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우리 교회의 발자취 | Chapter 2 The Church History
4. 성장기(1991-1995) | Growth Period
날마다 더하는 교회
새해 표어는 사도행전 2장 47절을 따라 ‘날마다 더하는 교회’로 정해졌다. “우리 교회가 올해에는 신령한 면에서 질적 양적으로 더해질 것을 기도하고 노력합시다”란 주보의 교훈이 성도들에게 힘을 더해주고 있었다.
김창길 목사는 새해 첫 주일인 6일 ‘날마다 더하게 하소서’란 설교에서 이 표어를 정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본 교회보 ‘임마누엘’ 제3호(1991년 3월 31일자) 참조.)) 90년 11월 어느 날 기도원에서 새해를 준비하던 중 행2:47 성구가 마음에 와 닿아 당회에 제의한 즉 만장일치로 통과됐다는 얘기였다.
김 목사는 이런 말도 했다.
“참회기도를 드리던 한 장로님이 4·5부 예배를 드리도록 해달라고 기도할 때 제 맘속으로는 감사하고 기쁘면서도 ‘아이쿠, 큰일 났네!’ 했습니다. 사실 어떤 때는 주일 대예배에 3번 설교하기도 쉽지 않거든요. 물론 장로님의 기도는 그렇게 목사가 많이 설교하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커져서 교회당을 다시 신축하게 해달라는 뜻인 줄 압니다.” ((실제로 그해 하반기에 4부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러면서 김 목사는 19년 역사 중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유는 교인수가 많아질 때 자칫 오만하여져 신앙의 질적 향상에 소홀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 이상의 딴 것은 없다” 면서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요 우리는 그분께만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시 집권 말기이던 당시, 미국 내 경제불황이 심각할 때였으나 우리 교회는 새해 예산을 전년도보다 12만 불이 더 많은 583,000불을 책정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하에 김 목사의 새해 교훈을 요약해 본다.
주께서 “날마다 더하게 하신”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러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였다. 장 칼뱅 ((영어명 존 캘빈. 프랑스 출신인 스위스 종교개혁가. 장로교 시조.))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세례와 성찬이 집행되는 곳, 성도들이 친교하는 곳, 하나님의 말씀을 훈련되는 곳으로 정의했다. 우리 교회가 곧 그러해야 한다. 두 번째로,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였듯, 우리 교회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있는 동안은 그의 가르침에 순복해야 한다. 또 초대교회가 믿는 자들이 늘 함께 한 교회였듯, 우리 교회도 한 형제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초대교회가 기도에 전혀 힘쓰는 교회였듯이 우리도 위로부터 기도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함으로써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두 번째 지 교회를 세우다
6일 오후에는 본 교회 출신인 김진양 전도사를 통해 새로 개척하게 된 웨체스터한인장로교회 창립예배가 드려졌다. ((교회당 위치는 15 S. Bedford Rd. Mt. Kisco, NY 10549였다.)) 우리 교회가 창립20주년을 앞두고 개척하기로 한 3개 지교회 중 두 번째 개척교회다. 김 전도사는 본 교회에서 집사직으로 시작해 전도사와 성가대 지휘자를 거쳐 목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김진양 목사는 1992년 10월 이 교회를 떠나고, 김영 목사가 후임자로 부임한다.))
김창길 목사가 집례한 이날 행사에서 교단총회장 김정국 목사가 말씀을 전했고 뉴욕노회장 정영환 목사 등 많은 내빈들이 참석, 새 교회의 미래를 함께 축하했다. 김진양 전도사는 “부족한 몸이지만, 한 마리의 어린양도 소홀히 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몸과 열성을 바쳐 봉사하겠다”고 다짐했다. ((1991년 1월10일 중앙일보 보도내용 참조.))
행사에 앞서 김창길 당회장은 다음과 같은 기념 메시지를 발표했다.
웨체스터 한인장로교회를 창립하면서
당회장 김창길 목사
뉴저지한인장로교회가 뉴욕주 웨체스터 지방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선교를 위해 지교회인 웨체스터 한인장로교회를 개척케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많은 이민교회들이 그래왔듯이 저희 교회도 18년 6개월 전에 교회도 빌리지 못한 채 갑자기 뉴저지 한구석에 있는 사일러스 칸딕트 공원에서 첫 예배를 시작하였습니다. 몇 번은 가정에서, 그 다음에는 두 번이나 빌린 교회에서 좀 나가달라는 노티스를 받고 이곳저곳 찾아다니다가 지금의 교회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우리의 힘으로 찾은 것도 아닙니다. 돈이 준비되어서 산 것도 못됩니다. 운이 좋아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 동안의 어려움을 인내해서 얻은 결과도 아닙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였습니다. 거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찬송가를 자주 부릅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네 /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 이 몸 밖에 더 없어서 이 몸 바칩니다
우리를 위해 먼저 십자가에 구속해주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전해준 자가 있어서 듣고 배우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는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 되자’ 라는 표어를 가지고 뉴저지 브런스윅 지방에 첫 번째로 지 교회인 브런스윅 한인장로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또다시 올해는 ‘날마다 더하는 교회’란 표어로 두 번째 지 교회로 웨체스터한인장로교회를 창립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해는 우리 교회에 두 분의 부목사님을 보내주시고 제2교육관을 구입하게 하시고 이제는 교인이 700명을 헤아리는 교회로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입이 열 개 있더라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4월이면 비자를 수속하고 있는 박용규 목사님이 콜롬비아 선교사로 들어가십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 교회는 교회 안 살림에 여러 가지 필요하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남아서 하는 선교가 아닙니다. 모자라지만 해야할 일이고 사명이 있기에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선교에 온 교우들은 기도와 협력과 봉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웨체스터 한인장로교회에 파송하는 김진양 전도사님은 본 교회의 서리집사를 거쳐 전도사로 2년 3개월을 시무했으며 오늘 창립예배에 참석하는 호산나 성가대의 초대 지휘자로서 공헌이 큽니다. 역시 김진양 전도사의 부인인 유영은 사모도 본 교회 서리집사와 호산나 성가대의 반주자로 수고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신앙이 돈독하고 소명감이 투철하며 책임감이 강한 김진양 전도사를 웨체스터 한인장로교회에 파송하는 데 전도부와 당회가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보냅니다. 이 길은 고난과 역경과 고독과 싸우는 길이며 때로는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또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반과 비난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길이요 복음을 전하는 길이기 때문에 부름받은 자만 가는 길입니다. 앞으로도 김진양 전도사님과 웨체스터 한인장로교회를 위해 계속적인 기도와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장래는 창대케 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웨체스터한인장로교회에 임할 것을 믿습니다.
다같이 동네에서 ‘몸조심’
새해부터는 교회가 보다 더 활기차고 생기 띤 모습을 보였다.
우선 교회 주변 횡단보도 안내 담당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교회 앞길과 옆길이 번잡하여 성도들의 교회당 출입과 안전운전에 늘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청년남전도회 봉사부는 주보 간지(間紙)에 12 가지 안전주의사항을 나열했는데, 신호등 준수와 어린이의 보행 조심, 보행자들에 대한 예절, 파킹규정, 지도담당 지원요청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91년 교회주보철(1월 21일) 참조.))
특히 Edsall Boulevard 선상에 이중주차나 정차를 삼가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가곤 했다. 두 달 남짓 후 3월 10일에는 인근 경찰서에서 와서 아이들이 교육관 뒤뜰에서 놀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갔다. 위반하면 교육관 사용허가가 취소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9월초에는 인근 지역민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기 위한 유의사항을 교인들에게 알렸다.
교회주변에서 차량을 오르내릴 때 이중주차를 하지 말도록. 신호등을 지켜 꼭 보행로로 통행할 것. 차도를 건널 때 어린이들을 보살필 것. 교회 앞 옆길에 통행자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길을 막지 말도록. 가능한 한 큰 소리를 지르지 말 것. 교회에 단정한 옷차림으로 오갈 것 등이었다.
이러한 ‘몸조심’은 교육관 사용허가를 유지해야 할 우리 교회 나름의 자구책이면서 적극적으로는 지역사회에 모범적인 한인 교회상을 부각시키는 한 길이었다.
한편 새해부터 당회는 임마누엘회 연령을 60세 이상, 청년 남전도회와 청년여전도회는 25살 기혼자로부터 40살까지로 결정했다.
구역 교구제(敎區制) 시작되다
새해부터는 구역모임을 효과적으로 분담하기 위해 크게 2개 교구로 나뉘어 운영되기 시작했다. I교구에는 제1〜11구역이 속했고, 교구담당 교역자는 조영진 목사, II교구는 12〜22구역에다 담당자는 김흥교 목사였다. 당시 구역편성은 별도 표와 같다.(표 39)
교회음악의 새 면모들
레이저프린터를 구입하다
앞서 떠나는 님들
성전건축 위원회와 100일 기도
성서대학 ((뉴욕중앙일보 1991년 7월27일 기사 일부 참조.))
사진 39 뉴저지성서대학 공개 신학강좌에서 특별찬양을 하는 동문들
New Jersεy Bible Institutε alumni perfonn special hymn at their symposium
직장인을 위한 금요예배를 시작하다 ((이 부분의 상당량은 다음 자료를 참조했다: 뉴욕 한국일보 뉴저지 판 5월 보도내용 중 관련기사(발행일 불명).))
그해 매주 금요일 정오에 한인 직장인 및 개인사업가들을 위한 예배를 본교회당에서 드리기 시작됐다. 첫 예배는 5월 3일, 12시 15분부터 45분까지였다. 신문지상에도 이를 위한 안내광고가 실렸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뉴저지한인장로교회에서는 직장인 및 개인사업을 하시는 분들의 신앙생활과 영적생활의 성장을 돕기 위하여 금요일 점심시간을 이용한 금요 낮 예배를 마련합니다. 우리의 삶이 떡으로만 채워질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의 많은 발걸음을 기다립니다.”
