대 초까지 10여 년간 공화당 전성기를 활짝 꽃피웠다.
조국—군사정권의 연장
60년대부터 약 20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독재해온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1979년 박 대통령이 시해된 뒤, 12·12사태로 군사계엄령을 발동한 데 이어 실세를 거머쥔 전두환 정권으로 교체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시민들이 군사정권에 항거한 광주민주항쟁사건은 과거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이어지게 된 기나긴 군사독재의 악몽에 대한 하나의 몸부림과 절규였다. 이 사건으로 민간인 148명 등 174명이 숨지고 약400명이 부상당했으며, 그후 정치활동의 전면중지와 함께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3김’은 정치무대에서 퇴장한다.
8월 16일 최규하 10대 대통령의 사임에 이어 27일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전대통령은 9월1일 취임식을 갖고 남덕우 내각을 출범시켰고 10월22일 개헌투표를 실시 대통령 7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5공화국 헌법이 확정됐다.
그해 5월 17일 재판에서 김대중은 내란음모·반공법 위반 등 4개 혐의로 두 차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대법원에 상고, 점차 감형을 받다가 82년 성탄절 시즌에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어 신병 치료 차 도미했다.
1983년 9월에는 소련 전투기에 의한 KAL기 격추사건으로 탑승자 269명이 몰사, 민족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미주 한인 다수가 희생됐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칭하고 소련여객기의 미국운항 금지 등 보복조치를 발표했고 각국에서 소련기 운항 규제에 동조하는 등 소련 만행에 대한 국제적인 규탄이 이뤄짐으로써, 냉전 기류가 극에 달하는 듯 했다.
레이건은 그해 가을 한국을 방문, 전두환 대통령과 2회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전방 미군기지를 답사, 남북 대결현장을 목격한 뒤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 안보가 미 국익에 직결된다”고 천명했다.
그 즈음 남북관계는 전두환 정권 당시 버마(미얀마) 아웅산 폭발사건 등 극적인 긴장도 있었으나 84년 서울에서의 남북8차 본 회담, 판문점에서의 최초의 남북경제회담, 북한 수해피해 물자 지원 등으로 무르익으면서 85년의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져 이후 다양하고 빈번한 남북대화가 진행된다.
80년대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3김 등 정치활동 피 규제자들이 해금되고 김대중 씨가 귀국하는 등의 정치완화 조치가 이뤄진다. 김영삼·김대중은 신민당에 입당했다가 결별, 통일민주당을 창당했으나 김대중이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한다.
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순위로 차점 득표를 했다. 노 당선자는 이듬해 2월 제12대 대통령에 올라 6공화국이 출범했다. 그해의 가장 큰 이벤트는 물론 88 올림픽이었다.
이민 전성기를 맞다 ((이 부분과 그 다음 섹션인 ‘80년대 한인 이민계의 특징’을 쓰면서 미 이민국 자료를 참조했다. ‘Korean Americans and Their Religions—Pilgrims and Missionaries from a Different Shore'(Ho-Youn Kwon, Kwang Chung Kim,R.Stephen Warner/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2001).))
날로 더해 가는 불안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조국 정세에 질린 겨레들은 안 그래도 70년대부터 활짝 열린 이민문호를 찾아 ‘자유와 기회의 땅’으로 물밀듯 밀려들어온다. 대(大) 엑서더스의 여건이 무르익은 셈이다. 80년대 중반기에는 사상최고의 이민 전성기를 맞으면서 이민 교회 교인수도 덩달아 늘고 있었다.
이민국 자료에 따른 80년대의 한인 합법 이민자 수는 표-17과 같다.
이에 따르면, 80년대 전반 한국인 이민자는 약간의 굴곡을 보이면서 70년대 후반기(평균 28,000명)와 대동소이한 수준을 유지하다가 1985〜1988년 4년간 연속 3만 이상을 웃돌았고 87년에는 32,000명 선을 넘어 사상 최다치를 내면서 이민 붐의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1991년을 기점으로 90년대 이후는 이민자수가 급감하게 된다.
아울러 한인 이민교회들도 한국서 갓 들어온 새 교우들을 속속 맞아들이게 되고, 뉴저지 한인 밀집가도에 자리잡은 본 교회도 이때 탄탄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민자들은 중산층이 많았고 한국 중산층에는 본시 기독교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80년대 이후의 이민자중 절반 이상은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80년대 한인 이민자들의 특징
1990년도 연방센서스는 당시 미국 내 한인들을 약80만으로 보고했는데, 그중 28%만이 미국 출신이며, 약 267,000명이 70년대에, 339,000명이 80년대에 이민을 온 것으로 추산된다.
이민자 다수가 20〜40세 연령대의 성인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한국 사회문화에 익은 데다 한국 전통문화를 중시하여 2세들에게도 심으려고 적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들은 문화충격(cultural shock)속에서 미국사회에 나름대로 적응하려 몸부림치면서도 한국의 것을 놓지 않으려는 특징을 지녔었다.
대부분의 한국 이민자들은 연고자를 통해 왔기 때문에 미국 정착지 인근에 보통 친척들이 있었고 가족친지끼리 소규모의 네트워크를 이루곤 했다. 그들 다수는 대학졸업자이고 화이트칼라 전문직 경험을 지녔기에 이곳에서 전문인으로부터 자영업, 서비스업 육체노동 등 직종이 다양했다.
그러나 미국 노동시장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다수가 비주류의 변두리 직종이나 소규모의 자영업자로 장시간 근무했다. 학자들은, 그러한 직장과 사회 행동반경의 제약, 그와 관련된 심리문제 등이 이들을 교회에서 삶의 의미와 위로를 찾게 만든 주 요인으로 분석한다.
반면 대부분의 자녀들은 초기에 미국화되고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기 때문에 그들의 경력 전망은 부모들보다 훨씬 밝고 따라서 백인 주류계의 일부가 될 수 있을 줄 생각하지만, 중·고교시절을 거치며 자신들이 백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점차 인식하면서 한국 전통문화와 교회의 소중성을 깨닫게 된다.
한편 부모들은 자녀에게 학구적 탁월성과 경제적 성취를 강요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독립심과 자율성을 배워온 2세들은 스트레스를 받아 세대차이와 상호괴리감이 늘어가고, 친구들을 부모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짙어갔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뉴저지장로교회도 1980년대로 성큼 진입했다.
본 교회로서는 가히 ‘은총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80년대로 새롭게 진입하는 1980년 그해에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평강이 기다리고 있은 것이다. 하필 한 십 년대가 바뀌는 때에 새 목회자가 부임한 것은 어찌 보면 기이한 일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1970년대의 8년간 지속 반복된 목자-양떼간 관계 정립상의 시행착오 속에, 아픈 생채기로 얼룩진 뉴저지장로교회에 새 시대를 열어주고 계셨다. 돌이켜보면, 70년대는 우리교회의 시련기인 동시에 수련기였다. 교회가 세워진 이래 1979년까지 8년간을 거의 곤고와 탄식으로 채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목에 따라 ‘수난기’로 보는 이들도 있으나,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고쳐보아도 좋을 법하다. 80〜90년대를 거쳐오며 드러나기 시작한 우리 교회의 성장저력은 그런 불시련을 밑바탕으로 구축돼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반복되는 연단 속에 처한 뉴저지장로교회를 보시고, “이젠 족하다!”(Enough is enough!)라고 선언하신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고 말씀하신다. 탄식과 애통으로 움푹 패인 골과 웅덩이를 메우고 대로를 고르게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오랜 성도들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귀기울여 들으신 것이요, 응답하심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은총의 시대를, 준비된 새 목회자를 통해서 였다.
사진 15. 제6대 담임 김창길 목사. 1980년 2월 8일 부임하여 현재 까지 시무중이다.
The 6th senior pastor of the church, Rev. Samuel Chang Ghil Kim (2/8/1980 ~ Present).
6대 담임 김창길 목사가 부임하다 ((당대의 역사적 정황들은 80년대 초기 주보철과 제직회의록 등을 참조했음.))
70년대 이민개방시대 초, 하나님의 뜻 가운데 희망찬 탄생의 고고성을 올린 우리 교회. 그러나, 70년대를 여러 목회자로 점철된 ‘단기 수습기간’처럼 보내버린 우리 교회.
그런 교회가 1979년 이희철 목사가 떠남으로써 또 한번 교착상태를 맛보면서, 이제 차기 목회자 선정이 당장 급선무임에도 불구하고 깊이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차제에 성도들이 희구하는 목자상과 새 목회자의 신선한 이미지는 서로 부합했다.
김창길 목사는 1980년 2월 8일에 도착, 주일인 10일에 정식 부임했다.(사진 15) 우리 교회에 오기 전 70년대 말까지는 캐나다 토론토한인장로교회 ((당시 그 교회 담임목사가 현재 나성영락교회를 시무하는 박희민 목사였다. 2002년 현재는 박철순 목사가 목회 중이다.)) 교육목사로 있으면서 시카고의 맥코믹(McCormick)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학업 차 캐나다와 미국 양쪽을 번갈아 오가던 그는 양국의 여러 한인교회에서 수시로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던 중 본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고 기도와 숙고 끝에 응하게 됐다. 당초 우리 교회에 “선보인” 날은 1980년 1월 6일 새해 첫 주일이었다. 오후 1시 30분 이성남 집사가 인도한 그날 주일예배 중 김 목사는 창세기 22장 1-14절 본문과 ‘여호와 이레’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당시 예배처는 바로 전년도인 1979년 11월 4일자로 이전한 저지시티 소재 미국인 복음자유교회(Evangelical Free Church)였고, 당일 출석 교인수는 33명이었다. 그날 주보 교회소식란 제1항은 “오늘 설교해 주신 김창길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2항은 “예배 후 제직회로 모입니다”로 적혀 있었다. 김기태 집사가 사회한 그날 정기 제직회는 동의와 재청을 거쳐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김 목사 청빙 건을 통과시켰다. 김 목사의 목자다운 인품과 설교에 온 교회가 일단 대 만족한 결과였다.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교회
대망(大望)의 80년대까지 우리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초기의 선진들이 역경을 극복한 결과였다. 인고(忍苦)와 경건의 연습이면서 안간힘으로 타다 살아남은 밑 둥지 같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기대감을 갖고 정들만 하면 훌쩍훌쩍 떠나버리던 목자들의 ‘시행착오’ 때문에 양들의 심경은 실망과 쓰라림으로 갈가리 찢기고 오만애간장이 썩고 멍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목자들뿐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인 과도기 장로들과 ‘장로감’들까지도 이래저래 우리 곁을 떠나갔다. 가장 최근에는 바로 전년도에 큰 일꾼 이현호 장로를 불시에 잃었다.
호감이 가는 새 목회자가 선보인 주일(80년 1월 6일)까지도, 교회는 아련한 슬픔의 앙금 같은 것으로 심경이 엇갈리던 때였다. 그날 교회소식 3항에는 “고 이현호 장로 비석이 세워져 유족들이 교회에 감사드리며 오늘 오후 4시 30분에 유가족들이 묘소에서 예배를 보오니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이런 우리 교회에 절대 필요한 것은 올바른 목자와 지도자를 통한 성령의 위로와 치유목회였다. 김창길 목사는 이러한 교회의 시기적 필요와 부름에 부응하여 하나님이 보내주신 적절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렇게 해서 결정된 청빙 건을 토론토의 김 목사께 알렸다.
이 무렵 김 목사는 우리 교회 외에도 이미 100여명이 출석하고 자체건물을 가진 유타 주 솔트레이크장로교회의 청빙과 60여명이 출석하는 캔사스 주 캔사스장로교회의 청빙을 받고 있었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작고도 주위에서 힘들다고 만류하는 뉴저지한인장로교회로 가라는 응답을 받은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뜻은 오묘막측하여 우리 교회로서는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밖에 없다!
김 목사는 교회측의 고무적인 반응을 알자, 성령의 뜻으로 확신하기에 이른다. 뉴저지에서 목회하기로 최종 결의를 다진 김 목사는 약 한달 후인 2월 둘째 주일 본 교회에 부임했다. 우리 교회에서의 두 번째 설교는 ‘썩는 밀알의 결실’(요한복음 12:24-26)이었다. 김 목사 자신부터가 썩는 한 알의 밀이 되기로 각오하고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호소한 셈이다.
김창길 목사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사실 우리 교회를 잘 알고있던 주위 사람들이 나더러 ‘그 교회 어려우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고 토로한다. 아무튼, 그로부터 지금까지 22년간 줄곧, 본 교회 주보에 새겨진 목회자의 이름은 바뀌지 않고 있다. 그의 첫 설교 제목 ‘여호와 이레’처럼 과연 주님이 예비해두신 우리 교회 목자였던 것이다.
