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1-12/부활을 알리라
160327 부활주일
근심과 두려움만 얻는 인생
오늘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복된 날입니다.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위에 흘러넘치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의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발견한 여제자들에 관한 보고입니다. 이 보고는 우리 인생의 많은 수고가 생명을 위한 수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먼저 그녀들은 누구입니까? 10절이 알려줍니다.
(눅 24: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그녀들은 대단히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여제자들이었습니다. 23장을 보면 그녀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와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남자 제자들이 모두 도망치는 중에도 끝까지 십자가 아래를 지켰습니다. 주님이 무덤에 묻히셨을 때는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다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즉시 다음날 새벽에 그것을 들고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어떤 남자 제자들이 이런 성실과 충성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까? 그러나 그런 성실과 충성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얻은 것은 근심과 두려움 그리고 책망뿐이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눅 24: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눅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녀들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성실하게 일합니다. 충성스럽게 가족을 돌봅니다. 교회를 사랑해서 열심히 봉사합니다. 돈을 벌고 성공도 거두고 보람도 찾는 것 같은데 왜 우리 영혼의 어카운트에는 평화와 기쁨 대신 근심과 두려움의 잔고만 가득할까요? 직장을 잃지는 않을까, 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자녀들이 실패하지는 않을까, 무시당하고 소외당하지는 않을까? 왜 우리는 원하는 것 대신 원치 않는 것만을 손에 쥐게 될까요?
죽음을 위해 일하는 이들
그 답은 이 천사들의 대답 속에 이미 드러나 있습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눅 24:5)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 여제자들은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죽어 누워계신 주님을 찾아다녔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그녀들은 생명을 위해 일하지 않고 죽음을 위해 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활의 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여제자들은 부활의 비전을 갖지 못 했습니다. 본문 6-7절이 그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눅 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눅 24: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기억하라! 즉 그녀들은 잊어버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녀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의 예고를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 했습니다. 그녀들에게는 지금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무덤에 묻혀있다는 현실만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시리라는 사실은 도무지 그녀들의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부활도 현실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비전을 갖지 못 한 인생은 결국 이 생이 삶의 전부이고 아무리 수고하고 아무리 충성해도 결국 마지막은 소멸과 망각으로 끝나버리는 짧은 연극무대 위에 선 것일 뿐입니다. 그런 인생은 곧 죽음을 위해 사는 인생인 것이지요.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이 바로 죽음을 위한 삶입니다. 돈 벌기 위해 수고하고 회사를 위해 충성하고 가족들 돌보느라 밤잠을 못 자지만 결국 그 모든 수고가 언제 자신을 찾아올 지 모르는 죽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삶에 다름 아닙니다. 그 삶이 죽음에 봉사하는 삶이라는 증거가 바로 근심과 두려움, 죄책감과 허무입니다.
지난 주와 이번 주에 저는 여러 번의 임종예배와 장례식과 추모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제가 이런 예식을 광고하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그저 무심코 흘려듣고 맙니다.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 아니면 그 누군가의 장례식도 우리 삶에 작은 파도도 일으키지 못 합니다. 가깝던 이들이나 유명한 이들의 죽음은 분명 파도를 일으키지만 그 역시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느듯 망각의 호수의 고요 속으로 사라집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아침이슬처럼 사라져버리는 이 순간을 위한 것이라면 그 모든 수고가 무슨 의미와 보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요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즉 죽음을 위해 일하지 말고 생명을 위해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위해 일하는 인생이라야 근심과 두려움, 죄책감과 허무 대신 기쁨과 확신, 목적과 의미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우리는 생명을 위해 일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될까요?
기억하라
부활하신 주님의 무덤에 나타난 두 천사가 그 답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눅 24:6)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눅 24: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천사들은 기억하라고 명령했고 그녀들은 기억해냈습니다. 무엇을요?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의 씨앗입니다. 말씀이 우리 영혼의 밭에 뿌려졌을 때 생명의 싹이 자라나고 그 싹은 마침내 영생의 열매로 열립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위해 일하는 복된 인생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먼저 그 말씀을 배웠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말씀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무슨 수로 기억할 수 있을까요? 뿌리지도 않은 씨앗이 어떻게 자랄 수 있을까요? 또한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정보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선언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선포이고 다가오는 세상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 말씀은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수학은 이해해야 하고 영어는 암기해야 하고 예술은 느껴야 하듯이 말씀은 믿어야 합니다. 믿은 말씀은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이란 마음밭에 뿌린 말씀의 씨앗에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계속 기억하면 말씀의 씨앗은 싹을 틔우고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생명을 위해 사는 복을 잘 누리지 못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잘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 듣고도 믿지 못 합니다. 믿고도 잊어버립니다.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지 못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잘 기억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전파하라
생명을 위하여 일하는 복된 인생이 되는 두 번째 비밀은 전파하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눅 24: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그녀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집으로 돌아가버리지 않았습니다. 즉시로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들이 기억한 말씀과 그 말씀대로 일어난 주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기억한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내 마음밭에서 자라나는 생명나무의 씨앗을 다른 이들의 마음에도 심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을 위해 일하지 않고 생명을 위해 일하는 가장 성공적인 방법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번식하고자 하는 본능이 그 DNA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창세기는 이것을 주님의 음성으로 선언하는데,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 정말 생명나무가 자라난다면 그 씨앗을 퍼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한 말씀을 전파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도 선교사도 아니고 그런 은사도 없습니다. 전도할 자신도 없어요. 말도 잘 못 합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밖에 나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은사와 열정이 있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지않더라도 하등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여제자들은 자신들이 잘 아는 다른 제자들에게 기억한 것을 알렸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기억한 것을 알리면 됩니다. 구역의 일꾼이 되어서 구역식구들에게 알리십시오. 일대일 양육자가 되어 동반자에게 알리십시오. 커피브레이크 리더가 되어 참여자들에게 알리십시오. 교회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알리십시오. 단기선교에 참여하여 섬김을 통해 알리십시오. 그럴 자신도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집에서 아내와 남편, 아이들에게 알리십시오.
사순절을 보내면 저희 집 아이들이 질문이 많아졌습니다. 진리가 주일예배를 드리고 와서는 묻는 겁니다. ‘엄마, 지져스가 왜 십자가에 달릴 때 헤머로 했어? 덕테이프로 하면 되잖아? 안 아프잖아?’ 엄마 왈, ‘그 때는 덕테잎이 비쌌을거야.’ 하루는 평화가 물었습니다. ‘아빠, 삼손이 죽었는데 삼손 이야기를 어떻게 썼어?’ ‘아, 삼손 이야기는 자신이 쓴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쓴 거야.’ ‘그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했는데 삼손이 한 기도는 누가 듣고 쓴 거야?’ ‘아, 그건…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가서 공부나 해….’
가족들에게도 알릴 자신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때는 나 자신에게 알려주면 됩니다. 내가 배우고 깨닫고 믿고 확신하는 바를 계속 기억하여서 자기 자신에게 계속 알려주십시오. 올 해 우리는 성경통독, 티성경공부, 일대일, 커피브레이크 등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부지런히 자신에게 알려주세요. 그러다보면 머지않아 성령께서 다른 이에게도 전할 수 있는 은사와 기회를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놀랍도록 성경에 무관심한 기독교인들로 가득찬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도 전하지도 않는 기독교인들로 가득찬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교인들이 생명이 아닌 죽음을 위해 일하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 합니다. 그 결과로 근심과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면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어보십시오.
(요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