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13 마음문을 여는 지진 / 행16:11~40

20160313 마음문을 여는 지진 / 행16:11~40

         행 16:11-40/마음 문을 여는 지진

160313 사순절 주일설교

  

하나님의 섭리 

지난 여름 과테말라 선교팀이 보고한 내용입니다. 선교팀이 우리 교회 히스패닉 부서 형제들의 고향방문 사역을 기획했습니다. 형제들의 인사를 비디오로 찍고 편지와 선물을 들고 그들의 고향에 가서 전해주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입니다. 치말테망고에서도 차를 타고 7시간을 시골로 들어가야 하는 라오야 지방으로 가는데 근처의 빠짜홉이란 동네에 도착했을 때 비가 와서 큰 버스가 좁고 미끄러운 산길을 올라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팀을 둘로 나누어 한 팀은 작은 차를 타고 라오야로 올라가고 다른 팀은 그 빠짜홉에 남아서 전도를 하다가 해질 무렵 남은 팀이 먼저 치말테망고로 돌아왔습니다. 산에 올라갔던 팀은 밤이 늦어서야 사역을 마치고 빠짜홉으로 돌아와서 차를 갈아타고 출발하려는데 한 현지인 자매가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전도팀의 소문을 들었다며 자기 마을에 죽어가는 이웃집 할머니가 있으니 와서 좀 기도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팀원들은 밤도 늦고 비도 오는데 길도 위험하고 더구나 이 여자의 말이 진짜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데 나쁜 사람들에게 속는 것이면 큰 일이라며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선교팀이 어떻게 외면하고 갈 수 있냐는 생각에 차로 그녀의 마을로 함께 갔습니다. 그녀가 가리키는 집에 들어갔더니 임종 직전의 한 할머니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데 몸이 불덩어리였습니다. 선교팀이 그녀를 붙들고 한 10분을 간절히 기도했더니 열이 떨어지며 숨도 진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통역을 해가며 복음을 전하려니 갑자기 그녀의 아들이 들어와서 뭘하냐며 훼방을 놓는 것입니다. 결국 그녀에게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 한 채 쫓겨나다시피 그 집을 나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새벽기도 시간에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 한 아쉬움으로 그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우리교회가 과테말라에 파송한 미사엘 선교사님이 뜻밖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선교팀의 기도와 전도를 집 밖에서 보고 있던 그 부탁하러 온 자매가 미사엘 선교사님께 묻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저 사람들이 믿는게 무엇이냐고, 그녀는 미사엘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듣더니 자기도 믿어도 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밤에 그 집 앞에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선교팀은 주님이 자신들을 그 밤에 위험한 산길을 다시 올라가 그 할머니의 집을 방문케 하신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할머니 가족이 아니라 그들을 데리러 온 그 자매와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 한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예기치않은 고난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에서 일어난 일을 다룹니다. 바울은 의아했을 것입니다. 성령님의 막으심으로 원래 가려던 아시아주와 비두니아주를 포기하고 빌립보로 건너온 결과 과연 준비된 마음밭을 가진 루디아라는 여제자를 얻었을 때만해도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되어 간다는 확신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기치않게 귀신들린 여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그 귀신을 쫓아냈더니 이번에는 그 주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난데없이 많은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억울하고 답답할 뿐 아니라 주님이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꼬여가는 것을 내버려두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막 회심한 루디아와 그 가족들의 믿음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말씀으로 양육해야 하고 강가에서 만난 다른 가족들도 조금만 더 전하면 믿음을 가지게 할 수 있을터인데 이 바쁘고 귀한 때에 몸은 매질로 만신창이가 되고 감옥에 갇혀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니요! 아니, 이럴거면 도대체 왜 아시아로도 못가게 하고 비두니아길로 막으시고 굳이 이 유럽으로 우릴 끌고 오셨단 말입니까?

그러나 주님의 계획이 드러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라는 것을 깨달은 바울은 실라와 함께 신실하신 하나님의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그 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깨어지고 발의 족쇄가 풀립니다. 그리고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자살을 하려던 간수가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말리는 바울과 실라를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당시 간수는 죄수를 놓치면 그 벌을 대신 받아야 했기에 어차피 그는 사형을 당할 것이었습니다,) 그는 죄수였던 바울과 실라 앞에 오히려 엎드려 도움을 청하고 그와 그 가족은 세례를 받고 구원받은 성도가 됩니다.

 

고난의 이유

이제야 바울과 실라가 당한 고난과 이해할 수 없이 일이 꼬이기 시작한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것은 바로 이 간수와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 일행을 일부러 이 곳으로 인도하신 이유에는 루디아 가족의 구원뿐 아니라 이 간수 가족의 구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루디아는 강가에서 바울 일행이 전한 복음을 듣고 즉시로 믿음을 가질 만큼 좋은 마음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간수는 오랫동안 죄수를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아왔습니다. 온갖 악한 인간을 다 보고 그들을 다루느라 그 자신도 거칠고 폭력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멸시와 고집과 오만이 몸에 배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들의 마음은 견고한 방어진지와 같습니다. 어지간한 전도에는 결코 열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러 강가에 오지도 않지만 우연히 바울의 메시지를 들었다해도 쉽게 마음을 돌릴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이들을 회심시키는데는 특별한 수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충격요법입니다.

우선 잡혀온 바울과 실라가 귀신을 쫓아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이들에게 묘한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심한 매질을 당하고 옥에 갇히는 과정에도 다른 죄수들처럼 욕설과 저주 대신 찬송과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보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 한 경외감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는가! 저들이 믿는 신은 어떤 분이기에 저토록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옥문이 깨어졌는데도 도망가지는커녕 오히려 절망감에 자살하려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으며 그의 마음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고야 말았습니다. 자신이 믿어온 모든 것이 헛것임을 깨닫고 이들이 부르는 신의 능력과 위엄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보고 그 앞에 엎드러집니다. 한밤중에 일어난 지진이 깨뜨린 것은 옥문만이 아니라 도무지 깨닫지도 회개하지도 못 하는 완고한 영혼의 견고한 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이 멀리 빌립보까지 불려와야 했던 이유는 그리고 예기치않게 일이 꼬이고 억울한 고난을 겪어야 했던 이유는 이 완고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에 얼마나 많은 억울한 고난과 예기치않은 어려움이 찾아오는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헤아리기 힘든 하나님의 지혜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신뢰하는 이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고난의 가치

과연 그런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인간의 구원을 위해 바울이 그런 모욕과 매질과 갇힘을 당할 가치가 있는가 묻고 싶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과 어려움이 원수 같은 한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런 인간을 위해 내가 그런 고난을 감수할 가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의 답은, 만약 나같은 절망적인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일이 그럴 가치가 있었다면 그 원수 같은 인간을 위한 우리의 고난도 결코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고난과 어려움이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여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도우라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인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무엇을 도우라는 것일까요? 이 간수와 같이 완고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를 믿고 고난과 모욕을 믿음과 인내로 이겨내는 영적 싸움을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전쟁을 도우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이들을 찾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에 바울을 바다 건너 먼 땅에서 이 곳까지 불러온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이 태평양 건넌 미국땅 그것도 가장 동쪽 뉴저지까지 부르신 이유도 그와같은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중에 이 거룩한 영적 싸움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군대를 도울 자는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런 용사가 될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