2월 10일 주보 교회소식란에는 “김창길 목사님께서 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이 떠올라 있었다.
새 목회자의 사례 문제는 부임 전부터 논의돼왔다. 2월 3일 제직회에 79년도 결산안과 함께 차기 연도 예산안이 상정됐었는데, “예산안 상 교역자 사례비가 적으니 연 14,000 달러로 올리자”는 동의와 재청이 있어 통과됐다. 아울러 6월 정기 제직회에서 재고하여 필요하면 추가예산에 반영키로 했다.
당시 캐나다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던 김 목사의 이민 수속 건도 7월 제직회에서 건의가 되어 변호사 비용을 교회가 부담키로 하고 수속에 들어갔다. 처음 거주하게 된 아파트의 위치는 저지시티였다. ((333 Fairmount Avenue, Jersey City.)) 그후 4월 중에는 토론토에서 김 목사의 어머니 안마리아 권사와 정영선(김에스더) 사모 등 식구들도 합류했다. 식구가 많아지자 5월에는 목사관을 포트리의 아파트로 옮겨 간다. ((3010 Edwin Avenue, Fort Lee. ))
목자다운 목회자—김창길 목사의 배경 ((이 부분부터 이하 김창길 목사의 배경에 관한 5개 섹션은 다음 자료를 참조했다: ‘서소문교회 50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 서소문교회 역사편찬위원회/1996년). 세계 속의 한인교회<III>(정석기). 기타 인터넷의 한국 교회사 자료.))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이 있다.
우리교회 30년 역사의 22년간이란 긴 세월동안 시무해온 김창길 목사의 성장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별다른 의미가 있을 성싶다. 김창길 목사는 어느 모로 보나 목회자로서 큰그릇이다. 키는 작은 편이나 ‘작은 거인’이다.
김창길 목사는 모진 고난과 아픔을 아는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맛보고 자랐다. 그래서 그와 우리 교회는 더욱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김 목사의 출신집안부터가 본가와 외가 쪽이 다 목회자와 순교자 가정이다. 김 목사의 삶과 목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을 꼽는다면, 아버지 김동철과 외삼촌 안길선, 목회선배 서금찬일 것이다.
김동철 목사와 안마리아 사모 사이에 난 여섯 형제 중 다섯 째 아들인 창길은 1940년 만주국 북간도 신경(오늘날의 장춘)시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처음 개척한 만주 입선정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말하자면 어릴 적에 이미 타국생활을 했었다.
1945년 조국 해방과 더불어 아버지를 따라 월남한 뒤로는, 1·4 후퇴 당시 부산 피난 시절 3년간을 제외하고 줄곧 서울서 자랐다. 역시 부친이 설립한 서울 서소문교회에서 유년부와 중·고등부 시절을 보내며 2대 서금찬 목사가 시무할 당시 입교한다.
부친의 순교 후, 고학으로 배재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창길은 학창시절 단짝인 친우 김영구의 어이없는 요절에 충격을 받고 반년동안 방황하던 중, 부친을 이어 목회여정을 밟기로 결심하고 농과대학을 가려던 생각을 바꿔 장로회신학교로 향한다.
신학교 졸업 후 서울노회(예장·통합)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육군 군목으로 복무하다 대위로 예편한 김창길은 서소문교회 부목사로 70년 1월부터 75년 6월까지 약6년간 봉직한다. 아버지로 받들어온 서금찬 목사를 이제 목회선배로 모시고, 어진 인품과 목회경륜을 본받게 된 것이다. 김 목사는 또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과 기독교교육도 전공했다.
서소문교회에서의 김창길 목사의 사역 면모를 엿보면 이렇다.
“학생회 시절을 본 교회에서 보낸 김 목사는 중·고등부, 대학, 청년부 지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그가 중·고등부를 시무하던 시기에는 150명에서 180명까지, 대학생회는 50여명까지 모였는데 그 열기는 대단한 것이었다.”8)
이때가 서소문교회 학생회 최고의 부흥기였다.
그후 해외에서 목회를 하면서 신학연구를 계속하고 싶던 차 캐나다 토론토한인교회에 교육목사로 청빙받아 대륙으로 건너와,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 과정을 밟게 된다.
아버지 김동철
김창길 목사에게서 종종 엿보이는 대쪽같은 성미는 순교의 길을 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양친은 함경도 출신이었다.
아버지 김동철은 일찍이 애국지사들의 근거지로 이름난 북간도 용정에서 살면서 민족·애국운동의 요람 명동학교에서 민족의식과 신앙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만주 영안(寧安)학교 교사로서 미래의 일꾼들을 기르던 그는 안마리아를 만나 결혼한다. 안마리아 역시도, 굽힘 없는 순절의 신앙으로 순교자 대열에 낀 안길선 목사의 누이동생이다.
교편생활만으로는 불타는 열정을 가눌 길 없던 동철은 민족의 참 소망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 있음을 확신하고 경성(서울)으로 건너가 협성신학교(현 감신대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시절, 부인 안마리아도 태화여자중학교에 다닌다.
신학교 졸업 후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용정으로 돌아와 과거 믿음 생활하던 용정교회의 부설 소년학관 사감으로 사역을 시작한다. 규모가 크고 신앙·체육교육이 탁월했던 소학관은 수많은 민족지도자를 배출했다.
아울러 고국을 떠난 나그네 한인들에게 눈을 돌려 숙식을 제공하며 사랑을 베풀어 ‘북간도의 사마리아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게 빈민목회를 하며 신경에 개척한 교회가 입선정(入船町)교회였다.
아들 여섯을 양육하며 가정을 돌보랴 양떼를 돌보랴 어려운 목회였지만 주님께 있는 충성을 다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아들 김창길은 올곧고 한결같은 목회자의 모습을 마음에 깊이 각인(刻印)해두고 있었다.
조국이 해방되자, 김동철 목사는 실향민의 귀국을 도우면서도 정작 자신은 굳이 귀국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당초 만주 선교에 뜻이 있었고 중국어도 능통했을 뿐더러 돌보던 양떼를 두고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선정교회 제직회에서 “목사님을 모시고 서울로 가자”는 의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자, 1945년 12월 식솔과 교우를 거느리고 신의주와 사리원, 개성 등을 거쳐 목숨을 내걸고 38선을 넘어 서울 서소문에 자리잡는다.
서소문교회
서소문교회는 김창길 목사에게는 지금도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한-만 국경과 38선을 넘은 신앙동지들이 함께 세운 교회로, 아버지 김동철 목사가 실향민 나그네들—소외당하고 고통받는 만주 동포들의 어버이 역할을 감당하다 순교의 길을 걸어간 곳이다. 김동철 목사 가족은 재정적으로 궁핍했지만, 날로 성장하는 교회의 미래 꿈을 기르며 마냥 즐겁게 초기시절을 보낸다. 아들 형제들은 제각기 탈렌트를 살려 성가대와 중·고등부 청년회 등에서 봉사 활약했다.
김 목사 가족은 주일예배 후 사례비를 받는 즉시 쌀을 사다 밥을 지어야 그날 요기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생활이 어려워 안마리아 사모가 밥장사를 해 여덟 식구의 생계를 근근히 이어갔지만 얼굴에는 늘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이 무렵 가족 중에는 1948년 단신 월남한 한진관 학생(현 뉴욕 퀸즈한인교회 목사)도 끼여있었다. 한진관은 초기 서소문교회 시절 김 목사 아들들과 함께 성가대원도 했다. 당시 김동철 목사 사택의 작은 방에서 6형제와 함께 지내면서 궁핍한 중에도 자신을 친아들처럼 돌봐준 안마리아 사모를 “잊을 수 없다”고 한 목사는 지금도 회고한다.9)
당시 전기사정도 좋지 않아 김동철 목사는 호롱불을 켜고 가정예배를 이끌었다. 어려움은 가난뿐만 아니었다. 교회자리를 판 불구자집단과 곁방을 쓰는 대동청년단 등으로부터 갖은 핍박을 당한 것이다. 불구자들은 주일날 설교 중인 김 목사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붓고 교회당을 둘러싸고 창문을 두들기거나 돌팔매질을 해댔다. 그러나 김 목사는 담대히 설교를 계속하며 교인들과 함께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대동청년단은 그들대로 예배시간 때 벽을 두들기며 교회당을 달라고 소란을 피우더니, 하루는 도끼로 강대상을 찍어버렸다. 그래도 김 목사는 그들을 용서하면서, 화를 내는 교회청년들을 되레 꾸짖었다.
바깥 무리들은 혼자 무릎꿇고 기도하는 김 목사를 끌어내어 욕설하고 뺨을 후려치기도 했다. 시달리다 못한 교회 제직들이 교회당 이전을 여러 번 건의해 봐도 김 목사는 서소문 언덕바지가 순교의 터전임을 상기시키며 굽히지 않았다. 그런 의연한 모습은 수 년 후의 순교를 앞둔 훈련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진 16. 김동철 목사 순교기념비를 찾아간 김창길 목사 내외
Rev. Samuel Chang Ghil Kim and Mrs. Esther Kim, at their visit to the monument to the martyrdom of the late Rev. Dongchul Kim.
순교자 김동철
1950년 6월 25일 주일날은 북괴 인민군이 한반도를 삼키려고 남침해온 날이었다.
가족들이 남으로 피난 가자고 설득했으나, 김동철 목사는 “만주 교회를 떠난 것도 가슴 아픈데 교회와 남은 양떼를 두고 나만 살려고 어딜 가느냐”며 요지부동이었다. 실랑이 끝에 아버지와 둘째 아들 창권만 남기고 피난길에 오른 가족은 폭파된 한강교 앞에서 맏아들 창국만 배로 보내고 나머지는 되돌아왔다.
그러던 8월 23일 수요예배 때, 김 목사가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뱀처럼 지혜롭게’ 살 것을 교훈한 것이 그의 고별설교가 되고 말았다. 이튿날인 24일 아침, 김 목사는 새벽기도를 이끈 뒤 이른 아침마다 장에 다녀오는 부인을 마중 나갔다가 돌아온 뒤 인민군 정치보위부 요원 청년에게 끌려간 것이다.
당시 어린 소년이던 김창길 목사는 그날의 생생한 기억을 훗날 이렇게 증언한다.
“그날 아침 아버님을 찾아온 청년은 서울지역에 있는 목회자들이 한 곳에 모여 구국기도회를 결성하려고 하니 지금 함께 가자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유명한 목사님들의 성함도 댔는데 아버님은 한동안 생각하시더니 그 청년을 따라 나섰어요. 그것이 마지막 본 아버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름옷을 입고 나가신 아버님 생각에 어머니는 서울 인근지역 감호소와 시체 보호실 등을 쉼 없이 찾아다녔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40여명의 목사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큰 트럭에 실려가더라는 소문을 접하게 된 것이 전부입니다.”
김동철 목사의 아호가 ‘야성’(野聲)이었다. 광야의 소리로서 올곧고 굽힘 없는 세례요한처럼 민족 앞에 복음을 부르짖다가 갔다. 현재 서소문교회 입구와 경기도 용인군 양지의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에 서있는 그의 순교기념비에는 다음 성구가 새겨져있다.(사진 16)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외숙부 안길선
안마리아의 오빠이자 김창길의 외삼촌인 안길선 목사(1891〜1950)도 한국교회사에 길이 빛나는 순교자다.
초기 한국교회의 대표적 지도자로 오랜 기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일제에 항거했고 북괴 앞에서도 믿음을 굽히지 않다가 순교했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했던 그는 민족교육과 복음화에 뜻을 두고 평양신학교를 다니다가 신사참배 거부로 퇴교 당했다.
다시 경성신학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편입해 학업을 마치고 안수받은 후 그는 계속 신사참배 거부로 여러 교회를 두루 ‘순회’하는 우여곡절 끝에 1942년 북간도 용정 동산교회에 부임했다. 거기서도 참배거부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직한 뒤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만주 각 교회를 누비며 신사참배 거부 집회를 이끌다 과로와 영양결핍 등으로 심한 관절염을 앓아 사모가 모진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해방 후 월남한 안 목사는 각 교회 부흥성회를 이끌면서 은혜로운 설교자로 소문나 신당동중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열정적이고 은혜 넘친 설교는 특히 피난민들의 심령을 파고들었다. 그는 평양신학교 때 사귄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와도 친분이 두터워 자주 설교 청탁을 받곤 했다.
성경중심의 보수적 신앙을 견지한 그는 기독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 한글교육에 치중한 애국자인 데다 기도의 사람이기도 했다. 6·25가 터지자 그 역시 매제인 김동철 목사처럼 주위의 피난 강청을 무릅쓰고 교회를 지키며 기도하다 꿋꿋이 순교의 길을 갔다.
