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성장기(1991-1995)

#2-04 성장기(1991-1995)


#2-03 안정기(1985-1990)

목차

#2-05 성숙기(1996-2002)

2부
우리 교회의 발자취 
| Chapter 2 The Church History

4. 성장기(1991-1995)  | Growth Period

1991년

날마다 더하는 교회

새해 표어는 사도행전 2장 47절을 따라 ‘날마다 더하는 교회’로 정해졌다. “우리 교회가 올해에는 신령한 면에서 질적 양적으로 더해질 것을 기도하고 노력합시다”란 주보의 교훈이 성도들에게 힘을 더해주고 있었다.
김창길 목사는 새해 첫 주일인 6일 ‘날마다 더하게 하소서’란 설교에서 이 표어를 정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본 교회보 ‘임마누엘’ 제3호(1991년 3월 31일자) 참조.)) 90년 11월 어느 날 기도원에서 새해를 준비하던 중 행2:47 성구가 마음에 와 닿아 당회에 제의한 즉 만장일치로 통과됐다는 얘기였다.
김 목사는 이런 말도 했다.

“참회기도를 드리던 한 장로님이 4·5부 예배를 드리도록 해달라고 기도할 때 제 맘속으로는 감사하고 기쁘면서도 ‘아이쿠, 큰일 났네!’ 했습니다. 사실 어떤 때는 주일 대예배에 3번 설교하기도 쉽지 않거든요. 물론 장로님의 기도는 그렇게 목사가 많이 설교하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커져서 교회당을 다시 신축하게 해달라는 뜻인 줄 압니다.” ((실제로 그해 하반기에 4부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러면서 김 목사는 19년 역사 중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유는 교인수가 많아질 때 자칫 오만하여져 신앙의 질적 향상에 소홀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 이상의 딴 것은 없다” 면서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요 우리는 그분께만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시 집권 말기이던 당시, 미국 내 경제불황이 심각할 때였으나 우리 교회는 새해 예산을 전년도보다 12만 불이 더 많은 583,000불을 책정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하에 김 목사의 새해 교훈을 요약해 본다.

주께서 “날마다 더하게 하신”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러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였다. 장 칼뱅 ((영어명 존 캘빈. 프랑스 출신인 스위스 종교개혁가. 장로교 시조.))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세례와 성찬이 집행되는 곳, 성도들이 친교하는 곳, 하나님의 말씀을 훈련되는 곳으로 정의했다. 우리 교회가 곧 그러해야 한다. 두 번째로,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였듯, 우리 교회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있는 동안은 그의 가르침에 순복해야 한다. 또 초대교회가 믿는 자들이 늘 함께 한 교회였듯, 우리 교회도 한 형제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초대교회가 기도에 전혀 힘쓰는 교회였듯이 우리도 위로부터 기도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함으로써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두 번째 지 교회를 세우다

6일 오후에는 본 교회 출신인 김진양 전도사를 통해 새로 개척하게 된 웨체스터한인장로교회 창립예배가 드려졌다. ((교회당 위치는 15 S. Bedford Rd. Mt. Kisco, NY 10549였다.)) 우리 교회가 창립20주년을 앞두고 개척하기로 한 3개 지교회 중 두 번째 개척교회다. 김 전도사는 본 교회에서 집사직으로 시작해 전도사와 성가대 지휘자를 거쳐 목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김진양 목사는 1992년 10월 이 교회를 떠나고, 김영 목사가 후임자로 부임한다.))
김창길 목사가 집례한 이날 행사에서 교단총회장 김정국 목사가 말씀을 전했고 뉴욕노회장 정영환 목사 등 많은 내빈들이 참석, 새 교회의 미래를 함께 축하했다. 김진양 전도사는 “부족한 몸이지만, 한 마리의 어린양도 소홀히 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몸과 열성을 바쳐 봉사하겠다”고 다짐했다. ((1991년 1월10일 중앙일보 보도내용 참조.))
행사에 앞서 김창길 당회장은 다음과 같은 기념 메시지를 발표했다.

웨체스터 한인장로교회를 창립하면서

당회장 김창길 목사

뉴저지한인장로교회가 뉴욕주 웨체스터 지방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선교를 위해 지교회인 웨체스터 한인장로교회를 개척케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많은 이민교회들이 그래왔듯이 저희 교회도 18년 6개월 전에 교회도 빌리지 못한 채 갑자기 뉴저지 한구석에 있는 사일러스 칸딕트 공원에서 첫 예배를 시작하였습니다. 몇 번은 가정에서, 그 다음에는 두 번이나 빌린 교회에서 좀 나가달라는 노티스를 받고 이곳저곳 찾아다니다가 지금의 교회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우리의 힘으로 찾은 것도 아닙니다. 돈이 준비되어서 산 것도 못됩니다. 운이 좋아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 동안의 어려움을 인내해서 얻은 결과도 아닙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였습니다. 거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찬송가를 자주 부릅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네 /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 이 몸 밖에 더 없어서 이 몸 바칩니다

우리를 위해 먼저 십자가에 구속해주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전해준 자가 있어서 듣고 배우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는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 되자’ 라는 표어를 가지고 뉴저지 브런스윅 지방에 첫 번째로 지 교회인 브런스윅 한인장로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또다시 올해는 ‘날마다 더하는 교회’란 표어로 두 번째 지 교회로 웨체스터한인장로교회를 창립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해는 우리 교회에 두 분의 부목사님을 보내주시고 제2교육관을 구입하게 하시고 이제는 교인이 700명을 헤아리는 교회로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입이 열 개 있더라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4월이면 비자를 수속하고 있는 박용규 목사님이 콜롬비아 선교사로 들어가십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 교회는 교회 안 살림에 여러 가지 필요하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남아서 하는 선교가 아닙니다. 모자라지만 해야할 일이고 사명이 있기에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선교에 온 교우들은 기도와 협력과 봉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웨체스터 한인장로교회에 파송하는 김진양 전도사님은 본 교회의 서리집사를 거쳐 전도사로 2년 3개월을 시무했으며 오늘 창립예배에 참석하는 호산나 성가대의 초대 지휘자로서 공헌이 큽니다. 역시 김진양 전도사의 부인인 유영은 사모도 본 교회 서리집사와 호산나 성가대의 반주자로 수고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신앙이 돈독하고 소명감이 투철하며 책임감이 강한 김진양 전도사를 웨체스터 한인장로교회에 파송하는 데 전도부와 당회가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보냅니다. 이 길은 고난과 역경과 고독과 싸우는 길이며 때로는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또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반과 비난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길이요 복음을 전하는 길이기 때문에 부름받은 자만 가는 길입니다. 앞으로도 김진양 전도사님과 웨체스터 한인장로교회를 위해 계속적인 기도와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장래는 창대케 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웨체스터한인장로교회에 임할 것을 믿습니다.

다같이 동네에서 ‘몸조심’

새해부터는 교회가 보다 더 활기차고 생기 띤 모습을 보였다.
우선 교회 주변 횡단보도 안내 담당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교회 앞길과 옆길이 번잡하여 성도들의 교회당 출입과 안전운전에 늘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청년남전도회 봉사부는 주보 간지(間紙)에 12 가지 안전주의사항을 나열했는데, 신호등 준수와 어린이의 보행 조심, 보행자들에 대한 예절, 파킹규정, 지도담당 지원요청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91년 교회주보철(1월 21일) 참조.))
특히 Edsall Boulevard 선상에 이중주차나 정차를 삼가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가곤 했다. 두 달 남짓 후 3월 10일에는 인근 경찰서에서 와서 아이들이 교육관 뒤뜰에서 놀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갔다. 위반하면 교육관 사용허가가 취소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9월초에는 인근 지역민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기 위한 유의사항을 교인들에게 알렸다.
교회주변에서 차량을 오르내릴 때 이중주차를 하지 말도록. 신호등을 지켜 꼭 보행로로 통행할 것. 차도를 건널 때 어린이들을 보살필 것. 교회 앞 옆길에 통행자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길을 막지 말도록. 가능한 한 큰 소리를 지르지 말 것. 교회에 단정한 옷차림으로 오갈 것 등이었다.
이러한 ‘몸조심’은 교육관 사용허가를 유지해야 할 우리 교회 나름의 자구책이면서 적극적으로는 지역사회에 모범적인 한인 교회상을 부각시키는 한 길이었다.
한편 새해부터 당회는 임마누엘회 연령을 60세 이상, 청년 남전도회와 청년여전도회는 25살 기혼자로부터 40살까지로 결정했다.

구역 교구제(敎區制) 시작되다

새해부터는 구역모임을 효과적으로 분담하기 위해 크게 2개 교구로 나뉘어 운영되기 시작했다. I교구에는 제1〜11구역이 속했고, 교구담당 교역자는 조영진 목사, II교구는 12〜22구역에다 담당자는 김흥교 목사였다. 당시 구역편성은 별도 표와 같다.(표 39)

표 39
구역 편성표

교회음악의 새 면모들

1월중 당회와 음악부는 주요사항 한가지에 합의했다. 교회예배 중 회중 찬송가를 부를 때, 미국교회처럼 마지막 절 직전에 간주를 한 후 나머지 절을 부르기로 한 것이다.
“오늘부터 교회예배 중 찬송 부를 때 매 찬송마다 마지막 절에 간주를 한 후 마지막 절을 부릅니다. 간주하는 동안 찬송의 뜻을 음미하며 가사를 통해 조용히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인들의 교회는 이렇게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앞으로 미국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해나갈 텐데 좋은 것이면 빨리 사용하기로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 대장, 총무 등이 찬성했습니다.” ((1991년 1월 13일 주보 ‘교회소식’란.))
사실 이 관습은 김 목사가 부임하던 해인 1980년 초에 실시하기 시작했다가 1983년 정초에 그만두었던 관습이었다.
교회음악 사역도 날로 새로워지고 확장돼갔다. 새해부터 오케스트라를 만들기로 하고 청년부·중고등부·초등부 대상으로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와 플루트 등 관현악기 연주자 모집에 들어갔다. 2월 l일에는 가브리엘 성가대 반주자로 홍순양 양이 부임했다. ((당시 지휘자는 이상원(가브리엘성가대), 이한섭(호산나성가대), 김홍일(할렐루야성가대) 집사들, 피아노 반주자로는 경운, 김영숙, 홍순양 교우들, 오르간 반주자로 김미경 교우 등이 봉직하고 있었다.))
그해 8월 17〜18일 이틀간은 우리 교회로서는 첫 번째 성가대수련회를 박재훈 목사(캐나다 토론토 큰빛장로교회) ((현재 원로목사.))를 초청, 본당에서 가졌다. 성가대원 및 성가대 후보자들이 참석하여 유익한 지혜와 지식을 터득했다.
박재훈 목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우리네 고유의 찬송가를 많이 작곡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 어린이들이 어머니주일이면 으레 부르곤 하던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통일 찬송가에 실린 ‘지금까지 지내온 것'(460), ‘눈을 들어 하늘 보라'(256), ‘어서 돌아오오'(317),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311) 등.)) 과거 한양대학 음대 작곡과 교수생활과 영락교회 성가대 지휘자 생활을 오래하면서, 수많은 어린이성가와 찬송가, 성가합창곡 ((박재훈의 대표적인 성가합창곡으로 ‘목마른 사슴같이’(시 42편)가 있다. 한국적인 가락에 다소 서구적인 화음을 결합시킨 곡이다. 캐나다에 거주하기 시작한 후 그는 읊조리는(吟誦) 형태의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합창 시편가를 다수 작곡했다. 그의 초기 성가작품으로는 구세대가 애창하던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2중창 또는 2부 합창)가 유명하다. 관련 성가합창곡집 악보 참조.))과 독창곡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는 소프라노 성악가들이 즐겨 부르는 걸작품이다.)), 오페라 ‘에스더’ 등을 작곡한 한국 유수의 교회음악인이었다. 또 한영찬송가위원회의 음악 전문위원으로 활약했었다. ((미국장로교 한인교회협의회가 발간한 이 초기 한영찬송가는 1976년 4월말 발간계획에 들어가 2년 후인 78년 부활절을 기해 5000권(755쪽)을 발행한 이래 92년 6월까지 16년간 계속 간행 보급했다[미국장로교한인교회사 52〜57쪽 참조]. 그후 다양한 출판사에서 비슷한 한영찬송가를 발행했고, 현재는 한국찬송가공회에서도 (통일)찬송가의 한·영어 판을 계속 펴내고 있다.)) 그는 캐나다에서 목회하면서도 국내외에서 자주 초청을 받기도 했다.
박 목사는 집회기간 중 ‘찬미의 제사’(시 69:30-31),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하나님’(시 22:3) 등의 말씀으로 성가대원들에게 큰 격려와 많은 교훈을 주었고, 18일 오후 성가대헌신예배 때는 ‘측량 못할 은혜, 영원한 찬송’(엡 1:3-14)이라는 감동적인 말씀을 전했다.
10월 27일에는 당초 4부 예배로 확장됨에 따라 김홍일 집사를 할렐루야 겸 호산나성가대 지휘자로, 4부 시온성가대 지휘자로 정성훈 선생을, 시온성가대 소집책으로 정우영 집사를 각각 임명했다. ((정성훈 지휘자: 연세대학교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매니스(Mannes)스쿨에서 음악이론의 석사과정을 이수 중이었다.))

레이저프린터를 구입하다

이 무렵, 교회는 창립기념예배 시 헌금으로 레이저프린터를 구입했다. 주보에는 “주보 발행을 위한 ‘레이저 컴퓨터’를 구입했다”고 잘못 기재되기도 했다. ((‘레이저 컴퓨터’라는 것은 아직 없다. 그러나 레이저빔은 프린터와 CD플레이어 및 CD리코더 등에 실제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무렵 주보 텍스트는 언뜻 보기에도 훨씬 단정하고 깔끔하게 눈에 비쳤다. 요즘은 레이저프린터가 흔해빠지고 칼라 레이저프린터까지 나오는 수준이지만, 당시는 ‘인쇄문화의 대 혁명’이라고 할만한 존재였다.
비록 화면의 폰트가 어설프게 보이더라도 인쇄물 자체는 기존 사진식자를 능가할 만큼 깨끗했기 때문이다. 레이저프린터가 주로 가루잉크를 사용하는 반면, 액체잉크를 사용하는 잉크제트형 또는 ‘데스크제트’ 등의 프린터가 당시 이미 나와 있었으나, 인쇄된 글씨 모습은 레이저프린터와 ‘천지 차’가 있었다. 잉크제트 프린터는 물론 중대형 레이저프린터 개발에 일찍이 휼레트-패커드(Hewlett-Packard)가 선구적 역할을 했다.

앞서 떠나는 님들

91년 1월 한달 동안 하늘나라로 돌아간 분들이 유난히 많았다. 주보 상으로는 모두 4명이었다. ((1991년 1월 13일 주보 교회소식란 참조.)) 우리 교회가 커갈수록 매년 결혼과 장례 건도 덩달아 잦아져갔다.
1월 6일 조영진 목사 조모(10일 장례식)
1월 8일 박명숙 권사 입관예배(김창길 목사 집례)
주문원 교우 부친(13일 추도예배)
박선옥 교우 부친(서울서)
한편, 그해 하반기에 장례예배를 치른 것으로 주보철에 나타난 이들은 고 김은규 여사(7월 5일), 이정석 성도(11월 30일)였다. 김창길 목사가 집례한 두 사람의 장례식 순서지를 대비해보면, 나름의 특색이 있다. 전자는 고인의 약력을 수필을 쓰듯 몇 문장으로 담담히 읊어 나갔고, 후자는 약력을 간단히 요약하여 조목조목 나열하고 유족상황을 상세히 소개한 것이다.
신문 부고에 보니, 이영규 전 뉴욕한인회 부회장의 부친인 이정석 성도는 76세를 일기로 하늘로 떠났다. 전주 리(李)씨 ((조선왕조 왕손인 전주 리(李) 씨는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을 시조로 한다.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2대 손이다. 전주 리씨는 모두 122개 파로, 대부분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派朝)로 두고 있다. 그중 가장 번창한 파가 효령대군파다. 전주 리씨 효령대군파 항렬표에 따르면, 본 교회 이정석 교우의 경우처럼 ‘정’(廷)자 돌림은 21세손으로 표기돼 있다. 세(世)와 대(代)는 다르며, 효령대군의 6자(六子)가 1대로 쳐진다. 관련 웹사이트 참조.)) 효령대군 ((효령대군(孝寧大君): 조선왕조 제3대 왕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4남4녀 중 둘째아들 보(補). 양령대군의 아우이자 충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이다. 일찍이 20대 초에, 아우 충령에게 성덕이 있음을 발견, 임금자리를 양보하고 충신으로서 아홉 조정을 내리섬기며 왕실어른으로 대접받았다. 서울시는 1984년 11월 7일 청권사 앞길을 ‘효령로’로 명명했다. (주85와 같은 자료 참조).))의 19대 손이기도 했다. 놀우드에 거주 중이던 그와 부인 김금이 교우는 만년을 보람있게 보내고 있었다. 전년도인 90년 12월 30일 주일 3부 예배 후 임마누엘 전원을 초대해 오찬회도 가졌던 것이다. ((당일 주보 교회소식 참조.))
성경은 성도들의 죽음을 매우 귀히 여긴다. 전도서 7장 2절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교훈 한 것이 그 예다.
모세는 “우리의 연수(年數)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탄식했다(시 90:10). 장례식은 짧고도 긴 인간생명의 무상함과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해 줌과 동시에, 하늘 영생에 대한 믿음, 마지막날의 부활을 알리는 소망의 전조가 된다. 또 그 어느 때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우리 주님은 식구를 잃은 유가족에게 언제나 깊은 온정을 느끼시고, 큰 위로와 긍휼을 베푸시고 소망이 되셨다. 나사로를 살리시기에 앞서 그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또 청년 외아들을 잃고 우는 나인성 과부를 보시고 측은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위로하실 뿐더러 가까이 가서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으로 청년을 살리셨다(눅 17:7-17).
성경은 또, 한 인생에 있어 ‘계수’(計數·count)되는 기간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기간만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5장과 11장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 계열에 속한 셋의 후손과 셈의 후손은 나이와 함께 족보를 상세히 기록했지만, 가인의 후손, 야벳과 함의 후손들은 이름만 나열했을 뿐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에게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시 90:12).

성전건축 위원회와 100일 기도

1월 13일 제직회는 교회증축을 위한 확장위원회를 두기로 결정, 위원선정을 당회에 일임했다. 3월 31일자로 발표된 증축위원은 정주섭 위원장 외 위원 33명이었으며, 후에 추가됐다. 기도회 때마다 교회증축 기도제목이 빠지지 않았고 수시로 위원회 모임이 열리곤 했다.
7월에는 증축위원회를 ‘교회건축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위원장 정주섭 장로와 서기 김의신, 회계 조영진, 총무 민의홍 제씨 외에 42명의 위원들로 강화했다.
8월 5일부터 100일간은 매일 새벽 성전건축을 위한 기도회를 교회당에서 오전5시30분부터 가지면서 매일 평균 60명의 교우들이 합심하여 기도를 했다. 이 기도를 하나님이 기특하게 여기시고 조만간 응답해 주신 것은 물론이다.
성전건축을 위한 기도기간 하반기인 51번째 날부터 100일까지는 매일 새벽기도 전 5시부터 25분까지 성도들 자신의 기도제목을 위해 담임목사가 함께 중보기도를 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시간 관계로 하루 2명 이상은 위하여 기도하지 못했지만, 부교역자에게 신청하여 해당 일을 받고 기도하기 전 기도제목을 담임목사에게 제출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새벽 기도하는 교우들은 5시 25분 후부터 본당에 들어오게 했다.

성서대학 ((뉴욕중앙일보 1991년 7월27일 기사 일부 참조.))

뉴저지성서대학(학장 김창길 목사)은 그해 1월 25일 제2회 졸업식을 갖고 2월 첫 주부터 개강했다. 마감 전까지 8교회에서 33명이 등록했다.
성서의 올바른 이해를 통한 교회지도자 및 사회봉사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본 대학은 타 신학대학과 달리, 성서과와 주교교사과(각 2년)만 개설, 교회와 사회에 올바른 지도와 봉사를 할 일꾼을 초교파적으로 배출해왔다.
1988년 1월 봄 학기 때부터 신입생을 모집한 성서대는 그간 2회에 걸쳐 총18명(1회 13명, 2회 5명)을 배출했다. 이 해에는 1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할 예정이었다. 현 재학생은 화요반 19명, 수요반 15명 등 모두 34명이었다.
당시 재학생의 구성은 장로 1명, 집사 25명, 권사 2명, 평신도 6명 등. 교수진의 ((당시 과목별 교수진은 이러했다. 일반서신(송병기), 시문학(윤사무엘), 교회사(이학권), 성서해석학(정광호), 종말론(김에스더), 청지기학(조덕현), 소선지서(박종만).)) 지도와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가 진지했다.
수업은 당시 화·수요반으로 나눠 주 1회 실시함으로써 직장인들이 직장과 가정생활의 시간대에 맞춰 선택, 부담 없이 과정을 이수케 하고 있었다. 수업료는 학기당 200달러로 저렴했고, 성적 우수자에게는 수업료 전액을 면제해주고 있었다.
3월 8〜10일에는 학생회 신약신학(박준서 박사)와 구약신학(박창환 교수·전 장신대 학장) 공개신학 강좌도 개최했다. 박창환 교수의 경우 장신대 교수와 학장을 거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렀고, 그 무렵 맥코믹신학교 초청교수로 와있었다.
특히 과거에 신약성서 원어인 그리스어 강의와 그리스어 학습교과서 저술로 명성을 떨쳤었다. 그는 사흘간 4복음서 신학 연속강의로 신학생들과 성도들의 성경말씀 이해에 큰 도움을 끼쳤다.
9월에 시작된 2학기에도 30여명이 등록했다. 12월 18일에는 제3회 졸업식을 갖고 10명의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공학, 약학을 전공한 박사출신들, 공인회계사, 은행원 등 다양한 직종의 성도들이 포함돼 참다운 교회일꾼이 되려는 열의를 보였다.(사진 39)
학생들의 요구에 응해 향후로는 헬라어, 히브리어 코스도 개설, 원어로 성서이해를 돕도록 하며 장차 학교를 독립시켜 이민2세 지도와 평신도훈련에 주력해볼 구상도 섰다.

사진 39 뉴저지성서대학 공개 신학강좌에서 특별찬양을 하는 동문들
New Jersεy Bible Institutε alumni perfonn special hymn at their symposium

직장인을 위한 금요예배를 시작하다 ((이 부분의 상당량은 다음 자료를 참조했다: 뉴욕 한국일보 뉴저지 판 5월 보도내용 중 관련기사(발행일 불명).))