이 정기모임에는 매주 초청강사가 초빙됐고 본 교회에서 간단한 식사가 제공됐다. 직장의 점심시간을 이용해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바쁜 생활 속에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직장인 예배는 직장에서 발생할 만한 문제들을 신앙으로 해결하는 길도 모색하는 기회가 됐다.
직장인 예배는 당시 한국에서는 새문안교회, 서소문교회, 영락교회 등에서 이미 실시되고 있었으나 한인사회에서는 본 교회가 최초로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지역별 기독실업인회의 정기적 모임도 강화되고, 신자 직장인들의 모임이 생겼고 미국 회사들도 상당수가 비슷한 성경모임을 실시하고 있다.)) 당시 포트리에는 삼성·럭키금성·현대그룹 등 한국계 지상사들이 다수였고, 한인기업체도 많아 이 프로그램의 발전성이 큰 것으로 보였다. 참석자들은 한시간 내로 예배와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직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김창길 목사는 어머니날에 즈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한 직장인은 “바쁘게 돌아가는 직장생활 때문에 이번 어머니날을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한국의 부모님에게 안부전화라도 드려야겠다”고 금방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다. 참석자들은 “이 예배가 각박한 생활 속에서 자칫하면 잃기 쉬운 삶의 가치와 일의 의미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고 만족을 표시했다.
얼마 후 직장인예배의 모임 시기는 목요일로 바뀌었다.
김창길 교협회장 임기 만료
그해 5월 6일 김창길 회장을 비롯한 뉴저지교협의 제4대 교협회장단이 제5회 정기총회와 아울러 임기가 만료됐다.
성베드로한인성공회당에서 열린 이날 총회에서는 김 회장의 후임으로 오다위 신부(보고타성공회)가 제5대 교협회장으로 선출됐다. 또 15개의 분과위원회 중 사모분과위원장 직은 본 교회 김에스더 사모가 맡았다.
김 회장은 교협뉴스(2호)에 실린 이임사에서 “지난 1년은 내게 짧은 것이 아니라 긴 세월이었다”면서 “뉴욕교협에서 분리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주성 확립과 교협이 나갈 방향과 지교회간의 신뢰감을 다져야하는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임기 중에 실천한 크고 작은 사업 10가지를 회고하고 취임당시 공약했던 이사회 조직을 실천하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본격화된 메모리얼 데이 퍼레이드 ((1991년 5월26일자 주보, 1991년 5월30일자 뉴욕한국일보 기사 참조.))
한국학교 종강예배 및 학예발표회
교사훈련
부목사 사역 분담
4부 예배 시작하다
건축을 위한 바자, 바자를 위한 기도
제2회 구역찬송대회
11월 17일에는 제2회 구역찬송대회를 가졌는데 90년대 초로서는 대규모인 데다 본격적이었다. 먼저 양호식 장로 인도로 예배를 드리고 김 목사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눅19:37-38)란 말씀을 전했다. 대회 전 김흥교 목사가 심사규정 및 심사위원을 발표한 뒤 이영종 집사의 진행으로 본 대회로 들어갔다. 반주는 김미경·서연화·홍순금 제씨가 맡았다. 대회 참가순서는 22개 구역 수에 따라 미리 추첨하여 정했다. 대회 후 김홍일 집사가 심사발표를, 시상 및 총평을 김 목사가 했다.
시상 순위는 1·2·3등과 사랑상, 믿음상, 소망상, 장려상 등이었고, 전년도 1등 구역인 유학생구역이 우승기를 넘겼다. 참가자 전원에게는 기념 컵을 분배했다. ((자세한 입상 내역은 그 다음 주일 주보에 기재되지 못했다.))
세 번째 지교회를 창립하다
남·여전도회(선교회)를 세분하다
대폭 늘어난 결혼식
1991년도 대내외 일지
믿고 순종하자
새해 1월 1일.
우리 교회 장기호 집사-김귀남 권사 부부의 장녀인 장경숙 양과 엄태용(스티브)군의 결혼식으로써 새해 하늘에 힘찬 소망의 첫 시그널을 올렸다. 주례자는 물론 김창길 목사였다. 신학교 출신인 신랑 엄태용 군은 전도사 기간을 거쳐 목사안수를 받고 90년대 후반기 뉴욕 퀸즈장로교회 영어교회 목사로 한동안 사역하게 된다.
그 해는 본 교회 설립 스무 돌을 맞는 해였다. 성숙한 이십 대로 돌입한 것이다. 새해 목표는 ‘믿고 순종하자’였다. 교회가 날로 증가되어가면서 믿음의 순종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단적인 예로, 약 두 달 전 온 교회가 실시한 건축헌금의 1백만 달러 목표는 여태 절반 수준 밖에 미치지 못한 상태였다. 담임 김창길 목사의 새해 첫 주일(5일) 설교도 ‘믿고 순종하라’(요 14:12-15)였고, 둘째 주일인 12일의 설교 제목은 ‘오늘이 중요하다’(시 90:1-12)였다.
당회는 1992년도 건축위원들을 임명했다. 임원까지 모두 15명이었다. 19일 예배 중에는 92년도 신임서리 집사 임명식이 있었다.
모두 7개로 나눠진 남여선교회 중 최초로 구성된 제3여전도회 초대회장으로는 김미경 집사, 부회장 윤영여 집사가, 가장 연소한 제4여전도회의 초대회장은 나애덕 집사, 부회장은 전년도에 갓 결혼한 홍순금 교우 ((할렐루야 겸 호산나성가대 지휘자 김홍일 집사의 부인. 주121 참조.))였다.
2월의 고고성(呱呱聲)
2월 초순에는 한 주간 사이에 한꺼번에 4명의 아기들이 태어났다.
1일은 주소웅(고명옥) 부부, 4일은 최정훈(최경란) 전도사 집, 그 이튿날인 5일은 정우영(김현정) 집사 가정, 7일은 이한섭(이종옥) 집사 가정에서 각각, 앞을 다투듯 힘찬 고고의 울음이 터졌다.
성경공부반 조직화
새해부터는 성경공부가 더 조직화됐다. 모두 11개 반으로 나누었고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월, 수요일만 빼고는 거의 매일 모이는 셈이었다(표 40).
언론에 주목받다
본 교회가 한창 성장 발전 일로에 있으면서 자연히 언론의 주목도 받았다. 그만큼 한인사회에 알려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탄생 20돌을 맞아, 당시 한인언론과 한인사회에 비친 우리 교회의 자화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할까.
2월 9일에는 본 교회 3부 예배 광경을 대한텔레비전 방송에서 녹화를 했다. 녹화내용은 그 다음주일인 16일 케이블채널 10에서 오전9〜10시에 방영됐다. 당시는 케이블 채널이 한인사회에도 점차 보급돼가고 있는 때였다.
2월 초순에는 당시 막 정착해가던 한인언론의 하나인 미주조선일보(발행인 한상기)도 본 교회를 크게 다뤘다. ((미주조선일보 1992년 2월 10일자 기사 참조.)) ‘하나님께 순종하며 교우화합 노력’이란 제하에, 본당 정면사진과 김 목사의 원내사진을 곁들인 이 기사는 당시 본 교회 정황을 비교적 상세히 그리고 있었다.
“김창길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의 실질적 부흥이 시작됐다”고 서두를 연 이 기사는 성장원인의 하나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내적 변화 즉 영적, 지적 변화를 통해 참된 신앙을 깨닫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라는 교우의 말을 인용했다.
또 “성장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교회 내 파벌 조성을 막고 교우간의 화목을 꾀했으며 경건한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해왔다”고 밝혔다.
아울러 “88년에 개교해 3회 졸업생을 배출한” 뉴저지성서대학과 버겐경로학당, 한국학교, 직장인예배, 어머니성경반, 남·여전도회 등 본 교회 기관을 소개했다.
또 전년도 5월 메모리얼데이에 교인 150명이 참가, 한인의 단결된 모습을 보였고, 바자회 수익금으로 지역사회 도서관, 학교, 소방서 등에 성금을 전달했다는 귀띔과 함께, 향후 이웃동네를 위한 병원, 학교, 아파트 등의 설립계획을 세우고 “선교와 베푸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고 썼다.
이 신문은 또 1986년에 구입한 6,400평방피트의 교회당과 교육관, 3개 지교회 등 본 교회의 현황과 김 목사 개인에 관한 자세한 소개를 덧붙였다.
3월 중순에는 뉴저지 ‘교포신문’이 ‘교회순례시리즈’의 첫 대상으로 본 교회를 한 쪽 전면에다 대서특필했다. ((교포신문 1992년 3월 16일자 7면 참조.)) 초창기 역사의 간략한 요약과 함께, 1980년 김 목사 부임당시 33명이었던 교인이 현재는 800여 성도가 예배드리며 교회학교 어린이부 250명, 중고등부 100여명, 대학·청년부 30여명이라는 소개와 연예산 66만불, 볼리비아에 선교사(이상철) 파송 사실과 예산의 10%가 선교비로 나간다는 설명이 붙었다.
본 교회 특성의 하나로 어린이가 많은 ((당시 어린이 250명, 교사 30명으로 기록됐다.)) 사실을 꼽은 이 신문은 “불과 12년 동안에 이렇게 불같이 성장한 교회의 모습이 경이롭기만 하다”며 교인들은 김 목사의 목회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김 목사는 신자들의 믿음이 큰 점을 공로로 돌린다고 적었다.