신당중앙교회에는 현재 안길선 기념도서관과 외아들 안철호 장로가 세운 안길선 기념장학재단, 안길선 목사 순교비 등이 세워져 있다. 이런 양가의 순교 정신이 김창길 목사의 삶과 목회 배경에 맥맥히 흐르고 있다.
서금찬 목사
김창길 목사의 삶과 목회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또 한 사람이 앞서 언급한 서금찬 목사다. 김 목사가 부임하던 해인 1980년 우리 교회 부흥회 강사로 모시려고 추진했던 분이다. 서 목사 역시 만년을 캐나다 토론토에서 보냈기 때문에 더더구나 김 목사와의 친분이 끊이지 않았다.
「서소문교회 50년사」에는 “순교의 길을 가신 아버지를 어린 나이에 잃은 김창길은 서금찬 목사를 아버지처럼 따랐고 아울러 그의 목회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귀띔해준다. 김 목사 자신의 말을 인용해 본다.
“병약자나 가난한 교우의 집을 심방하실 때면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잡히는 대로 꺼내 나눔을 베풀곤 했던 서금찬 목사님은 늘 소탈하고 꾸밈이 없는 성격에다 강단이나 목회 현장에서 일관된 삶을 사셨던 분이지요. 언젠가 제가 영락교회 전임 부목사로 청빙을 받고 그 일을 의논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목회하실 때도 더 큰 교회에서 청빙을 받으신 적이 있지만 움직이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목사는 한 교회에서 오래도록 충성해야 하는 법이라며 유학 가기 전까지 서소문에 있으라고 타이르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의지했던 그분은 저를 무척 아껴 주셨습니다.” ((같은 책 253〜254쪽 참조.))
서금찬 목사도 북방 조선족 사역에 뜻을 둔 부친을 따라 어린 시절 용정으로 이주했다가 기독교학교인 은진중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는, 1936년 간도에서 목회했다. 1940년에는 도쿄의 일본신학교에서 유학을 하면서 만주에서 유학 온 한국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도했다. 그는 후배지도에 있어 엄격하고 타협이 없으면서도 자상했고 뜨거운 조국애를 품은 목회자와 교육자로 유명했다. 해방 후 함흥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전 당시 교우들을 모두 피난시킨 뒤 맨 나중에 가족과 함께 흥남 부두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제주도에도 교회를 설립했고, 피난시절 서소문교회 성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9·28 서울수복 때부터 서소문교회를 시무하게 된다.
그는 혼자 지내는 외로운 노인들을 대접하기를 즐기는 등 고통받는 자들의 벗으로 살아갔다. 연고자 없는 시신을 교회로 옮겨와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고 딸의 약혼식 연회비용을 돈 없는 상가(喪家)에 몽땅 주고 국수로 피로연을 때우기도 했다.
원로목사로 은퇴한 뒤로는 캐나다에서 지내면서 김창길 목사와 깊은 친분을 유지했다. 1978년 토론토에서 있은 김창길 목사의 수필집 ‘이민전화’의 출판기념회 때도 축도를 했다. 1981년 8월 9일 우리 교회 창립 9주년 기념예배 때도 ‘주님의 요구’(계 2:1-7)라는 은혜로운 말씀을 전했다.
서 목사는 1994년 8월 21일 90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갔다. 후손들은 현재 한국과 캐나다, 미국 등에서 활동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준비된 목자
김창길 목사는 잠시 공백 중이던 본 교회를 목회체제로 변환시켜가며 체계와 조직력을 갖추고 영적인 성장을 향해 힘찬 박차를 가했다. “준비된” 목회자였기에 교회가 이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다름 아닌 목회자 때문에 오래 상처받은 본 교회를 치유할 길을 기도로 모색했고 영적으로 터득해갔다. 특히 교우들의 말씀 교육에 진력했다.
뉴저지 목회 초기였지만, 그는 이미 이민자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의 수상집 ‘이민전화’는 교육목회를 하던 캐나다 시절 다년간 이민자들의 신앙 상담을 해주면서 그들의 믿음과 일상 생활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면서 쓴 글들이다. ((‘더 캐너더뉴스’ (한국일보 토론토지사). 1978년 11월 11일, 25일자 참조.))
교회는 은혜 가운데 웅비(雄飛)에 앞선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80년도 교회요람에 따르면, 그해 표어는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 주제성구는 사도행전 1장8절 말씀이었다. 목표는 1. 모여 말씀을 배우기 힘쓰자, 2. 가정예배를 드리자, 3. 전가족 신앙화, 4. 직장에서 인정받는 신자상, 5. 이웃에게 화평을 심는 사람, 6.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전도 등이었다.
‘매달의 설계’ 항에는 1월이 기도의 달, 2월은 연구, 3월 성장, 4월 소망, 5월 가정, 6월 전도, 7월 수양, 8월 애국, 9월 교육, 10월 봉사, 11월 감사, 12월 반성의 달 등으로 계획됐다.
김 목사와 그 가정이 목회 초기 얼마나 바빴냐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가 않다. 위기에 처했던 교회를 살리려고 양떼들을 돌보랴, 집에서는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고 마구 매달리는 어린 두 아들 규호와 규창을 양육하랴, 캐나다에서 옮겨온 막대한 양의 책들이며 숱한 이삿짐을 정리하랴, 전부터 해온 목회학 박사 과정을 끝내기 위해 연구하고 논문준비를 하랴…
그해 3월 한 주 주보를 보면, 김 목사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시카고에서 신학연구 차 떠나 금요일 저녁에 귀가할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여러 해를 그렇게 수시로 오가야 했다. 그뿐인가. 부임하자마자 그는 교인가정 심방에 들어갔다. 심방목회의 중요성을 잘 아는 터였다. 주보에다 “심방 및 기도가 필요한 분은 서기부에서 준비한 용지에 써서 담임목사에게 건네주십시오” 라고 부탁하면서 교인 돌보기에 힘을 썼다.
목회자 외에는—아니 김 목사 자신이 되어보지 않고서는—그 바쁘고 허겁지겁한 심정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목적 있는 교회
교회는 자고로, 목표 내지 목적이 있어야 산다. 목표나 꿈이 없는 교회는 좌표와 방향이 없어 표류하는 배와 다를 바 없다. 미국 최대급 교회의 하나인 새들백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는 ‘목적중심(purpose-driven)’의 교회성장 및 리더십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새들백교회가 단기간에 대 성장한 비결이 그것이다. 그의 목적중심론을 배워 실제로 적용해온 사람들이 수십 만 명 된다. ((새들백교회 웹사이트 참조.))
1960년대 초부터 70년대 말까지 약 20년간 군사독재를 한 고 박정희 대통령은 전통적인 한국 농경사회를 수출 중심의 산업사회로 전환시킬 동안 농촌인구와 서민층을 희생시켜가며, 삼성, 현대 등 기라성 같은 세계적 재벌들이 그의 그늘에서 컸다. 그는 한국전쟁 이래 조국의 찌들 대로 찌든 가난의 틀을 벗어나려는 ‘몸부림’ 끝에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표면상 ‘조국근대화’의 기적을 낳았다.
‘계획’이라면, 과거 우리 교회에도 비슷한 인물이 있긴 있었다. 3대 담임 장승칠 목사였다. 앞서 70년대 기록에 본대로 그는 오자마자 교회 발전을 위한 10개년 계획을 내비쳤었다. ((70년대 부분 참조.)) 무턱대고 적당히 부딪쳐보는 무계획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 은혜로 이 계획이 주효하려 했는지는 모르나, 부임 약 8개월만에 교인수가 2배로 불어나는 배가현상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장 목사는 성장의 기미를 간과했는지 성급히 사임하는 바람에 장기계획이 무산돼 버렸다.
교회의 목적은 장·단기 목회계획에도 나타나지만, 연도별, 월별 표어에도 나타난다. 우리 교회 역사를 보면, 이희철 목사 재임시인 1977년부터 구체적인 연도별 표어가 눈에 띈다. 그 전에도 표어가 있었을 법한데 문서상으로는 확실치가 않다.
목회자들은 보통 새해를 앞두고 기도와 묵상 중에 표어를 정한다. 이희철 목사는 ‘전도하는 해’, ‘교육의 해’, ‘기도하는 해’ 등으로 목표를 펼쳤다.
80년대의 김창길 목사도 부임 첫 해를 ‘복음을 증거하는 해’로 잡은 뒤, ‘새로워지는 교회’, ‘계속 성장하는 교회’, ‘예수를 바라보자’…등으로 연연히 80년대를 이어나갔다. 교회요람에는 매달 그 달의 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재개된 새벽기도와 주중집회
성경은 ‘모이기에 힘쓰라’고 교훈한다.
그런데 자체교회당을 갖지 못한 한인교회는 새벽기도나 삼일기도회, 금요기도회 등 주중집회를 갖기가 매우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하다. 더욱이 바쁘기 이를 데 없는 미주 생활에서 그런 모임들을 꼬박꼬박 지켜 참석한다는 것은 여간한 정성이 아니면 힘들다.
그래서 미국에서 오래 지나다보면, 새벽기도나 수요기도회, 금요기도 등의 말이 자칫 아득한 옛 추억처럼 귀에 생경(生硬)할 수도 있다. 한인교회들이 자체건물을 희구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마음껏 모일 수 있고 양껏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목사가 부임하던 주일 주보에는 ‘새벽예배: 주일 오전 6시, 삼일예배: 화요일 오후 8시’로 명기돼 있었다. 당초 81년도 연초 정기 제직회에서 “(주일) 새벽집회에 모이는 교인수가 너무 적어 목사님 오실 때까지 당분간 중지하기로” 합의했었다.
김 목사의 부임 즉시 주일새벽모임이 재개되고 화요예배가 시작된 것이다. 초기 새벽기도회 때 김 목사는 야고보서 강해설교를 시작했고, 이어서 7월 중순부터는 디모데전서를 가르쳤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한 권 씩 정하여, 강해를 계속해 나갔다.
1984년 11월부터는 매일 오전 5시 30분에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으나 불과 며칠 후 예배장소를 팰리세이즈팍의 캘버리교회당으로 이전한 후 몇 달 동안은 조그만 사무실에 서 모였다. 미국인교회가 새벽기도 장소로 본당은 허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캘버리교회는 새벽기도회를 통해 본 교회가 성장함을 발견하자, 그들 역시 새벽기도를 시작하여 미국인들은 본당에서, 우리는 하층 친교실에서 교회당 구입 때까지 계속했다. 미국인교회가 한인교회를 본받아 새벽기도를 한 예가 타처에도 있긴 있지만, 매우 드물다.
1985년 2월 17일부터는 새벽기도를 위해 매일 오전 5시 40분부터 1시간 교회 문을 열어놓았고, 85년 12월부터는 한동안 새벽기도회를 6시에 모였었다. 새벽기도는 김 목사가 교단 총회로 출타한 동안에도 매일 5시 30분에 계속됐고, 86년 8월 1일부터는 김목사가 매일 6시 새벽기도회 때 설교를 시작했다. 얼마 후 주일예배 준비 관계로 주일새벽 기도회는 중지됐고, 평일 날은 유지됐다.
새 일꾼들
1980년의 새 일꾼들은 그해 3월말에 임명됐다. 따라서 그해 임기는 4월부터 12월까지 8개월간인 셈이다. 이유는 연말과 새해초 목회자가 공백이었던 시기였고, 새 담임목사가 교회를 파악하기 전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1980년 3월 2일 정기 제직회에서 서리집사를 3월말에 임명하되, 4월부터 12월까지를 임기로 하기로 했다. 각부 구성도 4월 첫 주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한편 이날 제직회 때 “각부 구성에 있어 본예배를 못 드리게 되는 직분자는 되도록 교대하여 예배불참이 장기화되지 않도록 하자”는 건의가 있었다.
예보된 대로, 3월 30일 주보에는 새 일꾼들이 발표됐다. 새 목회자 부임 후 새롭게 편성된 80년도 서리 집사들과 각부 담당자였다. 이때 앞으로의 교회건축을 위한 일꾼들이 뽑혀 계속 이어져나갔다.
명예직분들도 교회에 꼭 필요한 일꾼들이다. 그해 6월 1일 정기 제직회는 토론토에서 온 김 목사의 모친 안마리아 권사를 명예권사로 추대했고, 7월 27일 임시 제직회에서는 장기순 권사를 본 교회 명예권사로 추대했다.
과거 70년대에는 본 교회에 명예권사란 직분이 없었고 그럴만한 정서나 여유도 안 됐던 것 같다. 그러나 이때부터 상당수의 교우들이 명예권사로 임명됐다.
교육하는 교회
본 교회는 교육하는 교회다.