그해 매주 금요일 정오에 한인 직장인 및 개인사업가들을 위한 예배를 본교회당에서 드리기 시작됐다. 첫 예배는 5월 3일, 12시 15분부터 45분까지였다. 신문지상에도 이를 위한 안내광고가 실렸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뉴저지한인장로교회에서는 직장인 및 개인사업을 하시는 분들의 신앙생활과 영적생활의 성장을 돕기 위하여 금요일 점심시간을 이용한 금요 낮 예배를 마련합니다. 우리의 삶이 떡으로만 채워질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의 많은 발걸음을 기다립니다.”
이 정기모임에는 매주 초청강사가 초빙됐고 본 교회에서 간단한 식사가 제공됐다. 직장의 점심시간을 이용해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바쁜 생활 속에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직장인 예배는 직장에서 발생할 만한 문제들을 신앙으로 해결하는 길도 모색하는 기회가 됐다.
직장인 예배는 당시 한국에서는 새문안교회, 서소문교회, 영락교회 등에서 이미 실시되고 있었으나 한인사회에서는 본 교회가 최초로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지역별 기독실업인회의 정기적 모임도 강화되고, 신자 직장인들의 모임이 생겼고 미국 회사들도 상당수가 비슷한 성경모임을 실시하고 있다.)) 당시 포트리에는 삼성·럭키금성·현대그룹 등 한국계 지상사들이 다수였고, 한인기업체도 많아 이 프로그램의 발전성이 큰 것으로 보였다. 참석자들은 한시간 내로 예배와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직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김창길 목사는 어머니날에 즈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한 직장인은 “바쁘게 돌아가는 직장생활 때문에 이번 어머니날을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한국의 부모님에게 안부전화라도 드려야겠다”고 금방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다. 참석자들은 “이 예배가 각박한 생활 속에서 자칫하면 잃기 쉬운 삶의 가치와 일의 의미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고 만족을 표시했다.
얼마 후 직장인예배의 모임 시기는 목요일로 바뀌었다.

김창길 교협회장 임기 만료

그해 5월 6일 김창길 회장을 비롯한 뉴저지교협의 제4대 교협회장단이 제5회 정기총회와 아울러 임기가 만료됐다.
성베드로한인성공회당에서 열린 이날 총회에서는 김 회장의 후임으로 오다위 신부(보고타성공회)가 제5대 교협회장으로 선출됐다. 또 15개의 분과위원회 중 사모분과위원장 직은 본 교회 김에스더 사모가 맡았다.
김 회장은 교협뉴스(2호)에 실린 이임사에서 “지난 1년은 내게 짧은 것이 아니라 긴 세월이었다”면서 “뉴욕교협에서 분리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주성 확립과 교협이 나갈 방향과 지교회간의 신뢰감을 다져야하는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임기 중에 실천한 크고 작은 사업 10가지를 회고하고 취임당시 공약했던 이사회 조직을 실천하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사진 40. 메모리얼 데이 퍼레이드
Memorial Day Parade

본격화된 메모리얼 데이 퍼레이드 ((1991년 5월26일자 주보, 1991년 5월30일자 뉴욕한국일보 기사 참조.))

매년 미국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에 실시돼온 팰리세이즈팍의 한인 퍼레이드가 그해 처음으로 100명 규모로 늘었다. 그 동안 지역 한인상가의 급속한 진출로 백인 주민과의 사이에 다소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본 교회는 성심으로 참여해 지역화합의 계기를 삼곤 했다.(사진 40)
본 교회와 팰리세이즈팍 상인번영회(회장 남완희)가 중심이 되어 구성한 퍼레이드대는 5월 27일 오전 10시 미국 행진단과 합류, 브로드애브뉴 일대를 약 2시간 행진했다. 한인퍼레이드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뉴욕국악원의 길놀이 팀과 본 교회 어린이를 비롯한 태권도 시범단, 동부지구 미한인재향군인회 전역군인들을 초청해 참가시켰다.
우리 교우들을 포함한 한인들의 화려한 한복차림과 미소, 길놀이 팀의 민속장단, 태권도 팀의 무술시범 등은 주민들의 눈길을 모으기에 충분했고, 미 군복을 입은 재향군인들은 미군들과의 연대감을 북돋았다. 이날 본 교회는 팰리세이즈팍 도서관에 도서를 기증했다.

한국학교 종강예배 및 학예발표회

8월 23일 금요일에는 뉴저지한인장로교회 한국학교의 여름학교 종강예배와 학예발표회가 열렸다. 교감 김성인 집사가 인도한 이날 예배 때 김창길 목사가 말씀을 전했고, 2부 여름학교 발표회 때 무용반과 음악반까지 모두 10반이 나와 뛰어난 솜씨로 재롱을 보였다. 순서에 나타난 교사들만 모두 14명이었다.
그 즈음 본 교회 한국학교는 자타의 인정을 받는 수준 높은 학교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해 1학기말 수료증을 받은 어린이들은 모두 132명이었다. ((유치1부(13명), 유치2부(25), 1학년 17명, 2학년 15명, 3학년 18명, 4학년 10명, 특수I·II반 34명 등.)) 또 각종 수상자도 26명이나 됐다. ((우등상·선행상 수상자가 각 9명, 말씀상 8명 등.))
학교 안내 내용에 따르면 학교 교육 취지가 이러했다.
“본 교회 한국학교는 미국에서 자라나는 우리 한국인 2세들에게 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어 미국 안에서 한국인으로서의 특수성을 개발하여 미래를 이끌어갈 지도자적 인물의 배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교과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배제하고 신앙과 학습지도에 탁월한 교사들과 함께 신앙 교육 생활 교양의 조화 있는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한국학교 학기 및 학사과정은 가을학기 9월 둘째 주 토요일부터 1월 셋째 주 토요일까지 갖되, 매주 화요일 오후3시30분부터 토요일은 오전9시30분부터 오후12시30분까지 수업을 하며 교과서는 국어와 사회 2학기 과정을 전반부로 하고 기타 음악과 미술, 태권도, 역사, 사회 등을 가르쳤다.
봄 학기는 2월 첫째 주 토요일부터 6월 둘째 주 토요일까지 개교했다. 여름학교도 7월 1일부터 8월 마지막 주까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9시30분부터 오후3시까지 했고 특별히 평소과목 외에 수영, 무용, 컴퓨터 등 다양한 교양과목과 여름캠프가 곁들여졌다.

교사훈련

9월초부터는 교육부(부장 민의홍 집사) 주관으로 현직 교회학교교사 및 신입교사를 위한 교사반을 개설했다. 향후 4주간 교사과정을 마쳐 본 교회 교회학교에서 교사를 할 수 있었다. 수업은 9월 3, 8, 15, 22일 오후7시에 가졌다.
9월 15일 주일학교 전담 김도일 전도사가 새로 부임했다.

부목사 사역 분담

10월 27일자로 김흥교 목사는 행정, 조영진 목사는 교육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이미 1, 2교구 등 다양한 업무를 분담해 왔었다. 한편 조 목사는 청년부 지도자로도 임명됐다.

4부 예배 시작하다

그해 10월 6일부터 날로 늘어나는 교인 수를 감당하기 어려워 4부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예배시간이 1부 오전8시, 2부 9시30분, 3부 11시, 4부 12시30분 등으로 조정 변경됐다. 예배별 찬양은 할렐루야 성가대가 4부 예배로 옮겨가고 3부를 위한 성가대원은 신규모집에 들어갔다.
교회학교의 경우, 유치부와 어린이부 예배는 2, 3, 4부 예배 때 각각 제1교육관과 친교실에서, 중등부는 2, 4부 예배 때 제2교육관에서, 고등부는 제1교육관에서 각각 실시됐다. 청년부는 오후1시40분 본당3층에서 모임을 가졌다. 교회 밴 버스는 2·4부 예배에 한해 운행했다.
신문에는 ‘10월부터 4부 예배를 드립니다’란 제목 아래, 본 교회 교역자들의 사진 ((김 목사 등 3명의 목사들은 나란히 소위 ‘로먼 칼러’(Roman collar)로 불리는 흰 깃을 단 성직자 복장을 하고 가운데 서 있었다.))과 함께 이런 재미있는 광고문이 실렸다. ((일간지 하단광고에서 인용(신문명·날짜 미상).))
“저희 교회는 떠들고 울고 넘어지고 하는 요란스런 교회가 아니라 순수한 복음과 신앙이 설교되며 예배를 중시하는 정상적인 교회입니다. 주님의 섭리와 은혜로 주일마다 달마다 해마다 더해 가는 교회입니다. 1부에서 4부까지 설교하시는 김창길 목사님의 설교는 이해하기가 쉽고 간절하며 이민자들의 마음에 와 닿는 감화력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교회와 교우들을 사랑하시는 생활의 설교에서 은혜 받습니다. 항상 목사님들의 방문은 열려져 있습니다. 당회는 아래와 같이 4부 예배시간을 알려드립니다…(하략).”
4부 예배를 광고하면서 내친 김에 본 교회를 한껏 홍보한 것이다. 비정상적인 교회들과의 차별화를 선언하면서, 담임목사의 메시지를 부각시켰다. 그 아래는 당회원들과 부설기관, 성경반 등을 소개하고, 교역자 소개란에는 7명 교역자들의 ((김창길 목사, 김흥교 목사, 조영진 목사, 이학준 전도사(청년부), 웨슬리 남 전도사(영어예배·고등부), 최정훈 전도사(중등부), 김도일 전도사(어린이부).)) 현 학력까지 상세히 소개했다.
한편, 4부 예배는 여러 모로 ‘시행착오’를 일으켜 93년 1월부터 3부 예배로 일단 환원됐다가 예닮원을 마련한 뒤인 95년 10월부터는 다시 4부 예배가 부활된다.

건축을 위한 바자, 바자를 위한 기도

성전건축을 앞두고 각 부서들은 나름대로 부산하게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우선 9월 15일에는 청년부가 점심을 성전건축 헌금을 위해 봉사했다. 10월 19일에는 여전도회 주최로 본격적인 건축바자회를 가졌다. 당초 이 바자는 여전도회에서 주최한다는 내용으로만 간단히 공문이 나갔다가 3차 관련공문에서 임마누엘회부터 청년남·여전도회까지 모든 어른 부서가 총동원되는 대행사란 사실이 드러난다.
더욱이 여전도회는 단순히 바자만을 준비하지 않고, 바자회의 성공을 위해 행사 당일을 한달 여 앞둔 9월16일부터 이 바자를 앞두고 ‘기도 릴레이’ ((또는 연쇄기도.))에 들어간다고 했던 것이다. 무슨 수륙 양면작전 같고 입체 전쟁과도 방불한 느낌이다. 사실 기도란 영적 싸움이 아니던가. 건축을 위한 새벽기도도 교우 자신들의 제목을 위한 목회자의 중재기도를 함께 곁들이듯 바자도 그러했다.
10월 5일자로 성전건축 바자의 일환으로 ‘치과반’을 신설한다는 공문도 나갔다. 토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장장 10시간을 계속 진료한다는 것이다. 공문 내용이 흥미롭다.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금번 성전건축을 위한 바자의 일환으로 치과반을 신설하여 교우님들께 봉사코자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이인데도 시간에 쫓기다 보니 소홀하여 신경까지 썩어 통증이 왔을 때, 이미 시간적 경제적 불이익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번 좋은 기회에 온 교우님들께서는 전 가족 진료를 해 두시기를 희망합니다.
저희 치과반에서는 지속적으로 기회가 되어지면, 무료강의 및 진료를 병행할 예정입니다. 많은 협조를 바랍니다.
진료시일 : 1991년 10월 19일(토)
 진료시간 : 오전9시30분〜오후9시
1991년 10월 5일   바자준비위원회
10월 8일자 바자회 공문 내용은 보다 총체적이다.
건축바자회
“그런즉 너는 삼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택하여 성소의 전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역대상 28:10)
일시: 1991년 10월 19일(토요일) 9:30am-9:00pm
장소: 뉴저지한인장로교회
10월 19일 건축바자회로 전 교우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초대합니다.
임마누엘(회) 어른들께서 준비하신 고향의 맛이 깃들인 전통음식과 여전도회 회원들과 청년여전도회 회원들이 준비한 깔끔하고 정성이 담뿍 든 밑반찬과 남전도회 회원과 청년남전도회 회원들의 각종 옷과 일상용품을 준비하고 교우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컴퓨터 세일 및 컴퓨터 특강도 준비하였습니다. 금번 성전건축을 위한 바자의 일환으로 칫과반을 신설하여 교우님들께 봉사코자 합니다.
예로부터 치아가 오복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바쁜 이민생활 속에 치아관리가 소홀하기 쉽습니다. 이번 좋은 기회에 전 가족이 진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협조를 바랍니다.
1. 김치종류: 배추포기김치 막김치 깍두기 오이김치 파김치
2. 밑반찬: 고보, 창난젓 오징어젓 어리굴젓 마늘장아찌 깻잎 멸치볶음 호박죽 삼색나물 무말랭이 오이무침 북어무침 오징어채무침 묵 도토리묵 오이지 김치겉절이 떡볶이
3. 전 종류: 빈대떡 생전전
4. 김밥, 만두, 잡채
5. 새옷: 고급 여성 옷, 아동복, 기타 각종 옷
6. 잡화: 넥타이, 양말, 운동화, 비디오 공테이프, 기타 잡화.
7. COMPUTER: 별지 참조
8. RUMMAGE SALEL: 헌옷, 장난감…
9. 식사: 토요일(19일) 점심과 저녁
10. 주일(20일) 점심
주보 형태의 바자공문 뒷면에는 교회 약도와 함께 복음송가 가사도 실려 있었다.
주의 장막이 어찌 아름다운지요
내 영이 사모합니다
내 맘 다하여 주님께 기도합니다.
나의 왕 나의 주께
주의 궁전이 어찌 사랑스런지요
내 영이 사모합니다
내 맘 다하여 주님께 찬송합니다.
나의 왕 나의 주께
주의 궁전이 어찌 은혜스런지요
내 영이 사모합니다
내 맘 다하여 주님께 감사합니다.
나의 왕 나의 주께
바자회 결과 총 25,110여 불이 모금돼, 그중 2천 불은 팰리세이즈팍 타운에 기증했다. 고객들 중 타운 사람들도 있었을 뿐더러, 이런 계기에 타운의 좋은 점수를 얻는 ‘주고받는’ 지혜로운 투자인 셈이었다.
12월 1일 주일에는 교회신축헌금을 1백만 불 목표로 실행했다. ((그 주일 전까지 건축헌금 총계는 $163,665.50와 다이아몬드 반지 1점이었다.)) 정작 1일 헌금 때, 작정헌금을 포함해 예상에 훨씬 못 미치는 308,463달러 50센트가 걷혀졌다. 그러나 추가로 건축헌금이 계속 들어와 12월말까지는 53만 달러를 넘었다. 그 일부($215,156.74)는 12월 18일 본당 모기지로 전액 상환했다.

제2회 구역찬송대회

11월 17일에는 제2회 구역찬송대회를 가졌는데 90년대 초로서는 대규모인 데다 본격적이었다. 먼저 양호식 장로 인도로 예배를 드리고 김 목사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눅19:37-38)란 말씀을 전했다. 대회 전 김흥교 목사가 심사규정 및 심사위원을 발표한 뒤 이영종 집사의 진행으로 본 대회로 들어갔다. 반주는 김미경·서연화·홍순금 제씨가 맡았다. 대회 참가순서는 22개 구역 수에 따라 미리 추첨하여 정했다. 대회 후 김홍일 집사가 심사발표를, 시상 및 총평을 김 목사가 했다.
시상 순위는 1·2·3등과 사랑상, 믿음상, 소망상, 장려상 등이었고, 전년도 1등 구역인 유학생구역이 우승기를 넘겼다. 참가자 전원에게는 기념 컵을 분배했다. ((자세한 입상 내역은 그 다음 주일 주보에 기재되지 못했다.))

세 번째 지교회를 창립하다

12월 8일에는 창립 20주년기념으로, 세 번째 지 교회인 남부뉴저지장로교회의 창립예배를 드렸다. ((교회당 주소는 10 West, Maple Avenue, Merchantville, NJ 08109.))
담임사역자는 이학준 목사. 본 교회 교육전도사로 3년간 사역하다가 11월 5일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로써 본 교회는 89년 권오경 전도사를 개척자로 하여 출범한 뉴저지영광교회, 91년 초 김진양 목사를 통해 개척한 웨체스터한인교회에 이어, 모두 3개의 지 교회를 두게 된 것이다.
본 교회는 이후 1999년에 설립하는 영어교회 Joy Christian Fellowship(Danny Han 목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4개의 지 교회를 2000년전에 세우게 된다.

남·여전도회(선교회)를 세분하다

연말을 앞둔, 12월 15일. 여전도회는 넷으로, 남전도회는 셋으로 각각 세분화했다. 학교의 학년이 나뉘어있듯이 연령과 세대끼리 구분함으로써 효과를 기하기 위함이었다. 여전도회가 남전도회와 다른 점은 31〜40세 층을 둘로 분할했다는 점이었다. 1930년 이전 출생자인 60세 이상 교우들은 자연스럽게 임마누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12월 22일 주보간지에는 각 선교회별 명단이 적혀있었다. 세분한 결과 제2남선교회 회원들이 96명으로 가장 수가 많았다. 일부 선교회는 해당 회원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해 회원명단이 미처 기재되지 못했다. 이중 6개 선교회가 12월 29일부터 일제히 총회에 들어갔다.
여전도회
제 4여전도회 기혼〜30세(기혼 후〜1961년 생)
제 3여전도회 31〜35세(1960〜1956)
제 2여전도회 36〜40세(1955〜1951)
제 1여전도회 41〜59세(1950〜1931)
남전도회
제 3남전도회 기혼〜30세(기혼 후〜1961)
제 2남전도회 31〜40세(1960〜1951)
제 1남전도회 41〜59세(1950〜1931)
실제구성 결과
제 2남선교회(96명) 제 3남선교회(24명)
제 2여선교회(40명) 제 3여선교회(61명)
제 4여선교회(48명)

대폭 늘어난 결혼식

그해에는 우리 교회당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이 결혼식을 거행했다. 주보철에는 모두 6매의 결혼순서지가 끼어있다. 본 교회당에서 열린 결혼식만 최소한 6회였다는 얘기다. ((1991년에 결혼식을 올린 커플은 다음과 같았다. 전형지·서연화(6월5일), 양종찬·이정희(8월10일) 유인식·정선림(8월17일), 김창용·이연승(9월7일), 김명철·윤덕란(11월9일), 김홍일·홍순금(11월23일).)) 마치 이 해를 기다렸다는 듯, 계절을 따로 타지 않고 봄여름 가을 겨울 등 수시로 거행됐다. 한 주 간격으로 연이어 거행된 때도 있었다.
자체교회당 구입 후 교회당 주변이 말끔히 정돈되어 가는 데다 무엇보다 지역상 여러 모로 편리한 장소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혼식 음악은 주로 피아노 3중주가 인기를 끌었고 축가 연주자는 독창, 중창 등이 있었다. 결혼 순서지 뒷면에는 ‘결혼식을 도운 분들’이란 타이틀 아래 축가연주자와 반주자, 신부를 돌보는 기혼부인과 들러리(best man·bridesmaid·groomsman), 반지 나르는 이(ring-bearers), 화동(flower girls)등의 이름이 모두 적혀있거나 기재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또 과거 토요일에만 주로 거행되던 것이 주중의 다른 요일에 거행되는 예도 있었다. 수요일에 거행된 6월 5일의 결혼식이 그러했다. 다음은 그해 결혼한 사람들이다.
특히 11월 23일에는 할렐루야·호산나 성가대 지휘자 김홍일 집사와 피아니스트 홍순금 양의 결혼식이 있었다. 92년에는 아예 새해정초인 1월 1일부터 혼례 ‘테이프’를 끊는 두 사람이 있다. 장경숙·엄태용(스티븐) 커플이다.

1991년도 대내외 일지

1월 6일 제2지교회로 웨체스터한인장로교회(김진양 전도사) 설립.
  1월중 구역 교구제 시작.
  1월 7일 뉴저지 교협 신년하례만찬회.
  1월 13일 교회증측확장위원회(건축위원회) 구성 결의.
  3월 22〜24일 호산나91청소년전도집회(허드슨장로교회)
  3월 31일 교협 주최 연합 부활절 예배 ((뉴저지교협(회장 김창길 목사)이 주관한 그해 부활절 새벽연합예배는 3월 31일 새벽6시에 뉴저지 8개 지역에서 일제히 개최됐다. 이 새벽성회에서는 특히 예년과 달리 순서지가 통일되어 모든 교우들이 동시에 같은 찬송가를 부를 수 있었다.))
  5월 3일 직장인을 위한 금요예배 개시.
  8월 5일 성전건축을 위한 100일 새벽기도회 시작.
  8월 17〜18일 제1회 성가대 수련회(강사 박재훈 목사).
10월6일 4부 예배 개시.
10월19일 건축바자회
11월17일 제2회 구역찬송대회.
11월28일〜12월1일 부흥성회(강사: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시무·훗날 예장 총회장.))
12월1일전 교인 교회신축헌금.
12월8일제3 지교회 남부뉴저지장로교회 설립예배(교역자: 이학준 목사).
12월15일남녀전도회(선교회) 세분화.

1992년

믿고 순종하자

새해 1월 1일.
우리 교회 장기호 집사-김귀남 권사 부부의 장녀인 장경숙 양과 엄태용(스티브)군의 결혼식으로써 새해 하늘에 힘찬 소망의 첫 시그널을 올렸다. 주례자는 물론 김창길 목사였다. 신학교 출신인 신랑 엄태용 군은 전도사 기간을 거쳐 목사안수를 받고 90년대 후반기 뉴욕 퀸즈장로교회 영어교회 목사로 한동안 사역하게 된다.
그 해는 본 교회 설립 스무 돌을 맞는 해였다. 성숙한 이십 대로 돌입한 것이다. 새해 목표는 ‘믿고 순종하자’였다. 교회가 날로 증가되어가면서 믿음의 순종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단적인 예로, 약 두 달 전 온 교회가 실시한 건축헌금의 1백만 달러 목표는 여태 절반 수준 밖에 미치지 못한 상태였다. 담임 김창길 목사의 새해 첫 주일(5일) 설교도 ‘믿고 순종하라’(요 14:12-15)였고, 둘째 주일인 12일의 설교 제목은 ‘오늘이 중요하다’(시 90:1-12)였다.

당회는 1992년도 건축위원들을 임명했다. 임원까지 모두 15명이었다. 19일 예배 중에는 92년도 신임서리 집사 임명식이 있었다.
모두 7개로 나눠진 남여선교회 중 최초로 구성된 제3여전도회 초대회장으로는 김미경 집사, 부회장 윤영여 집사가, 가장 연소한 제4여전도회의 초대회장은 나애덕 집사, 부회장은 전년도에 갓 결혼한 홍순금 교우 ((할렐루야 겸 호산나성가대 지휘자 김홍일 집사의 부인. 주121 참조.))였다.
2월의 고고성(呱呱聲)

2월 초순에는 한 주간 사이에 한꺼번에 4명의 아기들이 태어났다.
1일은 주소웅(고명옥) 부부, 4일은 최정훈(최경란) 전도사 집, 그 이튿날인 5일은 정우영(김현정) 집사 가정, 7일은 이한섭(이종옥) 집사 가정에서 각각, 앞을 다투듯 힘찬 고고의 울음이 터졌다.

성경공부반 조직화

새해부터는 성경공부가 더 조직화됐다. 모두 11개 반으로 나누었고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월, 수요일만 빼고는 거의 매일 모이는 셈이었다(표 40).