또 김 목사의 말도 직접 인용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죠. 많은 분들이 저희 교회의 예배 분위기가 은혜스럽다고들 하는데 본 교회는 교회의 예절을 중히 여깁니다. 예절은 경건성을 유지해 주지 않습니까? 목회자들도 교인을 대할 때 정직하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족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도 같고요.” 김 목사는 또 “받기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의 세 가지 언론들이 공히 본 교회가 교육적인 교회인 데 초점을 맞추었다.
‘성서동문’ 창간호 발간
그 즈음 본 교회 부설기관인 뉴저지성서대학의 학보 ‘성서동문’이 첫 선을 보였다. ((「성서동문」 제1권 1호(발행인 김창길/발행처 뉴저지성서대학·1992년 3월 14일) 참조.))
김창길 성서대학장은 ‘이민자들이 읽고 배워야 할 성서’란 제목의 창간사에서 세계사를 통해 성경이 중요하고 다대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실을 열거하고, 성경은 이민자들이 부닥치는 모든 문제의 해답집이라고 소개했다. 김 목사는 대강 이런 내용으로 계속 써 내려갔다.
“이민 온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자녀들의 교육입니다. 교육은 미국에 자녀를 데려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환경으로 이사왔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과외공부도 필요하겠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김 목사는 성경을 꼭 배워야 할 이유를 성경을 알아야 믿음이 자랄 수 있고, 잘못 가는 신앙을 바로 잡을 수 있고, 말씀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으로 꼽으면서 당시 한인교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요사이 비 성서적인 가르침이 담긴 테이프와 부흥회, 세미나, 수련회가 뉴욕, 뉴저지에서 돌아다닙니다. 특별히 열심히 믿어보려는 사람을 유혹해 갑니다. 식품점이나 식당 앞에서 free로 가져가라는 테이프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들어보면 다 괜찮고 좋은 말 같지만 한 두 군데가 이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김 목사는 외식(外食)이 언뜻 맛보기에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것보다 좋게 느껴지지만 조미료가 많이 쳐진 것과 마찬가지로, 초신자들은 어떤 설교자의 강압적인 말투나 눈물을 자주 흘리거나 유행어와 몸짓으로 웃기거나 병 고치는 능력이나 신비체험을 보여주면 은혜를 받는다고 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하고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의 생활을 본받게 돼야한다고 역설했다.
결론에서 김 목사는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뉴저지성서대학이 존재한다며 성서대학을 ‘교회를 위한 학교, 교회를 보호하는 학교’로 소개했다.
성서대학도의 고백
그 무렵 뉴저지성서대학을 갓 졸업한 박병태 집사 ((현 장로. 이 원고는 주 42와 같은 출처에 실렸다.))의 간증을 여기 소개한다. 당시 학생들의 정서와 학교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는 한 자료일 터이다.
<<졸업생 기고>> 일기 중 어느 하루
박병태 집사
오늘도 성서대학의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가게문을 정해진 영업시간보다 30분 일찍 닫고 도망자처럼 급히 차를 몰고 학교로 향했다. 내가 하는 가게—세탁소는 자기의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고 남의 물건을 맡아서 관리하는 것이므로, 가게를 일방적으로 일찍 닫는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손해를 많이 보는 일이다.
더구나 피곤하고 배도 고픈데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으로 배불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편안하고 좋은 것 아닌가.
21년 전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것이 나의 마지막 학창생활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표에 따라 나를 뉴저지성서대학의 학생으로 뽑으시고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자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자격을 가르쳐 주시고 또 주님의 종으로서 부리시기에 합당한 자로 훈련시키시는 귀한 일을 나에게 시작하신 것이다.
새벽부터 꼬박 12시간 가게에서 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안고 4시간 동안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2년을 잘 견디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의 선하신 뜻을 생각해 본다. 다음 주이면, 2년 과정이 다 끝나고 이제 졸업날짜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2년간 그냥 다니기만도 쉽지 않은데, 많은 숙제와 시험을 치르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어려운 일이었다. 이 2년간의 어려움을 통해 주님은 나를 훈련시키셨고 내 영에 큰 활력을 불어넣으셨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주님은 이 2년간의 어려움의 시간들을 은혜의 시간으로 바꾸어주셨고, 이기게 해 주셨고, 마치게 해 주셨다. 성경을 바로 보는 법을 여러 귀하신 목사님들을 통해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기에, 이제부터는 전처럼 성경을 혼자서 볼 때 내 중심으로 읽던 습관을 버리고 바로 읽을 수 있겠다.
주님은 자신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고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섬기는 방법도 소상하게 알게 해 주셨다. 이제부터는 주님의 특혜로 2년간 훈련받은 자로서 주님의 십자가 가까이서 적극적인 믿음생활을 하며 주님의 몸인 교회를 바로 섬기고 담대히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2년간의 귀하고 뜻깊은 특혜의 시간을 주위에 형제자매들에게 자신 있게 권고하라고 요청하신다.
어느덧 차가 학교 앞에 도착했다. 이제 교실에 들어가서 마지막 시험을 칠 때 공부한 것 잘 생각나게 해 주시고 좋은 성적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교실 문에 들어갔다.
날로 자라 가는 중·고등부
2월 21, 22일에는 고등부 임원 연수회가 라마나욧 기도원에서 개최됐다.
23일은 중·고등부 학부모 세미나와 교사-학부모 모임(PTA)도 열렸다. 강사는 이학권 목사(뉴욕새교회)였다.
고등부는 또 여름단기선교여행을 앞두고 3월 22일에 김밥 바자회를 가졌다. 4월 25일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중고등부 배구대회가 열렸다.
음악부·음악위
모두 4개로 대폭 늘어난 성가대와 음악부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 연초인 1월 19일에 음악위원회가 음악부장 김인선 장로 집에서 모였다. 각부 성가대 대장과 총무, 지휘자, 반주자, 솔리스트가 총동원된 모임이었다.
그 해는 특히 스무 돌을 맞아 대규모의 축하 음악행사의 준비에 들어갔다. 4월 8일에도 음악위가 모임을 가졌다. 3월 중에는 음악부에서 ‘할렐루야 복음성가집’을 발행했다. 권당 4불씩에 배부했다.
각 성가대는 매달 틈틈이 오후예배 때 헌신예배를 드렸고 그때마다 해당 성가대가 주님께 찬양을 드렸다.
4·29 폭동 발생하다 ((주요 한인언론 자료 참조.))
그해 4월말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큰 비극이 발생했다.
4·29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국내 20세기 최악의 난동이었다. 본 교회 5월 3일자 주보 소식란에는 “LA에서 일어나고 있는 흑·백·한 인종간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기도제목이 실렸다.
도주하던 흑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을 백인 경찰관 4명이 마구 구타한 것을 촉발제로 삼은 폭도들이 코리아타운을 포함한 다운타운의 상점에 침입해, 삽시간에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는 사건으로 확대됐다. 여러 사람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오랫동안 일궈온 피땀의 소산인 코리아타운이 ‘싹쓸이’ 당하다시피 한인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약탈자 중에는 흑인과 히스패닉에다 일부 한인들까지 끼여있었다.
5월 첫 주일은 어린이주일, 둘째 주일(10일)은 어머니주일로, 즐겁고 기뻐야 할 계절이었으나 성도들의 마음은 마냥 무겁기만 하고 편치가 않았다. LA에 교우들의 친지나 친척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 직후 조바심 속에 그곳 친지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후 상황을 확인하는 교우들이 많았다. 안 그래도 핏줄을 나눈 우리네 동포들이고, 정작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 뉘우칠 구석도 많았다.
여러 이유를 따진다 해도, 당시까지 한인들은 돈 버는 데만 주로 관심이 있었고 지역사회에 기여하거나 다민족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사후 분석이다. 흑인계 일각에서는 한인 상인들이 흑인 지역사회에서 돈을 벌어 자기네 배만 채우는 ‘돈만 아는 흡혈귀들’이며 “유대인들보다 더 지독한 민족이다”이란 혹평이 오래 나돌아온 것이 사실이었다.
좋든 싫든 우리가 수긍하고 시인할 점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흑인 지역에서 돈을 벌면서 호화 자동차를 타고 거드름피우는 한인들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건 발생 후 한인 교계지도자들이 적절한 발언과 대처를 하지 못해 한인2세들에게 많은 의문과 실망을 안겼다. 이 폭동이 이곳 미동부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해서 큰 염려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도 있듯, 이 비극을 계기로 LA를 포함한 전국의 한인교계와 한인사회는 많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고, 흑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90년대 중반 기독교정신 아래 뉴욕 할렘에 설립돼 오늘날까지 한·흑 친선에 이바지해온 소니아 장씨의 ‘한·흑 연대’를 들 수 있다. 과거엔 평소 한인들이 멀리하고 경원시해 왔던 할렘에서 헨리 홍 목사, 김순애 선교사(그루터기선교회 대표), 연합감리교 김진형 목사 등이 장기간 한·흑 유대에 힘썼다.
우리교회 김효순 집사도 맨해튼 흑인가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흑인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사랑을 베풀어 1996.3.14, 뉴욕시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현재도 많은 한인교회들이 흑인교계에 장학제도와 같은 리소스를 제공하는 등 선린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교회는 물론 히스패닉계에 교회당 공간을 제공하는 한인교회도 늘고 있다. 한편 2002년에는 아르헨티나에서도 정부에 불만을 가진 국민들이 자체폭동을 일으켜 역시 지역 한인동포들이 큰 피해를 입고, 비슷한 교훈을 남겼다.
