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3 철병거를 가진 민족 / 삿 1:17-21

20220313 철병거를 가진 민족 / 삿 1:17-21

삿 1:17-21/철병거를 가진 민족

220313 사순절 2주
1. 낙타 코와 텐트
낙타와 아라비아사람이란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추운 밤 사막에서 텐트를 치고 자는 사람에게 그의 낙타가 텐트 안으로 코를 들이밀며 간청합니다. ‘주인님, 너무 추우니 머리만 좀 넣을 수 있게 해주세요.’ 너그러운 주인이 허락하자 잠시 후 낙타는 또 간청하기를 ‘어깨만 좀 넣을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합니다. 잠시 후엔 ‘엉덩이도 좀 넣어야겠습니다.’라고 하더니 마침내 ‘여긴 둘이 있기 너무 좁네요. 주인님은 좀 나가주세요.’라고 합니다. 결국 텐트를 빼앗긴 주인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밤을 지새야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텐트에 낙타 코처럼 스물스물 기어들어오다가 마침내 우리 삶을 차지해 버리고 때로 우리를 어둠 속으로 밀어내 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되는 식입니다. 죄의 코를 허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인생과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가 이 죄의 코를 무시했다가 고통을 겪고 심지어 멸망에 이르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죄의 코를 무시하는 이들에게 경고를 주십니다. 죄를 가볍게 대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죄를 이길 수 있는지를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우리는 듣습니다.
2. 철병거를 가진 이방인
사사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고 열두 지파가 땅을 모두 분배받은 후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은 큰 민족이 되었고 율법도 받았고 자기소유의 땅까지 분배받았습니다. 백성, 주권 그리고 영토까지 나라를 이룰 모든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신생국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이 탄생했습니다. 새생명의 탄생처럼, 새가정의 출발처럼 복되고 희망찬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사기는 막 탄생한 새 나라의 운명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줍니다. 이 그림자를 이스라엘은 끝내 걷어내지 못 하였고 마침내 남북왕국의 분열과 멸망이란 불행한 결과를 맞습니다. 그 그림자는 무엇입니까?
열두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이 지도와 같이 가나안 땅 대부분입니다. 서쪽으로는 지중해에 면한 해안평야부터 중부의 산지, 동쪽의 요단강 건너편까지, 북쪽으로는 헐몬산 아래부터 남쪽으로는 내게브광야까지 가나안 땅 대부분을 아우릅니다. 그야말로 이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서 약속대로 복을 누리며 사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 했습니다. 실제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거주한 지역은 분배받은 땅보다 한참 적었습니다. 다음 지도와 같이 지중해에 접한 해안평야지대 대부분을 포함 어림 3분의 1 이상의 땅을 그들은 차지하지 못 했습니다. 왜입니까? 오늘 본문 19절이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삿 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열두 지파 중 가장 강성했던 유다지파의 땅정복과정입니다. 산지주민은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했는데 서쪽 해안평야와 접한 골짜기의 주민들, 블레셋인을 쫓아내지 못 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청동기문명에 머물러있었던 것에 비해 그들은 철기문명에 이미 접어들었고 산지에서는 구경도 못 할 말이 끄는 철병거를 가졌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탱크입니다. 이기기 힘들었을 법도 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다른 평가를 하십니다. 2장 2절입니다.
(삿 2: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즉 그들을 쫓아내지 못 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철병거를 가져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인데 왜 하나님은 그 책임을 이스라엘에게 물으십니까? 19절을 다시 봅니다.
(삿 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3. 타협한 이스라엘
여호와께서는 유다와 함께 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여호와는 산지 주민과 싸울 때나 골짜기 아래 블레셋과 싸울 때나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관점에서는 산지 주민과 달리 골짜기 주민들에게는 철병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골짜기 주민을 물리칠 수 없는 이유로 철병거를 찾아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이것이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서 이미 철병거 6백 대를 몰고 추격해온 최강제국 애굽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거대한 성 여리고도 무너뜨리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보다 훨씬 큰 거인족 아낙자손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요단강도 가르게 하셨습니다. 그 어떤 장애물도 무너뜨리신 여호와에겐 철병거를 가진 블레셋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도 주님의 약속을 보십시오.
(삿 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믿음을 잃고 하나님 대신 철병거를 보았습니다. 부담스럽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물러섰던 것입니다. 그들이 물러섰던 데는 절박함이 사라진 것이 큰 몫을 했을 것입니다. 이전에 맞닦뜨린 상대는 넘어서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다 죽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절박하게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미 산지를 차지했습니다. 아쉽지만 산지에서만 살면 못 살 것도 없었습니다. 살 만 합니다. 절박함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목숨걸고 부르짖고 의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을 주저하고 멈추고 물러서게 만들었습니다.