표 40
뉴저지한인장로교회 1992년 성경공부

언론에 주목받다

본 교회가 한창 성장 발전 일로에 있으면서 자연히 언론의 주목도 받았다. 그만큼 한인사회에 알려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탄생 20돌을 맞아, 당시 한인언론과 한인사회에 비친 우리 교회의 자화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할까.
2월 9일에는 본 교회 3부 예배 광경을 대한텔레비전 방송에서 녹화를 했다. 녹화내용은 그 다음주일인 16일 케이블채널 10에서 오전9〜10시에 방영됐다. 당시는 케이블 채널이 한인사회에도 점차 보급돼가고 있는 때였다.
2월 초순에는 당시 막 정착해가던 한인언론의 하나인 미주조선일보(발행인 한상기)도 본 교회를 크게 다뤘다. ((미주조선일보 1992년 2월 10일자 기사 참조.)) ‘하나님께 순종하며 교우화합 노력’이란 제하에, 본당 정면사진과 김 목사의 원내사진을 곁들인 이 기사는 당시 본 교회 정황을 비교적 상세히 그리고 있었다.
“김창길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의 실질적 부흥이 시작됐다”고 서두를 연 이 기사는 성장원인의 하나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내적 변화 즉 영적, 지적 변화를 통해 참된 신앙을 깨닫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라는 교우의 말을 인용했다.
또 “성장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교회 내 파벌 조성을 막고 교우간의 화목을 꾀했으며 경건한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해왔다”고 밝혔다.
아울러 “88년에 개교해 3회 졸업생을 배출한” 뉴저지성서대학과 버겐경로학당, 한국학교, 직장인예배, 어머니성경반, 남·여전도회 등 본 교회 기관을 소개했다.
또 전년도 5월 메모리얼데이에 교인 150명이 참가, 한인의 단결된 모습을 보였고, 바자회 수익금으로 지역사회 도서관, 학교, 소방서 등에 성금을 전달했다는 귀띔과 함께, 향후 이웃동네를 위한 병원, 학교, 아파트 등의 설립계획을 세우고 “선교와 베푸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고 썼다.
이 신문은 또 1986년에 구입한 6,400평방피트의 교회당과 교육관, 3개 지교회 등 본 교회의 현황과 김 목사 개인에 관한 자세한 소개를 덧붙였다.
3월 중순에는 뉴저지 ‘교포신문’이 ‘교회순례시리즈’의 첫 대상으로 본 교회를 한 쪽 전면에다 대서특필했다. ((교포신문 1992년 3월 16일자 7면 참조.)) 초창기 역사의 간략한 요약과 함께, 1980년 김 목사 부임당시 33명이었던 교인이 현재는 800여 성도가 예배드리며 교회학교 어린이부 250명, 중고등부 100여명, 대학·청년부 30여명이라는 소개와 연예산 66만불, 볼리비아에 선교사(이상철) 파송 사실과 예산의 10%가 선교비로 나간다는 설명이 붙었다.
본 교회 특성의 하나로 어린이가 많은 ((당시 어린이 250명, 교사 30명으로 기록됐다.)) 사실을 꼽은 이 신문은 “불과 12년 동안에 이렇게 불같이 성장한 교회의 모습이 경이롭기만 하다”며 교인들은 김 목사의 목회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김 목사는 신자들의 믿음이 큰 점을 공로로 돌린다고 적었다.
또 김 목사의 말도 직접 인용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죠. 많은 분들이 저희 교회의 예배 분위기가 은혜스럽다고들 하는데 본 교회는 교회의 예절을 중히 여깁니다. 예절은 경건성을 유지해 주지 않습니까? 목회자들도 교인을 대할 때 정직하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족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도 같고요.” 김 목사는 또 “받기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의 세 가지 언론들이 공히 본 교회가 교육적인 교회인 데 초점을 맞추었다.

‘성서동문’ 창간호 발간

그 즈음 본 교회 부설기관인 뉴저지성서대학의 학보 ‘성서동문’이 첫 선을 보였다. ((「성서동문」 제1권 1호(발행인 김창길/발행처 뉴저지성서대학·1992년 3월 14일) 참조.))
김창길 성서대학장은 ‘이민자들이 읽고 배워야 할 성서’란 제목의 창간사에서 세계사를 통해 성경이 중요하고 다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실을 열거하고, 성경은 이민자들이 부닥치는 모든 문제의 해답집이라고 소개했다. 김 목사는 대강 이런 내용으로 계속 써 내려갔다.

“이민 온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자녀들의 교육입니다. 교육은 미국에 자녀를 데려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환경으로 이사왔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과외공부도 필요하겠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김 목사는 성경을 꼭 배워야 할 이유를 성경을 알아야 믿음이 자랄 수 있고, 잘못 가는 신앙을 바로 잡을 수 있고, 말씀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으로 꼽으면서 당시 한인교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요사이 비 성서적인 가르침이 담긴 테이프와 부흥회, 세미나, 수련회가 뉴욕, 뉴저지에서 돌아다닙니다. 특별히 열심히 믿어보려는 사람을 유혹해 갑니다. 식품점이나 식당 앞에서 free로 가져가라는 테이프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들어보면 다 괜찮고 좋은 말 같지만 한 두 군데가 이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김 목사는 외식(外食)이 언뜻 맛보기에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것보다 좋게 느껴지지만 조미료가 많이 쳐진 것과 마찬가지로, 초신자들은 어떤 설교자의 강압적인 말투나 눈물을 자주 흘리거나 유행어와 몸짓으로 웃기거나 병 고치는 능력이나 신비체험을 보여주면 은혜를 받는다고 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하고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의 생활을 본받게 돼야한다고 역설했다.
결론에서 김 목사는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뉴저지성서대학이 존재한다며 성서대학을 ‘교회를 위한 학교, 교회를 보호하는 학교’로 소개했다.

성서대학도의 고백

그 무렵 뉴저지성서대학을 갓 졸업한 박병태 집사 ((현 장로. 이 원고는 주 42와 같은 출처에 실렸다.))의 간증을 여기 소개한다. 당시 학생들의 정서와 학교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는 한 자료일 터이다.

<<졸업생 기고>> 일기 중 어느 하루

박병태 집사

오늘도 성서대학의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가게문을 정해진 영업시간보다 30분 일찍 닫고 도망자처럼 급히 차를 몰고 학교로 향했다. 내가 하는 가게—세탁소는 자기의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고 남의 물건을 맡아서 관리하는 것이므로, 가게를 일방적으로 일찍 닫는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손해를 많이 보는 일이다.
더구나 피곤하고 배도 고픈데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으로 배불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편안하고 좋은 것 아닌가.
21년 전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것이 나의 마지막 학창생활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표에 따라 나를 뉴저지성서대학의 학생으로 뽑으시고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자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자격을 가르쳐 주시고 또 주님의 종으로서 부리시기에 합당한 자로 훈련시키시는 귀한 일을 나에게 시작하신 것이다.
새벽부터 꼬박 12시간 가게에서 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안고 4시간 동안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2년을 잘 견디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의 선하신 뜻을 생각해 본다. 다음 주이면, 2년 과정이 다 끝나고 이제 졸업날짜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2년간 그냥 다니기만도 쉽지 않은데, 많은 숙제와 시험을 치르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어려운 일이었다. 이 2년간의 어려움을 통해 주님은 나를 훈련시키셨고 내 영에 큰 활력을 불어넣으셨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주님은 이 2년간의 어려움의 시간들을 은혜의 시간으로 바꾸어주셨고, 이기게 해 주셨고, 마치게 해 주셨다. 성경을 바로 보는 법을 여러 귀하신 목사님들을 통해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기에, 이제부터는 전처럼 성경을 혼자서 볼 때 내 중심으로 읽던 습관을 버리고 바로 읽을 수 있겠다.
주님은 자신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고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섬기는 방법도 소상하게 알게 해 주셨다. 이제부터는 주님의 특혜로 2년간 훈련받은 자로서 주님의 십자가 가까이서 적극적인 믿음생활을 하며 주님의 몸인 교회를 바로 섬기고 담대히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2년간의 귀하고 뜻깊은 특혜의 시간을 주위에 형제자매들에게 자신 있게 권고하라고 요청하신다.
어느덧 차가 학교 앞에 도착했다. 이제 교실에 들어가서 마지막 시험을 칠 때 공부한 것 잘 생각나게 해 주시고 좋은 성적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교실 문에 들어갔다.

날로 자라 가는 중·고등부

2월 21, 22일에는 고등부 임원 연수회가 라마나욧 기도원에서 개최됐다.
23일은 중·고등부 학부모 세미나와 교사-학부모 모임(PTA)도 열렸다. 강사는 이학권 목사(뉴욕새교회)였다.
고등부는 또 여름단기선교여행을 앞두고 3월 22일에 김밥 바자회를 가졌다. 4월 25일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중고등부 배구대회가 열렸다.

음악부·음악위

모두 4개로 대폭 늘어난 성가대와 음악부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 연초인 1월 19일에 음악위원회가 음악부장 김인선 장로 집에서 모였다. 각부 성가대 대장과 총무, 지휘자, 반주자, 솔리스트가 총동원된 모임이었다.
그 해는 특히 스무 돌을 맞아 대규모의 축하 음악행사의 준비에 들어갔다. 4월 8일에도 음악위가 모임을 가졌다. 3월 중에는 음악부에서 ‘할렐루야 복음성가집’을 발행했다. 권당 4불씩에 배부했다.
각 성가대는 매달 틈틈이 오후예배 때 헌신예배를 드렸고 그때마다 해당 성가대가 주님께 찬양을 드렸다.

4·29 폭동 발생하다 ((주요 한인언론 자료 참조.))

그해 4월말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큰 비극이 발생했다.
4·29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국내 20세기 최악의 난동이었다. 본 교회 5월 3일자 주보 소식란에는 “LA에서 일어나고 있는 흑·백·한 인종간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기도제목이 실렸다.
도주하던 흑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을 백인 경찰관 4명이 마구 구타한 것을 촉발제로 삼은 폭도들이 코리아타운을 포함한 다운타운의 상점에 침입해, 삽시간에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는 사건으로 확대됐다. 여러 사람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오랫동안 일궈온 피땀의 소산인 코리아타운이 ‘싹쓸이’ 당하다시피 한인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약탈자 중에는 흑인과 히스패닉에다 일부 한인들까지 끼여있었다.
5월 첫 주일은 어린이주일, 둘째 주일(10일)은 어머니주일로, 즐겁고 기뻐야 할 계절이었으나 성도들의 마음은 마냥 무겁기만 하고 편치가 않았다. LA에 교우들의 친지나 친척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 직후 조바심 속에 그곳 친지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후 상황을 확인하는 교우들이 많았다. 안 그래도 핏줄을 나눈 우리네 동포들이고, 정작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 뉘우칠 구석도 많았다.
여러 이유를 따진다 해도, 당시까지 한인들은 돈 버는 데만 주로 관심이 있었고 지역사회에 기여하거나 다민족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사후 분석이다. 흑인계 일각에서는 한인 상인들이 흑인 지역사회에서 돈을 벌어 자기네 배만 채우는 ‘돈만 아는 흡혈귀들’이며 “유대인들보다 더 지독한 민족이다”이란 혹평이 오래 나돌아온 것이 사실이었다.
좋든 싫든 우리가 수긍하고 시인할 점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흑인 지역에서 돈을 벌면서 호화 자동차를 타고 거드름피우는 한인들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건 발생 후 한인 교계지도자들이 적절한 발언과 대처를 하지 못해 한인2세들에게 많은 의문과 실망을 안겼다. 이 폭동이 이곳 미동부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해서 큰 염려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도 있듯, 이 비극을 계기로 LA를 포함한 전국의 한인교계와 한인사회는 많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고, 흑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90년대 중반 기독교정신 아래 뉴욕 할렘에 설립돼 오늘날까지 한·흑 친선에 이바지해온 소니아 장씨의 ‘한·흑 연대’를 들 수 있다. 과거엔 평소 한인들이 멀리하고 경원시해 왔던 할렘에서 헨리 홍 목사, 김순애 선교사(그루터기선교회 대표), 연합감리교 김진형 목사 등이 장기간 한·흑 유대에 힘썼다.
우리교회 김효순 집사도 맨해튼 흑인가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흑인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사랑을 베풀어 1996.3.14, 뉴욕시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현재도 많은 한인교회들이 흑인교계에 장학제도와 같은 리소스를 제공하는 등 선린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교회는 물론 히스패닉계에 교회당 공간을 제공하는 한인교회도 늘고 있다. 한편 2002년에는 아르헨티나에서도 정부에 불만을 가진 국민들이 자체폭동을 일으켜 역시 지역 한인동포들이 큰 피해를 입고, 비슷한 교훈을 남겼다.

사진 41. 메모리얼 데이 퍼레이드
Memorial Day Parade

표 41

메모리얼 데이 퍼레이드

5월 25일 월요일에는 메모리얼 퍼레이드가 펼쳐졌다.(사진 41)
본 교우들 다수가 한복을 정성껏 차려입고 참석했다. 어린이, 중고등부, 청년회 임마누엘회, 남·여전도회 모두가 참석했다. 퍼레이드 팀 구성(표 41)은 맨 앞에서 늠름한 청년회의 두 기수가 깃발을 들고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중고등부의 플래카드가 따랐으며, 교역자·장로·한인회팀, 태권도팀, 농악대, 어린이, 어른, 버겐경로학당, 플래카드, 상록회 등이 뒤따라 행진해 나갔다.
메모리얼 데이 당일 오전9시에 교회에 모인 교우들은 집합장소인 Edsall Ave.로 버스를 타고 가서 일단 합류했다. 거기서(E) 출발한 퍼레이드는 Roff Ave.(S)→  Columbia Ave.(W)→ Broad Ave.(N)→ Brinkerhoff Ave.(E)→ 2nd St.(N)→ Edsall Blvd.(W)→ Broad Ave(S).→ City Hall 등의 방향으로 옮겨갔다.
당일 시 대표 프렛 브라운 씨에게 화환과 어린이비디오를 기증하는 순서도 가졌고 퍼레이드가 시청 앞에서 끝나 간단한 식이 있은 후 참가 어린이들은 Caravel에서 아이스크림을 제공받았고 어른들은 KC Hall에서 음식과 음료수를 제공받아 동네 유지들과 교제하는 시간도 가졌다. 퍼레이드 도중 곳곳에서는 청년회원들이 음료수를 공급했고 본 교회 김창길 목사의 마무리 축도로 완전히 마칠 때까지, 온 퍼레이드 대원들이 움직이지 않고 잘 참아 유종(有終)의 미를 거두었다. 4·29폭동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역사회 유대가 더욱 중시되던 시기였다.

뉴저지영광교회 자립하다

5월 28일에는 본 교회가 개척한 첫 지 교회인 뉴저지영광교회의 교역자 권오경 전도사의 목사 안수식이 본 교회에서 거행됐다.
아울러 뉴저지영광교회는 5월말로 자립해 본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독립교회로 첫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부터 주보 상에서는 교회명과 권오경 목사의 이름이 빠졌다. 뉴저지영광교회는 1989년 12월 3일 당시 권오경 전도사가 본 교회 도움으로 ‘브런스윅한인장로교회’로 출범, 계속 발전해오다 새 이름으로 개칭했었다.

졸업예배

6월 7일은 각부 졸업예배로 드렸다.
유치부 24명, 주일학교(유년·초등부) 18명, 중등부 13명, 고등부 24명, 대학교 5명, 대학원과 박사학위자 1명 등 도합 86명이었다.

중·고등부, 대만·한국 선교여행

중고등부에서 대만과 한국 선교여행을 위해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비빔밥 제공과 셔츠 판매 등으로 선교모금운동을 펼쳤다. 단기선교단 15명은 6월 22일 오후예배를 헌신예배로 드리고 29일에 현지로 출발했다. 김창길 목사가 인솔책임을 맡은 선교단은  대만과 한국을 거쳐 7월 17일 돌아왔고, 8월 23일 찬양예배 때 선교보고 겸 간증을 했다.

여름 행사 개요

그해 여름의 각부 행사는 이러했다.
중고등부: 단기선교여행(6월29일〜7월17일/한국·대만). 15명 참가.
어린이부: 여름성경학교(6월29일〜7월1일/본 교회당)
버겐경로학당: 종강여행(6월27〜28일)
청년부: 수련회(7월2〜4일. 뉴저지크리스천아카데미)
어린이: 여름학교(7월6일〜8월21일/본 교회당)
장년부: 전 교우 수련회(7월31일〜8월4일/캣스킬수양관).
강사: 이승조 목사(서울문성교회).
어린이부: 여름성경캠프(8월 10일〜12일/포코노수양관)
중고등부: 여름수련회(8월 12〜14일/포코노수양관).
영어부: 수련회(8월 24〜25일).

전국 평신도지도자 헌신예배·세미나 ((뉴저지교포신문 1992년 6월 29일자 보도기사 참조.))

6월 23일에는 미주한인장로회 전국여선교회연합회 평신도지도자 헌신예배 및 세미나가 잉글우드 래디슨호텔에서 열렸다.
이 행사에는 서노회, 서남노회, 뉴욕노회, 뉴저지노회, 동노회 등 5개 노회 회장과 지도자 약 60여명이 참석했다. 예년의 거의 3배 되는 수였다. 헌신예배 중 김 에스더 사모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란 설교에서 “충만한 성령으로 종족과 국가를 초월,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여성들이 앞장 서야 하며 평화공존의 길은 모든 이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가짐”이라고 역설했다.
연합회장 오안순 권사는 인사말에서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절대적”이라며 “선교와 여성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있는 만큼 계속 노력해가자”고 당부했다.

음악사역과 성가대 활약상

7월19일 찬양예배 후 20주년 기념음악회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모였다. 각부 성가대장과 지휘자 총무로 구성된 위원회였다.
7월 26일 찬양예배 때는 극동방송국에서 복음성가 가수 3명, 40명 합창단이 방문, 본 교회 찬양예배를 드렸고 예배실황과 찬양을 녹음해 한국에서 방송했다.
8월13일부터는 매주 목요일 밤마다 창립 20주년 기념음악예배를 위한 성가연습이 실시됐다. 첫날 연습 때 54명이 대원으로 등록하더니 그 다음 주에 64명, 90명 등 삽시간에 대원이 2배 이상 불어났다.
연습 전 저녁식사, 그리고 연습 중 어린이와 아기를 가진 엄마대원들을 위해 베이비시팅도 준비돼 있었다. 본 교회 교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11차 전 교우 수양회

열 한 번째인 그해 전 교우 수련회는 육군 군종감을 지낸 이승조 목사를 초청,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캣스킬 수양관에서 개최됐다.
그해에 처음 올라간 캣스킬 수양관은 뉴욕주 북부 헤인즈 폴스에 위치한 40에이커 넓이의 장소로 각방마다 에어컨과 샤워, 화장실, 2더블베드를 갖춘 숙박시설로 가족별로 투숙할 수 있었다. 또 캠프장, 수영장, 아기풀장, 운동시설 등도 골고루 갖추었다.
첫날 저녁 수련회 개회예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란 설교로 연 강사 이 목사는, 연이어 ‘성령의 전’(고전 6:19-20),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15),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시 139:1-12), ‘마지막 때에 무엇을 할 것인가’(벧전 3:7-10) 등의 설교로 은혜를 끼쳤다.
낮에는 ‘성막과 신앙생활’ 시리즈 강해를 펼쳤다. 새벽집회는 ‘벳세메스의 신앙’(삼상6:10-15), ‘응답받는 기도’(약 5:13-18), ‘벧엘로 올라가자’(창 35:1-5) 등으로 이끌었다.
참석 교인수는 총 230명이었다. 본 교회 교회보 임마누엘 신문은 수련회에서 느낀 체험담 원고를 모집하기도 했다.

뿌리 깊은 나무이고자

한국의 교계 유명잡지인 ‘월간 목회'(발행인 박종구)가 그 무렵, 본 교회 김에스더 사모와의 대담 내용을 실렸다. ((사모탐방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시리즈의, ‘뿌리깊은 나무이고자’란 타이틀의 기사였다. 조인숙 자료실장이 직접 본 교회에서 취재했다. 「月刊牧會」 1992년 8월 호 참조.)) 김 사모의 측면과 내면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열린 창문과도 같았다.
“어떻게 목사의 아내가 되어 협력목회의 길을 가게 됐냐”는 물음에 김 사모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면서 ((한국에서는 김에스더 사모가 경기여고와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나왔다.)) 서양문학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 성경공부 서클에 들어갔다가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복음을 위해 평생을 드리겠다고 서원했다고 밝혔다. 이를테면 그것이 ‘첫 번째 부르심’이었고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는 창세기 1:18 말씀이 동기가 되어 당시 토론토한인교회 교육목사로 있던 김 목사와 결혼했고 아들 둘을 낳아 기르면서도 청년, 대학부의 성경공부도 가르쳤다.
김 사모는 말했다. ((대담 당시의 존댓말 체는 평문 서술체로 바꿨다.))  “이민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라기보다 이민사회의 집결지로 사회정보센터, 친목공간, 삶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였다. 복덕방으로 집을 구해줘야 하고 취직도 시켜줘야 했다.”
“이민자 다수는 사회적 인정을 받고싶은 욕구를 갖고 있다. 교회 지도자가 한인사회 지도자로 비춰져 교회직분도 봉사직보다 명예직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 안에서 거듭난 교회로서 믿음의 공동체, 참 교회의 모습을 이뤘다.”
“교회가 복음으로 거듭나기까지 과정은 어땠냐”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살았더니 하나님이 이뤄주셨다.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했다. 유치부를 만들고 2명뿐인 학생으로 중고등부를 시작하고 동네 엄마들을 모아 성경공부반을 시작했다. 결혼 전 대학에서 캠퍼스티칭을 한 것이 도움됐다. 나중엔 한국 주재원 가정이 많아 효과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물론 애로도 없지 않았다. 과거 6명의 목회자가 거쳤던 문제점들이 재 돌출하기도 했고 한번은 전 교우 수양회 때 온 제직이 불참한 적도 있었다. 참고 지내다 보면 서로 이해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이 선한 길로 이끄실 때까지 무조건 참고 견뎠다. 이사야 53장의 ‘종으로서의 지도자’상이 김 목사의 목회 방침이었다.
초기에는 부지런히 심방을 했다. 맞벌이부부 집을 심방하다 보면 새벽1시를 넘기기가 일쑤였다. 그런 날은 졸음을 억지로 이기며 운전했고 심지어 음식점에서 밥을 먹다가 포크를 떨어뜨리고 잠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랬더니 교회저변에서 차츰 조용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성경공부반을 계속 이끈 것이 도움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김 사모는 그렇다고 수긍, 교회 활성화에는 일꾼이 필요한데 주일설교만으로는 양성이 힘들어 성경공부로 조화를 이루게 됐다고 밝혔다. 성경공부를 통해 거듭나고 헌신의 열정을 갖고 봉사할 때 헌신 분위기가 조성돼 주일교인이 아닌 ‘주중 일꾼’으로 변화돼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도 열성을 더해가게 됐다. 자녀교육은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는, “자녀교육이 목회협력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며 성서대학 강의에도 불구, 아이들의 귀가시간에 맞춰 늘 대화를 나누면서 부모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꿈을 심어주려 노력한다고 김 사모는 밝혔다.
미국사회에서 한인청소년들에게 힘든 문제는 무엇이냐고 묻자, “이중문화 속에서의 가치관의 혼란”이라며 본 교회 중고등부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모든 (연령층의) 인간이 동등하다’는 단순한 서구가치관을 넘어, 절대적인 성경기준이 요구하는 바른 가치관과 신앙관을 심어주려 노력한다고 답했다.
예를 들면, 진실(truth)과 의견(opinion)은 다르다는 것 등이다. 중고등부는 또 매주 금요일 Fellowship Night 때의 기도와 찬양, 토요일엔 스키와 볼링, 세미나와 체육대회 등 모임을 자주 갖는다고 밝혔다.
올바른 목회자 부인상에 관해 김 사모는 가정을 잘 돌보는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로서 남편 및 자녀와의 관계를 (절대) 유지해야만 목회자가 강단이 부끄럽지 않고, 큰 나무를 지탱할 단단한 뿌리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願]을 비쳤다.
또 바른 신앙 안에서만 참 행복을 느낄 수 있으므로 모든 이들에게 신앙 안에서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면서 “교인들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기보다 말씀 안에서 옳은 바를 서두름 없이 조용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내하며 행할 수 있기를” 희구했다.