메모리얼 데이 퍼레이드
뉴저지영광교회 자립하다
졸업예배
중·고등부, 대만·한국 선교여행
여름 행사 개요
전국 평신도지도자 헌신예배·세미나 ((뉴저지교포신문 1992년 6월 29일자 보도기사 참조.))
음악사역과 성가대 활약상
11차 전 교우 수양회
뿌리 깊은 나무이고자
92년도 여름학교 종강예배
그해 9월
스무 돌 기념잔치 ((한국일보 1992년 11월 18일자, 교포신문 11월 2일자, 뉴저지교포신문 관련 보도기사 등을 참조했음.))
교회가 창립 스무 돌을 맞아, 11월 1일은 기념예배, 15일에는 기념음악제로 감사와 자축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뉴저지 로다이의 펠리션(Felician)칼리지 강당에서 공연된 ‘창립20주년기념성가제’는 독창자와 중창 등이 곁들여져 ‘여호와는 나의 목자’, ‘주기도’(강위덕 작곡), 구노의 ‘거룩’ 베토벤의 ‘할렐루야’ 등을 불렀고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곡’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사진 42)
100여명의 본 교회 연합성가대와 여성중창단, 현악단 등이 출연했고, 본 교회 안팎의 900여 성도들이 참석,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9명으로 구성된 여성중창단은 ‘주의 손길’, ‘오 나의 주를 찬양하리라’, ‘하나님께 감사드리네’ 등 곡으로 화려한 하모니를 구사했다.
김홍일 지휘, 서연화 반주로 진행된 이날 음악회의 독창자로는 소프라노 김경희, 알토 조정애, 테너 김동순, 베이스 김만규 씨 등이 출연했다.
김창길 목사는 인사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당시 순서지 참조.))
…(전략)…20년 전 20여명 창립교인으로 시작해 오늘의 천 여명의 교우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일이 너무 고마워 우리는 찬양하기로 했습니다. 말과 기도만이 아니라 벅차고 감격된 우리 마음을 노래하기로 했습니다. 뉴저지한인장로교회 연합성가대의 찬양은 100여명의 찬양이 아니라 1,000여명 전 교우들의 찬양입니다. 생명의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심금을 울리는 찬양입니다. 에벤에셀의 감격의 노래입니다.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곡은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우리 교회를 인도하시는 그분께 바치는 찬양입니다.
아이들아 나아가자. 어른들도 나갑시다. 어르신네들도 나아가십시다. 여인들과 남자들도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찬양 드립시다.
뉴저지 팰리세이즈팍 목사관에서
음악제를 축하하려고 지 교회인 뉴저지영광교회가 화환을 보내왔고 서울 한마음교회(이명호 목사)는 축전을 보내왔다. 이 성가제를 위해 성가대가 봄부터 준비모임을 가졌고 많은 연습과 노력을 기울였다.
성서대학의 자화상
그해 11월 중순 발간된 ‘성서동문’지는 ‘뉴저지성서대학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김창길 학장이 쓴 보고서 형식으로 된 글이었다. 「성서동문」 제1권 제2호(1992년 11월 15일)참조.)) 그해 설립 5년째를 맞은 성서대학이 4회 동안 졸업생 38명 ((주교교사과 8명, 성서과 30명.)), 재학생 37명, 수료(휴학 포함) 10여명 등을 냈다고 알리면서 졸업생과 재학생의 제반사항을 분석한 내용이었다.
이에 따르면, 졸업·재학생을 포함, 직분별로는 장로가 5명, 안수집사가 5명, 권사 8명, 서리집사 54명, 평교인 4명 등 총 76명이었다.
1992년도 주요 이벤트 일지
성전을 건축하라
모든 좋은 것을 목회자와 함께(갈 6:6)
공원 구역예배의 즐거움
수요예배 성가대 모집
부모님 주일과 교우야외예배·운동회
교구대항 운동회(I 청군·II 백군)
돌아온 선교바자와 거라지 세일의 계절
‘오 마이 베이비!’—장하다 우리 현지~
만발한 졸업의 꽃들
김 목사 러시아 선교여행
어린이여름캠프
항존직 대거 선출
주일성수 위한 지역투표 캠페인
의료선교회 구성하다
네 번째 구역찬송경연대회
서리집사 선임기준 강화
93년도 대내 이벤트 일지
93년도 대외활동 일지
시대를 앞서가는 교회
김 목사는 새해 첫 주일인 1월 2일 ‘시대에 앞서가는 교회’(시 34:14)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새해 목표이기도 했다. 그날 공동의회는 새해 예산을 815,000불로 결정했다.
새해부터 성경공부 문답지는 창세기 공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1월 23일 주보에는 성경공부를 제출할 때 파일에 끼어서 내고, 없는 교우들은 만들어서라도 제출해 달라는 주문이 있었다.
새해에도 제1남전도회는 변함없이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통조림 수집을 매달 하고 있었다. 그해 첫 달 분은 1월 30일에 수집했다.
1월말에는 94년도 구역담당자가 발표됐다. 모두 26구역으로 교구당 13구역씩이었다. 이와 함께 주보에는 “교회의 모든 부서는 2년마다 바뀝니다”라는 귀띔이 들어있었다. 구역장 권찰 수련회가 1월 29일 오후 7시30분에 교회에서 모인다는 광고가 있었다.
한편 본 교회 지교회인 웨체스터한인장로교회가 23일 창립 3주년 기념예배 및 장로 장립식, 임직식을 가졌다.
윤형주 초청 찬양과 간증의 밤
1월 9일 저녁에는 연예인 윤형주 집사 초청 찬양과 간증의 밤이 열렸다.
‘하얀 손수건’, ‘우리들의 이야기’란 노래로 유명한 윤 집사는 ‘대마초 사건’으로 투옥된 후 ‘너는 내 것이라’(사 43:1)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서울 온누리교회 안수집사와 (주)한빛기획 대표인 기업가로, 그리고 복음성가 가수로 변신하여 복음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아름다움’(나침반사) 등 책도 집필했고, 한국가수선교회 회장 등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윤 집사는 90년대 후반기에 다시 장로가 되어, 뉴욕을 비롯한 미주에서 퍽 자주 초청 받아 비슷한 집회를 이끌었다.
달라져 가는 교회당
2월 6일부터는 교회강단이 새로워졌다. 오르간 위치가 성가대쪽으로 옮겨졌고, 기도대가 세워져 세례와 결혼식 때, 앞에 나와 기도드릴 때, 특별기도와 안수기도를 할 때,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끊임없이 공간확충에 힘써온 우리는 새해에도 공간을 넓히고 있었다. 영아부 방이 1층과 2층 두 곳으로 늘어난 것이다. 또 영아부 비디오실이 협소해 1층 (구)회계실에 방 하나를 더 만들고, 거기 있던 회계실은 제2교육관 지하실로, 한국학교 사무실은 3층으로 각각 이전했다. 한편 2월 중 한글학교와 교회학교 유치부가 교사를 찾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2월에는 교회본당 카페트와 친교실 마루 등이 말끔히 단장됐다. 또 복도를 타일로 깔았으니, 교회당 안에서는 “절대로“ 껌을 씹지 말라는 신신부탁이 게재됐다.
한국학교 봄학기
본 교회 부설 뉴저지한인장로교회 한국학교는 그해 2월 봄 학기 개학을 앞두고 과거 어느 해 보다 풍성한 프로그램을 갖고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당시 학교 조직은 교장 김창길 목사, 교감 유동우 박사, 이수온 선생 등이었다.))
언론 광고상으로 밝혀놓은 학교의 설립목적은 “한인 2세들에게 신앙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어 미국 안에서 한국인으로서의 특수성을 개발하여 미래를 이끌어 갈 지도적인 인물의 배출“이었다. 특징은 매주 토요일 주1회 4시간 수업을 하고 한국 국정교과서를 각 학생별로 배부하며 학생들의 신앙 및 생활지도 체제를 확립한 것 등이었다. 모집대상은 네 살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였다. 각반 정원은 15명으로 철저히 정원제를 실시하여 초과 시에는 더 이상 등록을 받지 않았다. ((당시 등록금은 150불, 스쿨버스 70불이었고 교재대는 본교가 부담했다. 94년 봄학기부터 등록금을 50불 인하했다.)) 또 더 폭넓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주위 명소와 공원 등을 방문하기로 했다. 한편 한국학교는 학교설립 10주년을 맞아 효율적이고 책임 있는 교육을 위해 풀타임 디렉터를 초빙하고 있었다. 자격은 한인2세 교육에 관심이 있고 운영과 티칭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초빙광고는 그해 가을학기에도 반복됐다. 그만큼 적임자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한국학교 교사진도 매우 알찼다. 교사들의 학력과 경력이 적절하고 탁월했던 것이다. ((교사별 약력은 이러했다. 유영아: Rutgers 대 재학(커뮤니케이션 전공). 김남주: 숙명여대 아동교육학 석사, 한국학교 교사경력 4년. 이경희: 이화여대 영문학과, 한국학교 5년, Lindbergh초등학교, Palisades Pk. 중고교 보조교사. 이혜경: 이화여대 가정관리과, 한국학교교사 6년. 임주흥: 이화여대 국문과, 한국학교교사 4년. 조혜숙: Caldwell대 음악대학(성악).))
오순덕 권사 팔순 감사예배
본 교회의 충성스런 두 오 권사 중 한 분인 오순덕 권사 80회 생일잔치가 2월 19일 뉴욕 금강산(옛 서라벌연회장)에서 베풀어졌다. 191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오 권사는 중국 만주소학교를 졸업하고 39년 최대원 씨와 결혼했으며, 47년 인천송도교회를 개척했고, 59년부터 25년간 인천기독교방송국에 근무했다.