오늘날처럼 1천 명을 넘는 대형교회로 성장하게 된 경위가 교육목회로 쌓아올린 ‘탑’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김창길 목사 자신이 교육을 전공한 만치 교육목회를 평생과제로 삼았다. 연세대 연합신학원에서도 기독교교육을 전공했고 젊은 시절 서소문교회에서도 중·고등부, 청년들을 가르치며 유능한 교육자로 일했고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교육목사로 사역했다.
본 교회 목회로 분주한 와중에도 수시로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를 오가며 연구한 노력의 결정체인 박사학위 논문도 평신도 교육프로그램에 관한 연구 –‘Ministry of Lay Leadership Training through the Korean Bible Institute in Korean-American Context’였다. 혼신을 다하고 땀을 쏟은 연구의 결과가 우리교회에 몽땅 부어진 셈이다.
김 목사 부부는 오자마자 기독교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여 교회학교 각 부서를 조직하거나 어린이부와 중·고등부 수양회 때 직접 함께 다녀오곤 했다. 역대 주보철을 보면, 그런 교육목회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교육이라 해서 2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위한 전인적 성경교육으로 모든 부서가 적극 교육대상으로 부각됐고, 가능한 한 교육방법이 적용됐다. 본 교회의 전교인 교육자화, 지도자화가 가능한 맥락이 그런 데 근거를 두고 있다.
김에스더 사모는 특히 어머니성경반을 비롯한 성경반을 조직, 지난 20여년간 지도함으로써 교회성장의 근간이 되는 효과적인 평신도교육에 기여해왔다.
찬송가를 바꾸다
1980년 2월 17일 임시 제직회는 갓 부임한 김창길 목사가 처음 진행한 제직회였다.
김 목사를 포함한 10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논의된 사항 하나가 그 동안 사용해온 새찬송가를 ‘찬송가’(일명 개편찬송가)로 바꾸는 의안이었다. 성가대장 양호식 집사가 “음악적 견지에서 개편찬송가가 부르기가 쉽고 좋아 성가대는 이미 지휘자의 뜻에 따라 사용하고 있으므로 차제에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한 것이다. 김 목사는 이미 캐나다에서부터 (개편)찬송가에 익숙해 있었다.
찬송가 전환 작업은 본 교회 초창기인 1974년에도 있던 일이었다. ((70년대사 참조.)) 초기 장영춘 목사 때부터 사용했던 합동찬송가를 그의 이임(離任)과 함께 시대적 부응에 맞춰 개편찬송가로 바꿨었다. 그후 한동안 새찬송가로 대체됐다가 김 목사의 부임을 계기로 다시 개편으로 통일하게 된 것이다.
1967년 발행된 (개편)찬송가는 장로교 통합측을 비롯해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성결교,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기독교연합회 등이 공동으로 음악과 가사, 교독문 등을 위원들에게 위촉해 편찬했다. 반면 새찬송가는 합동·고신측 등 보수교단들이 1962년에 만든 것이었다. 제직 가운데는 “이제 목사님이 갓 오시고 해야할 급선무가 많은데 갑자기 바꾸면 부작용이 있을 지 모르니 적당한 때를 기다리자”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 오신 목사님이 개편찬송가에 익숙하여 불편도 많을 테니 부흥을 위해 목회자를 중심으로 마음을 합하는 견지에서 바꾸자”고 합의, 주보에 광고하고 시행키로 했다.
그리하여 24일 ‘교회소식’에 찬송가 변경 예보가 났다.
“지난 주 제직회에서는 그 동안 사용해 오던 새찬송가를 개편찬송가로 바꾸기로 만장일치 가결하였습니다. 이유는 성가대에서 건의한 대로 음악과 가사가 조화되어 부르기 쉽고, 또 우리교회가 속한 노회가 개편찬송가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3월 첫 주부터 개편찬송가를 사용하오니 부디 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따라 3월 2일부터 온 회중이 (개편)찬송가를 쓰기 시작했고 원하는 교인에게 권당 5달러씩에 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수년 후 ‘(통일)찬송가’가 한국에서 새로 발행됐기에 또다시 바꿔야만 했다.
신선한 변화
새 담임목회자가 부임하자 교회는 안팎으로 분위기가 현저히 달라져갔다.
새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한창 위기 때는 수십 명 선에 머물어 ‘대롱대롱’하던 교인수가 이젠 매주 새 교인들이 들어오면서 날로 늘어가고, 교회에 한결 생기가 돌았다.
김창길 목사가 갓 부임한 후 “예배 찬송 부를 때는 마지막 절 부르기 전 간주를 듣고 부르기로 했다”는 새로운 뉴스가 주보에 실렸다. “간주할 동안 찬송가 가사를 명상하도록” 교인들에 대한 주문도 곁들였다. 대부분의 미국교회들이 하고 있는 방법이다. 1983년 새해부터는 다시 전처럼 바뀌어 간주 없이 부르기 시작했고, 그후로는 약10년이 지난 1991년 1월 13일에야 재차 미국교회처럼 간주를 넣어서 부르게 된다.
1980년 4월 20일부터는 주보 표지가 산뜻하게 바뀌었다. 사진식자체로 ‘미주한인장로회 뉴저지한인장로교회’와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n USA’란 영어 교단명이 맨 꼭대기에 올려지고, 아래쪽에는 교회 영어이름과 함께 처음으로 새 담임목사의 이름과 성가 지휘자(김병기 집사)의 이름이 명시됐다.
아울러 주보 표지 앞면은 고전적인 교회당의 펜화가 실려, 그해 말까지 본 교회 얼굴노릇을 했다. 뒷면에는 주중의 모든 모임 안내와 기관안내, 1980년도 제직 명단 등이 실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해 5월 첫 주일(4일)부터 예배 순서가 확 바뀌었다는 점이다. 김 목사의 목회적 배려와 실천신학적 센스로 ‘깜짝’ 변모한 결과였다. (표 18)
한마디로 참신한 내용이었다.
흔히 이민교회는 본국교회에 비해 시대적으로 30〜40년 뒤떨어졌다는 말들을 듣는다. 그런 말이 무리도 아닌 것이, 케케묵고 고루한 전통과 고리짝 같은 요소들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안간힘들을 쓴다. 보수정통을 지켜나가는 방법의 일환인지는 모르나 어찌 보면 게으름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성경은 ‘새 노래로써 주를 찬양하라’, ‘내가 새 일을 행하노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고 새 것이 되었다’는 말씀에서 느끼듯, 끊임없이 새 것을 추구한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교회는 결코 뒤지는 교회는 아니었음을 주보가 증명해주고 있다.
김창길 목사는 사실, 1960년대 서소문교회 시절부터 이런 예배 개혁 내지 예배정신 개혁을 구체적으로 추구해왔다.
옛 주보순서와 달라진 특징을 보면, ‘사회’나 ‘인도자’가 ‘집례자’로 바뀌었고 ‘묵도’ 대신 반주자의 입례송 주악이 강조되고, 기원 후 성가대의 송영이 삽입됐다. 또 (대표)기도 대신 목회기도가 들어가고 평신도의 대표기도는 참회기도로 바뀌었다.
교독문은 ‘화답’이란 용어로 대체됐고 평신도대표가 봉독하는 ‘오늘의 양식’이 삽입됐으며 성경봉독은 ‘복된 소식’으로 용어가 바뀌었다. 회중이 부르는 ‘헌금영가’가 명기되고 ‘소식과 환영’은 ‘교회소식’으로 대체됐다. 무슨 회의종료 신고와 같던 ‘폐회’란 말이 사라지고 ‘후주’가 들어갔다. 예배에서는 바른 용어법(terminology)이 중요하다.
당대의 타 교회 주보와 비교해 보면 알지만, ‘묵도’, ‘폐회’ 따위의 용어가 80년대 초에 일찌감치 본 교회 주일예배순서에서 사라진 것은 보수성향이 농후한 당시 한인교계로서는 혁신적이고 개혁적인 일이었다.
한편 목회기도가 간략한 대화형태로 바뀐 것은 언뜻 카톨릭 미사순서를 연상시키지만, 이에 대한 김 목사의 변은 이렇다. “기독교 초기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장로교는 물론 카톨릭과 성공회, 감리교 등 모든 교파들이 공히 쓸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종전의 성경봉독도 평신도대표가 읽는 ‘오늘의 양식’과 목회자가 설교 전에 낭독하는 ‘복된 소식’으로 구분했다. 김 목사의 눈과 귀에 익은 캐나다장로교회의 전통을 본받은 것이다. 사실, 설교 전에 잠시 인사드리다시피 성경을 짤막하게 읽고는 곧장 설교로 들어가 버리는 대다수 한국교회와 한인교회의 상투적인 기존 성경봉독 형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중심도 그렇고 여러 모로 너무 가볍게 보인다.
반면, 많은 전통적인 미국교회들이 주일예배 때 성경 일과낭송(lesson)을 통해 신·구약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중심을 표하면서 동시에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있다. 이런 새로운 예배형식과 요소에 관해 김 목사는 “전통도 유지하고 복음적 패턴을 시도도 하는 방향으로 순서를 짰다”고 천명한다.
주보 안 오른 쪽 곁의 교회소식란 내용도 인상이 바뀌었다. 매달의 표제와 목표가 게재되면서 그 달에 맞는 적절한 교훈이 꼭대기에 실리곤 했다. 그런 특색은 약2년간 지속되다가 소식 양이 급격히 불어나면서 바뀌어갔다.
주보 뒷면도 바뀌었다. 전체를 주중의 모든 모임 시간과 장소, 각 기관 모임에 대한 안내를 배려한 것이다.
교회 밴을 구입하다
정말 반가운 소식은 이 해에 교회버스를 구입했다는 것이었다(사진 17).
960불의 버스 헌금으로 1천불 급 중고차를 산 것이었다. 부족액 40불과 유리창 등 수리는 양호식 집사가 부담했다. 비록 중고차이긴 했지만 당분간 많은 교우들의 발 구실을 톡톡히 해낼 것이었다. 16인승 밴으로, 교회 이름도 새긴다는 예보가 주보에 나간 뒤 김면오 선생이 교회 간판과 함께 밴에도 교회명을 새겨 넣었다. 밴-버스운영위원회가 구성되고 실행됐다. 중고 밴은 야외예배가 있던 5월 25일 첫 선을 보이며 운행됐고, 8월 첫 주일부터 친교부장 서태호 집사의 운전으로 밴 버스가 정식 운행되기 시작했다.
한편 6월 정기 제직회는 밴 버스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양호식, 서태호 두 집사를 위원으로 위촉했고, 운영위원회는 밴 운영 규정을 기안하여 차기 제직회 때 상정키로 했다. 위원장으로는 양호식 집사가 선임됐다.
7월6일 제직회는 밴 운영위원회의 안을 받아 그대로 채택했다.
대외행사
1980년도에 있은 대외적인 행사를 살펴본다.
2월 24일 주일에는 본 교회 집사 출신인 곽영철 전도사의 목사 안수식 및 새 교회 설립예배가 있었다.
4월은 특히 대외적인 각종 행사로 무척 바쁜 달이었다. 그해 부활주일은 4월 6일이었다. 당일 새벽 5시 링컨 파크에서 뉴저지 부활절 새벽연합예배가 드려졌고, 본 교회 교인 다수가 참여했다.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 주최로 지역별 연합예배의 일부로 개최된 것이다. 이날 행사에서 갓 부임한 본 교회 김 목사가 성경봉독(요20:17-18)을 했고 설교는 박재영 목사(‘부활의 새 아침’)가 했다. 또 조국의 안전과 번영, 동포교회의 부흥성장, 교협 주최 할렐루야 80대뉴욕전도대회를 위해 지역교회 목사들이 대표기도를 했고 감리교 김해종 목사의 축도로 마감했다.
한인교회협의회가 1975년에 일찌감치 생겨 이런 연합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교역자협의회 등 교계 연합단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연합활동이 활발치 못했었다. 초기에는 대개 한인 밀집 지역이던 퀸즈 등 뉴욕시 5개 보로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나 8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뉴저지 자체 교회연합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뉴욕교협은 7월11〜13일 퀸즈칼리지에서 개최되는 할렐루야 80 대뉴욕전도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회 취지는 부활 후 숨을 내쉬며 “너희가 가서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분부대로 아직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도한다는 것이었고 “이 기회에 비신자들을 매 시간마다 참석하도록 적극 힘써 달라”는 광고도 있었다.
지금도 뉴욕교협이 매년 갖는 전통적 행사인 할렐루야 전도대회는 본시 뉴저지한인제일교회 박재영 목사가 창안하고 기획하여 시작된 것이었다. 박 목사는 뉴욕교협은 물론 뉴저지교협 창설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1대 회장을 지냈다. 뉴저지교협이 독립한 뒤로는 호산나전도대회와 호산나청소년전도대회가 큰 연례행사로 발전했다.
