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0 고난 당하신 어린 양 / 사53

20160320 고난 당하신 어린 양 / 사53

사 53장/고난 당하신 어린 양

160320 주일설교

 고난받는 종의 노래

오늘은 교회력으로 지키는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환영한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종려주일을 지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고 다음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킵니다. 종려주일부터 부활주일에 이르는 이 일 주일은 성탄절과 더불어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본문 중 하나입니다. 이사야는 오늘날로부터 2,700여년 전, 예수님 탄생으로부터도 700여년 전 선지자이지만 메시야 예수님에 대해 명확하고 부인할 수 없는 가르침을 예언합니다. 이 장은 거의 모든 절이 신약에 인용되면서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도와줍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이 종려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진리를 외면하는 세대 

먼저 이사야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 하는 세대에 대한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1절입니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 탄식을 700년 후 사도 바울이 인용합니다.

(롬 10: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이사야의 때에도 바울의 때에도 그리고 이 시대에도 진리는 여전히 인기있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의와 사랑과 진리 대신 돈과 권력과 쾌락을 구합니다. 진리를 듣고 싶어하는 이들은 없고 의를 위해 살려는 이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리를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고난받는 종 

진리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메시지가 아닌 것처럼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습 역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난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난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 계십니까? 고난 당하는 이들 곁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 계십니까? 고난 당하는 이를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는 분은 혹 계십니까? 그런데 구원자로 오시는 분이 그런 고난을 당하는 이의 모습으로 올 것입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운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연한 순처럼 연약하고 물 없는 땅에서 자라는 뿌리처럼 말라 비틀어진 모습입니다. 당연히 송중기처럼 아름답게 생기지도 않았고 프로농구선수처럼 우람한 몸을 가지지도 못 했고 매력적인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데가 없는 모습으로 우리들 가운에 오셨습니다. 더구나 그는 어린 자식을 죽인 파렴치범들이나 당할 법한 멸시를 받고 모든 이들로부터 등을 돌려 버림을 받고 병들고 부러지고 찢기는 고통을 많이 당한 몸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우리 중 누구 하나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당신이 당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막 9: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 인자에 대해 (이사야가)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당신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당신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이사야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해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구절은 십자가 형을 당하실 때의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막 14:61) (예수께서)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주님의 침묵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돌이키지 않는 완고한 악을 마주하여서는 어떤 선한 말도 소용이 없음을 아셨고 더구나 같은 악한 말로 대응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침묵은 그 대응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벧전 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되

우리도 악을 마주할 때 선과 믿음으로 이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의 묘사가 계속 이어집니다.

(사 53: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행 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당시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고난을 주님은 왜 당하신 것인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4-6절을 보십시오.

 

고난의 이유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이 당하신 심문과 모욕과 채찍질과 십자가와 슬픔은 모두 우리가 당하여야 하는 것들인데 우리는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밝힙니다.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어서 5절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밝힙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가 우리의 죄값으로 저주받고 멸망당하지 않고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주님이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시고 찔리고 채찍질 당하시고 나무에 달리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모른 채 제 맘대로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아왔습니다. 이 사실은 6절이 고발합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베드로 사도는 선언합니다.

(벧전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성도는 양과 같이 제 멋대로 살아가던 삶을 청산하고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께로 돌아온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양과 같이 방황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목자되신 주님께 돌아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