일가족은 3남 1녀에 손자손녀와 증손들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날 본 교회의 ‘또 다른 오 권사’인 오안순 권사가 축가를 불렀고, 조영진 목사가 ‘부르심에는 상이 있다’는 말씀을 전했다.
김 목사의 잦은 선교 나들이
1994년은 선교 면에서 담임 김 목사가 무척 바쁜 한 해였다. 특히 교단 일로 바빴다.
2월 13일은 브라질 이과수에서 모이는 남미선교사 세미나에서 ‘한국 디아스포라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강의하고 중남미노회에서 설교를 담당한 뒤, 22〜25일 볼리비아 라파즈의 이상철 선교사의 사역현장을 시찰하고 25일 귀국했다.
4월 25일부터는, 중남미지역 선교를 위한 협력과 상호지원의 기반을 다지게 될 중남미·중국·러시아 선교협의회를 4월 30일까지 참석하고 한마음교회, 성서신학원 등에서 설교를 맡아하고 5월초 돌아왔다.
남아메리카 장로교회 및 개혁교회 연합회 미주한인장로회, 미국장로교 등 4개 교단 대표들이 참석했는데 김 목사는 미주한인장로회 대표로 참석했다. 5월 중 김에스더 사모도 코스타리카한인교회 여전도회 주관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왔다.
교단 총회장으로 피선된 후인 9월에는 김 목사가 한국 예수교장로회 제79회 총회에 초청 받아 참석하고 집회를 이끈 뒤 15일부터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9월 18일 시드니제일교회에서, 또 뉴질랜드 오클랜드 영락교회와 신종혁 선교사가 선교하는 마우리 족속들에게 설교했다. 그밖에도 시드니에 있는 10명의 목사들과 미주한인장로히 노회건으로 의논을 했으며 캐나다 노회까지 참석하고 돌아왔다.
9월 29일에는 캐나다노회 교역자 부부 세미나에서 ‘이민교회 목회자 부부의 자세’란 주제로 강의를 했다. 30일 노회 때는 총회장으로 인사를 하고 한국교단과 본 교단에 관한 보고를 했다. 10월 1일에는 해밀턴교회에서 목사안수식 설교를 했다.
10월2일에는 토론토영락교회에서 설교를 했고 토론토 염광교회 신임제직을 위한 본 교단 소개 및 교회법 강의를 했다.
너무도 바쁜 나날이었다.
조영진 목사 이임
섭섭한 일이 있었다.
“본 교회에서 4년 6개월간 부목사로 시무하셨던 조영진 목사님은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신학연구와 서울서소문교회 부목사로 취임하기 위해 3월에 떠납니다. 오늘 3부 예배 후 여전도회가 마련한 송별파티가 있습니다.”
2월 27일 공식 이임한 조 목사는 3월 14일 한국으로 출발했다. 그는 나중 8월 21일에 본 교회에서 1·2부 대예배 설교를 하기도 했다. 조 목사는 그후 뉴저지초대교회로 부임한다.
오클랜드 교회자리를 확보하다 ((이 부분을 쓸 때, 다음 자료들을 참조했다. 뉴저지 일간지 ‘Record’, 1994년 5월 12일자 북부저지(North Jersey)판(Section D) 1, 2쪽. 세계 속의 한인교회(Ⅲ)(정석기 지음) 244〜247쪽. Record의 기사는 ‘Catholic order sells estate-A New Mission’이란 타이틀, ‘Korean church to buy site’란 부제를 달았고 사목관 기둥 사이에 앉은 신부와 별도의 저택 전경 사진, 주변 약도 등을 실렸다. 이 부동산의 상세한 역사와 내력을 곁들인 퍽 충실한 기사였다. 담당기자는 Paul J. Toomey.))
1994년은 우리 교회가 또 하나의 거보(巨步)를 내딛은 해였다.
래머포 밸리 로드(Ramapo Valley Road) 선상의 오클랜드 교회당 곧 예닮원을 발견하고, 구입절차에 나선 것이다. 25에이커의 숲과 늪지, 22,000평방 피트 넓이의 학교건물, (사진 44)9,000 평방 피트 규모의 사목관(rectory) ((당시 이 사목관에는 루이지 애서비 신부(Rev. Luigi Acerbi·이탈리아식으로는 ‘아체르비’)가 7년째 살고 있었다. 그는 이 사목관 사상 최후의 PIME 신부인 셈이다.)) 등 이곳은 부동산 시장에 나온 지 4년이나 된 터였다.
물론 구입 과정은 쉽지 않았다. 여러 차례 공청회와 우여곡절이 있었고, 거액의 헌금도 필요했다. 그러나 어디 첫 밥술에 배부르랴? 많은 기도와 헌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돌아보면, 본 교회는 91년 성전건축위원회가 조직된 이래 그 동안 열 한 차례 건물과 부지를 돌아보았지만, 다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고 적합치 못했다. ((부록 예닮원 편 참조.)) 오랫동안 기도하고 돌아보던 끝에 부동산 시장을 통해 우연히 소개를 받아 이곳을 찾은 것이다. 물론 사람으로 볼 때 우연이지만, 하나님으로 볼 때는 만세 전에 예비해 두신 ‘모리아 산’이었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 산은 ‘여호와 이레’의 처소였다(창22:1-19). 이 모리아 산이 바로 훗날 솔로몬 성전이 건립될 아라우나(오란)의 타작마당 부지였다(역대하3:1).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가장 귀한 아들을 바친 곳이 성전 터가 됐고, 아브라함의 뒤에 있던, 뿔이 수풀에 걸린 수양이 대신 제물이 됐듯, 성전 바깥 골고다 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어린양으로 죽으신 것이다.))
오클랜드 건물과 부지는 우리가 입주하기 전, 로마 카톨릭 소속 기관인 교황청 해외선교회 소속(Pontiff Institute for Foreign Mission·이탈리아어 약자 PIME) 훈련학교였다. 바티칸에 본부를 둔 PIME는 소외된 자들과 빈민들을 상대로 봉사하며 전세계에 병원과 양로원, 고아원, 학교 등을 운영하는 단체다.
PIME 이전에도 지난 역사가 있다. 버겐카운티 문화역사사무소 자료에 따르면, 맨 첫번 소유주는 ‘윌킨스 브라더스’(Wilkins Bro.) 브러시 공장 사장이자 오클랜드 소방서장인 루도 웨버 윌킨스였다. 래머포 강기슭에 자리잡은 이 공장은 1894년 설립돼 당시 오클랜드 최대의 수력(water-powered) 산업체였다. 약100명의 직원들이 이곳에서 머리 빗과 털 솔을 제작하여 전세계에 수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3년까지 이곳에 6개 부속건물이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이 현존해 있다. 현재의 목사관 건물이다. ((본 교회가 구입하기 전에는 PIME소속 루이지 애서비 신부가 사용하던 사목실이었다.)) 6회나 오클랜드 소방서장으로 재임했던 윌킨스는 1909년 이곳에 3층 집을 지었다. 신고전적인 도리안식 기둥이 서있는 흰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뉴저지주와 국가 사적으로도 손꼽히는 건물이다. 이런 유로서는 유일한 독특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차기 소유자는 오클랜드의 한 너싱홈의 소유자인 존 피오렐로 씨로 부인 메리와 함께 살다가 1959년에 PIME에 팔았다. 1963년 PIME는 부지 안에 학교를 세웠으나 불과 수년 후인 70년대에 폐쇄했다. 이유는 PIME 지원자의 격감 때문이었다. 1995년 당시 빈민을 돕는 약 500여명의 신부들이 미국에 남아있었고 21세기초인 지금도 잔존해 있다. 그후 이 건물은 수양관으로 사용되었었다.
본 교회가 매입 신청자로 나서자, 디트로이트에 있던 PIME 소속 사제들이 가격협상에 나섰는데 기본조건이 1백만 달러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때는 250만 불을 호가했었고, 세금보고에 따르면 380만 불로 평가되기도 했었다. 신문에는 ‘버겐카운티 한인계의 주요 종교 단체의 하나’인 본 교회에 팔리게 됐다고 소개했다. 오클랜드 시의 피터 켄덜(Peter Kendall) 당시 시장은 “새 소유주가 또 다른 종교단체인 것이 기쁘다”며 “그들의 건물 보유 목적이 우리가 원하던 바와 일치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오클랜드 성전건축을 위한 릴레이금식기도가 한창일 때였다. 김창길 목사는 현장에 자주 찾아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려고 그곳에 갔다가 수양관 간판이 없어진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그 새에 누가 이 건물을 샀나 본데…”
혼자 중얼거리며 잠시 기분이 암울해졌다. 나중에서야 진상을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후로도 그는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특별기도를 지속했다.
김 목사는 이후, 예닮원을 고향처럼 각별히 아끼게 된다. “나는 목사가 되기 전 꼭 농과대학에 가고 싶었죠. 꽃을 좋아했고 짐승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꽃을 보면 사람이 아름다워지고 순수해집니다.” ((정석기 지음 같은 책 246쪽.)) 그는 이곳에 에덴 가든의 이상을 실현하고 싶어했다.
반복된 오클랜드 공청회
아무튼, 오클랜드 교회당 구입 공청회를 앞두고 3월 20일부터 온 교우들이 기도와 금식에 들어갔다. 겉으로는 각자 바쁘게 자기 할 일로 나다니면서도, 내심 신경이 모두 오클랜드 공청회에 쏠려있었다. 주보 소식란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기도로 성전을 지읍시다. 성전 짓는 일에 하루 금식과 기도를 드리십시다. 오클랜드 교회당 구입 공청회를 위해 전 교우들이 기도와 금식으로 참여하십시다. 참여하실 분은 하실 날짜와 이름과 구역을 써넣어 주시기 바라며 친교실 벽에 붙어 있사오니 싸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날부터 친교 시 안내판은 매일 금식기도 날짜에 이름을 적어 넣는 교우들로 이내 채워져 갔다.