92년도 여름학교 종강예배

그해 8월 21일 여름학교 종강예배가 거행됐다.
고등부 언니들의 찬양팀 인도로 감사와 찬양을 드린 뒤 이수온 교무의 진행으로 종강예배를 드렸고 이어서 장진영 선생 사회로 학예발표회를 갖고 8개 반이 각각 순서대로 나와 재롱을 보였다. 이날 수료증을 받은 어린이 수는 유치1반 16명, 유치2반 16명, 1학년 9명, 2학년 9명, 기초1반 18명, 기초2반 18명, 3학년 9명 등 총 95명이었다. 또 우수상과 개근상을 받은 어린이들이 모두 39명이었다.

그해 9월

9월중 대외활동의 하나로 9월 초순 팰리세이즈팍 경찰서 앞에서 사망한 2명의 백인 십대 청소년들을 위해 본 교회가 조화를 보내고 교역자들이 직접 장의사에 다녀왔다. 우리 교회가 청소년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역사회에 모범을 보이고 동시에 유대를 공고히 한 기회였다.  9월 20일 전 교우 야외예배 겸 운동회가 펼쳐져 마음껏 하루를 즐겼다. 온 교우 운동회는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눠했고 보물찾기, 경품추첨과 시상이 진행됐다. 또 1교구와 2교구 응원단이 따로 나뉘어 구성돼, 서로 자기 팀을 위해 열띤 격려를 보냈다. 이 야외예배에는 모두 약 650명이 참가했다.
9월 13일에는 찬양예배 후 성경암송대회가 남전도회 주최로 열렸다. 말라기 3장 또는 시편119편 중 선택해서 하는 것이었다. 이 성경암송대회 입상자는 다음과 같았다.
장년부 1등: 김영숙 권사(시 119·말3) 2등 허필수 집사(말3)
중등부 1등: 조세나, 2등 피터 김, 3등 김지연 (시1·23)
어린이부 1등: 허대석(말3)

사진 42. 창립 20주년 기념 성가제
Church’s 20-Year Anniversary Concert

스무 돌 기념잔치 ((한국일보 1992년 11월 18일자, 교포신문 11월 2일자, 뉴저지교포신문 관련 보도기사 등을 참조했음.))

교회가 창립 스무 돌을 맞아, 11월 1일은 기념예배, 15일에는 기념음악제로 감사와 자축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뉴저지 로다이의 펠리션(Felician)칼리지 강당에서 공연된 ‘창립20주년기념성가제’는 독창자와 중창 등이 곁들여져 ‘여호와는 나의 목자’, ‘주기도’(강위덕 작곡), 구노의 ‘거룩’ 베토벤의 ‘할렐루야’ 등을 불렀고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곡’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사진 42)
100여명의 본 교회 연합성가대와 여성중창단, 현악단 등이 출연했고, 본 교회 안팎의 900여 성도들이 참석,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9명으로 구성된 여성중창단은 ‘주의 손길’, ‘오 나의 주를 찬양하리라’, ‘하나님께 감사드리네’ 등 곡으로 화려한 하모니를 구사했다.
김홍일 지휘, 서연화 반주로 진행된 이날 음악회의 독창자로는 소프라노 김경희, 알토 조정애, 테너 김동순, 베이스 김만규 씨 등이 출연했다.
김창길 목사는 인사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당시 순서지 참조.))

…(전략)…20년 전 20여명 창립교인으로 시작해 오늘의 천 여명의 교우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일이 너무 고마워 우리는 찬양하기로 했습니다. 말과 기도만이 아니라 벅차고 감격된 우리 마음을 노래하기로 했습니다. 뉴저지한인장로교회 연합성가대의 찬양은 100여명의 찬양이 아니라 1,000여명 전 교우들의 찬양입니다. 생명의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심금을 울리는 찬양입니다. 에벤에셀의 감격의 노래입니다.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곡은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우리 교회를 인도하시는 그분께 바치는 찬양입니다.
아이들아 나아가자. 어른들도 나갑시다. 어르신네들도 나아가십시다. 여인들과 남자들도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찬양 드립시다.

뉴저지 팰리세이즈팍 목사관에서
음악제를 축하하려고 지 교회인 뉴저지영광교회가 화환을 보내왔고 서울 한마음교회(이명호 목사)는 축전을 보내왔다. 이 성가제를 위해 성가대가 봄부터 준비모임을 가졌고 많은 연습과 노력을 기울였다.

성서대학의 자화상

그해 11월 중순 발간된 ‘성서동문’지는 ‘뉴저지성서대학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김창길 학장이 쓴 보고서 형식으로 된 글이었다. 「성서동문」 제1권 제2호(1992년 11월 15일)참조.)) 그해 설립 5년째를 맞은 성서대학이 4회 동안 졸업생 38명 ((주교교사과 8명, 성서과 30명.)), 재학생 37명, 수료(휴학 포함) 10여명 등을 냈다고 알리면서 졸업생과 재학생의 제반사항을 분석한 내용이었다.
이에 따르면, 졸업·재학생을 포함, 직분별로는 장로가 5명, 안수집사가 5명, 권사 8명, 서리집사 54명, 평교인 4명 등 총 76명이었다.

항존직이 졸업자중 31%, 재학생중에서는 19%였다. 교파별로는 미주한인장로회 소속이 졸업자중 34명, 재학생중 26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밖에도 졸업·재학생 통틀어 미연합감리교(UMC) 소속이 3명, 대한기독교감리회(기감) 소속이 2명,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소속 2명이었고, 미장로회(PCA), 미국장로교(PCUSA), 침례교, 순복음, 천주교, 독립교회, 기타가 각 1명씩이었다. 출석교회는 본 교회 소속이 졸업생 29, 재학생 22명 도합 51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밖에도 16교회나 되는 다양한 곳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성서대학의 재정규모는 교회보조 연5,000불, 학생등록금 15,000불, 학생찬조금 3,000불 등, 그해 연말 지출이 총 19,080불로 적자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김창길 학장은 이와 함께, 성서대학이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학장과 행정책임자의 교대 직임, 이사회 구성, 시설의 강화, 도서실 확장, 커리큘럼 개발과 교수진 확보, 장기계획, 동문회의 참여, 교역자 사모 장학제 등을 희망사항으로 열거했다.
또 학생들의 수업태도가 진지하다며 “학구열과 분위기를 보고 찾는 신입생이 늘고 있다”고 밝혔다. 성서대학을 설립하고 지원해온 우리 교회로서 사뭇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1992년도 주요 이벤트 일지

2월 23일 중고등부 학부모세미나. 교사-학부모모임(PTA)
3월 15일 뉴저지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헌신예배
3월 21일 버겐경로학당 강연회 ((뉴욕 전형수 교민담당 영사를 초청, ‘통일의 전망과 이산가족 문제’에 관한 강연을 가졌다.))
3월 20일〜22일   뉴저지성서대 제3회 신학공개강좌 (강사: 김광수 박사) ((김광수 목사(뉴잉글랜드중앙침례교회)는 ‘바울 서신의 역사—비평적 이해’란 주제 아래 바울의 생애와 사역, 바울서신의 이해, 바울의 핵심적 교훈 등으로 강의를 펼쳤다.))
5월  3일 창립 20주년기념 교회앨범 발간을 위한 사진 수집 개시
5월 10일 항존직분자 임직예배 ((장로장립: 조영진 장로취임: 김인선·박희일 집사장립: 이인용, 박병태, 양진, 권사 취임: 김향란  채규례, 김영숙.))
5월 25일   메모리얼 데이 퍼레이드
5월 31일 이기종 협동장로, 경운 호산나성가대 반주자, 정호진 할렐루야 성가대 반주자 임명
          직장인 예배를 목요일로 이동
5월 28일 본 교회 제1지교회인 뉴저지영광교회 권오경 전도사 목사안수 교회자립
5월중     미주한인장로회, 시한부종말론과 관련, 사이비·이단 경고문 배포
6월 1일   김인선 장로, 뉴저지 교협 회계 피선
6월  7일 교회학교 졸업예배(86명 졸업)
6월 23일 미주한인장로회 전국여선교회연합회 평신도지도자 헌신예배 및 세미나
6월 29일 중고등부 대만·한국 단기선교여행 출발(15명) 7월 17일 돌아옴
6월 중 허필수 집사 뉴저지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임시총회에서 부회장 피선
8월 23일 중고등부 단기선교보고
9월 6일 항존직 직분자 은퇴식을 만70세 생일 달에 치르기로 당회가 결정
9월 6〜7일 청년회 수련회 (불빌기도원)
9월 10일 어머니 영어반 개설 (10주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9시30분부터 11시)
9월 27일 안 마가렛 4부 성가대반주자 부임
          자녀교육과 상급학교 진학문제 세미나(강사: 김기희 박사)
 10월 7일〜9일 임마누엘회 캐나다 여행(37명 참가)
 10월 13일 뉴저지노회 (반석교회) (장로총대: 정주섭·박희일·조영진)
 10월 16〜17일 여전도회 바자회(모금액 $25,000)
 10월 18일 (5월 이후 등록) 신입교우 환영회
 10월 중 (본 교회 제2지교회) 웨체스터한인장로교회 김진양 목사 사임, 김 영 목사 부임
 10월 23〜25일 신앙강좌 강사: 김진홍 목사 (두레선교회·남양만 활빈교회) ((새벽기도회는 강선우 사모가 인도했다.))
 11월  1일 교회창립 20주년 기념주일 오순덕 권사 은퇴
 11월 15일 20주년 기념음악제 (펠리션 칼리지 강당)
 11월 22일 제 3차 구역찬송가 경연대회 ((총 27개 구역이 참가했다. 결과는 1등: 14구역(구역장 김공환), 2등:  6구역(구역장 장경욱) 3등: 5구역(구역장 이상근), 13구역(구역장 유동우) 등이었다.))
 11월 26일 성전건축헌금 마련 친선골프대회 (Great Gorge Country Club) ((입상자: 1등 김성민, 2등 최재식, 3등 유강윤))
 12월 15일 기획당회 (불빌기도원)
 12월 24일 맨해튼장로교병원(Presbyterian Hospital) 에이즈 환자 방문 연주
 연말       김정희 교우, 성전건축기금모금 전시회(본당 하층)

1993년

성전을 건축하라

새해 1월부터는 91년 10월부터 시행해온 4부 예배를 중지, 3부 예배로 재차 환원했다.
이에 따라 첫 주일(1월 3일)부터 예배 시간이 1부 오전8시, 2부 오전10시, 3부 12시 등으로 재편됐다.
까닭은 교인 상호간의 성도교제가 힘들고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의 고충이 적지 않은 등 비효율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 예닮원을 얻게된 2년여 뒤인 1995년 10월 첫째 주일부터는 다시 4부 예배를 추가하게 된다.
새해 목표는 ‘성전을 건축하라’(에스라 1:1)였다. 본당을 비롯한 기존 공간은 아무리 봐도 너무 좁아, 더 이상 뻗칠 곳이 없는 만큼 새로운 교회당 자리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새해 목표에도 반영이 되었다.
1월 15일〜17일에는 이인수 장로(새문안교회)를 초청, 특별간증집회를 가졌고 23일에는 제직수련회(강사 손길룡 목사)를 가졌다. 새해초 대부분의 이벤트가 예년과 별 다름없이 바쁘게 진행됐다.
새해 초 김목사는 ‘다시 성전을 건축하라’(에스라1:2),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요 4:23-24)등으로 메시지를 전했고 1월말에는 ‘십일조 드리는 신앙’(말 3:8-11)이란 설교를 통해 믿음과 십일조의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조영진 부목사는 10일 찬양예배 설교를 ‘기적의 해가 되게 하소서'(히 6:14-15)라는 다소 영성적인 제목을 택했다.

모든 좋은 것을 목회자와 함께(갈 6:6)

정초인 1월 3일 주보 교회소식란에 흥미로운 문장이 들어있었다.
“각부 모임이 교회나 개인 집에서 모이기 전에 목사님에게 보고를 드리고 목사님의 예배로 시작해야 합니다. 특히 파티도 먼저 목사님의 예배인도 후 식사하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이란 당회장을 가리키는지 목사급 사역자들을 가리키는지, 문장 상으로는 확실치 않지만, 모임 전에 목회자가 관여하지 않았을 경우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소재가 분명치 않아서였던 것 같다. 필시 이런 유의 불상사가 발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교회관련 행사에 목회자가 고의적 또는 부지중에 빠져서는 교회행사일 수 없다는 평범한 원칙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목회자의 이 교훈에 순종하는 것은 여러 모로 성경적이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라고 했기 때문이다. ‘모든 좋은 것’이라고 했으니, 예외가 없는 법이다.
또, 목회자에게의 일반적인 순종에 관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라는 성구도 그렇고,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히 13:17)도 그렇다.

공원 구역예배의 즐거움

날씨가 풀리는 봄철부터 늦가을까지는 공원에서 구역예배를 드리는 예가 현저히 잦아졌다. 특히 예닮원을 얻기 전에는 그러했다.
공원내 구역모임은 야외예배를 갖는 기분이다. 아니, 사실상의 야외예배다. 바쁜 일상의 틈바구니와 답답한 주택환경을 벗어나 꽃과 나무, 풀이파리들을 바라보며 동심에 젖을 수 있고 낭만적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뉴저지에는 기막히게 멋진 공원들이 즐비하게 널려있다. 주의 별명 자체가 가든스테이트(Garden State)이니 오죽하랴.
한 달에 한번이라고는 하나, 가정집에서의 구역예배는 해당 가정으로서는 또 한번의 대 심방(?)처럼 약간 부담스러운 데다 보통 구역원들에게 최소한 간단한 다과정도는 제공하는 예가 있다. 물론 겨울철에는 비좁은 가정집도 오순도순 정답기만 하지만, 무더운 여름철에는 사뭇 상황이 다르다.
여름철에는 우선 확 트인 자연공간이 시원스럽고 주위의 나무 때문에 공기도 맑아 몸과 마음이 개운한 데다 스트레스도 한결 풀린다. 아울러, 아무래도 건물보다는 자연이 하늘나라의 모습과 더 가깝지 않을까.
인류는 본래, 마치 엄마의 품과 고향을 그리듯 자연을 찾는 노스탤지어 적 본능이 있다. 우리네 첫 선조가 아름답고 완전한 에덴동산에 살다가 쫓겨났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하늘나라가 진짜 본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돌아보면, 우리 교회는 설립 초 예배를 공원에서 드리기 시작한 교회다. 첫 예배부터가 그랬다. 예닮원이라는 드넓은 ‘공원 교회’를 얻은 것도 같은 맥락이랄까.
요즘은 일반가옥처럼 교회당 앞 강단 쪽에다 그림 같은 자연경관을 내다볼 수 있는 큼직한 창문을 단 교회라든지 사방 벽을 몽땅 유리로 횡 하니 터놓은 현대적인 교회당도 없지 않다. 그만큼 자연과 가까워지자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교회들은 강단에 교인들을 주목시키기 위해, 그런 모험을 감행하진 않는다.
일찍이, 우리 교회는 1991년부터 공원 구역예배 현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주보 상에 구역예배 상황이 보도되지 않은 80년대나 1990년 후반기 중까지는 기록상 공원 구역예배 여부를 알 수 없다. 구역예배보고가 주보에 정식으로 실리기 시작한 것은 90년 10월 27일 주일부터였으니 말이다.
공원 구역예배가 주보 상에 최초로 나타난 것은 91년 7월경이었다. 그해 ‘6월 구역예배보고’ 난에 제8구역 ((당시 8구역 구역장은 조영진 집사, 권찰은 박순자 집사였고 성경지도자는 조영진 목사였다.))이 그 다음 번 구역예배 일정을 ‘park에서 7/28’로 기재한 것이다. ((1991년 6월 30일 주보 참조.)) 2주 후인 7월 14일 구역예배보고에는 제1구역 ((당시 1구역 구역장은 박희일 장로, 권찰은 한종희 집사, 성경지도자는 조영진 목사였다.))도 ‘park에서 7/25’ 라고 예보했다. 당초 공원예배 개시 ‘테이프’를 끊으려 했던 8구역보다 사흘 앞당긴 날짜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가장 먼저 공원모임을 가진 첫 구역은 8구역도 1구역도 아닌 II교구 소속인 제17구역 ((당시 구역장 이인용, 권찰 이은주.))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17구역은 7월 구역예배를 21일 이인용 집사 집에서 갖기로 했다가 돌연 예정을 바꿔 공원에서 19명이 모여 예배함으로써 살짝 선수(?)를 친 것이다. 7월말까지 공원에서 모임을 가진 구역은 모두 3개였다.
8월로 접어들자, ‘park에서’라고 기재한 공원예배 희망구역은 4, 8, 17, 18, 구역이 더 늘어 모두 5개 구역이 됐고, 이를 실행한 구역이 4구역이었다. 일단 공원 ‘맛’을 본 구역은 물론 공원예배를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었다. 9월까지도 3개 구역이 공원모임을 가졌고, 한기 서린 10월에 계획한 구역은 1구역이었으나 실제로는 단 한 구역도 없었다. ((제1구역이 그해 10월 구역예배를 공원에서 갖기로 했다가 예정을 바꿔 개인 집(박영택)에서 드렸다. 1991년 10월 27일 주보 참조.))
공원구역 모임의 즐거움을 단단히 맛봤는지, 이듬해인 92년에는 일찌감치 5월초부터 시작됐다. 제20구역 ((구역장 정우영·권찰 강진희.))이 5월 3일 공원에서 모인 것이다. 5월중 공원모임을 가진 구역은 2개 구역이었고, 6월에는 대폭 늘어나 11개 구역이나 되었다. 그러나 7월에는 5개 구역으로 줄어들었고, 8월에는 2개 구역 ((당시 7, 8월은 휴가철인데다 교회행사가 많아 구역예배를 드리지 못한 구역도 상당수였다.)), 9월에는 단 1 구역이었으며 10월에는 전혀 없었다.
1993년에는 아예 4월보고 때부터 미리 공원모임을 신청(?)해놓은 구역이 있었다. 3개 구역이었다. 그런 구역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5월말까지 공원에서 예배드린 구역은 7개였다. 6월에는 8개, 7월에는 1교구만 6개 구역이었고, 휴가말기인 8월에는 모임을 가진 전체 4개 구역중 단 1개 구역이었다. 휴가철이 지난 9월에는 3개 구역이, 10월에는 1개 구역이 예정했다가 가정집으로 바꿨다.
94년에는 공원에서 드려진 구역예배 회수가 총25회였다. ((94년도에 공원에서 구역예배를 드린 월별 구역 수는 5월에 1개, 6월 6개, 7월 9개, 8월 6개, 9월에 3개였다.)) 그 무렵에는 교회당에서 구역예배를 드린 구역도 상당수 있었다. 예닮원(구 오클랜드교회당)을 구입하고 난 95년 봄철에도 공원모임을 갖는 구역이 간혹 있었으나 예닮원 구내가 가꿔지고 정돈되면서 그해 6월부터는 예닮원에서 모이는 구역이 대폭 늘어났다.

수요예배 성가대 모집

그 즈음 수요예배를 위한 성가대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 동안 매주 수요찬양은 각 구역별로 돌아가며 맡아왔었다. 그러나 좀더 교회음악다운 전문성이 요구되거나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거나 모이지를 못해 역부족인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책임 있게 찬양사역을 수행할 일꾼이 필요했다. 그러나 종래는 이루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지금까지 계속 구역별 윤회로 찬양드리고 있다.

부모님 주일과  교우야외예배·운동회

가정의 달인 5월에는 부모님 주일 행사와 온 교우 야외예배가 주요 이벤트였다.
5월 9일 부모님 주일을 위해 교우 가정에서 카네이션 600 송이를 기증해 교우들의 가슴에 달았다. 그날 예배 때 김창길 목사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룻1:15-21)란 메시지를 전했다.
5월 16일은 전교우 봄야외예배를 가졌다. 장소는 전년도와 같은 매리언 슈라인(Marian Shrine)이었다. 예년과 다른 점은 본당에서 1부 예배(오전8시)만 드린 후 전 교우가 오전 10시30분에 야외예배 장소에서 함께 모이기로 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동안 1〜3부로 예배 시간이 엇갈려 서로 만나지 못한 본의 아닌 ‘이산’ 교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외예배는 전 교우 집합의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이 행사를 앞두고 교회는 이런 공문을 배포했다.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새롭게 소생하듯 모든 생명이 새롭게 생동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온 교우가 다함께 야외에 나가 주님 동산에서 예배하고 즐겁게 뛰노는, 그래서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귀한 시간을 준비하였습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가 본당에서 주님 은혜로 부흥 발전함에 따라 본당이 협소하여 전 교우가 다함께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오니 부디 참석하시고 특별히 이번에는 지나간 몇 년 동안의 야외예배를 참고하여 개인과 구역별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그룹별로 다양한 놀이와 상품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야외예배에 도착한 교우들은 곧바로 짐을 내리지 말고 성경 찬송을 갖고 예배부터 드린 뒤 구역깃발이 꽂힌 곳으로 이동해 달라”는 당부도 곁들였다. 점심식사 후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는 담당 전도사 인솔로 운동회와 오락회를 가졌고, 청년부는 고등부와 함께 차량 안내를 돕고 전체행사가 끝난 후까지 남아 청소 및 정리 정돈을 맡도록 돼 있었다.
야외예배를 돕느라 20여 교우들이 현금과 상품, 의류, 전자제품 등 다양한 금품을 헌납했고 한 가정은 운동모 600개를 기증하기도 했다.
당일 I교구가 청군, II교구가 백군이 된 교구대항 운동회에서는 경기종목이 예년보다 다양했고, 그야말로 ‘배꼽 잡는’ 다소 기발한 게임과 흥미 소재들이 개발돼 나왔다.