4월 중에는 교단 대외행사도 있었다.
22〜23일 뉴욕한민교회에서 교단 미주동노회가 열렸다. 이 노회에서 본 교회 김창길 목사의 담임목사 청빙이 허락됐다. 이어서 23〜27일에는 대뉴욕지구 장로교연합전도대회가 미주동노회 뉴욕시찰회 주최로 뉴욕한성교회에서 개최됐다. 주제는 ‘그날이 오기 전에’, 주제성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강사는 서울영락교회 박조준 목사였다[박 목사는 훗날 영락교회를 떠나 갈보리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게 된다].
이 행사에는 뉴욕 9교회, 뉴저지 5교회 등 모두 14개 교회가 참가했다. ((참고로 당시 참가교회를 열거해 본다. 동부교회(박희소) 새소망교회(정도인) 새한교회(배성호) 엘름허스트교회(이형기) 연합장로교회(지관순) 염광교회(이성의) 퀸즈중앙교회(안창의) 한민교회(고용수) 한성교회(김권석) 뉴져지장로교회(김창길) 뉴져지서부교회(김광웅) 뉴져지연합장로교회(길웅남) 라더포드장로교회(김용주) 버겐장로교회(김기홍).))
정상화된 성례식
성례전(성례전·sacraments)은 세례와 성만찬을 통틀어 하는 말로, 성경말씀과 함께 개혁교회의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다.
카톨릭에는 중세 때부터 발전된 영세·견진·성체·고해·종부·신품·혼배 등 7가지 성례(성사)가 있으나, 개혁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오로지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전으로 정립했다.
일반적으로 전통교회에서는 목회자 없이는 개 교회에서 성례전이 시행되지 못한다. 반드시 목회자가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을 집례하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는 안수 받지 못한 평신도 선교사, 기능선교사 등이 현지인들을 위한 성례전을 갖기 위해 외부 목사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교회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전통교회 세례에는 아기세례, 학습 및 입교, 성인세례 등이 있다.
본 교회는, 일찍이 초창기인 1972년 성탄절에 장영춘 초대목사의 집례로 첫 성례식을 가진 바 있다. 그러나 목회자가 번갈아 바뀌던 과도기 시절, 성례식을 갖기란 쉽지도 흔치도 않은 터였다. 반드시 목회자가 집례해야 하는 성찬식과 세례가 제대로 시행될 리 없었다. 김창길 목사의 부임 후, 매해 시즌에 따라 성례식이 본격적으로 빠짐없이 시행되고 빈도가 잦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목회자 변동이 없어서, 꾸준히 지속됐기 때문이다.
그해 성금요일 기도회를 홍무승 집사 집에서 가진 뒤 4월 5일에는 세례와 학습, 유아세례 면접이 실시됐다. 김 목사가 부임한 이래 첫 학습 세례식과 성찬식은 4월 6일 본 교회 부활절 예배 때 거행됐다.
1980년대의 첫 세례·학습자들인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사진 18)
사진 18
1980년 4월 6일과 그해 6월 29일 있은 아기세례, 입교, 학습, 세례장면. 당시에는 전입교식도 함께 거행 되었다. Infant baptisms, Entering-a-faith, Studying and the baptized on April 6 and June 29, 1980.
나아져 가는 재정
교회음악사역 면모
가정의 달과 새 전통
나라 사랑 교회 사랑
무더위 공략 작전
활발한 교육활동
교우 동정(動靜)
80년대 첫 부흥성회
11월 감사의 달
첫 시무장로를 선출하다
연말연시 준비
글쓰는 목회자
김창길 목사는 바쁜 목회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글쓰기를 즐긴다.
구약 시편의 시인들처럼 그의 삶 속에서 문학을 떼어놓을 수 없다. 이민목회의 삶 구석구석에 시와 명상, 수상(隨想)의 편린이 깔려있는 그의 글과 삶, 목회가 살과 피, 뼈처럼 서로 밀착되어 있다.
그는 문단에 정식 데뷔한 시인이다. 우리 교회에 부임하기 전, 토론토에서 교육자와 이민목회자, 상담가, 신학자로서 생활하던 틈틈이 문학활동을 한 면모를 현지 한인언론에서 엿볼 수 있다.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Y문학클럽’ 등의 회원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첫 저서는 ‘성직자’였고 초기 시집으로는 ‘새울’(공저)이 있다. ((‘더 캐너더뉴스’(한국일보 토론토지사). 1978년 11월 11일, 25일자.))
시인으로서의 활약상을 단편적인 사례로 보면, 당시 캐나다 문인협회(회장 이석현)를 통해 1년간 한국일보 캐나다 주말판에 실리던 시작품 시리즈 ‘계절시첩’의 필진으로도 여러 차례 작품을 게재한 적도 있었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계간지 ‘신앙과 교회’ 등 언론에 틈틈이 신앙시를 싣기도 한 김 목사는 첫 시집 ‘떠나온 그리고 떠날 사람’을 펴내 서울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진 데 이어 1999년 8월 22일 예닮원에서 시집출판 감사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두 번째 책을 출판했을 당시도 현지언론에 저작 배경을 곁들여 소개됐다. 1978년에 펴낸 수필모음 ‘이민전화’(서울 계문사)로, 75년 11월부터 78년 4월까지 전화상담을 통해 “이민자의 고민 해결과 길잡이로 활약한” 인생, 종교, 민족, 이민 등 전반에 걸친 ‘1분 설교’라 할 수 있는 212편의 ‘소품’을 담았다.
김 목사의 글은 한마디로 쉽고 평범할 정도로 담백하며 꾸밈이 없다. 이민자에 의한, 이민자를 위한 글들이다. 이민자들과 어우러져 살다보니 그 삶 자체를 옮긴 글들이면서 이민 목회의 ‘우물’안 깊이에서 퍼내고 길어낸 고백이기에, 그의 글은 이 땅 한인들을 구슬리는 설득력이 있다. 웬만한 글쟁이들처럼 어정쩡하게 한국문학이나 영어 번역을 흉내낸 글을 그에게선 찾을 수가 없다.
한 예로—비록 문학작품이 아닌 공적인 글이기는 하지만, 교단 총회장이던 1994년 연말, ‘교포신문’과 ‘장로교공보’에 실린 성탄메시지 ‘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여’를 보면, 물레 돌리듯 술술 풀어간 그의 독특하고 담담한 어조를 체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찾아오신 예수님은 가난하고 굶주린 대중을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시고, 권세가 높고 돈은 많으나 내면의 문제로 고민하는 삭개오를 찾아가서 구원해 주시고, 살기 위해 몸을 파는 여인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어 바른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경제적 불황과 소수민족으로서 상처받는 우리 동포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그네로 이 땅에 찾아오신 겸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직까지도 우리들의 삶의 둥우리에서 역사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표 19)
여전도사 대행
우리 교회는 심방을 전담하는 여전도사를 두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특색이라기보다 담임목사의 방침이다. 평소 다른 교회를 보면 여전도사로 인하여 잡다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려니와 인건비를 줄여 예산을 절감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이다.
김창길 목사는 여전도사의 업무를 사모가 담당하면 된다고 했다. 지금도 여전도사를 채용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니, 부임 초기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김 목사는 부임 초 예배 때마다 김에스더 ((본서에서 김 에스더, 정에스더, 정영선, 김영선은 동일 인물로 김창길 목사의 부인이다.))사모를 교회입구에 세워 교인들을 영접하게 했고 예배의 안내를 맡게 했다. 가정 심방도 동행했어야 함은 물론이다.
교인들의 일이란 무슨 때를 정하고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지 않아도 김 목사는 때 없이 심방 다니는 목사로, ‘심방대장’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였다. 그는 실로 ‘심방으로 목회에 성공한 목사’였다.
어느 날. 교회에서 일을 마치고 김 목사 부부가 집으로 돌아가려던 중, 늦은 시간에 심방 가야할 일이 생겼다. 남쪽으로 하이웨이를 타고 가야하는 좀 먼 곳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사모는 성경 찬송을 들고 김 목사를 따라나섰다.
김 목사 부부가 심방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밤 1시였다. 토끼 새끼 같은 어린것들이 저녁밥을 먹지 못한 채 지쳐서 잠들어 있었다. 널브러져 있었다는 표현이 나을 것 같다. 그것들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 말라붙어 있었다. 사모의 눈에서 와락 눈물이 났다. 쓸어안으며 흔들어 깨워 보았다. 이제라도 뭔가 먹여서 재우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울다 지쳤는지 눈을 뜨지 못했고, 고사리 손을 펴서 엄마를 끌어안지도 못했다.
김에스더 사모는 그 어려운 목회 뒷바라지와 자녀교육에도 불구하고 훗날 80년대 말기에 프린스턴 신학교를, 90년대에는 예일 신학대학원을 나올 만큼 학구적이다.
새해 새 맘—새로워지는 교회
1981년 새해목표는 ‘새로워지는 교회’였고, 1월은 기도의 달이었다.
11일 주보 꼭대기에는 “일년 계획을 위해 하나님께 먼저 기도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응답 받으시기 바랍니다”라는 권고가 씌어있었다. 새해 매 주일 예배 30분전인 1시부터는 25분간 기도회가 열렸다.
1월 4일 첫 주일에는 새해축하예배와 함께 성찬식이 거행됐고, 1월중 새 일꾼들이 임명됐다. 제직들은 앞서 1월 3일 김기태 집사 댁에서 강세대 목사를 강사로 제직수련회를 가졌다. 둘째 주일은 예·결산 통과를 위한 공동의회로 모였다. 공동의회 후 김기태 집사 집에서 전 교우 초청 새해 만찬회와 친교파티가 열렸다. 푸짐한 상품도 준비되고 신나는 새해맞이 잔치 한마당을 치른 것이다(사진 19).
준 당회는 1월중 81년도 서리집사와 제직회 부서담당자, 성가대원, 교회학교 교사, 구역장 등을 임명했다. 서리집사는 남집사 12명과 여집사 6명 등 18명이었고, 구역별 구역장이 5명이었다. 성가대원들은 모두 20명이었고, 교사는 어린이부가 4명, 고등부 2명, 청년부 1명이었다. 1981년도 신임 제직회의 재적은 당회장과 안수집사, 시무권사와 명예권사까지 모두 24명이었다. 그해 첫 제직회(1월 4일)는 재적 24명 중 20명이 참석, 출석성적이 좋았다.
1월 제직회는 또, 전년도보다 약 5천 달러($4,522)가 더 많은 총 40,152달러의 새해 예산안에 3천 달러의 부흥회 예산을 추가, 사실상 1980년보다 약 8천 달러 더 많이 상향조정됐다. 새해에 재정에 관한 믿음도 늘어난 셈이다. 아울러, 전년도 회계 잔액 5,290달러는 미지급금의 지급과 새해 예산에 신설된 목회적립금 900달러를 공제한 잔액을 건축기금으로 이관했다. 임대 교회를 매입할 계획도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사진 20)
활성화된 구역예배
주윤서 교육전도사 부임
81년도 고난주간
위임·장립·취임
가정의 달
여가와 묵상
바치고 드리기
말씀·말씀·말씀 잔치
연말에 일꾼 뽑기
사진 21. 임마누엘회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모형 지성소를 견학하고 있다.
Members of the Emmanuel Association of Seniors, at their visit to the model of the sanctuary in the Philadelphia area.
사진 22. 임마누엘회 초대 회장을 맡았던 고 김숙자 권사는 2000. 11. 7. 소천, 임마누엘 동산에 안장 되시다.
The first president of the Emmanuel Association of Senior Adults, the late Kwansa Sookja Kim (2000.11.7), buried at the Emmanuel Hill church cemetery.
임마누엘회 창립되다
1981년 11월 22일 주일날은 본 교회역사상 퍽 의미 깊은 날이었다.
임마누엘회가 조직된 것이다.(사진 21) 55세 이상 남녀의 모임이었다. 원래는 그해 1월에 준당회에서 항차 이 모임을 조직하기로 하고, 김 목사를 고문으로 추대했었으나 정작 실제 구성은 연말에 이뤄졌다.
당시의 본 교회보(敎會報) 이름이기도 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God with us)는 뜻이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한 명칭이기도 하다. 따라서 임마누엘 회원들은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구약성도 에녹처럼 강건하게 살면서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희구하는 무리다.