4월 3일 부활절예배 후에는 오클랜드 교회당 구입안건을 위한 임시공동의회가 열려, 경과보고와 설명이 있은 후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4월 10일 소식란에 그 소식이 게재됐다.
“본 교회 교회당 신축을 위해 버겐카운티의 오클랜드 222 Rampo Valley Rd.의 24.7에이커와 26,000평방피트의 2층 건물을 180만달러에 구입하기로 건축위, 당회,제직회, 공동의회에서 결정했습니다. 50만 불을 다운페이 하고 180만 불을 오너 모기지로 8년 6개월간 한 달에 17,000불씩 물게 됐습니다.”
뉴스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본 교회 예배는 팰리세이즈팍에서 2번의 예배를 드리고 오클랜드에서 1번의 예배를 드릴 예정입니다. 또 오클랜드교회당을 교육과 수양관을 위한 다목적으로 사용합니다. 거리는 교회에서 25분 걸립니다.”
6월 19일에 진짜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알렐루야! 여러분들께서 금식과 기도로 오클랜드교회 사용허가를 위해 애써 주심으로, 지난 목요일16일 오후8시 오클랜드 법원 워크세션-실무협의회에서 교회사용허가가 통과됐습니다. 그러나 8월 11일 주민공청회가 남았습니다. 계속 기도와 금식을 부탁드립니다.”
이 공청회란 것이 바짝바짝 사람 애간장을 태우고 피를 말린다. 미국에는 공청회란 것이 하고 많다. 의회 같은 데서는 청문회란 말도 쓴다. 법원의 심문도 배심회의 전에도 알고 보면 일종의 청문회 비슷한 걸 한다.
주민공청회는 주민들에겐 공평한 것일지도 모르나 공청회 대상자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진짜로 ‘빠꾸’ 되면 여태 노력이 헛수고이고 도루묵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8월 11일 공청회 당일까지 특별새벽기도회에 돌입했다.
공청일인 8월 11일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목요일이었다. 그러나 두 시간 가량 하다가 너무 늦어져 정회하고, 다시 9월 8일 속개하기로 했다. 주보에는 재차 “그날까지 계속 금식과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란 광고가 났다. 이것은 공청회 자체보다 우리들의 끈기와의 싸움인 것 같다.
그해 9월 22일. 그날은 우리 교회 역사를 장식하는 또 다른 감격의 목요일이었다. 오클랜드 주민공청회에서 교회허가가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이다. 금식과 기도를 해온 성도들의 기도의 승리였고, 하나님의 승리였다.
공청회를 기다리며 애태우던 기간 중, 광복주일인 8월 14일 여전도회는 이런 공문을 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교우님들에게 문안드립니다.
교우님들께서도 이미 아시다시피 지난 8월 11일 목요일 저녁 8시에 오클랜드 땅 성전건축문제에 대하여 그곳 주민들의 공청회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교우님들께서 눈물로 금식으로 특별새벽기도회로 앉아 있을 때나 서있을 때나 정말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아버지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공청회는 다시 9월 8일로 연기되고 저희들의 기도는 계속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해야할 한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대청소입니다(제1교육관 제2교육관도 포함됩니다). 오래 되어 상한 곳은 청소를 하여도 깨끗하게 되지 않을 부분들도 있겠지만 청소해서 깨끗해지고 새로워질 부분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사주었을 때 아이가 물건을 아끼고 잘 정리하고 간직한다면 우리는 그 아이의 모습이 예쁘고 대견하여 또 다른 것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저희에게 주어진 것을 아끼고 잘 닦아서 간직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쁘게 생각하시고 다시 있을 때에는 곡 저희들이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청소는 월요일(8월 15일) 아침 9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열 시간 걸릴 일도 열 사람이 한 시간 씩만 협조해 주시면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아침 시간에 여유가 있으신 교우님들께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회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셔서 협조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뉴저지한인장로교회 여전도회
준비물
·물에 젖거나 더려워져도 괜찮은 옷을 입으시고…
·걸레용 헌옷이나 타월 ·Ajax(Comet) ·윈덱스 ·작은 브러시(못쓰는 치솔이나 기타…)
김영덕 전도사 부임
김영덕 전도사가 6월 5일 본 교회 부교역자로 부임했다. 본 교회 김인선 장로의 장남이었다. 연세대 신과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했으며 팰리세이드장로교회 교육전도사를 역임했다. 사실은 이미 4월 10일 제159차 당회에서 그를 선임키로 결정했었다. 김 전도사는 또 그해 11월 5일 김창길 목사 주례로 성 토마스교회에서 신지영 양과 결혼도 했다. 신지영 양은 신진식 목사(기독교방송 사장 역임)의 딸이었다. 11월 17일에는 한무리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20일에는 안수기념 설교를 대예배 때 했다.
성숙해 가는 신앙(Growing Faith)
본 교회가 성장 발전하면서 언론을 통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특히 지역일간지인 ‘레코드’(Record)는 꽤 자주 접하는 신문이 됐다. 6월 9일자 신문은 ‘한인교회 붐—자라는 신앙’(Korean congregations boom-Growing Faith)이란 제하에 본 교회 교우들의 예배 광경 사진을 큼직큼직하게 곁들여 ‘교회가 이민자들의 적응을 돕는다’(Churches help immigrants adjust)라고 소개했다.
데이비드 깁슨 기자가 쓴 이 기사는 ((카메라는 릭 프랜시스(Ric Francis) 기자가 찍었다. 회중석과 성가대 가까이서 하나씩 시원스럽게 찍은 사진이었다.)) 그 전주에 지켜본 본 교회 새벽기도회로부터 아주 세밀히 관찰해 묘사했다. “오전 5시30분에 모여든 그들은 찬송가를 부르고 김 목사의 간단한 설교를 들은 후 오전6시쯤 어둑한 성전의 통로와 의자 사이 등 각자 기도할 자리를 잡아 구두를 벗고 ((‘성소에 대한 한국 전통적인 경건의 표시’라고 주를 달았다.)) 꿇어앉아 힘차고 서정적인 간구를 올리며 길면 7시까지 머물다가 하나씩 자기 일터나 가족들을 향해 돌아간다. 고속 성장하는 이 한인 공동체 멤버들의 하루가 그렇게 시작된다”고 썼다.
“이민자로서의 문제들을 겪으면서 다시 한번 교회를 찾아 믿음을 통해 힘을 얻고 삶 속에서 의지할 닻을 얻는다”는 이 기사는 ‘한인교회가 없다면 미국생활에 적응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라는 최정숙 교우의 말도 인용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초기사를 잠시 소개하면서 장로교가 최대교단으로 자라 미국에서도 역시 최대교단을 이뤘다고 소개했다. 북부 저지에만 70교회에서 지난 5년간 거의 배가됐다고 경탄했다. 또 1980년 당시 33명에 불과했던 교인이 지금 600명의 성인, 300명의 어린이들로 발전했고, 4부 예배로부터 다양한 모임과 소그룹이 있음을 소개했다.
오클랜드의 교회터를 구입한 최근 사실도 알리면서 곧 교단 총회장이 될 김 목사로서 “그만한 목사관에 거주하게 된 것이 걸맞다”고 나름의 평가도 곁들였다. 더욱이 통틀어 약 75%의 한인가족들이 교회와 연루돼 있고 65%가 정기 출석한다는 민병갑 교수 ((퀸즈칼리지 사회학교수. 한인사회 관련 통계전문가.))의 추산을 인용, “그들의 출석률은 대다수 미국교회를 부끄럽게 할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또 “미국교회처럼 지역사회의 일부가 되기를 원해” ((이 말은 이언 리 집사의 말이었다.)) 교인 가게마다 한글간판과 함께 영어로도 표기하고 더블파킹을 경계한다는 김 목사의 말도 인용했다. “본 교회 교인들의 80%는 학사 출신 이상입니다. 그러나 다수가 청과상과 생선가게 기타 등지에서 일합니다. 거기에 그들의 이상과 실제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 갈등을 조화시키는 길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김 목사 총회장에 피선되다 ((‘미주기독공보’(발행인 박희소·편집인 김주열) 94년 7월2일자(통권190호), ‘(뉴욕)교협신문'(발행인 조덕현) 94년 7월1일자(통권 68호) 등 언론 보도자료를 참조했음.))
그해 6월 21일부터 23일까지 사흘간, 미주한인장로회 19차 정기총회가 ‘네 장막을 넓히라'(이사야54:2)라는 주제아래 뉴저지 팰리세이드장로교회에서 개최됐다. 이 총회에서 김창길 당시 부총회장이 총회장으로 선출됐다. ((기타 임원으로는 목사 부총회장 김상구 목사, 장로부총회장 곽근상 장로, 총무 우요한 목사, 서기 김인철 목사, 회계 조명섭 장로가 선출됐다. 또 부서기 황의춘 목사, 회록서기 전덕렬 목사, 회록부서기 정창은 목사, 부회계 이덕신 장로도 추가됐다.)) 총회기간 중 본 교회 성가대가 개회예배 찬양을 맡고, 여전도회 첫날 저녁과 매일 다과를 담당하기도 했다. 총회장 취임사는 다음과 같았다.
이 모임은 미주 10개 노회와 240여 교회 대표 등 4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고 개회예배 중 총회장 김도석 목사의 설교도 있었다. 본회의 때 총대 210명중 198명이 참석한 것으로 집계됐다.
