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06 죄사함의 축복 / 행13:38~41

20160306 죄사함의 축복 / 행13:38~41

행 13:38-41/죄 사함의 축복

160305 주일설교

 

믿을 때의 복

사순절 기간 중 주일설교는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의 설교본문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원래 13절부터 읽어야 하는데 시간관계상 결론 부분인 38절부터 읽었습니다. 읽지 못 한 부분은 내일 새벽기도 시간에 자료와 함께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한 설교의 결론부분입니다.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의 이방선교사로 파송된 바나바와 바울 일행은 구브로섬과 버가를 거쳐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이릅니다. 일행은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설교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 설교가 16-41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설교의 결론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결론이 38-39절에 나옵니다.

(행 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행 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보내주시리라고 예언하신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며 그 예수님을 통해 모든 이들이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을 때에 받게 되는 진짜 복이 무엇인지 확실해집니다. 그것은 죄사함과 의로움입니다.

 

교회의 무지 

아주 단순하고도 명확한 이 결론을 뜻밖의 많은 교회가 깨닫지도 가르치지도 못 해 왔습니다. 실명을 거론해 죄송합니다만, 지난 세기 한국의 순복음 교회는 요삼 1:2을 인용하며 소위 3박자 복음이란 것을 가르쳤습니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구절에 의해 영혼구원, 만사형통, 육신건강이 예수 믿을 때에 받게 되는 복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고 순복음교회의 폭발적 성장을 지켜본 많은 타교단 교회들도 노골적으로 혹은 은근히 이와 유사한 복음을 교회에서 가르쳤습니다. 3박자가 균형잡힌 복음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현실의 가난과 질병 앞에서 누구나 방점은 만사형통과 육신건강에 찍히기 마련입니다. 영혼구원도 믿지만 언제나 우선순위에서는 만사형통과 육신건강에 뒤로 밀리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믿음으로 빌 4:13이 인용되었습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요한삼서의 구절처럼 빌립보서의 이 구절도 본래의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실상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해석되어 만사형통과 육신건강을 이루는 만능열쇠처럼 선포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의 가르침은 현세 기복주의라는 이름으로 교회 안팎에서 맹비난을 받는 싸구려복음, 유사복음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이 삼박자 복음의 원조는 미국의 노만빈센트필박사의 소위 적극적사고방식 시리즈입니다. 이 제목으로 비슷비슷한 책을 쏟아낸 필박사의 책을 읽고 회심을 경험했다는, 지금은 파산해버린 로버트 슐러 목사의, 으리으리한 궁전같던 수정교회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적극적 사고방식을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바꾸어 엄청난 성공을 거둔 레이크우드처치의 조엘 오시틴 목사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복음의 결론을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학을 신학자들은 Theology of self-esteem:자기존중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이 가르침에서 구원은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 안의 가능성을 발견하여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고 죄란 그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 한 채 썩혀 두는 것입니다. 이는 죄사함을 전하는 복음의 자기부인과 정 반대되는 메시지로 기독교의 어떤 가르침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 하는 가르침입니다. 유사복음도 아닌 반(反)복음(Counter Gospel)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의 성공-여기서의 성공이란 교인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메가처치가 되는 것입니다-을 보고 그런 메시지를 흉내내는 수많은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실제

이런 예들은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복음의 본래적 메시지를 외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일 뿐입니다. 교회는 진리 즉 죄사함과 의롭게 하심을 주시고자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로마서는 선언하기를 모든 사람은 절망적인 죄인으로 영원히 멸망받는 것 외에 어떤 선택지도 없는 죄의 수렁에 빠져서 악을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볼 때 가장 선하고 도덕적이라는 사람조차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인 죄의 본성을 품고 태어나고 죄의 생각 속에서 살아가며 실제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이 사실은 그가 종종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품고 실제로 선행을 일부 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눈에 어떤 이들은 선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는 검은 바탕에 회색 종이를 올린 것과 같은 착시효과입니다. 회색종이는 검은 바탕때문에 마치 흰종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 흰 종이 위에 올려놓으면 그 회색이 얼마나 어두운 색인지가 금방 드러납니다. 우리 눈에 어떤 이가 선하게 보인다는 것은 그 판단의 근거인 우리의 자신의 도덕기준이 얼마나 타락해있는가를 증명해줄 뿐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을 지극히 가끔 하는 삶조차도 지극히 훌륭하게 보인다면 그것을 보는 우리들이 얼마나 타락해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런 훌륭한 인간조차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가장 악한 인간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만큼 이미 더러워져있는 죄인일 뿐입니다. 이런 착시현상은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 깨닫지 못 하는 우리의 무지 때문입니다.

이런 죄로 인해 멸망할 죄인들에게 주시는 죄사함과 의롭게 하심을 어떻게 만사형통과 육신건강 따위와 비교하며 그것으로 대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그 가치를 알지 못 하는 것은 우리의 영의 눈이 감겨서 뭐가 배설물인지 된장인지조차 분간하지 못 하는 영적 시각장애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나면 주저함없이 바울처럼 외치게 됩니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립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깨닫고 그 복을 구하고 누리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을 멸시하지 말라

이런 깨달음을 얻지 못 하고 영적 시각장애인의 상태에 계속 머무르면 교회 안에 있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멸망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두 번째 설교의 결론입니다. 본문 40-41절을 보십시오.

(행 13: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행 13: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여기서 바울의 비난을 받는 ‘너희는’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복음에 대한 적대행위는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에 다름아닙니다. 그들을 놀라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받게 될 심판은 사람들이 듣고 도무지 믿을 수 없을만큼 무서운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떤 이들에게 일어날 것이란 말입니까? 오늘 읽지는 않았으나 전문맥의 27절을 보십시오.

(행 13: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그들은 그들이 안식일마다 읽는 것도 아니요, 달달 외우고 있는 선지자들의 말을 깨닫지 못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복음을 적대하고 교회를 분란케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닫지 못 하기 때문입니까? 자신들이 죄인임을 모르고 죄사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의로움의 가치를 모르고 세상 영광의 헛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와 미움과 계략과 욕심으로 예수님을 죽이고 복음을 적대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그들의 모든 헛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시지만 그런 악한 일을 한 이들은 영원한 멸망과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줄줄 암송하고 있다고 해서 결코 자만할 것이 아닌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가장 하나님께 열심을 낸다는 이들이 가장 하나님을 적대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복음을 열심히 전한다는 이들이 가장 복음을 적대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교회를 사랑한다고 큰소리치는 이들조차 가장 교회를 흔들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철저한 죄인인 줄 모르고 얼마나 그리스도의 죄사함이 필요한지 모르고 얼마나 그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귀한 보배피를 흘리신 줄 제대로 알지 못 한다면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나아가 날마다 씻음을 받는 겸손한 믿음을 잃지 않으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