교구대항 운동회(I 청군·II 백군)

전반전(1시간) 담당: 유승봉
1. ‘둥글게 둥글게'(50점): 전교우 짝맞추기 준비운동
2. ‘당신이 최고'(100점): 각 구역에서 부부 한 쌍 씩 출전, 반환점까지 업고 뛰어 돌아오기. ((몸이 풍성(?)한 부부들은 이럴 때 정말 인기를 독차지했을 것이다.))
3. ‘얄미운 당신'(200점): 각 구역에서 부부 한 쌍 씩 나와 반환점까지 서로
   가슴으로 풍선을 운반하고 엉덩이로 터뜨린 후 손잡고 돌아오기.
4. PGA 투어(300점): 각 교구의 고령자 순위로 10명씩 출전, 젓가락 2개로 골프 공 운반전달하기.
5. ? ((? 이라니, 이런 게임도 있었나?? 더 있을 수 있으니 기대하시란 표시인지, 예측불허의 황당한 게임 표신지… 여하튼 ‘흥미진진’ 표식이다.))
중반전(1시간) 
6. 축구(500점·전후반 20분씩)/주심: 김경열, 부심: 황종태(청), 정우영(백)
7. 배구(500점)/주심: 최재식, 부심: 유승봉(청), 방호성(백)
8. 피구(500점·여교우·전후반 20분) 주심: 이상근, 부심: 박용옥
9. 임마누엘오락회(즉석상품·500점)/담당: 장경욱
후반전(30분)
10. 줄다리기(1000점)/담당: 방호성
   (앞뒤전후를 봐서 아무 경기도 출전 안 한 교우)
11. 보물찾기(많이 찾은 교우는 못 찾은 교우에게 나눠주고)
12. 경품추첨 및 시상/담당: 황종태
목사님 폐회기도
이 야외예배에는 600여 교우들이 참석, 은혜와 형제우애의 한마당을 맘껏 양껏 펼쳤다.(사진 43)

사진 43.
교구대항 체육대회(줄다리기) Church Field Day

돌아온 선교바자와 거라지 세일의 계절

이미 80년대부터 선교·건축·자선 등 바자문화에 젖어온(?) 우리 교회는, 간혹 여러 부서들이 뒤질세라 한꺼번에 치르는 동시다발 바자회에도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5월말 주보에는 고등부가 6월 5일 거라지 세일을 한다는 광고가 났다. 옷, 장난감, 책 등을 보내주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고등부는 매년 이런 유의 기금모금을 해서 여름 단기선교에 쓰곤 했다. 아직 어리면서 착하고 기특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이었다.
그런가하면, 당일 제1남전도회가 온 교우들에게 뿌린 비라(?)에서는 숨을 멎게 하는 듯 강렬한 도전이 불일듯 튀고있었다.
잠깐만요 !
우리는 주변에 있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얼마나 관심을 가졌고 무엇을 했는지요?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 우리가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1. 매월 둘째 주일날에는,
  2. 각종 통조림류(육류·생선·야채·과일 등)를 교회로 가져오셔서,
  3. 친교실에 비치할 수집통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4. 수집된 통조림은 팰리세이즈팍에서 일하는 소셜워커를 통해서 타운 내
     극빈자들에게 전달할 계획입니다.
남전도회의 이 간단명료하고도 순발력과 호소력을 겸한 애교스런(?) 손짓에 교우들은 마음이 홀리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지난해 여전도회에서 바자회를 통해 모금한 기금 중 1,000불을 팰리세이즈팍 고등학교 장학금으로 기증했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만점 선행들이었다.
한편 영어부는 7월에 맨해튼 무의탁 보호소를 방문하기 위해 모금의 일환으로 김밥과 빙수를 친교실에 준비하고 유료 제공했다.

‘오 마이 베이비!’—장하다 우리 현지~

앞을 다퉈 성장 발전해가던 우리 교회는, 뭐가 튀어도 늘 크게, 높이, 멀리 ‘튀는’ 소질이 있었다.
5월 중 뉴욕한국일보사 주최 제10회 우량아선발대회에서 본 교회 주소웅(고명숙) 교우네 딸 현지 양이 최우량아로 뽑혔다. 정말 놀랄만한 일이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이었다.

만발한 졸업의 꽃들

6월 13일 졸업예배 때는 그 어느 해보다 엄청 많은 졸업생(108명)들이 영예의 식전에 참례했다. ((각부별 졸업생 수는 다음과 같았다. 유치부 23명, 유초등부 30명, 중등부 9명, 고등부 7명, 대학교 8명, 대학원 6명, 박사 5명.)) 대학원 졸업자 중에는 교육담당 부목사인 김흥교 목사(Presbyterian Seminary of NY)도 끼어있었다. 김창길 담임목사는 이날, ‘택한 나의 그릇'(행9:15-16)이라는 메시지로 졸업생들의 영혼에 힘을 북돋아주었다.

김 목사 러시아 선교여행

김창길 목사는 7월 4일부터 2주 동안 러시아선교여행을 다녀왔다. 김 목사는 상페테르츠부르그에서 3번의 설교와 6시간의 신학교 강의를 했고 모스크바, 우즈베키스탄, 타시켄트 등을 방문하고, 그곳 교회와 고려인들의 생활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그리고 7월 25일 찬양예배 때 선교보고를 했다. 또 10월 24일에는 채널 63(WMBC)에서 김 목사 소련 선교보고가 녹화되어 31일 오전 8시에 방영됐다.
그 무렵의 러시아는 소련공산당 정권이 무너지고 갓 개혁과 개방을 하던 참이어서, 방문자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맛볼 수 있었다.

어린이여름캠프

7월 20일〜22일 어린이여름캠프가 Mount Motor Lodge에서 열렸다.
선착순으로 1〜6학년 어린이 100명을 접수했다. 강사는 김 강 전도사(LA오렌지영락교회 주일학교)였다. 캠프에 초대하는 공문이 이렇게 나갔다.
싱그러운 여름철이 다가옵니다. 그 동안 실내에서 열심히 신앙교육을 받아온 우리 어린이들의 마음과 몸은 이미 저 푸르른 들판으로 달려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금년에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 자연으로 우리 어린이들을 데리고 여름캠프를 가지려고 합니다. 최신의 캠프시설과 깨끗한 음식으로 잘 알려진 캠프장에서 선착순 1〜6학년 어린이 100명만 받아 여러명의 카운슬러들의 도움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여름캠프를 갖게 됩니다. 가능하시면 빨리 신청하셔서 귀한 기회에 어린이가 동참할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이 공문이 퍽 잘된 때문인지 그후에도 몇 년간 같은 내용의 공문이 활용됐다.

항존직 대거 선출

10월 31일에 항존직 투표를 위한 공동의회가 열렸다. 당선자는 안수집사 10명, 권사 6명이었다. ((안수집사: 황종태 김진 홍종봉 정우영A, 이상근 김성인 변병조, 김경열 최영선 조인기. 권사: 허필수 정시화 양연이 박광자 이순옥 김금이)) 이들을 위해, 94년도 3월에 있을 임직식을 앞두고, 12월부터 2월까지 3개월간 항존직교육을 매주 수요예배 후에 가졌다. 과목은 구약개론, 신약개론, 교회헌법, 신조, 예배모범, 청지기학, 장로교신앙, 집사론, 권사론 등이었고 외래강사의 강의도 있었다.

주일성수 위한 지역투표 캠페인

미국 선거철을 앞둔 10월 31일 주보에 이런 광고가 났다.
버겐카운티가 11월 2일 투표하는 Blue Law(주일에 가게문을 열지 못하는 법)을 폐지하려는 데 반대하여 NO하십시다.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동조하여 막대한 자금으로 로비활동을 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상명령이며 또 한국 교포가 7일동안 일하고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Blue Law 폐지하자는 문안에 NO 해주시기 바랍니다.

의료선교회 구성하다

10월 31일 의료선교회 임원들을 선출했다. 회장에는 정신과의사 유강윤 집사가, 서기 박현서 집사(간호사), 회계 이은희 집사가 각각 선출됐다. 회원은 의사 노연숙집사(마취과), 정해양 집사(소아과·내과), 이문세 집사(치과), 약사 이수희 집사, 간호사 이윤옥, 주종희 집사와 서경희 윤수련 교우 등.
정해양 집사는 11월 중 임마누엘 회원 감기예방주사를 자신의 내과·소아과에서 무료 제공했고 12월 5일에는 백혈병 환자를 위한 혈액검사를 희망자에 한해 의료선교회에서 실시했다. 의료선교회는 그러나, 닥터들이 워낙 바쁜 관계로 구체적인 사업 프로젝트를 세워 선교사업을 제대로 진행하지는 못하다가 점차 페이스를 찾게 된다.

네 번째 구역찬송경연대회

제4회 구역찬송가경연대회가 11월 28일에 개최됐다.
김홍윤 집사가 진행한 이날 대회에서 모두 25개 팀이 참가했는데, 13, 14구역과 12, 28구역은 합하여 1개 팀을 이뤘다. 심사기준은 출석 50점, 음악성 30, 태도 20점씩으로 당일 출석 성적이 유난히 강조됐다. ((심사위원장 김인선 장로, 심사위원 조영진 최정훈 이상원 김홍일, 천광우 지휘자들이었다. 반주는 서연화, 문은영, 홍순양 등 성가대 반주자들이 맡아했다.))
요청사항 자유곡 악보는 반주자에게 제출했고 간단한 구역 소개서도 사회자에게 미리 제출해야 했다. 그해 최우수상은 제24구역이었다. ((Harrington Park, 구역장 황종태 권찰 유숙영.)) 그밖에도 1·2·3등과 믿음·소망·사랑·은혜·분투·못말려상과 참가상이 수여됐다. ((1등: 12·28구역(유학생구역 / 구역장: 이승환 / 권찰: 김남주), 2등: 7구역(Palisades Park/구역장: 이문세/권찰; 조혜숙), 3등: 2구역(Palisades Park/구역장: 최영선/권찰: 안정옥)))

서리집사 선임기준 강화

교회는 새해 서리집사의 선임을 앞두고 좋은 일꾼들을 뽑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회는 12월 12일에 연말 새해 서리집사 후보 추천기준을 발표했다.
집사 후보 명단과 함께 교구별로 당회장실에서 면접을 하도록 했다.
면접은 교구별로 A·B팀으로 나눠 차례로 12월 12, 14, 16, 19일에 실시됐다. 1교구 A 17명, B 15명, 2교구 17명, B 16명 등이었다. 그리하여 12월 31일 송구영신 예배 때 남자 24명, 여자 29명 등 총 53명을 임명했다.

93년도 대내 이벤트 일지

2월 7일 이영자·이종숙·전백림·민경석·송기하 명예권사 임명식 및 축하다과회.
  2월 18일 어머니영어회화반 2학기 개강(매주 목요일 오전).
  2월 14일 영어청년부 담당 유영권 전도사 임명.
  3월 21일 손영진 복음성가가수(서울강변교회) 간증과 찬양.
  4월 9일 청년회 정원 공사, 여전도회 화단정리.
      11일 유·초등부 교사회의(매주일 오전11시30분/친교실).
      16일 전교우 기도회.
  4월 18일 새교우 환영회.
            이종태 사찰 부임.
  5월 2일 관리부장 김경열 집사, 봉사부장 홍영석 집사 임명.
  5월 3일〜6월 11일 40일 특별새벽기도회. ((교회건축준비 및 교우 영성훈련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 특별기도회에는 70여 교우가 모여 은혜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5월 초 주보 교회소식은 “우리 모두 기도제목을 가지고 매일 아침 5시30분에 기도드리십시다. 응답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5월 9일 교우 가정 대상 교회로고 스티커 배부.
          제1남전도회, 팰팍 청소년회관 운영기금 $1,000 기부.
  5월 16일 전 교우 봄 야외예배 및 교구대항 운동회
  5월 21일 뉴저지성서대학 제4회 신학공개강좌(강사 민영진 목사). ((제목: ‘한국어 번역의 역사’, ‘성경전서 표준새번역의 특징’, ‘성경전서 표준새번역의 쟁점’.))
  5월 21·22일 임마누엘회 뉴햄프셔 화잇마운튼 여행(40명 참가).
  5월 31 연례 메모리얼 퍼레이드 참가.
  6월 19일 2부 호산나 성가대 피아노 반주자 안마가렛, 권율희 김형욱 대원 송별회.
  7월 4일〜22일 김창길 목사 러시아선교여행.
  7월 6일 여름학교 개강
  7월 19일 어린이교회학교 부흥회
  7월 20일〜22일 유년부(1-6학년) 서머캠프(Pocono Motor Lodge Camp)
강사: 김강 전도사(LA오렌지영락교회 주일학교)
  7월 30일〜8월 3일 전교우수련회(강사: 한진관 목사). 215명 참가. ((전반부는 본 교회에서, 후반부는 포레스트수양관에서 열렸다. 새벽기도회는 김태열 사모가 이끌었다. 한 목사는 과거에도 우리 교회 부흥회를 인도한 바 있었다. 회비는 무료여서, 희망자는 누구나 쉽게 갈 수 있게 했다.))
  7월 31일 김흥교 부목사가 뉴욕중앙교회 부목사 부임.
          김도일 어린이부 전도사 이임.
  8월 6일〜8일 청년부수련회 강사: 이학권 목사. 27명 참가.
  8월 15일 광복기념주일.
  8월 31일부로 정성훈 알렐루야성가대 지휘자 이임.
  8월 14일 어린이학교 영아부, 노숙자 대상 선교. ((노래를 준비하고, 샌드위치, 의류와 비누 등을 선물로 배부하고 옴.))
  8월 22일   9월부터 1부 예배 교회학교 어린이부 개설(책임총무: 장혜경 집사).
  9월 5일 유년·초등부 1부 예배 개시(오전8시). ((연변 기숙대학교 낙성식 참석. 용정한인교회, 북경과 장춘 중국인 교회 등 순방.))
            미주장로회신학대학 신학생 후보로 이원경, 박현서 집사 결정.
    9월   5일〜17일 김창길 목사, 중국 방문.
9월11일 버겐경로학당 개강.
            뉴저지한인장로교회 부속 한국학교 개학.
9월 19일 최정훈 전도사 미국장로교 한미노회에서 목사안수.
9월 26일 최정훈 목사, 대예배서 안수기념 설교.
9월중 최정훈 목사를 부목사, 도에스더 전도사를 교육전도사, 천광우 씨를 알렐루야 성가대 지휘자로 각각 선임.
10월 8일 신규 어머니성경반 개강. ((파라무스성경반(김영숙권사), 금요성경반I(김에스더사모), 금요성경반II(조영진목사).))
  10월 10일 신입교우 환영회.
  10월 14일〜17일 부흥사경회. 강사: 박영선 목사(서울봉천교회). ((‘달란트를 활용한 자’(사명론), ‘신앙인의 삶’, ‘성부시대의 기독교’, ‘기독교 신앙의 3대 요소’(교인론), ‘봉사자의 삶’, ‘성자시대의 기독교’, ‘구원의 방주’(교회론), ‘한국교회의 사명’(선교론) 등의 말씀을 전했다.))
10월22일〜23일건축바자회 ($21,530 모금).
10월24일남전도회 주최 안병욱 교수 강연회 ‘세계 속의 한국인의 사명’
10월31일 항존직 투표 공동의회. ((당선자 안수집사: 황종태 김진 홍종봉 정우영A, 이상근 김성인 변병조, 김경열 최영선 조인기. 권사: 허필수 정시화 양연이 박광자 이순옥 김금이.(본서 346쪽 주 70)))
11월7일유영권 전도사 미국장로회 샌프란시스코노회에서 목사 안수.
제1남전도회 성경공부반 개시(매주 목요일 저녁 8시30분
제1교육관) ((지도 김창길 목사.))
11월14일유영권 목사 안수기념 설교
찬양예배 청년부 헌신예배 후 ‘젊은 예수와 나’ 공연
연극 재 공연.
12월6일1994년도 준비 기획당회(레인보우수양관).
12월15일제5회 뉴저지성서대학 졸업식(본당)

93년도 대외활동 일지

2월20일뉴저지노회 연합제직수련회(강사 조덕현 목사).
3월4일〜7일김창길 목사 캐나다 교회 방문. ((토론토염광장로교회 부흥회 인도. 토론토영락교회 설교.))
  4월 9일 성금요일 가상칠언 연합예배(한무리교회).
  5월 2일 뉴저지노회 교육부 어린이교회학교 사생대회
(파라무스 벤슨공원).
5월13〜17일 뉴저지교협 호산나93대회(티넥고교). 강사:
박종순 목사(서울충신교회).
14〜15일 교역자세미나·사모세미나·백양세미나(본교회당)
5월21일 뉴저지성서대학 제4회 신학공개강좌(강사: 민영진 목사).
6월7일 김인선 장로, 뉴저지교협 제7차 정기총회에서 부회장에 피선.
6월 22일〜24일 미주한인장로회 제18차 총회. 김창길 목사 부총회장 피선. ((본 교회 장로총대: 정주섭·조영진·박희일 장로.))
8월 15일 교협 주최 광복기념주일예배(뉴저지영락교회).
9월5〜6일 총회 북방선교회 주최 중국·러시아 선교세미나(본교회당).

1994년

시대를 앞서가는 교회

김 목사는 새해 첫 주일인 1월 2일 ‘시대에 앞서가는 교회’(시 34:14)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새해 목표이기도 했다. 그날 공동의회는 새해 예산을 815,000불로 결정했다.
새해부터 성경공부 문답지는 창세기 공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1월 23일 주보에는 성경공부를 제출할 때 파일에 끼어서 내고, 없는 교우들은 만들어서라도 제출해 달라는 주문이 있었다.
새해에도 제1남전도회는 변함없이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통조림 수집을 매달 하고 있었다. 그해 첫 달 분은 1월 30일에 수집했다.
1월말에는 94년도 구역담당자가 발표됐다. 모두 26구역으로 교구당 13구역씩이었다. 이와 함께 주보에는 “교회의 모든 부서는 2년마다 바뀝니다”라는 귀띔이 들어있었다. 구역장 권찰 수련회가 1월 29일 오후 7시30분에 교회에서 모인다는 광고가 있었다.
한편 본 교회 지교회인 웨체스터한인장로교회가 23일 창립 3주년 기념예배 및 장로 장립식, 임직식을 가졌다.

윤형주 초청 찬양과 간증의 밤

1월 9일 저녁에는 연예인 윤형주 집사 초청 찬양과 간증의 밤이 열렸다.
‘하얀 손수건’, ‘우리들의 이야기’란 노래로 유명한 윤 집사는 ‘대마초 사건’으로 투옥된 후 ‘너는 내 것이라’(사 43:1)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서울 온누리교회 안수집사와 (주)한빛기획 대표인 기업가로, 그리고 복음성가 가수로 변신하여 복음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아름다움’(나침반사) 등 책도 집필했고, 한국가수선교회 회장 등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윤 집사는 90년대 후반기에 다시 장로가 되어, 뉴욕을 비롯한 미주에서 퍽 자주 초청 받아 비슷한 집회를 이끌었다.

달라져 가는 교회당

2월 6일부터는 교회강단이 새로워졌다. 오르간 위치가 성가대쪽으로 옮겨졌고, 기도대가 세워져 세례와 결혼식 때, 앞에 나와 기도드릴 때, 특별기도와 안수기도를 할 때,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끊임없이 공간확충에 힘써온 우리는 새해에도 공간을 넓히고 있었다. 영아부 방이 1층과 2층 두 곳으로 늘어난 것이다. 또 영아부 비디오실이 협소해 1층 (구)회계실에 방 하나를 더 만들고, 거기 있던 회계실은 제2교육관 지하실로, 한국학교 사무실은 3층으로 각각 이전했다. 한편 2월 중 한글학교와 교회학교 유치부가 교사를 찾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2월에는 교회본당 카페트와 친교실 마루 등이 말끔히 단장됐다. 또 복도를 타일로 깔았으니, 교회당 안에서는 “절대로“ 껌을 씹지 말라는 신신부탁이 게재됐다.

한국학교 봄학기

본 교회 부설 뉴저지한인장로교회 한국학교는 그해 2월 봄 학기 개학을 앞두고 과거 어느 해 보다 풍성한 프로그램을 갖고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당시 학교 조직은 교장 김창길 목사, 교감 유동우 박사, 이수온 선생 등이었다.))
언론 광고상으로 밝혀놓은 학교의 설립목적은 “한인 2세들에게 신앙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어 미국 안에서 한국인으로서의 특수성을 개발하여 미래를 이끌어 갈 지도적인 인물의 배출“이었다. 특징은 매주 토요일 주1회 4시간 수업을 하고 한국 국정교과서를 각 학생별로 배부하며 학생들의 신앙 및 생활지도 체제를 확립한 것 등이었다. 모집대상은 네 살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였다. 각반 정원은 15명으로 철저히 정원제를 실시하여 초과 시에는 더 이상 등록을 받지 않았다. ((당시 등록금은 150불, 스쿨버스 70불이었고 교재대는 본교가 부담했다. 94년 봄학기부터 등록금을 50불 인하했다.)) 또 더 폭넓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주위 명소와 공원 등을 방문하기로 했다. 한편 한국학교는 학교설립 10주년을 맞아 효율적이고 책임 있는 교육을 위해 풀타임 디렉터를 초빙하고 있었다. 자격은 한인2세 교육에 관심이 있고 운영과 티칭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초빙광고는 그해 가을학기에도 반복됐다. 그만큼 적임자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한국학교 교사진도 매우 알찼다. 교사들의 학력과 경력이 적절하고 탁월했던 것이다. ((교사별 약력은 이러했다. 유영아: Rutgers 대 재학(커뮤니케이션 전공). 김남주: 숙명여대 아동교육학 석사, 한국학교 교사경력 4년. 이경희: 이화여대 영문학과, 한국학교 5년, Lindbergh초등학교, Palisades Pk. 중고교 보조교사. 이혜경: 이화여대 가정관리과, 한국학교교사 6년. 임주흥: 이화여대 국문과, 한국학교교사 4년. 조혜숙: Caldwell대 음악대학(성악).))

표 42.
뉴저지한인장로교회 한국학교 반 편성 및 교과과정

오순덕 권사 팔순 감사예배

본 교회의 충성스런 두 오 권사 중 한 분인 오순덕 권사 80회 생일잔치가 2월 19일 뉴욕 금강산(옛 서라벌연회장)에서 베풀어졌다. 191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오 권사는 중국 만주소학교를 졸업하고 39년 최대원 씨와 결혼했으며, 47년 인천송도교회를 개척했고, 59년부터 25년간 인천기독교방송국에 근무했다.
일가족은 3남 1녀에 손자손녀와 증손들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날 본 교회의 ‘또 다른 오 권사’인 오안순 권사가 축가를 불렀고, 조영진 목사가 ‘부르심에는 상이 있다’는 말씀을 전했다.

김 목사의 잦은 선교 나들이

1994년은 선교 면에서 담임 김 목사가 무척 바쁜 한 해였다. 특히 교단 일로 바빴다.
2월 13일은 브라질 이과수에서 모이는 남미선교사 세미나에서 ‘한국 디아스포라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강의하고 중남미노회에서 설교를 담당한 뒤, 22〜25일 볼리비아 라파즈의 이상철 선교사의 사역현장을 시찰하고 25일 귀국했다.
4월 25일부터는, 중남미지역 선교를 위한 협력과 상호지원의 기반을 다지게 될 중남미·중국·러시아 선교협의회를 4월 30일까지 참석하고 한마음교회, 성서신학원 등에서 설교를 맡아하고 5월초 돌아왔다.
남아메리카 장로교회 및 개혁교회 연합회 미주한인장로회, 미국장로교 등 4개 교단 대표들이 참석했는데 김 목사는 미주한인장로회 대표로 참석했다. 5월 중 김에스더 사모도 코스타리카한인교회 여전도회 주관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왔다.
교단 총회장으로 피선된 후인 9월에는 김 목사가 한국 예수교장로회 제79회 총회에 초청 받아 참석하고 집회를 이끈 뒤 15일부터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9월 18일 시드니제일교회에서, 또 뉴질랜드 오클랜드 영락교회와 신종혁 선교사가 선교하는 마우리 족속들에게 설교했다. 그밖에도 시드니에 있는 10명의 목사들과 미주한인장로히 노회건으로 의논을 했으며 캐나다 노회까지 참석하고 돌아왔다.
9월 29일에는 캐나다노회 교역자 부부 세미나에서 ‘이민교회 목회자 부부의 자세’란 주제로 강의를 했다. 30일 노회 때는 총회장으로 인사를 하고 한국교단과 본 교단에 관한 보고를 했다. 10월 1일에는 해밀턴교회에서 목사안수식 설교를 했다.
10월2일에는 토론토영락교회에서 설교를 했고 토론토 염광교회 신임제직을 위한 본 교단 소개 및 교회법 강의를 했다.
너무도 바쁜 나날이었다.