김 신임총회장은 인사말에서 ‘비전 있는 총회, 생산적인 총회’로 발전시킬 것을 다짐했다. 그는 이번 주제가 교단의 확장을 의미하며 교단확장을 위해서는 교단신문이 필요하고 2,3세가 머물 수 있는 교회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결론 부분에서 자신이 착용한 자주색 총회장 로브(robe)의 색깔이 암시하는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245교회를 섬기는 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자주색은 성경에서 고대의 왕족과 귀족 등 지배계급을 시사하는 색깔이었다(에스더8:15).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적(sovereign) 권위와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한다.))(사진 45)
눈을 들어 바라보라
장로교 공보가 창간되다
그해 여름학교는
신앙은 이민사회의 정신적 기둥
화려했던 제5회 구역찬송대회
대내외 이벤트 일지
네 지경을 넓히라
발빠른 연두(年頭) 움직임
생로병사(生老病死)
재개된 출석통계
고베 지진 피해자 돕다 ((당시 한국 조선일보 등의 보도기사를 참조했음))
그해 1월 17일 고베 시를 중심한 일본 간사이(關西)지방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LA 노스리지 대지진 만 1주년 되는 날이었다. 언론에 따르면, 그날새벽 5시 46분부터 효고현을 진원지로 시작된 이 지진은 지진규모 ((지진규모의 단위는 magnitude를 뜻하는 M을 사용함)) M7.2에 최대진도 7의 엄청난 크기였고, 사망자 약 6,000명, 부상자 36,000명, 이재민 60만, 가옥파손(전·반파) 176,000동, 관련화재 531건 등으로, 총 10조엔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
한인들의 손실도 상당했다. 1월24일자 한국어 신문에 의하면, 23일까지 재일동포 사망자는 88명으로 잠정 집계됐다. 좌익계인 조총련 쪽 통계까지 더한다면 모두 150여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재산피해로는, 주민의 80%인 1만 이상의 한인이 밀집된 나가타(장전)구의 경우, 신발공장과 회사 등 30년간 일군 코리아타운이 완전 잿더미가 됐고, 1천〜2천억 엔의 손해를 입어 동포 피해 규모로서는 가장 컸다. 간사이 전역을 합쳐 한인들의 재산 피해규모는 5천억 엔으로 추산됐다. 또 여기저기 동포 교회를 비롯한 교회당도 많은 파손을 당했다.
이를 보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 없던 본 교회도 1월 29일, 2월 5일 2주 동안 모금함을 교회입구에 설치, 1,516불의 성금을 모아 교단을 통해 전달했다. 아울러 미주 전역의 한인교계와 한인사회가 이에 적극 동참했다.
한편 교단 총회장 김창길 목사는 교단산하 교회들이 헌금한 지진피해자돕기 성금 35,000불을 전달하러 5월 2일부터 11일까지 일본 고베와 도쿄를 방문, 재일기독교회에 전달하고 현지의 파손된 교회들과 재민들을 순방했다.
가고 오는 교역자
새해에 첫 교역자 인사 이동이 있었다.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부목사로 일해온 최정훈 목사는 1월 31일부로 사임했다. 당회는 이미 15일에 사표를 수리했었다. 한편 청년부 전담과 4개 구역담당 교역자로 조한경 전도사가 임명됐다. 조의호 목사의 장남인 그는 연세대 문과·신과대를 졸업하고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교역학 석사를 마치고 뉴욕효신교회에서 사역했었다.
김선태 목사 초청 신앙간증부흥회
제 3회 신앙간증 부흥회가 2월 10〜12일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주제 아래 개최됐다. 강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맹인선교회 총무 김선태 목사였다. 김 목사는 첫날 새벽집회를 ‘인생과 보람’(눅 5:1-11)이란 말씀으로 연 데 이어 ‘성도가 잘 살려면’(신 7:12-16), ‘소문을 잘 내는 교회’(살전 1:1-10), ‘모든 것을 주께 맡기는 삶’(벧전 5:7-11), ‘교회가 부흥하려면-갖출 요소들’(행 2:37-47), ‘미친 성도들 때문에’(고후 5:12-16) 등으로 말씀을 전했고, 낮 집회는 ‘성도의 생활’이란 제목으로 야고보서 강해를 했다.
시각장애자를 위한 한국맹인연합교회를 창설했고 실명자의 개안수술 캠페인을 벌이는 등 폭넓은 기여로, 국민훈장을 포함한 다양한 포상도 받은 김 목사는 의료법인 실로암 안과병원 원목실장으로 최근까지도 실로암(간호사)합창단을 이끌고 미주에 활발하게 다니는 등 선교활약상을 펼쳐왔다.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면서도 숭실대 철학과, 장신대학원을 나왔고 맥코믹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앙과 열정, 투지의 사람이었다. 그는 또 늘 티없는 미소를 짓고 너털웃음으로 역경을 떨쳐버리는 기쁨의 사람이기도 했다.
한국학교, 봉사차원으로 쇄신하다
한국학교가 2월 18일 개학했다.
그 학기부터는 대 한인사회 봉사차원에서 등록금을 인하함과 동시에 보다 폭넓은 한국어 보급을 위해 한국어 교육시기를 놓친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특별반을 신설했다. 본 교회 이중언어 교사들이 성심성의껏 가르치고 있었다.
그해 봄학기는 2월 18〜6월 10일이었고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12시30분까지 수업이 진행됐다. 등록금은 100불(가족 중 제 2학생은 80불)이었다.
오! 오클랜드… 예! 예닮원
그해 최 선두 과제는 연전에 구입한 오클랜드(Oakland) 교회당(후의 예닮원)으로의 입주였다. 오클랜드는 본 교회의 새 터전이요 소망의 보금자리였다. 새해 상반기는 수리와 대청소로 보냈다. 수리 위원회가 모여 준비를 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3월 28일에는 180만 불에 오클랜드 컴플렉스를 클로징 했다.
4월 16일에는 오클랜드 교회당의 청소와 정리를 위해 각 자치회가 해당일 교회에서 점심 식사 후 교회 밴이나 각자 차량을 이용해 현장에 3시까지 모이기로 하고 각 부서별로 모임 및 작업 일을 정했다. 모임도 갖고 봉사도 하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였다.
4월말부터는 구역예배도 한 두 구역씩 오클랜드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봄철 동안은 공원에서 예배드리는 구역도 있더니, 오클랜드 모임 횟수가 주가 가고 달이 갈수록 늘어 7월초에는 전체 26구역 중 3분의1이 그곳에서 구역모임을 갖고 있었다. 드넓은 공간에다 풋풋한 내음이 가득한 자연과 더 가까워 내 고향 같고, 구석구석 내 손길이 갈만한 봉사의 기회가 무진장 많아, 재미도 솔솔 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5월 14일부터 9월까지는 주일오후 찬양예배를 오클랜드에서 드리기 시작했다. 주일 찬양예배 후 청소를 원하는 이들은 누구나 간편한 복장을 하고 가서 봉사했고 구역 점심 봉사도 거기서 했기 때문에 오클랜드에 가면, 누구나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오클랜드 성전을 꾸밀 각종 헌납품도 속속 드려졌다. 제직회는 6월중 오클랜드 본당에 비치할 그랜드피아노를 위해 제직 1인 100불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본당에 있는 그랜드피아노도 10년 전 제직들의 자진 모금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피아노 기금은 6월말까지 우선 총 2,750불이 모금됐다. 가족이 함께 또는 혼자서 200, 300, 500불을 내는 교우들도 있었다.
한편 청년회가 7월2〜4일에 있은 그해 수련회를 오클랜드에서 가짐으로써 구체적인 행사 테이프를 끊은 데 이어 7월 28일부터 8월 1일에 있은 제14차 전교우수련회도 역시 오클랜드에서 개최됐다. 그해 전교우수련회 강사는 임현수 목사(토론토 큰빛교회)였다. 이와 함께 유초등부 서머캠프도 26〜28일 이곳에서 열렸다.(사진 46)
오클랜드교회당은 8월 13일부로 ‘예닮원’으로 공식 명명됐다. 당일 주보에는 이렇게 감격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당회에서는 오클랜드교회를 ‘예닮원’으로 명명했습니다. *예–예수 *닮–닮기 *원–원합니다.”
‘예닮원’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것은 당회장 김창길 목사의 제안이었다. 또 오클랜드를 담당할 교역자(파트타임)로 정은혁 목사가 임명됐다.
예닮원 시대를 열다
예수를 닮기 원하는 사람들, 예수를 닮아 가는 사람들이 예닮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클랜드에 예닮원을 마련하게 되면서, 교회학교와 교회의 여러 이벤트가 점차 이분화 되어 갔다. 예닮원 전담 사역자도 모셨다. 성인예배는 주로 본당에서 드리지만 자녀들은 시간상, 지역상으로 편리한 시간, 편리한 장소를 택하여 예배드릴 수 있게 됐다. 단 전체모임은 본당에서 또는 예닮원의 큰 장소에서 함께 모였다.
본당은 영혼의 ‘지성소’와 같다면, 예닮원은 마음의 ‘회막 뜰’과 같은 곳이었다. ((구약 출애굽 후 광야시대의 성소와 성전이 그러했다)) 본당이 현재 내 집과 같다면, 예닮원은 별장 같고 고향마을 같은 곳이었다. 교인들은 고향 같은 예닮원의 성전과 ‘뜨락’을 정성 들여 가꾸고 꾸미기에 점점 바빴다.
