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4:17-25/바랄 수 없는 중의 믿음
160124 주일설교 로마서14
진정한 믿음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의 친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좋은 시절을 함께 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하는 것은 정말 그 친구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에 어려울 때 진짜 우정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혼식 주례자는 항상 묻기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요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항상 이 사람을 사랑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기쁘고 부요하고 건강할 때 사랑하는 것은 참 사랑이 없이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슬프고 가난하고 아플 때에도 사랑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동의합니다.
우정과 사랑에 적용되는 이 원리를 믿음에 적용해보면 참 믿음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좋은 시절에 실현가능한 약속을 믿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집안도 좋고 실력도 있고 이미 승승장구하는 사람에게 결국 성공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믿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반면 고아에 장애를 가지고 실력도 없고 빚더미 위에 앉아있고 눈꼽만큼의 운도 없이 살아온 사람에게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믿으라는 것은 보통 믿음으로는 안 되는 일이지요. 그러므로 어려운 시절에 실현가능성이 낮은 약속을 믿는 것일수록 더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도 이와 유사합니다. 도저히 바랄 수 없는 것에 대한 약속을 하나님은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참 믿음이라고 인정하십니다. 오늘은 그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의 믿음
오늘 본문은 로마서에서 구원의 교리를 설명하는 전반부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이 단락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고 동시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본질에 대해 설명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그것과 너무나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인 줄 알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서야 그것을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비참한 일이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참된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랄 수 없는 중에 가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후손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바랄 수 없는 소망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17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 약속은 창 17:5에 등장합니다. 이 약속을 믿었다는 것의 두 가지 의미가 이어서 소개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먼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브라함 자신과 아내 사라가 생물학적으로는 자녀를 가질 수 없는, 번식의 능력을 잃은 죽은 자와 같았는데 그런 자신들을 생명을 잉태하는 산 자와 같이 만들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19절 이하가 그것을 설명합니다.
(롬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자신이나 아내를 보면 그 약속을 바랄 수 없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런 죽은 자 같은 이들을 산 자 같이 만드셔셔 생명을 잉태하게 하신다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약속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도 적용됩니다. 히 11:19은 본문 17절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히 11:19) 그(아브라함)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해석은 당연히 창 22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아니, 이삭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인데 그를 죽이면 자손을 어떻게 만듭니까? 하나님의 요구는 당신의 약속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었다는 말이지요. 이삭이 죽으면 그를 살리시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고야 말 것이라는 전적인 신뢰를 하나님께 가졌다는 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23절 이하를 보십시오.
(롬 4: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또한 살리셨습니다. 죄로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의를 행할 수 없던 우리를 살리시고 생명을 잉태할 수 없던 우리를 살리셔서 의를 행하며 전도를 통해 생명을 잉태하고 세상을 살리는 천국의 군대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럼 못 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영혼이 살아났고 의를 행할 능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지요.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며 살아야지요. 우리는 늘 못 한다고 합니다. 저는 부족해서, 믿음이 약해서, 죄인이라서… 핑계입니다.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부활하신 주님의 이 약속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은 또한 모든 절망에서 우리를 건지셨다는 말입니다.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에서 살리신 주님이 어떤 절망에서든 우리를 못 건지시겠습니까? 어려운 경제로 인한 절망, 실직으로 인한 절망, 건강으로 인한 절망 혹은 신분으로 인한 절망, 끊지 못 하는 죄로 인한 절망… 어떤 상황에서도 이제 끝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불신입니다. 그 어떤 절망 중에 있더라도 살리시고 건져내실 하나님으로 인해 소망을 가지시길 축복합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실 것을 믿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다음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표현의 의미를 바울 사도는 그의 다른 서신인 고린도전서 1:28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여기서 없는 것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세상의 천한 것, 멸시 받는 것 그것은 곧 부와 권세와 명예가 없는 이들입니다. 즉 영광과 존귀가 없는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을 마치 영광과 존귀가 있는 이들처럼 불러서 높히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 가치의 역전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런 사람들이 부러움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영광이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멸시받고 천대받은 이들은 서럽고 억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수치를 겪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가치에 의해 평가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치 역전에 대해 예수님이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의 첫 일성 팔복의 가르침입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설교에서 예수님은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런 이들이 없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아무 영광과 존귀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면 살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점점 더 없는 자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손해를 보고 오해를 받고 무시를 당하고 이용 당하고 심지어 멸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하늘의 상이 크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 사실을 믿는 자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가 다릅니다. 손해를 보고도 감사하고 오해를 받고도 즐거워하고 무시를 당하고도 기쁘고 핍박을 받고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의 바로 다음 단락에서 이렇게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마치 있는 자처럼 즐거워하고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데 영광과 존귀를 누리는 자처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믿음의 진위를 드러내주는 척도입니다.
4영리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원과 죄사함과 영생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 이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무 것도 없이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기뻐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이가 그만큼 적은 것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많으면 더 기뻐하고 적으면 슬퍼합니다. 아프면 슬퍼하고 나으면 기뻐합니다. 취업하면 기뻐하고 실직하면 괴로워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 우리도 똑같이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믿음이 되겠습니까? 고난과 핍박 중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참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