조영진 목사 이임

섭섭한 일이 있었다.
“본 교회에서 4년 6개월간 부목사로 시무하셨던 조영진 목사님은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신학연구와 서울서소문교회 부목사로 취임하기 위해 3월에 떠납니다. 오늘 3부 예배 후 여전도회가 마련한 송별파티가 있습니다.”

2월 27일 공식 이임한 조 목사는 3월 14일 한국으로 출발했다. 그는 나중 8월 21일에 본 교회에서 1·2부 대예배 설교를 하기도 했다. 조 목사는 그후 뉴저지초대교회로 부임한다.

오클랜드 교회자리를 확보하다 ((이 부분을 쓸 때, 다음 자료들을 참조했다. 뉴저지 일간지 ‘Record’, 1994년 5월 12일자 북부저지(North Jersey)판(Section D) 1, 2쪽. 세계 속의 한인교회(Ⅲ)(정석기 지음) 244〜247쪽. Record의 기사는 ‘Catholic order sells estate-A New Mission’이란 타이틀, ‘Korean church to buy site’란 부제를 달았고 사목관 기둥 사이에 앉은 신부와 별도의 저택 전경 사진, 주변 약도 등을 실렸다. 이 부동산의 상세한 역사와 내력을 곁들인 퍽 충실한 기사였다. 담당기자는 Paul J. Toomey.))

1994년은 우리 교회가 또 하나의 거보(巨步)를 내딛은 해였다.
래머포 밸리 로드(Ramapo Valley Road) 선상의 오클랜드 교회당 곧 예닮원을 발견하고, 구입절차에 나선 것이다. 25에이커의 숲과 늪지, 22,000평방 피트 넓이의 학교건물, (사진 44)9,000 평방 피트 규모의 사목관(rectory) ((당시 이 사목관에는 루이지 애서비 신부(Rev. Luigi Acerbi·이탈리아식으로는 ‘아체르비’)가 7년째 살고 있었다. 그는 이 사목관 사상 최후의 PIME 신부인 셈이다.)) 등 이곳은 부동산 시장에 나온 지 4년이나 된 터였다.

90-12 예닮원 본당 전경
Main Sanctuary at YDW

물론 구입 과정은 쉽지 않았다. 여러 차례 공청회와 우여곡절이 있었고, 거액의 헌금도 필요했다. 그러나 어디 첫 밥술에 배부르랴? 많은 기도와 헌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돌아보면, 본 교회는 91년 성전건축위원회가 조직된 이래 그 동안 열 한 차례 건물과 부지를 돌아보았지만, 다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고 적합치 못했다. ((부록 예닮원 편 참조.)) 오랫동안 기도하고 돌아보던 끝에 부동산 시장을 통해 우연히 소개를 받아 이곳을 찾은 것이다. 물론 사람으로 볼 때 우연이지만, 하나님으로 볼 때는 만세 전에 예비해 두신 ‘모리아 산’이었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 산은 ‘여호와 이레’의 처소였다(창22:1-19). 이 모리아 산이 바로 훗날 솔로몬 성전이 건립될 아라우나(오란)의 타작마당 부지였다(역대하3:1).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가장 귀한 아들을 바친 곳이 성전 터가 됐고, 아브라함의 뒤에 있던, 뿔이 수풀에 걸린 수양이 대신 제물이 됐듯, 성전 바깥 골고다 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어린양으로 죽으신 것이다.))
오클랜드 건물과 부지는 우리가 입주하기 전, 로마 카톨릭 소속 기관인 교황청 해외선교회 소속(Pontiff Institute for Foreign Mission·이탈리아어 약자 PIME) 훈련학교였다. 바티칸에 본부를 둔 PIME는 소외된 자들과 빈민들을 상대로 봉사하며 전세계에 병원과 양로원, 고아원, 학교 등을 운영하는 단체다.
PIME 이전에도 지난 역사가 있다. 버겐카운티 문화역사사무소 자료에 따르면, 맨 첫번 소유주는 ‘윌킨스 브라더스’(Wilkins Bro.) 브러시 공장 사장이자 오클랜드 소방서장인 루도 웨버 윌킨스였다. 래머포 강기슭에 자리잡은 이 공장은 1894년 설립돼 당시 오클랜드 최대의 수력(water-powered) 산업체였다. 약100명의 직원들이 이곳에서 머리 빗과 털 솔을 제작하여 전세계에 수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3년까지 이곳에 6개 부속건물이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이 현존해 있다. 현재의 목사관 건물이다. ((본 교회가 구입하기 전에는 PIME소속 루이지 애서비 신부가 사용하던 사목실이었다.)) 6회나 오클랜드 소방서장으로 재임했던 윌킨스는 1909년 이곳에 3층 집을 지었다. 신고전적인 도리안식 기둥이 서있는 흰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뉴저지주와 국가 사적으로도 손꼽히는 건물이다. 이런 유로서는 유일한 독특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차기 소유자는 오클랜드의 한 너싱홈의 소유자인 존 피오렐로 씨로 부인 메리와 함께 살다가 1959년에 PIME에 팔았다. 1963년 PIME는 부지 안에 학교를 세웠으나 불과 수년 후인 70년대에 폐쇄했다. 이유는 PIME 지원자의 격감 때문이었다. 1995년 당시 빈민을 돕는 약 500여명의 신부들이 미국에 남아있었고 21세기초인 지금도 잔존해 있다. 그후 이 건물은 수양관으로 사용되었었다.
본 교회가 매입 신청자로 나서자, 디트로이트에 있던 PIME 소속 사제들이 가격협상에 나섰는데 기본조건이 1백만 달러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때는 250만 불을 호가했었고, 세금보고에 따르면 380만 불로 평가되기도 했었다. 신문에는 ‘버겐카운티 한인계의 주요 종교 단체의 하나’인 본 교회에 팔리게 됐다고 소개했다. 오클랜드 시의 피터 켄덜(Peter Kendall) 당시 시장은 “새 소유주가 또 다른 종교단체인 것이 기쁘다”며 “그들의 건물 보유 목적이 우리가 원하던 바와 일치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오클랜드 성전건축을 위한 릴레이금식기도가 한창일 때였다. 김창길 목사는 현장에 자주 찾아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려고 그곳에 갔다가 수양관 간판이 없어진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그 새에 누가 이 건물을 샀나 본데…”
혼자 중얼거리며 잠시 기분이 암울해졌다. 나중에서야 진상을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후로도 그는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특별기도를 지속했다.
김 목사는 이후, 예닮원을 고향처럼 각별히 아끼게 된다. “나는 목사가 되기 전 꼭 농과대학에 가고 싶었죠. 꽃을 좋아했고 짐승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꽃을 보면 사람이 아름다워지고 순수해집니다.” ((정석기 지음 같은 책 246쪽.)) 그는 이곳에 에덴 가든의 이상을 실현하고 싶어했다.

반복된 오클랜드 공청회

아무튼, 오클랜드 교회당 구입 공청회를 앞두고 3월 20일부터 온 교우들이 기도와 금식에 들어갔다. 겉으로는 각자 바쁘게 자기 할 일로 나다니면서도, 내심 신경이 모두 오클랜드 공청회에 쏠려있었다. 주보 소식란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기도로 성전을 지읍시다. 성전 짓는 일에 하루 금식과 기도를 드리십시다. 오클랜드 교회당 구입 공청회를 위해 전 교우들이 기도와 금식으로 참여하십시다. 참여하실 분은 하실 날짜와 이름과 구역을 써넣어 주시기 바라며 친교실 벽에 붙어 있사오니 싸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날부터 친교 시 안내판은 매일 금식기도 날짜에 이름을 적어 넣는 교우들로 이내 채워져 갔다.
4월 3일 부활절예배 후에는 오클랜드 교회당 구입안건을 위한 임시공동의회가 열려, 경과보고와 설명이 있은 후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4월 10일 소식란에 그 소식이 게재됐다.

“본 교회 교회당 신축을 위해 버겐카운티의 오클랜드 222 Rampo Valley Rd.의 24.7에이커와 26,000평방피트의 2층 건물을 180만달러에 구입하기로 건축위, 당회,제직회, 공동의회에서 결정했습니다. 50만 불을 다운페이 하고 180만 불을 오너 모기지로 8년 6개월간 한 달에 17,000불씩 물게 됐습니다.”
뉴스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본 교회 예배는 팰리세이즈팍에서 2번의 예배를 드리고 오클랜드에서 1번의 예배를 드릴 예정입니다. 또 오클랜드교회당을 교육과 수양관을 위한 다목적으로 사용합니다. 거리는 교회에서 25분 걸립니다.”
6월 19일에 진짜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알렐루야! 여러분들께서 금식과 기도로 오클랜드교회 사용허가를 위해 애써 주심으로, 지난 목요일16일 오후8시 오클랜드 법원 워크세션-실무협의회에서 교회사용허가가 통과됐습니다. 그러나 8월 11일 주민공청회가 남았습니다. 계속 기도와 금식을 부탁드립니다.”
이 공청회란 것이 바짝바짝 사람 애간장을 태우고 피를 말린다. 미국에는 공청회란 것이 하고 많다. 의회 같은 데서는 청문회란 말도 쓴다. 법원의 심문도 배심회의 전에도 알고 보면 일종의 청문회 비슷한 걸 한다.
주민공청회는 주민들에겐 공평한 것일지도 모르나 공청회 대상자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진짜로 ‘빠꾸’ 되면 여태 노력이 헛수고이고 도루묵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8월 11일 공청회 당일까지 특별새벽기도회에 돌입했다.
공청일인 8월 11일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목요일이었다. 그러나 두 시간 가량 하다가 너무 늦어져 정회하고, 다시 9월 8일 속개하기로 했다. 주보에는 재차 “그날까지 계속 금식과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란 광고가 났다. 이것은 공청회 자체보다 우리들의 끈기와의 싸움인 것 같다.
그해 9월 22일. 그날은 우리 교회 역사를 장식하는 또 다른 감격의 목요일이었다. 오클랜드 주민공청회에서 교회허가가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이다. 금식과 기도를 해온 성도들의 기도의 승리였고, 하나님의 승리였다.

공청회를 기다리며 애태우던 기간 중, 광복주일인 8월 14일 여전도회는 이런 공문을 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교우님들에게 문안드립니다.
교우님들께서도 이미 아시다시피 지난 8월 11일 목요일 저녁 8시에 오클랜드 땅 성전건축문제에 대하여 그곳 주민들의 공청회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교우님들께서 눈물로 금식으로 특별새벽기도회로 앉아 있을 때나 서있을 때나 정말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아버지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공청회는 다시 9월 8일로 연기되고 저희들의 기도는 계속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해야할 한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대청소입니다(제1교육관 제2교육관도 포함됩니다). 오래 되어 상한 곳은 청소를 하여도 깨끗하게 되지 않을 부분들도 있겠지만 청소해서 깨끗해지고 새로워질 부분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사주었을 때 아이가 물건을 아끼고 잘 정리하고 간직한다면 우리는 그 아이의 모습이 예쁘고 대견하여 또 다른 것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저희에게 주어진 것을 아끼고 잘 닦아서 간직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쁘게 생각하시고 다시 있을 때에는 곡 저희들이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청소는 월요일(8월 15일) 아침 9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열 시간 걸릴 일도 열 사람이 한 시간 씩만 협조해 주시면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아침 시간에 여유가 있으신 교우님들께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회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셔서 협조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뉴저지한인장로교회 여전도회

준비물
·물에 젖거나 더려워져도 괜찮은 옷을 입으시고…
·걸레용 헌옷이나 타월 ·Ajax(Comet) ·윈덱스 ·작은 브러시(못쓰는 치솔이나 기타…)

김영덕 전도사 부임

김영덕 전도사가 6월 5일 본 교회 부교역자로 부임했다. 본 교회 김인선 장로의 장남이었다. 연세대 신과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했으며 팰리세이드장로교회 교육전도사를 역임했다. 사실은 이미 4월 10일 제159차 당회에서 그를 선임키로 결정했었다. 김 전도사는 또 그해 11월 5일 김창길 목사 주례로 성 토마스교회에서 신지영 양과 결혼도 했다. 신지영 양은 신진식 목사(기독교방송 사장 역임)의 딸이었다. 11월 17일에는 한무리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20일에는 안수기념 설교를 대예배 때 했다.

성숙해 가는 신앙(Growing Faith)

본 교회가 성장 발전하면서 언론을 통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특히 지역일간지인 ‘레코드’(Record)는 꽤 자주 접하는 신문이 됐다. 6월 9일자 신문은 ‘한인교회 붐—자라는 신앙’(Korean congregations boom-Growing Faith)이란 제하에 본 교회 교우들의 예배 광경 사진을 큼직큼직하게 곁들여 ‘교회가 이민자들의 적응을 돕는다’(Churches help immigrants adjust)라고 소개했다.
데이비드 깁슨 기자가 쓴 이 기사는 ((카메라는 릭 프랜시스(Ric Francis) 기자가 찍었다. 회중석과 성가대 가까이서 하나씩 시원스럽게 찍은 사진이었다.)) 그 전주에 지켜본 본 교회 새벽기도회로부터 아주 세밀히 관찰해 묘사했다. “오전 5시30분에 모여든 그들은 찬송가를 부르고 김 목사의 간단한 설교를 들은 후 오전6시쯤 어둑한 성전의 통로와 의자 사이 등 각자 기도할 자리를 잡아 구두를 벗고 ((‘성소에 대한 한국 전통적인 경건의 표시’라고 주를 달았다.)) 꿇어앉아 힘차고 서정적인 간구를 올리며 길면 7시까지 머물다가 하나씩 자기 일터나 가족들을 향해 돌아간다. 고속 성장하는 이 한인 공동체 멤버들의 하루가 그렇게 시작된다”고 썼다.

“이민자로서의 문제들을 겪으면서 다시 한번 교회를 찾아 믿음을 통해 힘을 얻고 삶 속에서 의지할 닻을 얻는다”는 이 기사는 ‘한인교회가 없다면 미국생활에 적응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라는 최정숙 교우의 말도 인용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초기사를 잠시 소개하면서 장로교가 최대교단으로 자라 미국에서도 역시 최대교단을 이뤘다고 소개했다. 북부 저지에만 70교회에서 지난 5년간 거의 배가됐다고 경탄했다. 또 1980년 당시 33명에 불과했던 교인이 지금 600명의 성인, 300명의 어린이들로 발전했고, 4부 예배로부터 다양한 모임과 소그룹이 있음을 소개했다.
오클랜드의 교회터를 구입한 최근 사실도 알리면서 곧 교단 총회장이 될 김 목사로서 “그만한 목사관에 거주하게 된 것이 걸맞다”고 나름의 평가도 곁들였다. 더욱이 통틀어 약 75%의 한인가족들이 교회와 연루돼 있고 65%가 정기 출석한다는 민병갑 교수 ((퀸즈칼리지 사회학교수. 한인사회 관련 통계전문가.))의 추산을 인용, “그들의 출석률은 대다수 미국교회를 부끄럽게 할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또 “미국교회처럼 지역사회의 일부가 되기를 원해” ((이 말은 이언 리 집사의 말이었다.)) 교인 가게마다 한글간판과 함께 영어로도 표기하고 더블파킹을 경계한다는 김 목사의 말도 인용했다. “본 교회 교인들의 80%는 학사 출신 이상입니다. 그러나 다수가 청과상과 생선가게 기타 등지에서 일합니다. 거기에 그들의 이상과 실제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 갈등을 조화시키는 길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김 목사 총회장에 피선되다 ((‘미주기독공보’(발행인 박희소·편집인 김주열) 94년 7월2일자(통권190호), ‘(뉴욕)교협신문'(발행인 조덕현) 94년 7월1일자(통권 68호) 등 언론 보도자료를 참조했음.))

그해 6월 21일부터 23일까지 사흘간, 미주한인장로회 19차 정기총회가 ‘네 장막을 넓히라'(이사야54:2)라는 주제아래 뉴저지 팰리세이드장로교회에서 개최됐다. 이 총회에서 김창길 당시 부총회장이 총회장으로 선출됐다. ((기타 임원으로는 목사 부총회장 김상구 목사, 장로부총회장 곽근상 장로, 총무 우요한 목사, 서기 김인철 목사, 회계 조명섭 장로가 선출됐다. 또 부서기 황의춘 목사, 회록서기 전덕렬 목사, 회록부서기 정창은 목사, 부회계 이덕신 장로도 추가됐다.)) 총회기간 중 본 교회 성가대가 개회예배 찬양을 맡고, 여전도회 첫날 저녁과 매일 다과를 담당하기도 했다. 총회장 취임사는 다음과 같았다.
이 모임은 미주 10개 노회와 240여 교회 대표 등 4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고 개회예배 중 총회장 김도석 목사의 설교도 있었다. 본회의 때 총대 210명중 198명이 참석한 것으로 집계됐다.
김 신임총회장은 인사말에서 ‘비전 있는 총회, 생산적인 총회’로 발전시킬 것을 다짐했다. 그는 이번 주제가 교단의 확장을 의미하며 교단확장을 위해서는 교단신문이 필요하고 2,3세가 머물 수 있는 교회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결론 부분에서 자신이 착용한 자주색 총회장 로브(robe)의 색깔이 암시하는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245교회를 섬기는 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자주색은 성경에서 고대의 왕족과 귀족 등 지배계급을 시사하는 색깔이었다(에스더8:15).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적(sovereign) 권위와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한다.))(사진 45)

사진 45. 김창길 목사 미주한인장로회 총회장 취임
Inauguration of Rev. Kim as Chairperson of KPCNJ

친애하는 제19회 총회 총대 여러분!
지난 19년 동안 미주한인장로회 초석을 놓으시고 이끌어오셨던 존경하는 증경 총회장님들. 저희 총회를 축하해 주려고 오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김창인 목사님, 그리고 재일기독교단 총무 강영일 목사님.
오늘 부족한 제가 10개 노회 245교회 세례교인 2만6천여명의 교단 대표가 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총회 일은 어느 누구 한 사람의 힘으로나 몇 교회의 도움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힘을 합하고 협력할 때 참신한 비전이 있는 총회와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총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총회 표어는 ‘네 장막을 넓히라'(Enlarge the place for tent.·이사야54:2) 입니다. 지금 세계는 지구촌(Global Village)입니다. 한국 동포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네 장막을 넓히라는 말은 땅의 넓이만 크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집만 크게 지으란 말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광야생활에서 장막이란 패턴의 교회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장막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너의 장막을 넓히란 말은 첫째로, 교단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1976년 미주한인장로회가 시작될 때, 미국 안에서의 동서중앙 3개 노회로 시작한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n USA이었습니다. 그러나 캐나다노회와 남미노회가 가입함으로써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대양주에 한국동포가 많이 가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곧 노회가 구성되어 들어올 것을 기대하며 또 러시아에 고려인 3세, 4세의 교회가 노회를 만들어 들어올 것을 기대합니다. 그때는 본 교단의 이름이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n the World로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미주한인장로회는 세계 한국 디아스포라를 위한 교회요, 복음이어야 합니다. 세계선교가 중요한 만치 한국 디아스포라 선교는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힘이 있어야 남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미에, 캐나다에, 미국 안에 한국인 교회가 필요한 곳을 찾아 교회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교단 확장을 위해서는 교단신문이 필요합니다. 교단 20주년을 바라보면서 아직 교단의 소식을 나누는 신문 하나 없었습니다. 총회가 고작 1년에 한번 총회촬요(보고서)를 내는 정도이며, 그것도 총대(總代) 없는 교회는 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교단 산하 교회와 교인들에게 일어나는 소식을 전하며 교단 신학의 일치, 설교자료 제공, 총회와 노회의 이슈, 급변하는 세계 속의 한국교회의 사명, 2세, 3세 문제 등을 토론할 대화의 장이 필요합니다. 교단신문이 나오면 교회가 급성장하며 연대성과 일치성을 갖습니다.
셋째로, 네 지경을 넓히라는 의미는 2세, 3세가 교회 안에 머물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2세, 3세를 위한 목회자 양성과 그들이 유할 수 있는 교회구조의 변화와 이들을 위한 투자가 요구됩니다. 우리가 교회를 짓고 땅을 넓혀도 그들이 떠나면 끝입니다. 교회는 한인 1세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디아스포라 2세, 3세를 위해서도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목회자들의 계속적인 교육과 1.5세와 2세를 위한 교육투자가 필요합니다. 교육은 지금 당장은 효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나타나게 돼있습니다.
본인은 총회장 로브(robe)를 입으면서 이 총회장복의 색깔의 의미처럼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245교회를 섬기는 자가 되겠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발걸음 따라 인내와 겸손으로 임기를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총회장은 우요한 총무와 함께 ‘교포신문’과 나눈 대담에서도 “이제는 세계적으로 흩어져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한데 묶는 지구촌 선교를 할 때입니다. 한국교회의 건전한 보수성향을 유지하면서 다른 교회들과도 협력해서 일하는 방향으로 교단 확장에 힘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내년(1995년)으로 다가온 총회창설 20주년 기념행사와 더불어 에큐메니칼 선교라인 선상에서 개혁교단과도 선교협약을 맺어 신학적 교류와 사업의 공동목표를 세워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교단이 극단적인 보수주의에 머물러선 안됩니다. 변화돼가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직면하면서 세계 교회와 호흡을 함께하며 세계 교회 선교사역에 협력과 유대를 갖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는 또 현대교회의 세속화와 관련, “현대신학 자체가 복음보다 문화와 상황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기 때문일 것”이라며 “복음이 문화의 옷을 입을 수는 있으나 문화 때문에 복음이 죽어선 안 된다”며 예수님이 인간구원을 위해 인간의 옷을 입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눈을 들어 바라보라

그해 한국에서 발간되는 「월간 목회」 7월 호에 ‘눈을 들어 바라보라’는 김 목사의 설교가 실렸다. 이 기고 설교에서 김 목사는 아브라함과 롯의 안목과 관점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썼다.
거의 모든 이민자들이 자동차를 사기 위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부부가 맞벌이하여 빨리 자기 집을 마련키 위해 뜁니다. 그 동안 자녀들은 TV를 보면서 친구를 잘못 사귀면서 고독으로 인하여 병듭니다. 아이들이 다 잘못된 후에 학군 좋고 정원 넓은 집을 사서 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이들이 아이비리그 대학교를 위해 미국에 온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들이 문화를 창조하며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존재이지, 학교 들어가는 일과 집과 자동차를 장만하는 일이 미국에 어렵게 이민 와 사는 이유가 아닙니다. 뭔가 우리들의 가치관이 잘못 바뀌어져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미국에 와서 개척한 청교도들은 처음에 교회당을 짓고 그 다음에 학교를 세우고 나중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청교도들이 마지막에 지었던 집을 먼저 짓기 위해 자녀들도, 아내도, 가족도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아브람과 청교도들이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미국 교포 75%가 교회에 속해 있는데 바른 가치관을 설정해 주어야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여기 미국에 늦게 와 사는 우리 한국동포들이 이민자로서 넓은 땅에 살 때 풍요로운 물질과 향락, 최첨단의 과학과 기술, 수준 높은 학문과 기술을 바라봅니다. 이때 우리 한국 이민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이 무엇이겠는가 말입니다.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의 가치관 정립이 중요합니다.
이 메시지는 한인들 뿐 아니라 ‘조기유학’ 병에 물든 한국 학부모들, 나아가 모든 학부모들이 가히 들어둘 만한 설교였다.