예배와 찬양모임 등 정규행사들은 본당에서 열릴 때가 많았고, 수련회, 체육대회 등 보다 캐주얼한 이벤트들은 예닮원에서 열리는 경향이 있었다. 2세들의 결혼식도 본당에서나 예닮원 양쪽에서 거행됐다.
묵상과 절제의 사순절
그해 사순절이 다가왔다. 주보에는 이 소중한 기간을 타성적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사순절 특별기도회를 여는 교훈과 계몽의 글이 실렸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명상과 기도를 하시며 금식과 절제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말 많이 하는 생활과 나쁜 말(참소하는 것)을 피하는 계절입니다. 40일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로 드립니다.”
새벽기도회의 설교제목도 곁들여 연속 게재됐다. 3월중 첫 주간은 이러했다.
(월)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
(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나의 십자가
(수) 돈 때문에 배반했습니다.
(목) 예수냐, 바라바냐?
(금)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
(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자체 및 지역사회를 위한 부활성가제
부활절 성가제가 4월 9일 린드버그 스쿨 대강당에서 성대히 치러졌다.
음악부는 몇 달 전부터 성가제를 준비하면서 성가대원과 악기 연주자들을 모집하고 매주 목요일과 주일 오후마다 연습을 계속했다. 당일 공연은 두 차례에 걸쳐 했는데 1차 공연은 학부모와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고 2차 공연은 주로 미국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한편 그해 부활절 연합새벽예배는 4월 16일 본 교회에서 드려졌다.
새 교우 환영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과업은 뭐니뭐니해도 잃은 영혼을 되찾는 일이다.
주님은 아흔 아홉 양을 우리간에 놔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로서 자신을 비유하셨다. 상반기 신입교우들을 위한 환영회가 6월 4일 찬양예배 후 오클랜드에서 치러졌다. 그해 상반기 신입교우는 모두 26가구였고 가족들까지 총 50명이었다. 이인용 집사가 이끈 이날 환영회 예배 때 김창길 담임목사는 ‘우리 교회의 목적’(행 12:24-13:12)이란 말씀을 전했다. 새 교우를 포함한 온 교우들은 함께 식사를 나누고 찬양을 하면서 그날 저녁을 즐겼다. 하반기는 연말에 개최됐다.
김 목사 20차 교단총회 인도
김창길 목사는 그즈음 6월 20〜22일 로스앤젤레스 남가주동신교회에서 열리는 미주한인장로회 제 20차 정기총회를 이끌기 위해 정주섭, 김인선 장로 등 두 총대와 여전도회 연합회 총대 오안순 권사와 함께 LA로 향발했다.
김 목사로서는 총회장 1년 임기를 마무리하는 총회였다. 주보에는 선교사대회, 개회예배 설교, 중부영락교회 창립 14주년 설교, 각 노회장 및 임원 연석회의 인도, 총회 개회예배 설교 등 일정을 알리고 교우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김 총회장은 개회예배에서 ‘성숙한 교회’(엡 4:11〜16)란 설교를 하고 전국 총대들을 위한 개회 성찬식을 이끈 뒤 회무 처리에 들어갔다. 그해 총회에는 목사 109명, 장로 71명 등 모두 180명의 총대가 참가했다. 후임 총회장으로는 관례에 따라 부총회장인 동신교회의 김상구 목사가, 부총회장으로는 뉴욕 베다니장로교회의 김리관 목사가 당선됐다.
희년(禧年·Jubilee)과 조국
1995년은 광복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그 어느 해보다 감격이 컸음은 말할 나위없다. 본 교회 광복 50주년으로 지킨 8월 13일, 김창길 목사는 ‘희년과 조국’(레 25:9-10)이란 제목으로 기념설교를 했다.
“제 50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 돌아갈 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갈지니라.”
마치 레위기 25장의 말씀과도 같이, 50년 전 일본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은 우리 한민족이 해방 후 반 백년에 의미를 더하여 자유를 선포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일도 중요했다. 보다 중요한 일은 사탄의 압제를 받는 뭇 영혼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해(눅4:19)를 누리게 하고 영혼들이 자유함을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
광복50주년의 ’50’이란 숫자에 큰 의미성을 더하여 뉴욕 일원의 교계에서는 굉장한 행사를 치르느라 연초부터 분주했다.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회장 박순종 목사)가 조국광복50주년 기념 대 축제 행사의 일환으로 기념음악회, 자전거대륙횡단과 같은 거창한 행사를 벌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8월15일 당일, 유엔 함마슐드 광장에서 치르던 뉴욕 교협의 기념식에 설교자로 초청된 인사가 이단으로 널리 알려진 베뢰아 파의 김기동 목사(성락침례교회)란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행사자체가 의미성을 잃어버렸고, 교협 임원진이 총 사퇴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은 교회단체가 할 일의 명분과 경계선이 어떠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준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성서적 희년은 숫자 개념보다 영적인 의미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불붙은 상페테르츠부르그 선교
본 교회 선교사후보생인 김도수 목사의 러시아 상페테르츠부르그(St. Petersburg) ((옛 레닌그라드)) 파송예배가 7월 24일 본당에서 거행됐다. 그는 8월 10일에 현지로 떠났다.
성도들은 그를 파송하면서 현지 사무실에 필요한 컴퓨터와 팩스기, 레이저프린터 등을 위해 모금했다. 김 선교사는 목사안수기념 설교를 7월 16일 1〜3부 대예배 때 ‘자유함의 비밀’(요 8:32)이란 제목으로 행했다.
한편 고등부도 김피터, 조하나, 박 로즈메리, 박 레이먼드, 이 어네스트 등 5명을 7월30일부터 8월19일까지 일정으로 여름단기선교훈련 여행 차 보냈다.
여름학교 ‘상(賞) 열매’ 만발
그해에 제5차 여름학교 6주간 교육을 마무리하는 종강예배가 8월 18일 거행됐다.
김성인 집사가 인도한 이날 예배에서 교육담당 대니 한 목사는 ‘다윗의 승리의 비결’ 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2부는 학년별 학예발표회로 치른 후 수료식과 시상식에 들어갔다.
수료자는 총81명. 수상자는 유치반부터 5학년까지 최우수·우수·장려상 등 모두 28명이었다. 또 주기도문 외우는 학생이 모두 21명,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는 학생이 10명, 개근상이 56명, 모범상 13명, 향상상 12명 등 골고루 우수한 성적을 나타냈다.
오안순 권사 은퇴하다
8월 27일 오후에는 예닮원에서 본 교회 설립 때부터 지난 24년간 충성해온 오안순 권사의 은퇴식이 거행됐다.
창립멤버로서, 70년대에 온갖 굴곡 속을 오르내린 험난한 본 교회의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말없는 바위와 변함없는 오뚝이처럼 견디어 온 그녀.
본 사기(史記)를 출판하는 2002년까지 30년을 기도와 권면의 여종으로 일관해온 그녀. 집사 시절부터 본 교회 역사의 증인이면서 본 교회의 어머니 같은 오 권사이다. 수없이 많은 헌물을 손수 만들어 아낌없이, 서슴없이 바쳐온 그는 곧 자신이 봉헌제물의 화신(化身)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갖 궂은 일도 마다 않고 도맡아하면서 초창기 성가대 가운을 직접 짓느라 일일이 바늘땀을 넣던 그 손길. 그 손길과 기도와 헌신과 봉사를 하나님은 열납하시고 현세와 내세에 무한한 상급을 내려 퍼부으시리라…
더욱이나 오 권사는 본 교회 여전도회로부터 임마누엘회, 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교단 여전도회연합회 등 교회여성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까지 대내외 모든 직책을 골고루 맡아왔다. 어찌 놀랍지 않으랴! 끝까지 충성된 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요 선물이었다.
오…! 오 권사님, 주님 오실 날까지 늘 장수하소서. 기도와 헌신의 어머니로서 교회를 지켜가소서. 권사님, 파이팅!
예닮원 헌물 급증
성도들의 땀과 정성으로 예닮원이 점차 훤한 모습을 갖춰가자, 교우들이 앞다퉈 예물 드리기에 바빴다.
그 옛날 출애굽당시 회막에 온갖 보화를 예물로 바친 성도들처럼. 황금·유향·몰약 등 당대최고의 보물을 아기예수께 바쳐드린 동방의 박사들처럼. 고귀한 나드 향합을 아낌없이 깨어바쳐 주님의 죽음을 예비한 마리아처럼. 그리고…팰리세이드팍 본당 구입 시 바치던 뉴저지장로교회 성도들의 손길처럼 말이다.
의자와 밥솥, 어린이 놀이기구, 대문, 강단 장식, 교실 피아노 등 구석구석 뭔가 드려서 갖춰야할 것이 없는지 두루 살피며 성도들은 저마다 바치지 못해 안달일 정도였다. 하나님이 하늘의 복과 땅의 좋은 것으로 갚으심을 믿는 그들이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하).
한편 그랜드피아노 헌금은 10월까지 총 약 37,000불이 모금돼 스타인웨이 대형 피아노를 구입해 예닮원에 비치했다. 참가성도는 모두 314명이었다. 그밖에도 4 가정이 대형 업라잇 야마하 피아노를 4대 봉헌, 1·2 예배실과 성가연습실, 유치부 실 등에 놓았다. 11월 12일에는 그랜드 피아노 봉헌음악회가 열렸다.
이듬해는 구내 도서실을 위한 도서, 부엌과 식당을 위한 식기 등의 헌물도 들어왔다. 물론 안팎을 깨끗이, 깔끔하게, 아름답게 꾸미고 가꾸고 봉사도 끊임이 없었다.(사진 47)
사전 47. 한국적 이미지로 꾸며진 예닮원 중·고등부실
Youth Chapel at YDW, decorated in the style of traditional Korean architec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