초대 임원진으로는 회장 김숙자 권사,(사진 22) 부회장 오순덕 권사, 서기 오안순 권사, 회계 이봉금 집사 등이 선출됐다. 첫 임원진이 여성일색인 것을 보면, 당일 남자회원들은 거의 참석치 않았거나 아니면 임원직을 전적으로 사양했거나 긴가민가한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후 임마누엘회는 가장 효율적인 부서의 하나로 급속 발전했고, 특히 국내외 명승지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거나 교회를 돕기도 하며 보람있고 활기찬 여생을 보내는 모임의 하나였다.
임마누엘회의 가장 큰 업적은 아마도 90년대 초 버겐경로학당의 설립일 것이다. 웃어른들을 공경하는 경로사상 고취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전도 차원에서도 유익한 기구였다. 임마누엘회는 그후 교회업무의 중요한 부분들을 맡게 되는 등 없어서는 안될 기관으로 성숙하고 자리잡아가게 된다. 더욱이 미국과 한국 등 세계적으로 고령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노인목회가 중시되는 21세기에 그 무게가 더해 갈 것이다.
81년의 대외행사
그해 첫 대외행사로는 3월 29일, 우리 교회가 입주해있는 복음자유교회의 설립 90주년 행사에 본 교회 성가대가 초대받아가서 찬양한 기록이 있다.
또 7월 11-12일 이틀간 퀸즈한인교회에서 대뉴욕지구 교역자회 주관으로 열린 이단종파비판집회를 탁명환 교수(국제종교문제연구소 대표·현대종교 발행인)가 ‘통일교 또 구원파는 과연 무엇인가’란 주제로 이끌었다.
탁 교수는 ‘이단의 정체’(요일 2:18-23 / 요 10:7-12), ‘악령의 정체’(요일 4:1-6) 등의 제하에 열띤 강연을 펼쳤다. 목숨걸고 이단을 파고드는 연구비평가로 명성을 떨치던 탁명환 교수는 그후 90년대 상반기 중 소위 ‘말씀의 아버지’라 불리던 서울 대성교회의 박윤식 목사와 대성교회를 조사한 일로 그 교회 교인에게 피살당했다. 그가 하던 일들을 현재는 아들 탁지원 전도사가 필생의 과업으로 잇고 있다. 아무튼 그때 전후나 지금이나 미주 한인사회에서의 이단종파와 이단교리의 준동은 여전하다.
10월 18일 본 교회 주일예배는 미국인들이 교회당 전체를 사용하는 관계로 포레스트 수양관에서 야외예배로 드렸다. 이 수양관은 김 목사가 그해 휴가철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그날 오후5시에 저지시티감리교회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영화 감상회가 있었다. 이 행사에 대한 광고도 3주 째 계속 주보에 게재되어 그 중요성이 강조됐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은혜로운 영화였고 또 요즘처럼 비디오문화가 발달한 때가 아니어서 그런 명작을 감상할 기회가 흔치 않았다.
11월 1일 저녁에는 뉴욕한성교회에서 노회직영 신학교의 이병규 학장 취임식이 있었다. 17, 18일 이틀간은 미주한인장로회 제14차 노회가 필라델피아 에덴교회에서 개최됐고 본 교회 김 목사와 김기태 장로가 총대로 참석했다. 이 노회에서 김 목사의 위임 건이 허락됐고 위임국장으로 한성교회 김권석 목사가 임명됐다. 또 김 장로는 선교부 서기에 선임됐다. 11월 26일에는 동노회 북부시찰 연합 추수감사예배가 뉴욕한성교회에서 드려졌다. 예배 후 ‘교회별 특기자랑’이 있어서 각 교회에서 2명씩 선발된 사람들이 출연했는데, 본 교회에서는 성가대지휘자 김병기 집사가 독창을 하고 백남향 교우가 성경을 암송했다. 기타 참석자들의 찬양순서도 있었다.
그해의 성탄
이 해 성탄축하예배는 12월 20일에 드렸다. 주보에는 이런 글귀가 실렸다.
“에덴동산에서 죄로 말미암아 쫓겨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지금부터 2천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나라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다같이 동방박사처럼 경배하러 나갑시다.”
성탄절 당일 밤에는 오후6시부터 예년처럼 교회학교 유치부, 어린이부, 중·고등부, 청년부의 특별순서가 있었다.
미국인교회와의 선린(善隣) 유대
우리 교회는 80년대 전반까지 임대해 머물던 교회당의 임대주인 복음자유교회(Evan-gelical Free Church)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특히 연말에는 서로 어울려 친교를 나누곤 했다.
1981년 11월 1일의 정기 제직회는 남부지역으로 파견 이주케 된 미국인교회 목사를 위해 친교부(부장 서광진 집사) 주관으로 30달러 선에서 선물증정을 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 성탄절 선물과 겸하여 하기로 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31일에는 밤 9시부터 미국인교회와 친교다과회를 가진 후 11시부터 송구영신예배로 드렸다. 여전도회가 음식을 준비하고 성가대가 솔로를 준비하기도 했다. 교인 중 다수는 한복을 입고 나왔다. 또 다음 해를 위한 기도제목을 각자 생각해 와서 김 목사께 제출했다. 김 목사는 그 제목을 놓고 1년간 기도했다.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1982년 9월쯤 교회당 교회계단 손잡이가 파손돼 본 교회가 미국교회에 100달러를 주기로 제직회에서 가결한 일이 있다. 또 84년 연초에는 본 교회 성가대 가운이 찢어진 일로 인해 미국교회가 반액 부담하겠다는 통보를 해왔으나, 2월 정기제직회에서 그냥 수선하여 쓰기로 한 적도 있다.
성장하는 교회—새해 새 기쁨
기도와 심방, 묵상
82년도 가정의 달
성경퀴즈대회·찬송가 대회
곽규석 장로 초청간증 집회
여름과 수양
교회 창립 열 돌을 맞다
기념행사는 기념예배와 김창길 목사 위임식, 네 집사의 안수식, 그리고 23일부터 열린 한진관 목사 초청 부흥사경회 등으로 이어졌다.
기념행사 당일 여러 행사 후 설립 당시부터 계속 충성해온 오안순 권사, 양호식 집사가 10주년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위임국장 김권석 목사가 주례한 목사위임식은 이렇게 진행됐다.
김목사의 위임을 축하하기 위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이영숙 증경총무는 이런 축시를 보내왔다. (‘金 창길 목사 위임 축하’를 소재로 행시를 지은 것이다. 좌측에서부터 아래로 읽게 되어 있다.)(표 21)
10주년 기념성회가 열리다
그해의 주요 대내사항
그해의 대외행사
결산의 달
한편 12월 26일 예배 때 주보 속에 넣어진 카드는 83년 기도제목과 함께 전도대상자를 기도하는 중에 작정, 기록하여 송구영신 예배 때 드리도록 했다.
소망의 새해—다시 새로워지는 해
1월 2일 공동의회가 열려, 63,878 달러 규모의 결산과 70,000 달러의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당일 임명된 신년도 서리집사는 여자 10명, 남자 12명 등 모두 22명이었다.
그해 목표는 ‘다시 새로워지는 해’였다. 9일에 있은 1월 정기 제직회에서 김 목사는 소금의 직분이 되는 제직, 기도하는 제직, 말씀 읽는 데 주력하는 제직이 될 것을 당부했다.
1월 15일에는 이언년 권사가 명예권사로 추대됐고, 당일 제직수련회가 양호식 집사 집에서 박석린 목사(버겐장로교회)를 초청해 열렸다.
23일 예배 후에는 서태호 집사 집에서 신임집사 환영회가, 30일에는 서광진 집사 집에서 전 교우 신년축하 친목회가 성대히 열렸다. 신년축하 잔치는 당초 1월 2일 신년예배 후로 예정돼 있었으나 서집사 가족들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연기됐었다. 예배 후 식사와 윷놀이를 했는데 푸짐한 상품도 준비되어 있었다.
새해에는 구역이 7개로 늘어났다.
1구역은 저지시티였고, 2구역(저지시티), 3구역(호보큰) 4구역(린허스트·패터슨·벨빌), 5구역(파라무스·포트리·테나플라이), 6구역(이스린·에디슨·팔린), 7구역(퀸즈·브루클린)등이었다.
전년도에 비해 대폭 확대됐다. 뉴저지 쪽도 여러 구역으로 늘고 특히 뉴욕의 퀸즈와 브루클린에도 교인들이 분포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월 9일 광고시간에는 특별히 1982년도 전도상 시상식이 있었다(괄호 속은 대상자).
오안순(김은숙), 한원열(조영진·양연이), 김어금(배인숙), 양명자(김춘지) 원혜숙(김창신), 이선옥(권은숙), 유정순(이경희), 정주섭(조수훈·정옥희), 권은숙(이성배·이상금), 오순덕(최명진·김화자), 조동희(김동관·박화순), 김민자(김종덕·엄두식), 최재식(정주택·이문영·황성태) 김창길(김성천 최도현 노명담)
한편 김창길 목사는 연초 한달 동안 심기일전과 깊은 묵상을 위하여 성경 읽기와 기도에 힘쓰고 긴급한 심방만 하기로 했다.
이명(移名) 장로 거취 문제와 항존직 모임
1월 9일의 정기 제직회는 미국교회측의 임대료 인상안을 논의하는 한편, 지난해부터 수개월 째 본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는 김기태 장로의 거취문제로 현 직분에 대한 해명 요청을 담임목사께 했다. 김 장로는 일부 제직과의 불편한 관계로 떠났던 터였다.
김 목사는 “아직 해명 요건이 되어있지 않아 행정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3월 정기 제직회는 김기태 장로가 이명돼 간 것으로 서류를 보내왔음을 확인했다. 그후 7월 초순에 김 장로와 이혜숙 집사가 본 교회로 되돌아왔다. 1년여 만이었다.
당일 주보는 “김기태 장로(이혜숙 집사)께서 1년 1개월 동안 교회를 쉬셨다가 다시 본교회로 돌아왔습니다. 환영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당일 정기 제직회는 김 장로 건으로 격론이 벌어져 부득불 제직회가 산회되는 소동이 있었다.
8월 제직회에서는 교회의 모든 일을 장로·안수집사·권사 등 항존직분자들과 의논하여 결정하되 인사권에 대해서는 목사님이 주도하기로 했다. 장로가 공석중인 당회이기 때문에 당회 대신 항존직 모임에 교회 일을 맡기게 된 것이다.
7월 17일 주보에는 “지난 제직회에서 건의한 대로 앞으로 당회가 생길 때까지 항존직 모임에서 교회행사를 의논 결정하겠습니다”라고 명시됐다. 또, 8월 제직회 기록에는 내년(84년)에 장로 추천을 하여 선출하기로 했다는 사항이 보였다.
그후, 7월부터 매달 마지막 목요일에 항존직 모임이 있었고 첫 모임은 7월28일에 있었다. 항존직 기도회는 81년부터 줄곧 있어왔다.
김 장로는 그후 교회출석과 봉사생활을 열심히 했고 84년 1월 1일 협동장로로 임명됐으며 그해 11월 4일 재차 시무장로로 취임했다.
상반기 부흥사경회
새해를 맞아 부흥사경회가 2월 3-6일에 개최됐다.
본 교회 성회 순서지에는 반드시 찬송가 가사 전체를 싣는 배려를 했다. 당시 한인교회들이 저마다 다른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통일되기 전이어서 옛 ‘합동’찬송가로부터 ‘새찬송가’, 개편찬송가가 골고루 사용되고 있었다.
강사는 초기 중국인 선교사였던 방지일 목사(영등포교회 원로목사). 새벽기도회와 저녁집회로 모였다. 이를 위해 1월 20일 목요기도회는 준비기도회로 모였다. 방 목사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어찌할꼬’(행2:37), ‘다시 주신 삶’(갈2:20), ‘주신 지위’(행2:35), ‘주님의 형상으로’(빌3:21), ‘처음이요 나중’(요1:14) 등의 메시지를 통해 은혜를 끼쳤고 새벽기도회도 이끌었다.
매일 설교 직후에는 합심·통성 서원기도, 환영과 소식 순서가 들어가곤 했다. 집회 기간 동안 인근 지역교회 목회자 다수가 초청돼 순서를 맡았다. 그후 3월 정기 제직회에 보고된 전도부 집계에 따르면, 집회기간 동안 새벽기도회는 남자 7명, 여자 10명, 낮예배는 남자 46명, 여자 64명, 저녁예배 때 남자 26, 여자 40명이 출석했다.
방지일 목사는 특히 80-90년대에 미주지역 각 교회에 인지도가 높아 수많은 교회들이 강사로 청하곤 했다. 1911년 평북선천 출생인 방 목사는 선천 신성학교와 평양 숭실전문학교, 평양신학교 등을 졸업하고 장대현교회에서 목회를 했으며 총회파송 중국선교사로 21년간 사역하면서 중국 선도 한국학교장도 지냈다.
