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2:21-34/돌이켜 굳게 하라
160131 주일설교
악의 일상성
한국의 정치인 안철수 의원의 멘토로 유명해진 법륜 스님이 겪은 이런 이야기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스님은 군사독재의 그림자가 뒤덮었던 1980년대 소위 반정부 인사로 체포되어 밀실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무서운 욕설과 몽둥이질을 퍼붓던 기관원들이 잠시 담배를 피고 쉬면서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는 것을 고문실에 쓰러져 듣고 있으려니, 이번에 딸이 대학입시를 잘 치를지 걱정이라느니 집주인이 전세값을 올려달라는데 걱정이라느니 하는 너무나 평범한 이웃들의 고민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고문자들을 찬찬히 살펴 보니 동네에서 만나면 손 흔들고 웃고 지나갈 지극히 평범한 이웃 아저씨들의 모습이더라는 것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여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2차 대전 중 히틀러의 심복으로 수백 만의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에 관해 정리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고 받은 충격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너무나 흉악한 범죄자의 모습이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범한 체구에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 자신은 그저 명령받은 대로 할 뿐이었다고 대답하는 이의 모습에서 그저 무기력하고 시키는대로 일 잘 하는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들이 보여주는 바는 정말 무서운 악이란 저 어두운 밤거리의 뒷골목에서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마저 발견되는 것이며, 그 일상 속의 평범함으로 위장된 악이야말로 더욱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테러보다 식당과 마켓 등 일상속에서 벌어지는 테러가 더 큰 공포를 주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제자공동체 속의 악
오늘 본문에는 심각한 두 종류의 악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배신과 다툼입니다. 21절과 24절을 보십시오.
(눅 22: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눅 22: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유다의 배신과 제자들의 권력다툼, 이 두 가지 악이 벌어지는 곳이 어디입니까? 앞으로 거슬러가 14-15절을 보십시오.
(눅 22: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눅 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게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다름이 아닌 최후의 만찬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가운데 모시고 거룩한 사도로 부름받은 제자공동체의 식탁교제 즉 오늘날 성만찬의 자리에서 벌어지는 악입니다. 가장 거룩한 자리에서조차 가장 심각한 악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본문은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우리는 교회를 죄와 악의 무균실 정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가장 뜨거운 예배를 드리는 중에도 추악한 복수를 꿈꿀 수 있습니다. 가장 경건한 언어로 기도를 하는 중에도 끝없는 탐욕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가장 겸손히 섬기는 중에도 가장 큰 교만과 허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거짓의 사람들’의 저자 스카팩은 그 책에서 성모 마리아조차도 포르노의 소재가 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이용된다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의 부부생활, 가정생활, 경제생활 그리고 직장생활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일상 그 어디서든 악의 위협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곳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사탄은 모든 시간, 모든 장소 그리고 모든 기회를 틈타 성도들의 약점을 노리고 죄와 악으로 넘어뜨리려 합니다.
시험받는 제자들의 믿음
이런 상황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절입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두 번이나 시몬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는 사탄이 시도하는 시험과 고난에 직면하게 될 베드로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밀 까부르는 것은 농부가 밀을 그 껍질인 겨와 다른 불순물과 분리하려고 농기구인 채에 담고 좌우로 격하게 흔들거나 혹은 넙적한 바구니에 담고 바람 부는 곳에서 공중으로 던졌다가 받았다가 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시몬을 시험에 빠뜨려서 밀 까부르듯 심하게 뒤흔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가룟 유다에게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자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요구했다는 것은 욥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욥기 1장에서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시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사탄의 주장은 욥의 믿음은 가짜이기에 그를 시험에 빠뜨리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베드로의 믿음 역시 사탄이 주장하듯 시험에 직면하면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좇아가다가 대제사장의 마당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사탄의 주장이 맞았던 것입니다.
사탄이 원하고 믿는 바는 이것입니다. 사탄은 죄인인 인간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을 미워할 뿐 아니라 믿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사랑하고 그를 믿으셨던 것과 정반대입니다. 사탄은 욥과 베드로를 뒤흔들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편을 정욕으로 뒤흔듭니다. 아내를 이기심으로 뒤흔듭니다. 비지니스맨을 탐욕으로 뒤흔듭니다. 일꾼들을 게으름으로 뒤흔듭니다. 성도들을 분노와 미움으로 뒤흔듭니다. 교회를 다툼으로 뒤흔듭니다. 어디 멀리 시험장으로 데리고 가서 뒤흔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가장 거룩한 교회 안에서, 가장 안전해야할 가정에서 뒤흔듭니다. 흔들리는 성도는 죄로 넘어지고 악에 물들어 갑니다.
성도들을 지키시는 주님의 기도
그러나 사탄이 제대로 알지 못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를 지키시는 전능한 주님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님은 성도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그런 것이라면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입니까? 이에 대한 힌트를 요한복음 15: 15의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에게 줍니다.
(요 15: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베드로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그가 연약하여 사탄의 시험을 이기지 못 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를 짓더라도 악에는 빠지지 않기를 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와 악이 서로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죄란 하나님을 떠난 상태의 모든 행위라면 악이란 돌이킬 의지가 없이 그 죄에 머무르고자 하는 이의 상태와 그 상태가 만들어내는 모든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악이란 죄를 사랑하고 죄에 중독되어 죄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한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연약하여 시험을 이기지 못 하고 죄를 짓게 되더라도 가룟 유다처럼 그 상태에 머무르지 말고 돌이키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32절을 다시 보십시오.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 기도의 능력으로 베드로는 돌이켜서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 초대교회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이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벧전 5:8을 보십시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시험하여 죄의 함정에 빠드리고 더 나아가 악의 늪에까지 빠뜨리려는 사탄의 계략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위협에 대항하여 성도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길은 근신하고 깨어 기도하는 것뿐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님과 베드로 사도의 기도를 본받아 근신하고 깨어서 기도함으로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일상속에서 말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는 상사와 동료와 직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구역의 일꾼들, 부서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목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직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누가 이기게 될까요? 우리는 자지만 사탄은 잠들지 않고 우리를 노립니다. 사탄은 육체가 없으니 잠이 필요 없습니다. 이 상황을 보면 우리에겐 승산이 없습니다. 대신 우리에겐 우리를 위해 탄식하기까지 하시며 밤낮없이 기도하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사탄도 영적 존재이지만 여전히 그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영원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성령님의 중보와 능력은 사탄의 모든 공격을 거뜬히 물리치게 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성령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승리합니다. 결국 승산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최후 승리는 성도들의 것입니다.
혹 죄로 넘어졌더라도 거기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다시 영적 잠에서 깨어나 근신하고 기도하며 돌이켜 형제를 굳게 하는 주님의 일꾼으로 다시 쓰임받으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