절박함이 사라진 성도는 능력을 잃기 쉽상입니다. 절체절명의 고난의 때엔 목숨걸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붙듭니다. 그러나 먹고 살만하고 인정도 받고 별로 아쉬운 것이 없어지면 절박함을 잃습니다. 목숨을 걸 이유도 없고 기도 말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많습니다. 이 안전하고 풍요로운 나라의 삶은 우리에게서 절박함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면 산지의 삶의 만족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절박하게 하나님께 부르짖고 목숨걸고 골짜기 아래 사람들을 몰아내는 대신 그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등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산지의 삶에 만족하자 원주민들도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삿 1:27) 므낫세가 …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이뿐 아니라 일부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몰아내었습니다. 34절입니다.
(삿 1: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단지파는 오히려 분배받은 땅에서 원주민들에게 밀려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원주민들을 쫓아내지 않고 타협한 대가는 무엇입니까? 당장 약속의 땅의 복지를 온전히 누리지 못 하는 것을 물론 장차 그들로 인해 큰 재앙을 맞습니다.
(삿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이방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원주민들은 이스라엘과 섞여 살며 낙타가 텐트에 머리를 밀어넣듯 이스라엘의 삶에 조금씩 조금씩 스며듭니다. 욕망을 자극하는 그들의 우상숭배문화는 거룩하고 깨끗한 율법의 질서를 밀어냅니다. 아이들이 공부보다 게임에 더 쉽게 빠지고 우리가 기도보다 드라마에 더 쉽게 빠지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말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은 깊이 오염되고 타락합니다. 사사기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도대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고발 다큐멘타리나 다름없습니다. 그 타락상은 왕정기에도 계속 되다가 결국 남북왕국이 모두 멸망함으로써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에서 누릴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성취되지 못 하고 끝납니다.
4. 죄를 몰아낸 성도
이스라엘의 이 비극적 운명은 오늘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 삶에서도 비극은 지극히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아보이는 일, 낙타의 콧구멍같은 작은 일에서 시작합니다. 온라인예배를 드리다보니 예배생활에 소홀합니다. 기도를 빼먹기 시작합니다. 아내에게 숨기는 것이 생깁니다. 사람을 마음으로 무시합니다. 무심코 험담합니다. 작은 부정을 용납합니다. 그러나 낙타가 콧구멍만 들이미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듯 사소해보이는 죄는 결코 사소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소해도 죄는 점점 더 그 몸뚱아리를 키워 우리 인생의 텐트에 밀어넣다가 마침내 우리를 삶에서 밀어냅니다. 예배와 기도에 마음이 냉랭해져 버립니다. 아내를 배신합니다. 무시하다못해 멸시하고 경멸합니다. 험담을 계속 하다 거짓과 비방이 인격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습니다. 영이 병들고 성격이 병들고 가정이 병들고 교회와 사회와 국가가 병듭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코를 디밀고 있는 죄, 여러분의 텐트를 차지하고 여러분을 내어모는 악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하신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죄와 악은 그것이 익숙한 습관과 태도가 되기 전에 몰아내라는 것입니다.
(마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살전 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죄와의 치열한 싸움을 포기합니다. 철병거를 가진 민족처럼 몰아내기에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종종 죄와의 적당한 타협을 택합니다. 그런 이들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꾸짖습니다.
(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이 본문은 고대 그리스도의 권투시합을 배경으로 합니다. 글러브를 끼지 않고 했던 권투는 승자와 패자 모두 피투성이가 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피흘리지 않은 권투시합은 제대로 싸우지 않고 시늉만 했다는 뜻입니다.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않았다? 죄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면 죄는 작정하고 눌러 앉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오히려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죄는 옆구리의 가시와 올무가 되어 우리를 멸망으로 밀어넣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죄의 권세로 우리를 삼키려고 노립니다. 성도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모든 무기를 부여받았습니다. 철병거가 아니라 어떤 첨단 탱크도 물리칠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엡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엡 6: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엡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말씀의 검을 들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이는 어떤 철병거를 가진 죄이든 고난이든 장애물이든 물리치고 약속의 땅을 차지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복과 승리와 은혜와 평강과 기쁨이 충만한 땅 곳곳을 차지하고 누비며 다스리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복을 밭은 최초의 인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죄와 고난의 철병거에 밀려나 여전히 침체와 슬픔과 어둠의 산지에만 갇혀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일어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대장되신 그리스도의 뒤따라 달려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삶의 모든 죄와 악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삶과 가정과 일터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차지하고 누비고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