장로교 공보가 창간되다

교단신문인 미주한인장로회 총회신문인 ‘장로교공보’가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창간됐다. ((발행인 김창길, 편집인 김상구, 사장 곽근상, 주필 우요한, 편집장 유재도.)) 김 총회장이 취임사에선 표명했던 희망사항을 총회장단이 실행에 옮긴 것이다. 격월간 타블로이드판인 ‘장로교공보’ 창간사에서, 발행인 김 목사는 성년에 이른 교단의 지난 역사를 간추려 술회한 후, 신문발간의 의의를 일목요연하게 밝혔다.
그 동안 6개월이나 1년에 한번씩 노회나 총회에서 대표로 온 총대들만의 만남이었고 지교회나 평신도들은 교단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서 답답했고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었습니다. 그러니 힘도 규합되지 못하고 이슈도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이즈음에 ‘장로교공보’ 발간은 교단신문으로서 지교회와 노회와 총회가 만날 수 있는 장이며 평신도와 교역자가 대화할 수 있는 만남의 장입니다. 이민 1세와 1.5세가, 그리고 2세가 격의 없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장이며 남미와 캐나다, 미국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코리언 디아스포라를 한데 묶는 줄이 될 것을 믿습니다.
김 총회장은 ‘장로교공보’가 해외신자들에게 초교파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령지로서, 이민자들에게 한민족의 주체성과 정서를 고취하며, 지구촌에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이민사회와 세계에 기독교문화를 심는 촉매가 되기를 희구했다.
아울러, ‘장로교공보’는 정확한 보도와 공감 얻는 논평, 평신도 여론을 수렴해 새 공동체 형성에 기여할 것, 교회발전을 저해하는 이단과 사이비신앙의 척결에 앞장서서 교회의 정통성을 보호하고, 교단신학의 일치와 발전을 도모해 세계교회에 공헌할 것 등을 천명했다. 그러면서 김 총회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동안 우리는 이민자로서 읽을 거리와 말거리를 잃고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실어증(失語症)을 앓고 살아왔습니다.…이민자들과 교회를 위한 우리들의 신문으로 세계 한국 기독교인 손에 의해 만들어진 신문입니다. 페니 하나 미국교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한국장로교 신앙을 가지고 한국인 주머니를 털어 만들어내는 신문입니다.”
창간사 말미에서 발행인은 격월간이 곧 월간지가 되고 머지않아 주간지가 될 것을 기대했다. 이 신문은 본 교회를 비롯한 각 산하교회마다 뿌려져, 교인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읽기에 바빴다.

그해 여름학교는

94년도 여름학교는 7월 5일 시작하여 8월 19일 마감했다. 총 수업일수가 6주였다.
교사진과 체제, 내용 등이 한국학교와 비슷했으나, 교목 김영덕 전도사가 이끄는 채플 및 신앙지도, 영어스피치, 수영, 공작(Art & Craft) 태권도 등 주3회와 주2회 교과목 중 학년에 따라 하나씩 특별선택과목이 있다는 점이었다.
여름학교 종강예배는 8월 19일 금요일 오후 1시 드려졌다. 고등부 경배찬양단의 찬양인도로 시작되어, 임인영 선생의 예배인도와 이혜경 선생의 반주, 임주홍 선생의 기도, 김영덕 전도사의 말씀, 김창길 목사의 축도 등으로 이어졌다.
이경희 선생이 이끈 2부는 학예발표회로 가졌다. 애국가로부터 시작돼 유치반(유영아), 기초I(정명희), ESL(Ebet Diaz), 기초II(김성동), 1학년(이혜경), 2학년(임인영), 3학년(임주홍), 음악반(천광우·우순선) 영어반(Ebet Diaz), 태권도반(정스태권도)의 발표 순서로 진행됐다. 친교 시에는 아트와 태권도시범도 있었다 .4부 수료식에서, 수료증을 받은 어린이는 총 67명이었고 ((유치반 12명 기초I반 16명, 기초II 9명, 1학년 12명, 2학년 12명, 3학년 6명.)) 상을 탄 어린이도 근 50명이나 됐다. ((각 학년별 우수상 1·2·3등과 장려상 24명, 개근상이 23명이었다. 또 주기도문을 다 외는 어린이가 10명,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는 학생이 12명이었다.))

신앙은 이민사회의 정신적 기둥

앞서 언급한 한국잡지 「월간 목회」에 그해 9월 김창길 목사와의 인터뷰 내용이 실렸다. ((‘목회응접실’난을 위해 강신억 편집국장이 9월 8일 잡지사 기획실에서 김 목사와 대담한 내용을 실렸다.)) ‘신앙은 이민사회를 끌고 가는 정신적 기둥입니다’란 표제가 붙은 이 대담에서 김 목사는 이민목회자로 관조해온 의미심장한 교훈들과 견해를 설파했다. ((제목 아래 다음 요약문구가 적혀있었다. “이민교회는 한국교회의 훌륭한 신앙적 전통과 미풍양속을 지켜 가는 파수꾼이고자 합니다. 그것만이 세월이 지나서도 한인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세계선교의 비전을 일궈 가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한인사회에서 교회와 목회자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비교적 잘 감당하고 있다”고 말문을 연 그는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살아가는 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 신앙의 전승’이라고 전제했다.
특히 김 목사는 “참 신앙은 생활 속에서 열매를 얻는다”며, “한국문화는 한인교회에서 가장 잘 보존될 수 있다고 본다”는 중요한 말을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틈틈이 한국 예절교육과 함께 심지어 국악, 장기 등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가르친다고 밝혔다.
청교도들의 교회중심 신앙, 신앙제일주의의 가치관을 다시 상기시킨 김 목사는 “한인교회는 주일날 예배만 드리고 흩어질 것이 아니라 피차간 친교적 삶을 통해 교제를 나눔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교육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재양성을 뒷받침할 좋은 시설과 스포츠, 레크리에이션이 가능해야 한다는 김 목사는 “가까운 시일 안에 교회중심의 라이프스타일이 정착되리라 본다”며 2세 교육에 대한 적극적 투자 없이 한인2세교회의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적 신앙. 이것 없이 교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고 “바른 복음을 굳게 지키는 것이 교회의 비전을 가능케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와 함께 “한인은 한인끼리 뭉쳐야 한다는 김 목사는 “우리가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해도 미국인이 될 수는 없다”며 “따라서 한인교회의 전망은 매우 밝다”고 확신했다.
한인교회 성장에 기여한 구체적 프로그램의 사례로, 한글학교 외에도 토요일 오전 전문인들을 통해 노인들에게 성경, 영어, 교양강좌 등을 각 1시간씩 가르치며, 어머니합창단, 소년야구단, 성서대학, 평신도신앙훈련 등의 활동을 소개하고 지역사회 상담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한인교회의 당면과제로 무엇보다 교회의 본질을 되찾는 것이 시급하다”는 김 목사는 사회봉사만으로 교회의 책임을 다할 수 없고 선교와 2세들을 포용할 예배와 교육프로그램 개발 등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인교회 일각에서 분쟁이 잦고 상호협력하지 못하는 원인을 묻자 김 목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미국적 상황에서도 한국식 목회방식을 지나치게 고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넓은 나라에선 더 넓은 마음과 생활의 요구됩니다. 교파의식에 얽매이고 개 교회의 입장과 벽을 너무 높이 쌓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이념이 깨어져 가는 시점에서 내 교파, 내 교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배타적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동포복음화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다면 같이 손잡고 나가야 합니다. 나도 장로교 목사이기에 장로교적 특성이 많겠지만 그것이 절대적일 수 없잖아요. 복음 안에서 하나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개신교의 분열과 목사 장로들의 갈등 때문에 카톨릭측이 반사적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보는 한국교회상을 묻자 김 목사는 한국교회가 ‘풍만 비대 증후군’을 보인다며 장로제도의 변화와 경건 회복과 낭비 절제 등을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본 교회에 관한 물음에, 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15년간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한 신앙훈련과 교육목회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며 “장로님들과 온 교우들이 너무들 좋은 협력자, 동역자들“이며 하나로 잘 묶여있다고 자랑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본 교회 성장이 전도보다는 좋은 소문 때문이라는 점. 또 교계에 공통된 점으로서 이민생활이 안정된 틈을 이용해 신앙생활을 등한히 여기거나 교회를 떠나는 신자의 증가현상을 지적, 향후 이 부분을 극복하고 보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화려했던 제5회 구역찬송대회

11월 20일 추수감사주일 찬양예배 시간 때 제직회 음악부 주최로 그해 구역찬송대회가 열렸다. 규모나 짜임새에 있어 무척 거창하고 화려했던 행사였다. 우선 행사조직부터가 확실했다. ((대회장 양호식, 준비위원장 이상근, 부위원장 이인용, 위원: 윤덕철 유광훈 주요식 안내위원에 성전과 친교실 등 8명. 진행: 최영선 집사. 심사위원장: 김창길 목사, 위원: 최정훈, 김영덕 목사(출석부문), 음악: 이상원, 김홍일, 천광우 지휘자, 김창길 목사, 대니 한 목사(태도부문).))
시상내용은 1·2·3등이 트로피 및 부상을, 기타 아차상, 은혜상, 화목상, 못말려상 등이었다. 총 26구역이 참가했고 24-25구역은 통합팀을 이뤘다.
지정곡은 찬송가 308·311장. 부른 곡들을 보면 자유곡 중에서는 찬송가가 총 10곡이었고, 나머지 13곡은 복음송가 또는 경배찬양곡들이었다. 전년도인 93년에는 25개 참가팀 중 13팀이 찬송가를 부르고 나머지 12팀이 복음성가를 불렀는데, 판도가 바뀐 것이다.
예년처럼 자유곡 악보를 반주자에게 며칠 전 반주곡을 제출해야 했고 출연순서는 행사 1주전에 추첨했다. 빠른 진행과 질서 있는 운영을 위해 순번 1-12까지는 친교실, 12-24까지는 본당 내 지정좌석에 정좌해야 했다.
입·퇴장 질서를 위해 각 구역은 안내위원의 지시를 잘 따랐고, 본당 정문으로 입장해 앞 구역이 시작하면서 바로 대기했다. 퇴장은 본당 출입문 안쪽 계단을 이용, 친교실로 퇴장하되, 앞 구역이 퇴장하면서 동시에 입장했고, 혼잡을 피하기 위해 입·퇴장 공히 일렬로 우측 통행을 실시, 예년보다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였다. 친교실에는 대형 텔레비전을 비치했다.
평점계산은, 출석률을 최정훈, 김영덕 두 교구담당 목사가 해당교구의 구역을 백분률로 계산, 이를 40전 만점으로 환산하되 담당구역이 아닐 경우 배점하지 않았다. 태도는 단합 통일 질서 정확 열성 등을 심사하되, 출연의 입·퇴장 태도 및 연주태도를 포괄적으로 심사했다. 이는 김창길, 대니 한 두 목사가 숙의해 30점을 배점했다.
음악성은 1-3성가대 지휘자가 각 10점씩 분담하되 지휘자 자신의 소속구역이 출연했을 때 채점을 하지 않고, 다른 두 심사위원들이 15점씩 배점했다. 동점이 발생할 때 등 심사 중에 발생하는 난해사항은 심사위원장이 유권 판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최대한의 공평을 기했다. 대회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1등: 22구역(해링턴파크 / 구역장 방호성 권찰 유숙영)
2등: 15구역(포트리 / 구역장 박병태, 권찰: 양복규)
3등: 4구역(팰리세이드팍 / 구역장 황종태, 권찰 백경숙)
아차상: 2구역(팰리세이드팍 / 구역장 이원명, 권찰 안종옥).

대내외 이벤트 일지

 1월  8일〜9일 제직수련회 강사 이종표 목사(윌로그로한인교회)
 2월  6일 제1남전도회, 한국 한빛 맹아학교 후원비 $1,379.00 우송
 2월  1일 가브리엘 성가대 솔리스트 조혜숙 집사 임명
 2월 20일 2부 호산나 성가대 솔리스트 이지연 선생 임명
 4월  3일 부활절 연합 해당지역 새벽예배(본당)
          부활절예배 성찬식
          오클랜드 교회당 구입 건을 위한 임시공동의회
 4월 중   95년도 파송 러시아선교사 후보로 김도수 전도사 임명
 5월 8일   웨슬리 남 전도사 사임
 5월 12〜15일 뉴저지교협 94호산나대회(팰리세이즈장로교회/강사 박조준 목사)
 5월 22일 앤젤라 오 변호사 초청 특별강연회 ((LA흑인폭동 당시 한인사회 대변인이었던 오 변호사는 우리의 위치, 우리는 어디를 향하여 가야만 하는가에 대해 강연과 질의응답을 했다.))
5월 27일〜29일 청년부 주관 부흥회(강사 이학준 목사)
5월 29일 메모리얼 데이 퍼레이드 행사 ((주보에는 한복 입는 것을 환영한다며, “타운을 위하여 여러 가지 말하는 것보다 퍼레이드 행사에 참석하여 뉴저지 한인장로교회와 팰리세이즈팍 타운의 일치감을 세계인들에게 나타내십시다”라고 당부했다.))
6월 18일(토) 제4회 당회장배 친선골프대회(Tamiment Resort Country Club)
8월 21일 대뉴욕지구원로성직자회(회장 주관준 목사) 초청순회예배
8월 28일 박희일 장로의 은퇴예배 ((본 교회에서 2년 4개월 시무장로로 수고했다.))
          제니양, 미쉘 박, 중국·몽고 선교여행 보고
          세례 받은 교우들, 세례증서 발급
 9월  1일부   한태헌 목사(Danny Han), 영어·중고등부 담당 개시
10월 28·29일 양일간 건축바자
10월 16일 남전도회 주최 특별간증집회(김상철 변호사) ((전 서울시장인 그는 ‘고난의 역사와 한국비전’이란 특별강연을 했다. 김 변호사는 90년대 말기 탈북자를 돕기 위한 국제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건축위, 오클랜드 성전수리위원 선임 ((이인용, 양호식, 김의신, 최재식, 김경열, 박병태, 차민석 등. 11월 2일 첫 모임.))
11월 11일부터 중고등부가 매주 금요일 모임 후 저녁식사와 사랑의 교제
11월 20일 추수감사절
          구역감사주일예배
          중고등부 대심방 개시
12월 2〜4일 구역장 권찰 제직수련회, 강사: 안덕원 목사(나성영락교회)
11월 27일 새신자 환영회
          김현정 알렐루야 성가대 반주자 임명
12월  4일 초대교회 조영진 목사 취임예배/김창길 목사 설교
12월 14일 뉴저지성서대학 제6회 졸업식 ((졸업생: 김진, 민영숙, 김인렬, 김정숙, 최영선, 홍원영, 황종태.))
12월 18일 구역성경공부 수료자(총48과) 발표 ((김병수 박희일 이윤규 오안순 김영숙 김인식 박수예 이순옥 오민자 박현서 윤영여, 윤영희 권정숙 정보혜 김정신 이현숙 (20명).))

1995년

네 지경을 넓히라

새해 첫 주일은 1월 1일이었다.
예년처럼 온 교우들이 성찬식에 참례,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여 영혼을 희맑게 함으로써 새해를 맞았다. 새해 목표는 ‘네 지경을 넓히라’(이사야 54:2)였다. 첫 주일 김 목사의 설교제목도 같은 내용이었다.
이사야를 통해 하신 여호와의 말씀은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는 내용이었다(사 54:2-3).
또한 유다의 자손으로서 형제보다 존귀한 자였던 야베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역대상 4:10).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다.
말하자면, 이사야서의 명령과 야베스의 기도가 모두 우리교회 목표가 된 셈이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응답하셔서 날로 우리의 지경을 넓히고 계셨다. 눈에 보이는 결과로는 이미 연전에 오클랜드 성전(예닮원)을 구입해 수리와 공간확장을 해나갔고 영적으로도 그러했다.
1월 한달 동안 김 목사는 ‘같은 믿음을 따릅시다’(딛1:1-4), ‘솔로몬이 드린 기도’(역대하 1:1-13), ‘죽음과 영생’(요 11:17-26), ‘믿음의 사람 모세’(히 11:24-26) 등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1995년은 또, 조국광복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한국과 한인교계가 이 한 해에 깊은 의미를 두려고 애를 써왔다.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는 교단이나 교회 단체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타난 영적인 희년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발빠른 연두(年頭) 움직임

유난히 분주한 새해 벽두였다.
여느 해처럼 연중 친교봉사와 강단 꽃꽂이를 원하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첫 주일에 기꺼이 자원했다. 첫주에 신임 서리집사 후보들은 1〜3부 대예배 후 당회장실에서 면접을 가졌다. 이 인터뷰에 통과해야만 집사 임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1월 8일 신임집사들의 임명식을 가졌다. 모두 55명이었다.
청년부 수련회가 6〜7일에 김영덕 목사를 강사로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영어부 수양회가 5〜7일 헤브론 수양관에서, 샤론 송 강사와 함께 헤브론수양관에서, 각각 개최됐다. 당회신년하례식(10일), 뉴저지교협신년하례식(9일), 뉴저지노회 신년하례회(16일) 등이 보름 남짓 사이에 숨가쁘게 이어져 내려갔다.
15일 주일 오후에는 효과적인 2세 자녀지도 및 대학진학준비를 위한 교육 세미나(강사: 백경수 박사)가 본당에서 열렸다. 다수의 학부모들이 참석했다.
8일에는 3개 성가대 대장들과, 유아·유치·유초등·중등·고등·영어·청년부 등 7개 교회학교 부서의 지도·부장·부감 등이 임명됐다. 성경공부반도 새해에 새 마음을 가다듬기로 했다. 금요 어머니 성경반에서는 24주간에 걸쳐 출애굽기 공부를 시작했다.
2월부터는 제2남전도회 성경공부반이 매주 화요일 김에스더 사모 지도로, 화요 어머니 성경반은 김영덕 부목사 지도로 각각 실시되고 있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처럼 희로애락, 생로병사의 범사가 새해 초 우리 교회에도 여전했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니 당연지사일 수밖에 없다. 특히 교회 규모가 커져 성도들이 많아지면서, 날로 빡빡해져 가는 주보의 교회 소식란에서 더욱 체감할 수 있었다. 1월에만 다음과 같은 뉴스들이 오갔다.
2일 추도예배(박병태 집사 집)
7일 돌잔치(권경혁 집사 집)
8일 생일(이금녀 집사)
    돌잔치(곽광덕 집사 딸)
15일 칠순잔치(최동섭 집사)
20일 별세(김유관 교우)
24일 결혼(홍성수-홍순심)

재개된 출석통계

1월 15일 주보부터는 주보 뒷면에 매주일 출석통계가 다시 실리기 시작했다.
과거 90년대 초까지도 출석통계가 계속 실렸으나 한동안 주보의 면 배정 등 여건 때문에 실리지 않았다가 재개된 것으로 보인다.
1월 15일 당일 교인출석 통계는 별도의 표와 같았다. 내친 김에, 이 통계를 과거 분과 대조 분석해 보면(90년도 11월 통계 참조), 실제로 우리 교회가 90년대 전반기 동안 수적으로는 크게 부흥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흥성장을 위한 영적인 잠재력은 자못 컸다고 볼 수 있다. 새해 초 새벽기도회에 175명이 회집했고 실제로 그해 중반기에 250명선을 넘어 계속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 중고등부 금요집회나 청년부 등 전에 없던 별도의 모임들이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표 43)
이민교회들이 비슷한 현상을 보이겠지만, 특히 본 교회는 전통적으로 휴가철인 8월에 교인수가 크게 증가한다. 멀리 갔던 가족들이 귀가하고 방문자가 많아서일까. 이 해에 출석수가 최다치를 이룬 것도 95년도 8월 13일 집계로 그 전주간 주일과 주중의 모든 모임에 총1,439명이 모였다.
아무튼 새벽기도의 열성 때문인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듬해인 96년에는 전년도의 최다수준을 평시에도 유지하게 된다.

표 43.
95년 1월 15일 집계

고베 지진 피해자 돕다 ((당시 한국 조선일보 등의 보도기사를 참조했음))

그해 1월 17일 고베 시를 중심한 일본 간사이(關西)지방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LA 노스리지 대지진 만 1주년 되는 날이었다. 언론에 따르면, 그날새벽 5시 46분부터 효고현을 진원지로 시작된 이 지진은 지진규모 ((지진규모의 단위는 magnitude를 뜻하는 M을 사용함)) M7.2에 최대진도 7의 엄청난 크기였고, 사망자 약 6,000명, 부상자 36,000명, 이재민 60만, 가옥파손(전·반파) 176,000동, 관련화재 531건 등으로, 총 10조엔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
한인들의 손실도 상당했다. 1월24일자 한국어 신문에 의하면, 23일까지 재일동포 사망자는 88명으로 잠정 집계됐다. 좌익계인 조총련 쪽 통계까지 더한다면 모두 150여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재산피해로는, 주민의 80%인 1만 이상의 한인이 밀집된 나가타(장전)구의 경우, 신발공장과 회사 등 30년간 일군 코리아타운이 완전 잿더미가 됐고, 1천〜2천억 엔의 손해를 입어 동포 피해 규모로서는 가장 컸다. 간사이 전역을 합쳐 한인들의 재산 피해규모는 5천억 엔으로 추산됐다. 또 여기저기 동포 교회를 비롯한 교회당도 많은 파손을 당했다.
이를 보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 없던 본 교회도 1월 29일, 2월 5일 2주 동안 모금함을 교회입구에 설치, 1,516불의 성금을 모아 교단을 통해 전달했다. 아울러 미주 전역의 한인교계와 한인사회가 이에 적극 동참했다.
한편 교단 총회장 김창길 목사는 교단산하 교회들이 헌금한 지진피해자돕기 성금 35,000불을 전달하러 5월 2일부터 11일까지 일본 고베와 도쿄를 방문, 재일기독교회에 전달하고 현지의 파손된 교회들과 재민들을 순방했다.

가고 오는 교역자

새해에 첫 교역자 인사 이동이 있었다.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부목사로 일해온 최정훈 목사는 1월 31일부로 사임했다. 당회는 이미 15일에 사표를 수리했었다. 한편 청년부 전담과 4개 구역담당 교역자로 조한경 전도사가 임명됐다. 조의호 목사의 장남인 그는 연세대 문과·신과대를 졸업하고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교역학 석사를 마치고 뉴욕효신교회에서 사역했었다.