해방 후에는 한국교민회의 책임 아래 동포의 귀국을 알선해 미군의 도움으로 수 차례에 걸쳐 수 만 명을 귀국시켰다. 그는 또 1961년과 67년 두 차례 예장(통합측)의 경기노회 노회장을 지낸 것을 비롯, 총회전도부장, 재단이사장, 기독공보사장, 대한성서공회 재단이사장 등 수많은 공직을 맡았다. 만년에 경기노회 공로목사, 영등포교회 원로목사로 지내면서 숭전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를 받기도 했다.
그는 은혜로운 설교자일 뿐 아니라 60여권에 달하는 수많은 저서도 펴냈다. 특히 1991년에 펴낸 체험수상록 ‘눈물의 병(甁)’은 미주에도 폭넓게 소개되어 많은 감동을 주었다. 또 깊은 말씀 묵상의 결과로 신구약 성경 대부분을 망라한 강해서를 펴냈다.
한편 전도부는 부흥사경회를 계기로 ‘은혜성가집’ 2백 부를 편집 발행했다. 수록곡은 61곡. 이 곡들을 부를 때마다 은혜를 받곤 했다. 이 노래들이 은혜롭고 좋다 보니 성회가 끝나면서 상당수가 행방불명(?) 되어 주보에 “은혜성가집을 가져가신 분들은 교회에 가져오시기 바랍니다”란 광고가 나기도 했다.
50년만의 대 폭설
부흥성회가 끝난 그해 ‘대통령 날’(President’s Day)을 낀 2월 11일부터 미 동북부에 50년만의 대 폭설이 내렸다. 12일 밤까지는 곳에 따라 강설량이 18인치로부터 24인치를 기록했고 심지어 1ft를 넘은 곳도 없지 않았다. ((인터넷의 동북부 기후 역사 자료를 참조했음.))
13일 주일날에도 큰 지장을 주었으나 많은 교우들이 어려운 교통사정을 이기고 출석했다. 미주 동북부 지역은 겨울철에 이따금 폭설이 퍼붓기로 원래 악명(?)이 높지만, 이 해의 눈은 무릎까지 찰 정도로 정말 대단했다. 이 폭설과 부흥집회로 인하여 2월 하순 구역예배는 1·2구역만 드리고 다른 구역은 시간을 갖지 못했다.
한글학교와 태권도교실 개설
3월6일에는 교육부가 한글학교를 개교했다. 한글학교 부장은 김귀남 집사. 매주일 오후1시부터 1시30분까지 30분간 진행됐고 3개 반으로 편성됐다.
또 태권도 교실도 역시 3월 첫 주부터 개설돼 매주 예배 후 45분간 정재봉 사범이 지도했다. 80〜90년대에 많은 교회가 한국문화학교 등을 통해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범죄가 많아 늘 위험한 미국사회에서 개인 방어를 위한 호신술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도 우리네 전통문화와 정신 및 육체 단련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4월 3일의 정기 제직회에서는 교육부장 김귀남 집사가 “한글교육에 학생들이 흥미를 많이 느끼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 어른들이 시간을 꼭 지켜달라”고 부탁을 했다. 5월 제직회에서도 “오후1시 이전에 어린이들을 교회에 데려와 달라”고 재삼 촉구했다. 효과적인 한글학교를 위해서는 어른들의 시간 엄수가 필수적이었다.
모처럼 시작된 한글학교는 그해 7월10일부터 6주 동안 중지하기도 했다. 미국인교회에서 선교사 훈련을 위해 교실을 침실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고등부도 별도의 모임 대신 성인예배에 참석키로 했다.
9월 4일에는 한글학교 2학기가 개강됐다. 그날부터는 모임과 예배시간을 정확히 지켜, 한글학교에 지장이 없도록 다들 애썼다. 즉 오후 1시부터 장년부 성경공부가 본당에서, 성가연습이 주교실에서, 한글학교가 교실에서 각각 정시에 시작됐다.
특히 한글학교는 1시10분전까지 학생들이 모이도록 부모들이 힘썼다.
미국인교회 ‘8 계명’
교회가 성장하다보면 수입과 함께 지출도 늘게 된다.
임대주인 미국인교회는 한인교회가 나날이 성장해 가는 것을 보자 뭔가를 느꼈는지, 새해부터 교회당 월 사용료 300달러를 500달러로 인상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1월 제직회는 이대영, 서광진 두 집사에게 미국교회측과 상의하도록 위임했다.
2월 제직회 때 서광진 집사는 미국교회측이 새 계약서(contract)를 제시하면서 임대료 500달러 건과 아울러 2년 계약을 요구해왔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3월 제직회는 3월 7일에 이대영 재단이사장이 미국인 교회대표를 만나기로 했으나 고수광, 양호식 집사가 대신하도록 했다. 미국인교회당을 빌려쓰는 기간이 장기화되면서 그들의 시선은 점점 곱지가 않았다. 자체건물을 갖지 못한 한인교회들의 “서러운” 상황은 어디나 마찬가지였지만, 미국인교회와 비교적 친선관계가 좋은 우리 교회에도 가슴 아린 일들이 닥치곤 했다.
물론 미국교회 전통과 예절에 충분히 익지 못한 한인들의 잘못도 있지만, 교회당을 임대해주는 미국인교회 측이 대체로 한인교회가 성장하여 규모가 커지면 덩달아 그런 태도를 보이곤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특히 한인 밀집지역의 커뮤니티 보드 등에서는 한인교회들이 성장해 가면서 도로 주차 등의 문제로 껄끄러운 불평 불만을 토해놓기가 일쑤였다. 각별히 몸을 사리며 ‘요 주의’하는 한인교회들도 가끔 폭탄 같은 경고장 또는 ‘추방’ 통고를 받고 급기야 내어쫓기는 아픔을 유달리 많이 겪고 난 교회들은 자체 건물을 마련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이 붙곤 했다.
흔히 주일날 친교 시간 때 유난히 번지는 한식 냄새와 쓰레기의 뒤처리, 교회 시설 또는 기물 파손, 교회당 안팎을 마구 뛰어다니는 어린이들 등이 주 요인이 되곤 했다.
3월 6일 주보에는 이런 통보사항이 실렸다. “미국교회의 청원으로 교회 캐비닛을 성가대 가운 넣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앞으로 안내위원 및 주교교사들은 성가대 가운 있는 방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튿날인 3월 7일에는 월요일 미국교회 건물관리위원회와 고수광, 양호식 집사 등 본 교회 대표가 만나 교회관리에 대한 특별한 주의를 들어야 했다. 13일 주보에는 “온 교우들은 각별히 신경을 써달라” 는 주문이 떴다. 내용인 즉 이러했다.
1. 교회마당에서 절대로 농구를 하지 말 것.
2. 어린이들이 칠판에 낙서를 하지 말 것.
3. 교회당 안에서 어린이들을 뛰지 못하게 할 것.
4. 교실이나 부엌의 서랍에서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 말 것.
5. 본당의 헌금봉투나 기타 다른 것에 낙서하지 말 것.
6. 교회기물이 파손됐을 때 즉시 보고해줄 것.
7. 교회당 사용 후 의자정리 및 청소를 잘 하고 쓰레기통을 깨끗이 비울 것.
8. 교회에 올 때 정장차림을 반드시 할 것.
그리고 그 아래는 “이 모든 일에 부모와 교사, 학생들이 협력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주를 달았다. 우리로서는 예배 장소가 아쉬운 판이니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3월 20일 주보 상에도 “주일에는 어른이나 어린이나 정장 혹은 단정한 옷을 입고 교회에 나오시길 바랍니다”란 통보가 반복됐다. 4월 정기 제직회 때 봉사부의 김춘지 집사는 “교회 끝나고 돌아갈 때 안내위원들도 끝까지 남아 쓰레기 버리는 데 협조해달라”고 제직들에게 부탁했다. 김 목사가 3월 제직회 때 “교회 일에 제 삼자가 되지 말고 내 일 같이 참여하자”고 한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미국교회는 비판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고 우리가 본받을 점도 많겠지만, 미국인 주류 교회 다수는 으레 주인으로서의 자기네 입장을 더 강조하기 마련이었다.
아무튼 우리로서야 달거나 쓰거나 가릴 처지가 못 됐고 그런 계기를 통해 자체건물 마련을 위한 갈구는 더욱 커져만 가고 깊어만 갔다.
한쪽 손이 모르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 안에는 아름다운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교인들과 제직들은 끊임없이 교회에 무엇인가 바치기 원했고 봉사하기 원했다. “손 대접 하기에 힘쓰라”는 말씀처럼 성도들을 집에 초대하기를 즐겼고 남이 보지 않는 가운데서 교회 구석구석을 눈여겨보고 돌보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3월중에는 한 교우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아빠와 아기의 생일 기념으로 교회에 찬송가 30권을 헌납했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늘나라 보고에 보물을 쌓은 그 교우에게는 훗날 주님으로부터의 상급이 컸으리라!
그러나 교회에 비치한 찬송가는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교회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와 관련, 4월 제직회는 “앞으로 찬송가는 교회에다 두고 다니시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교회 살림살이를 갖고 계신 분은 서무부에 연락해달라”는 서무부장 서태호 집사의 요청이 있었다.
종려주일과 부활주일 교훈
사순절이 절정에 달해가던 종려주일 주보에는 이런 유익한 교훈이 실렸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유대인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의 뜻은 히브리말로 ‘구원하소서,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시편 118:25)입니다. 그후에 이 말은 기쁨의 갈채, 찬양의 송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수년래 우리 교회의 전통인 성금요일 가상 7언 기도회가 제5구역의 주관으로 금요일인 4월 1일 오후 8시에 열렸다.
“그날은 가능한 한 금식을 하시기 바랍니다”란 권고의 말씀도 주보에 게재됐다.
주보 상단의 교훈은 늘 유익했다. 4월 3일 부활주일의 주보 메시지는 이러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지은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주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진정 믿는 신자들은 이 땅이 나그네인 것을 알고 세상 욕심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삽니다.”
신문 ‘대포광고비’—내느냐 마느냐
본 교회가 정식 광고신청을 안 했는데도 한인 신문 ‘종교안내란’에 우리 교회 광고가 마구 실리는 적이 있었다. 다른 많은 교회들도 마찬가지였다.
80〜90년대 언론계에서는 신청이나 계약을 하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싣는 광고를 흔히 ‘대포광고’라고 불렀다. 미리 쾅 쏘아놓고 본전을 찾기 때문인지 ‘대폿잔’을 건네면서 동시에 손을 내민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론사에서 광고수익을 올리기 위한 상투적 전략의 일환으로 그런 ‘선심’을 쓴다는 것을 뻔히 알므로 과히 달갑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언론의 광고파워를 생각하면 교회 홍보 차원에서 고맙다고 해야할지 어떨지 때로는 난감했다.
그러나 교우들의 정성어린 헌금으로 신청하지도 않은 광고를 위해 ‘생돈’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판단하여, 4월 제직회 때 광고료를 지불하지 않도록 조치하고 “광고를 취소해 달라”는 서신을 신문사 측에 띄우기로 했다.
대외 행사
2월 13일 오후에는 뉴욕한성교회에서 동부노회 여전도연합회 제2차 총회가 열렸다. 50년만의 대 폭설이 내린 무렵이었다. 이어서 15일에는 뉴욕제일장로교회에서 뉴저지평신도신학원 졸업식이 거행됐는데, 본 교회 오안순 권사가 졸업했다.
그 즈음 뉴욕한성교회 김권석 목사가 지병으로 입원해 시찰회 소속 교회에서 교회 당 100달러씩 사랑과 위로의 성의를 표하기로 해, 본 교회도 3월 제직회 때 그러기로 결의했다. 김 목사의 환우(患憂)는 그후 계속 악화돼 결국 1년여만에 별세하기에 이른다.
4월의 대외행사로는 4월9-10일 이틀간 뉴저지연합장로교회에서 제직들을 위한 연합집회가 열렸다. 강사는 서울 청량리중앙교회의 임택진 목사였다.
또 제2차 여전도연합회 총회가 4월 10일 한성교회에서 개최돼 본 교회 오안순 권사가 회장에 피선됐다. 4월 19〜22일에는 미주한인장로회 제17차 동노회가 뉴욕한성교회에서 열려 본 교회 김 목사가 다녀왔다. 이 노회에서 김 목사는 뉴저지중앙장로교회의 임시 당회장으로 임명됐다. 그 교회 당회장이던 윤명호 목사가 다른 교회로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5월에는 제2회 장로교 전도대회가 4〜8일 한성교회당에서 열렸다. 당시는 자체건물을 가진 한성교회에서 노회의 웬만한 행사들이 죄다 열리고 있었다. 미주동부지역 장로교 선교협회가 주최한 이 대회 강사는 성경주해가인 대구제일교회 이상근 목사였다.