김선태 목사 초청 신앙간증부흥회

제 3회 신앙간증 부흥회가 2월 10〜12일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주제 아래 개최됐다. 강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맹인선교회 총무 김선태 목사였다. 김 목사는 첫날 새벽집회를 ‘인생과 보람’(눅 5:1-11)이란 말씀으로 연 데 이어 ‘성도가 잘 살려면’(신 7:12-16), ‘소문을 잘 내는 교회’(살전 1:1-10), ‘모든 것을 주께 맡기는 삶’(벧전 5:7-11), ‘교회가 부흥하려면-갖출 요소들’(행 2:37-47), ‘미친 성도들 때문에’(고후 5:12-16) 등으로 말씀을 전했고, 낮 집회는 ‘성도의 생활’이란 제목으로 야고보서 강해를 했다.
시각장애자를 위한 한국맹인연합교회를 창설했고 실명자의 개안수술 캠페인을 벌이는 등 폭넓은 기여로, 국민훈장을 포함한 다양한 포상도 받은 김 목사는 의료법인 실로암 안과병원 원목실장으로 최근까지도 실로암(간호사)합창단을 이끌고 미주에 활발하게 다니는 등 선교활약상을 펼쳐왔다.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면서도 숭실대 철학과, 장신대학원을 나왔고 맥코믹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앙과 열정, 투지의 사람이었다. 그는 또 늘 티없는 미소를 짓고 너털웃음으로 역경을 떨쳐버리는 기쁨의 사람이기도 했다.

한국학교, 봉사차원으로 쇄신하다

한국학교가 2월 18일 개학했다.
그 학기부터는 대 한인사회 봉사차원에서 등록금을 인하함과 동시에 보다 폭넓은 한국어 보급을 위해 한국어 교육시기를 놓친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특별반을 신설했다. 본 교회 이중언어 교사들이 성심성의껏 가르치고 있었다.
그해 봄학기는 2월 18〜6월 10일이었고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12시30분까지 수업이 진행됐다. 등록금은 100불(가족 중 제 2학생은 80불)이었다.

오! 오클랜드… 예! 예닮원

그해 최 선두 과제는 연전에 구입한 오클랜드(Oakland) 교회당(후의 예닮원)으로의 입주였다. 오클랜드는 본 교회의 새 터전이요 소망의 보금자리였다. 새해 상반기는 수리와 대청소로 보냈다. 수리 위원회가 모여 준비를 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3월 28일에는 180만 불에 오클랜드 컴플렉스를 클로징 했다.
4월 16일에는 오클랜드 교회당의 청소와 정리를 위해 각 자치회가 해당일 교회에서 점심 식사 후 교회 밴이나 각자 차량을 이용해 현장에 3시까지 모이기로 하고 각 부서별로 모임 및 작업 일을 정했다. 모임도 갖고 봉사도 하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였다.
4월말부터는 구역예배도 한 두 구역씩 오클랜드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봄철 동안은 공원에서 예배드리는 구역도 있더니, 오클랜드 모임 횟수가 주가 가고 달이 갈수록 늘어 7월초에는 전체 26구역 중 3분의1이 그곳에서 구역모임을 갖고 있었다. 드넓은 공간에다 풋풋한 내음이 가득한 자연과 더 가까워 내 고향 같고, 구석구석 내 손길이 갈만한 봉사의 기회가 무진장 많아, 재미도 솔솔 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5월 14일부터 9월까지는 주일오후 찬양예배를 오클랜드에서 드리기 시작했다. 주일 찬양예배 후 청소를 원하는 이들은 누구나 간편한 복장을 하고 가서 봉사했고 구역 점심 봉사도 거기서 했기 때문에 오클랜드에 가면, 누구나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오클랜드 성전을 꾸밀 각종 헌납품도 속속 드려졌다. 제직회는 6월중 오클랜드 본당에 비치할 그랜드피아노를 위해 제직 1인 100불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본당에 있는 그랜드피아노도 10년 전 제직들의 자진 모금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피아노 기금은 6월말까지 우선 총 2,750불이 모금됐다. 가족이 함께 또는 혼자서 200, 300, 500불을 내는 교우들도 있었다.
한편 청년회가 7월2〜4일에 있은 그해 수련회를 오클랜드에서 가짐으로써 구체적인 행사 테이프를 끊은 데 이어 7월 28일부터 8월 1일에 있은 제14차 전교우수련회도 역시 오클랜드에서 개최됐다. 그해 전교우수련회 강사는 임현수 목사(토론토 큰빛교회)였다. 이와 함께 유초등부 서머캠프도 26〜28일 이곳에서 열렸다.(사진 46)
오클랜드교회당은 8월 13일부로 ‘예닮원’으로 공식 명명됐다. 당일 주보에는 이렇게 감격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당회에서는 오클랜드교회를 ‘예닮원’으로 명명했습니다. *예–예수 *닮–닮기 *원–원합니다.”
‘예닮원’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것은 당회장 김창길 목사의 제안이었다. 또 오클랜드를 담당할 교역자(파트타임)로 정은혁 목사가 임명됐다.

사진 46 예닮원 별관
Secondary building of YDW

예닮원 시대를 열다

예수를 닮기 원하는 사람들, 예수를 닮아 가는 사람들이 예닮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클랜드에 예닮원을 마련하게 되면서, 교회학교와 교회의 여러 이벤트가 점차 이분화 되어 갔다. 예닮원 전담 사역자도 모셨다. 성인예배는 주로 본당에서 드리지만 자녀들은 시간상, 지역상으로 편리한 시간, 편리한 장소를 택하여 예배드릴 수 있게 됐다. 단 전체모임은 본당에서 또는 예닮원의 큰 장소에서 함께 모였다.
본당은 영혼의 ‘지성소’와 같다면, 예닮원은 마음의 ‘회막 뜰’과 같은 곳이었다. ((구약 출애굽 후 광야시대의 성소와 성전이 그러했다)) 본당이 현재 내 집과 같다면, 예닮원은 별장 같고 고향마을 같은 곳이었다. 교인들은 고향 같은 예닮원의 성전과 ‘뜨락’을 정성 들여 가꾸고 꾸미기에 점점 바빴다.
예배와 찬양모임 등 정규행사들은 본당에서 열릴 때가 많았고, 수련회, 체육대회 등 보다 캐주얼한 이벤트들은 예닮원에서 열리는 경향이 있었다. 2세들의 결혼식도 본당에서나 예닮원 양쪽에서 거행됐다.

묵상과 절제의 사순절

그해 사순절이 다가왔다. 주보에는 이 소중한 기간을 타성적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사순절 특별기도회를 여는 교훈과 계몽의 글이 실렸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명상과 기도를 하시며 금식과 절제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말 많이 하는 생활과 나쁜 말(참소하는 것)을 피하는 계절입니다. 40일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로 드립니다.”
새벽기도회의 설교제목도 곁들여 연속 게재됐다. 3월중 첫 주간은 이러했다.
(월)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
(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나의 십자가
(수) 돈 때문에 배반했습니다.
(목) 예수냐, 바라바냐?
(금)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
(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자체 및 지역사회를 위한 부활성가제

부활절 성가제가 4월 9일 린드버그 스쿨 대강당에서 성대히 치러졌다.
음악부는 몇 달 전부터 성가제를 준비하면서 성가대원과 악기 연주자들을 모집하고 매주 목요일과 주일 오후마다 연습을 계속했다. 당일 공연은 두 차례에 걸쳐 했는데 1차 공연은 학부모와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고 2차 공연은 주로 미국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한편 그해 부활절 연합새벽예배는 4월 16일 본 교회에서 드려졌다.

새 교우 환영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과업은 뭐니뭐니해도 잃은 영혼을 되찾는 일이다.
주님은 아흔 아홉 양을 우리간에 놔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로서 자신을 비유하셨다. 상반기 신입교우들을 위한 환영회가 6월 4일 찬양예배 후 오클랜드에서 치러졌다. 그해 상반기 신입교우는 모두 26가구였고 가족들까지 총 50명이었다. 이인용 집사가 이끈 이날 환영회 예배 때 김창길 담임목사는 ‘우리 교회의 목적’(행 12:24-13:12)이란 말씀을 전했다. 새 교우를 포함한 온 교우들은 함께 식사를 나누고 찬양을 하면서 그날 저녁을 즐겼다. 하반기는 연말에 개최됐다.

김 목사 20차 교단총회 인도

김창길 목사는 그즈음 6월 20〜22일 로스앤젤레스 남가주동신교회에서 열리는 미주한인장로회 제 20차 정기총회를 이끌기 위해 정주섭, 김인선 장로 등 두 총대와 여전도회 연합회 총대 오안순 권사와 함께 LA로 향발했다.
김 목사로서는 총회장 1년 임기를 마무리하는 총회였다. 주보에는 선교사대회, 개회예배 설교, 중부영락교회 창립 14주년 설교, 각 노회장 및 임원 연석회의 인도, 총회 개회예배 설교 등 일정을 알리고 교우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김 총회장은 개회예배에서 ‘성숙한 교회’(엡 4:11〜16)란 설교를 하고 전국 총대들을 위한 개회 성찬식을 이끈 뒤 회무 처리에 들어갔다. 그해 총회에는 목사 109명, 장로 71명 등 모두 180명의 총대가 참가했다. 후임 총회장으로는 관례에 따라 부총회장인 동신교회의 김상구 목사가, 부총회장으로는 뉴욕 베다니장로교회의 김리관 목사가 당선됐다.

희년(禧年·Jubilee)과 조국

1995년은 광복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그 어느 해보다 감격이 컸음은 말할 나위없다. 본 교회 광복 50주년으로 지킨 8월 13일, 김창길 목사는 ‘희년과 조국’(레 25:9-10)이란 제목으로 기념설교를 했다.

“제 50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 돌아갈 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갈지니라.”
마치 레위기 25장의 말씀과도 같이, 50년 전 일본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은 우리 한민족이 해방 후 반 백년에 의미를 더하여 자유를 선포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일도 중요했다. 보다 중요한 일은 사탄의 압제를 받는 뭇 영혼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해(눅4:19)를 누리게 하고 영혼들이 자유함을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
광복50주년의 ’50’이란 숫자에 큰 의미성을 더하여 뉴욕 일원의 교계에서는 굉장한 행사를 치르느라 연초부터 분주했다.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회장 박순종 목사)가 조국광복50주년 기념 대 축제 행사의 일환으로 기념음악회, 자전거대륙횡단과 같은 거창한 행사를 벌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8월15일 당일, 유엔 함마슐드 광장에서 치르던 뉴욕 교협의 기념식에 설교자로 초청된 인사가 이단으로 널리 알려진 베뢰아 파의 김기동 목사(성락침례교회)란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행사자체가 의미성을 잃어버렸고, 교협 임원진이 총 사퇴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은 교회단체가 할 일의 명분과 경계선이 어떠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준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성서적 희년은 숫자 개념보다 영적인 의미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불붙은 상페테르츠부르그 선교

본 교회 선교사후보생인 김도수 목사의 러시아 상페테르츠부르그(St. Petersburg) ((옛 레닌그라드)) 파송예배가 7월 24일 본당에서 거행됐다. 그는 8월 10일에 현지로 떠났다.
성도들은 그를 파송하면서 현지 사무실에 필요한 컴퓨터와 팩스기, 레이저프린터 등을 위해 모금했다. 김 선교사는 목사안수기념 설교를 7월 16일 1〜3부 대예배 때 ‘자유함의 비밀’(요 8:32)이란 제목으로 행했다.
한편 고등부도 김피터, 조하나, 박 로즈메리, 박 레이먼드, 이 어네스트 등 5명을 7월30일부터 8월19일까지 일정으로 여름단기선교훈련 여행 차 보냈다.

여름학교 ‘상(賞) 열매’ 만발

그해에 제5차 여름학교 6주간 교육을 마무리하는 종강예배가 8월 18일 거행됐다.
김성인 집사가 인도한 이날 예배에서 교육담당 대니 한 목사는 ‘다윗의 승리의 비결’ 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2부는 학년별 학예발표회로 치른 후 수료식과 시상식에 들어갔다.
수료자는 총81명. 수상자는 유치반부터 5학년까지 최우수·우수·장려상 등 모두 28명이었다. 또 주기도문 외우는 학생이 모두 21명,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는 학생이 10명, 개근상이 56명, 모범상 13명, 향상상 12명 등 골고루 우수한 성적을 나타냈다.

오안순 권사 은퇴하다

8월 27일 오후에는 예닮원에서 본 교회 설립 때부터 지난 24년간 충성해온 오안순 권사의 은퇴식이 거행됐다.
창립멤버로서, 70년대에 온갖 굴곡 속을 오르내린 험난한 본 교회의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말없는 바위와 변함없는 오뚝이처럼 견디어 온 그녀.
본 사기(史記)를 출판하는 2002년까지 30년을 기도와 권면의 여종으로 일관해온 그녀. 집사 시절부터 본 교회 역사의 증인이면서 본 교회의 어머니 같은 오 권사이다. 수없이 많은 헌물을 손수 만들어 아낌없이, 서슴없이 바쳐온 그는 곧 자신이 봉헌제물의 화신(化身)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갖 궂은 일도 마다 않고 도맡아하면서 초창기 성가대 가운을 직접 짓느라 일일이 바늘땀을 넣던 그 손길. 그 손길과 기도와 헌신과 봉사를 하나님은 열납하시고 현세와 내세에 무한한 상급을 내려 퍼부으시리라…
더욱이나 오 권사는 본 교회 여전도회로부터 임마누엘회, 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교단 여전도회연합회 등 교회여성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까지 대내외 모든 직책을 골고루 맡아왔다. 어찌 놀랍지 않으랴! 끝까지 충성된 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요 선물이었다.
오…! 오 권사님, 주님 오실 날까지 늘 장수하소서. 기도와 헌신의 어머니로서 교회를 지켜가소서. 권사님, 파이팅!

예닮원 헌물 급증

성도들의 땀과 정성으로 예닮원이 점차 훤한 모습을 갖춰가자, 교우들이 앞다퉈 예물 드리기에 바빴다.
그 옛날 출애굽당시 회막에 온갖 보화를 예물로 바친 성도들처럼. 황금·유향·몰약 등 당대최고의 보물을 아기예수께 바쳐드린 동방의 박사들처럼. 고귀한 나드 향합을 아낌없이 깨어바쳐 주님의 죽음을 예비한 마리아처럼. 그리고…팰리세이드팍 본당 구입 시 바치던 뉴저지장로교회 성도들의 손길처럼 말이다.
의자와 밥솥, 어린이 놀이기구, 대문, 강단 장식, 교실 피아노 등 구석구석 뭔가 드려서 갖춰야할 것이 없는지 두루 살피며 성도들은 저마다 바치지 못해 안달일 정도였다. 하나님이 하늘의 복과 땅의 좋은 것으로 갚으심을 믿는 그들이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하).
한편 그랜드피아노 헌금은 10월까지 총 약 37,000불이 모금돼 스타인웨이 대형 피아노를 구입해 예닮원에 비치했다. 참가성도는 모두 314명이었다. 그밖에도 4 가정이 대형 업라잇 야마하 피아노를 4대 봉헌, 1·2 예배실과 성가연습실, 유치부 실 등에 놓았다. 11월 12일에는 그랜드 피아노 봉헌음악회가 열렸다.
이듬해는 구내 도서실을 위한 도서, 부엌과 식당을 위한 식기 등의 헌물도 들어왔다. 물론 안팎을 깨끗이, 깔끔하게, 아름답게 꾸미고 가꾸고 봉사도 끊임이 없었다.(사진 47)

사전 47. 한국적 이미지로 꾸며진 예닮원 중·고등부실
Youth Chapel at YDW, decorated in the style of traditional Korean architecture

예배시간 변경

10월부터 대예배가 4부로 변경되고, 찬양예배는 폐지됐다.
1부는 오전 8시, 2부 오전 9시30분, 3부 11시, 4부 오후 1시, 영어예배 오후 6시 등으로 채택됐다. 4부 예배는 예닮원을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4부 예배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성도들을 찾고 있었다. 4부 예배 시에 또 유년주일학교 중고등부 예배와 성경공부가 각각 진행됐다.
한편, 10월부터는 예배 찬송 시에 해온 절 사이의 간주를 없애고 연이어 마지막 절까지 부르기로 했다.

정성들인 바자

그해 10월 13, 14일 양일간은 건축바자가 펼쳐졌다. 10월초에 배포한 관련 공문이 어느 해보다 정성이 엿보인다.
“건축바자회로 전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초대합니다. 임마누엘 어른들께서 준비하시는 고향의 맛이 깃들인 전통음식과 여전도회 회원들과 청년여전도회 회원들이 준비한 깔끔하고 정성이 담뿍 든 밑반찬 등을 준비하고 성도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모든 팔 수 있는 물건들을 도네이션 해 주시면 성전건축을 위한 바자회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을 합하여 힘껏 일할 때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줄 믿으며 하나님께서는 큰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바자 공문은 임마누엘회와 1·2·3 여전도회, 1·2 남전도회, 청년회 회장 등의 명의로 돼 있었다.

대외 활약상

제13차 뉴저지노회가 10월 10일 예닮원에서 열려 본 교회 김인선 장로가 장로 부회장으로 당선됐다.
본 교회 사회부는 9월 중 버겐카운티 노인국에 컴퓨터 1대(3,600불)를 한인노인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기증했다.
전도부는 10월 중 한국 연세대학교 선교센터 건립에 3천불을 헌금했다. 본 교회가 3명의 연세대 출신 교역자를 둔 이유 때문이었다.
또 당회는 팰리세이즈팍에 신축되는 도서관을 위해 11월 2일 1만 불을 기부했다. 까닭은 본 교회가 지역 내에 있는 데다 한인학생들이 도서관을 많이 사용하고 있고, 한인상가와 한인들도 집결해 사는 곳이므로 지역봉사 참여의 일환으로서 였다.
11월 19일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했는데, 추후에 이례적으로 감사헌금자 명단이 발표됐다. 총193명이 26,360달러를 드렸다.

이 땅에 빛을

11월 25일에 대학·청년부 주최로 ‘이 땅의 빛을’ (제3회) 문학의 밤이 개최됐다.
특히 그날 신약성경에 바탕을 둔 연극 ‘순교자’가 공연됐다. 대학·청년부는 아울러 회지 「예닮원」을 발행했다.
제3회 ‘문학의 밤’의 막을 올리며
이제 막이 오른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 모두의 인내와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다. 우리 모두에게 이번 공연이 그저 일년에 한번씩 치르는 연례행사로 인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에 참가한 모든 회원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막이 내리는 그 순간까지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끝으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 드린다.
이 땅에 빛을
준비찬양
기도
회장인사
제1부/사회 정재훈·임수연/지휘 정진호, 피아노 최보영, 드럼 우재준
Intro/대학·청년부 모두
     ‘모든 것 되시는 예수’
     ‘보혈찬송 메들리’
시 낭송/김윤옥
     ‘낮아지게 하소서’
남성중창/주광수·홍성철·송승근·김형주·이주엽·최준호
     ‘주를 찬양하여라’
     ‘오! 자유’
핸드벨 연주/김미소·이민지·김미숙·오현주·김현숙
     ‘감사해’
수필낭송/함경아
     ‘43년간의 일기’
혼성중창/윤영명·김현숙·김미소·김미숙·정진호·우재준
     ‘피날레 메들리’
찬조출연/럿거스 주사랑 찬양단
     ‘참 기쁜 노래’  / ‘예수님을 사랑해’ /‘계신 주님’
제 2 부 연극/ ‘순교자’
때: 로마시대
곳: 로마
등장인물: 야고보(김진완), 요셉(김윤옥), 점쟁이(송승근), 술집주인(함경아),
         나푸니우스(이주엽), 네로(정재훈), 병사(홍성철), 여인1(최보영),
         여인2(오현주), 로마인·예수님음성(최영준).
스태프: 고문: 김창길 목사님, 지도: 조한경 전도사님, 후원: 김낙중·김경욱 집사님), 총감독: 최영준 연출: 김윤옥, 기획: 김진완, 조명: 김형주, 음향: 임정헌,
        무대장치: 주광수, 의상: 이민지·방연, 분장: 이민지,
     다과준비: 최영란.
피날레/대학·청년부 모두
           ‘내 증인이 되리라’
축도 / 김창길 목사

김 목사, 뉴저지성서대학 2대 학장 취임

11월 29일에는 뉴저지성서대학 김창길 목사의 제 2대 학장 취임예배가 뉴저지한무리교회당에서 거행됐다.
이사장 김춘실 목사가 집례한 이날 취임식은 신명동 증경노회장의 기도, 김인선 부노회장의 성경봉독, 김상구 총회장의 설교, 김정국 증경총회장의 축사, 성서대학 학생들의 축가, 김창길 신임학장의 취임사, 천상경 교무과장의 광고, 김용주 증경총회장의 축도 등으로 진행됐다. 학장 임기는 2년이었다.

1995년 그해 이벤트

 3월 12일 장재열 협동장로 임명.
 3월 19일 신구약성경공부 완필 시상(62과 시리즈) ((입상자 대다수는 여 성도였다 성경전서 완필자: 21명, 신약: 2명, 구약: 1명, 기타: 6명))
 5월 29일 메모리얼 데이 퍼레이드 ((주보에 “한인교회가 지역 일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란 당부사항이 떴다))
 6월  1〜3일 영어부 수련회(장소: 크리스천 아카데미/19명 참석)
 6월  3일   제5회 전 교우 친선골프대회(그로신거골프클럽/35명 참가)
 6월 11일 교회학교 졸업예배 ((부서별 졸업생들은 다음과 같았다. 유아부 7명, 유치부 18명, 유초등부 21명, 중등부 21명, 고등부 17명, 대학부 7명, 대학원 1명))
 8월  6일 역사판찬위원회 발행 교회 일람을 위한 구역별 사진촬영 개시
 8월 13일 장학위원회 구성 ((위원장: 양호식, 서기: 박병연 위원: 조영진 고수광 황석남 박병태 양진 민의홍 유강훈 안정옥 나애덕))
 9월  3일 95년도 장학생 선발 ((괄호 속은 대학명·학년 김정희(콜럼비아·1), 황진희(MIT공대·3), 현승철(럿거스·2), 김미미(버겐커뮤니티대·3), 김진완(럿거스·4)))
 9월초 뉴저지소년소녀합창단 모집 ((대상: 3〜9학년, 회비는 월60불이었다))
 9월 7일〜10일 제4회 영적대각성 간증집회 강사:이종근 장로(대구서문교회)
 9월 10일 캐럴 손(Carol Sohn) 전도사, 중고등부 지도자로 임명
10월 11일 김창길 목사 연세동문상 수상 ((모교인 서울 연세대 연합신학원 개교 80주년 기념 동문상 수상차 출국했다. 연세 신학을 빛내거나 공헌한 이에게 주는 상으로 목회적 노력과 교계에 기여한 공로로 김 목사가 선정됐다))
11월 17일 강신원 권사 은퇴예배
11월 23일 유학생들을 위한 추수감사절 만찬과 친교(예닮원)
11월 24〜26일 영어예배부 부흥회(본당)
     25일 청년부 문학의 밤(예닮원)
11월 26일 제6회 구역찬송가대회(예닮원) ((심사기준은 100점 만점에 참석인원 40점, 음악성 40번, 태도 20점 등이었다 지정곡은 502·458장 중 1곡이었고 자유곡도 한 곡씩 불렀다 모두 26개 구역이 미리 정해진 순서대로 나와 그 동안 정성껏 닦아온 기량을 겨루었다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1등; 제14구역, 2등: 24구역, 3등: 13구역))
12월 31일 신입교우 환영회 ((모두 83명의 새 교우가 하반기중 등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