‘주여 말씀하옵소서!’란 주제로 열린 이 대회에서 이 목사는 ‘믿음의 3면’(딤후 3:12〜17), ‘하나님의 형상’(창 2:27〜28), ‘믿음의 3 대상’(엡 1:15〜19), ‘하박국을 통한 믿음의 교훈’(합 2:1〜8), ‘하나님의 형상’(창 2:27〜28), ‘누구든지 문을 열면’(계 3:20〜22) 등의 설교를 했다. 그 기간동안 새벽기도회도 함께 진행됐고 6, 7일 이틀간 교역자세미나도 곁들여졌다.
졸업철인 5월말에는 이선옥 전도사가 뉴욕장로회신학대학을, 최재식 구역장이 스티븐스 공대를, 김창신 교우가 럿거스 대학교를 각각 졸업했다.
한편 이선옥 전도사는 6월 5일부로 본 교회 명예전도사로 추대됐다(같은 날 강신원 권사는 명예권사로 추대됐다).
당일 오후에는 여전도회 연합회 월례회가 포트리한일교회에서 열렸다. 7월 1〜3일에는 할렐루야 83전도대회가 퀸즈 칼리지에서 개최됐다.
성경공부 열기 뜨거워
80년대 초부터 일찌감치 후대 교육을 유난히 강조해온 우리 교회는 해마다 성경공부 열기가 더해가고 있었다.
매년 암송대회나 퀴즈대회를 개최하는 것 외에도, 1983년 연초부터 전도부 주최로 성경문답지 풀기가 시작됐다. 성경공부 문제지를 배부하고 교우들이 답안지를 작성하여 안내석에 제출하면, 체크하여 돌려주곤 했다.
성경공부 제1호를 제출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았다.
오순덕, 최도현, 정주택, 이문영, 정영선, 이선옥, 정옥희.
3월 제직회 때 전도부장 최도현 집사는 “2월 현재 9명이 답안지를 냈다”며, “제직들이 성경문제집을 많이 내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4월에도 이를 재차 강조했다.
4월 24일자 주보에는 “성경공부 4호가 나왔습니다. 마치신 후에 전도부장에게 내어주시기 바랍니다”란 통보와 함께, 3호를 낸 교우들의 이름이 기록됐다.
오안순 오순덕 최도현 김영선 이선옥 정주택 정옥희 이문영 박정윤 배인숙 김어금 등이었다.
한편 5월 29일에는 구역 및 개인대항 성경퀴즈가 열렸다. 원래는 야외예배와 함께 열릴 예정이었다가 비가 오는 통에 교회에서 진행됐다(야외예배는 그 다음 주일인 6월 5일 드렸다). 범위는 창세기. 모두 100문제가 출제됐다.
퀴즈대회 수상자들은 다음과 같다.
구역상 : 3구역(호보큰·구역장 최재식)
개인상 : 이문영 이선옥 권은숙 오안순 김영선(이상 순위별)
장려상 : 김창신 박병연 박정윤 정주택 권상식
각 부의 성경공부도 왕성했다. 5월 첫 주일부터 오후 1시에 장년부 성경공부(담당 이선옥 전도사)를 시작했다. 아울러 청년회도 전년도부터 나름대로 성경공부를 해온 터였다.
6월 정기 제직회에서는 교육부장 권은숙 집사가 “고등부 학생들에게 집에서 성경 1장씩을 꼭 읽게 부모님들이 배려해 달라”고 당부를 하기도 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징후’의 하나였다.
10월 9일에는 성경문제지 모범 해답자와 전도자들을 시상했다. 수상자들은 이선옥 오안순 오순덕 정주택 김창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어머니 성경반이 조직되어 본 교회 평신도교육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한 해에 세 번 바뀐 교역자
1983년은 한해동안 어린이부 교육전도사가 세 번 바뀐 해였다.
2년 3개월간 시무해온 주윤서 전도사가 6월 19일 자로 사임하고, 후임자로 임광수 전도사가 부임했다. 주 전도사는 5월 제직회에 “본인 사정으로 주일학교 일을 계속할 수 없으니 다른 분을 물색해 달라”는 말을 전달했었다.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율동도 이끄는 등 교회학교 일을 헌신적으로 해왔고, 재임 당시 약혼식과 결혼식도 올렸다.
신임 임광수 전도사는 서울 도원동교회 출신으로 신일중고등학교와 장로회 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과 1년을 수료했다. 임 전도사는 본 교회 어린이 여름캠프도 이끄는 등 많은 수고를 했으나 5개월 후 서울장로회 신학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11월 초순 한국으로 떠났다.
연말을 한달 남짓 앞둔 11월20일 윤은수(마이크) 전도사가 새로 부임했다. 그는 노스이스턴 바이블칼리지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김 목사 박사학위 취득
김창길 담임목사는 수년간 목회생활을 겸한 연구와 각고의 노력 끝에 1983년 6월 7일 드디어 맥코믹 신학교 ((맥코믹신학교 : 미국장로교(PCUSA) 교단 신학교 중 하나. 대도시인 시카고에 위치해 있으면서 다변화된 사회를 위한 지도자 양성 차원에서 지구촌 선교, 도시선교, 현대교회의 지도자의 개발과 행정교육을 중시한다. 다민족 복합문화권을 적극 인정, 인종차별이 없는 것이 특징. 1829년 설립 이래 수많은 저명 지도자가 배출되었다. 마포삼열(Samuel Moffet)을 비롯 이길함, 곽안전, 배위량, 소안론, 새뮤얼 무어 등 한국교회 초기 미국선교사들의 잘대 다수가 이곳 출신이다. 최초의 한인동문은 1930년대의 배민수(뉴욕한인교회 6대 담임목사)였고, 50년대에 한철하, 김득렬, 백예원 등이, 70년대에 일부 한인들이 공부했다. 1978년에 시작된 목회학 박사 과정의 첫째 그룹이 81년도에 졸업햇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목사연수교육, 총회 여전도회 연수교육 등도 여기서 실시돼온 바 있다. ‘미국장로교 한인교회사’ 157-159쪽 참조.))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수여식은 당일 시카고대학교 라키펠러 채플에서 거행됐다.
김 목사는 학위를 받은 약 한 주 후인 6월 13일부터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그가 교우들에게 부탁한 기도제목은 이러했다:
겸손하고 정직하기 위하여,
말씀에 깊이 들어가기 위하여,
기도에 더욱 힘쓰기 위하여,
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교우들이 하나되어 서로 사랑하도록,
교우들의 가정, 가정의 기도 제목을 위하여.
김 목사가 겸손해지기 위한 기도를 우선으로 삼은 것은 그 즈음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기저기 초청도 많이 받아 목회자로서 대내외적 위상이 날로 제고됨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김 목사는 또 그 무렵 뉴욕한성교회 김권석 목사가 장기간 투병 중이어서 그곳 강단에서 자주 대리설교를 했다. 당시 김권석 목사의 회복을 위한 기도가 범 교단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6월 26일에는 예배 후 오후 4시부터 주교실에서 김 목사 목회학 박사학위취득 축하예배 및 논문발표회가 있었다. 이날의 순서는 이러했다.(표 22)
캠프와 수련회
그해 7월 18일〜21일 3박4일간 교회학교 어린이부가 ‘말씀대로 살자’(딤후 3:15)는 주제로, 포코노수양관에서 여름캠프를 가졌다. 어린이들과 교사들은 심신을 단련하며 마음껏 자연을 즐겼다.
캠프 조직과 일정은 (표 23,24,25)과 같았다.
캠프 신청 어린이는 추후 늘어나 당초의 반 조직(19명) 보다 캠프 수료자가 6명 더 많았다.
캠프 수료자 명단
벱 라이언, 이병민, 고정헌, 배재철,
김규호, 김규창, 장화인, 최인분,
김동욱, 조선경, 이유진, 김성미,
서재인, 최인실, 배샤론, 정은주,
고은수, 양제니, 고정수, 이줄리,
배미셀, 문석, 서재훈, 장동현, 문성계
(합 25명)
이에 앞서, 6월 5일 본 교회학교 교사 장경숙(유치부), 정재철 (유년부), 유정심(유년부), 권은숙(중·고등부) 등은 크리스천 아카데미 주최 교사강습회에 참가하기도 했었다.
어린이캠프를 마친 뒤 8월 15일 제직회에서 임광수 전도사는 “준비과정과 교사진이 미흡했으나 하나님 은혜 가운데 무사히 마쳤다”면서 “유년부 교사를 보완해 달라”고 부탁했다.
8월 6일부터 7일까지는 제2회 전교인신앙수련회가 열렸다.
주제는 ‘여호와를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 강사는 박맹술 목사(대구대봉교회 위임목사)였다. 회비는 가정당 45달러였고 식사는 예년처럼 각 가정에서 준비했다. 참가 가정 수는 모두 20가정이었다.
박 목사의 설교제목은 ‘하나님의 자녀’(요일 3:1-12), ‘믿음을 더하게 하자’(마 14:22-33),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그네 생활’(히 11:1-6)등이었다. 여름이 차차 식어가던 8월 25-28일에는 청년부가 제4회 수양회를 펜실베이니아에서 개최했다.
창립 11주년
8월 14일로써 교회설립 11주년을 맞았다.
주보에는 이런 글귀가 올라 있었다.
“그 동안 우리로 역경을 이겨내게 하시고 앞길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우리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여기 ‘성장하는 교회’란 말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참된 성장을 지향하고 있고 또 주님 은혜 가운데 실제로 서서히 성장단계로 들고 있음을 시사하는 말로 여겨진다.
또, 창립 11주년을 기념하여 본 교회에 10년간 계속 출석한 교우들에게는 기념패를 주기로 했다. 그해는 홍무승 집사와 이애순 권찰에게 주기로 하여, 한국에 기념패 제작을 주문하여 추수감사절에 수여됐다.
기타 주요 대내 사항
5월 29일 청년부 회지 ‘작은 빛’ 원고 모집.
10월 2일 성찬식을 앞두고 참회기도 하며 준비할 것을 예고하면서 회개의 제목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어긴 죄.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감당치 못하거나 교회 일을 방해한 죄. 거짓증거와 분노, 다툼 등 이웃에게 지은 죄 등.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양심을 속인 일 등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감사하는 기도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날로 늘어나는 전도자, 새 신자들
10월 9일 예배 후, 전도부 주최로 성경문제지 모범 해답자들과 함께 전도자들을 시상했다. 특히 이날 수상한 전도자들은 모두 11명이었고 이들이 전도한 대상자들은 총26명에 달했다. 과거에 비해 현저히 증가된 숫자였다. 교회가 성장하는 증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날 전도상 수상자들은 다음과 같았다(가나다순·괄호 속은 대상자).
고수광(조동근·위은희) 권은숙(이춘희) 김동관(양성철·이신옥·김공환)
김일영(김남연). 오순덕(최명찬·신복자·최명철·이명애) 이대영(정신옥)
이문영(장상일·안주현·장경희) 이상금(김덕림·이미라·이미경) 이애순
(이정호·이낙신) 최재식(천형권·홍순일·원혜경·이정목·송정화)
한원열(이진호)
하반기 부흥사경회 열다
11월 18일부터 20일까지 그해 하반기 부흥사경회가 열렸다.
주제는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자’(딤후 3:14), 강사는 토론토영락교회의 김재광 목사였다.
김재광 목사는 사흘간 ‘인간의 요구와 하나님의 선물’(행 3:1-10), ‘신앙생활의 3대 황금률’(살전 5:16-22),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야 4:13-17), ‘구하라 주신다’(마 7:6-12), 주일예배 때는 ‘최고의 은사’(고전 12:31/13:13) 등의 제목으로 사랑에 관하여 열변을 토했다. 또 주일 오후에 있은 제직수련회 때 ‘충성된 일꾼’(마 25:23-38)이란 설교를 했다.
강사 김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을 나왔고 토론토영락교회 위임목사로 7년 시무했고 미주한인장로회 총회장을 지냈다. 원로목사로 은퇴한 뒤인 90년대에는 러시아선교사로 사역하게 된다.
그해 연말은
12월 22일 목요일 밤에 성탄축하예배를 드렸다.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표 26)
연말인 31일은 한·미 합동 디너파티를 갖고 송구영신 예배를 드렸다. 이날 우리 교우들은 1984년도 소원 기도 제목을 담임목사께 적어냈다.
김 목사와 EFC 미국인교회 담임 마이클 플로레스(Michael A. Flores)목사가 한·영 이중언어로 진행한 합동 송구영신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