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4/놀라운 소망과 기쁨
160410 주일설교
부자 목사
최근 미국의 인터넷 잡지 ‘바이럴월드닷넷’이 흥미로운 자료를 발표했는데요, 바로 미국 목회자 중 자산가 상위 15명 순위였습니다. 그 중 1위는 한인들에게는 좀 낯설지만, 번영신학을 전파하는 유명 TV목회자인 케네스 코플랜드 목사입니다. 그의 재산은 얼마나 될까요? 약 7억 6천만 달러, 한화로 약 9천억이 넘습니다. 1조원이 조금 안 됩니다. 수백만불의 저택과 개인비행장(개인비행기가 아니라)을 소유하고 있는 그는 그러나 탈세와 친인척의 비리로 구설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2위는 아이티 대지진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등 미국판 막말목사로 유명한 팻 로버트슨 목사이고, 3위는 신유사역으로 유명한 베니 힌 목사, 4위는 레이크우드처치의 조엘 오스틴 목사입니다. 그의 재산은 약 4천 만불 한화로 5백 억 정도 됩니다. (목회자의 생활수준에 대해 오해는 마시길 바랍니다. 제가 아는 뉴저지의 한인 목회자의 대부분은 일부 교회를 제외하고는 열악한 목회환경에서 최저생계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이런 엄청난 부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들은 대부분 번영신학을 전파하는 이들이라 자신들의 부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상이자 축복이라고 주장하리라 생각됩니다만, 건강한 신앙과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과연 그 주장에 동의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확실히 믿기를 성도의 순종에 대한 하늘의 상은 이런 세상적 부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하지만 명확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 하고 왜곡한 결과 현대 교회의 세속화가 오늘날과 같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누누이 강조하는 있는 이 진리를 오늘 성경본문도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무엇입니까? 분명한 것은 결코 세상의 부와 성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다
오늘 본문은 참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성도들이 누리는 복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복은 지난 주에 자세히 살펴본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1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 평화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어떤 죄의 빚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이 누리는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성도는 인생의 모든 것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실패한 과거와 고단한 현재와 불안한 미래와도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더 이상 인생은 우리에게 위협이 아니라 축복이 됩니다. 이런 평화를 누리시길 축복드립니다.
영광의 소망을 품다
두 번째 복은 영광의 소망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 방법과 같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온 사람은 소망을 품을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영광이란 어떤 것입니까? 다음의 구절들을 참고해 보십시오.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딛 3:7) 우리로…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빌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행 14:22)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딤후 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상속하고 부활의 새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주와 함께 왕노릇하는 것이 성도의 참소망입니다. 이 세상에서 왕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 세상에서 왕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왕노릇하는 것을 소망으로 주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이 세상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영광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왕노릇의 영광의 크기는 마치 초등학교 교실에서의 반장과 미국 대통령의 영광의 차이와 같습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반장이 센 체해 보지만 대통령 앞에서는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하듯이 세상에서의 어떤 영광도 하나님 나라의 왕노릇과 비교할 수 없이 우수운 것입니다. 둘째 영광의 길이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시간은 영원이란 세계 앞에서 찰나와도 같습니다. 인생은 휴가와 같아서 언제 시작했나 싶은데 벌써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참된 영광입니다. 셋째 영광의 질이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영광은 누리면서도 참된 기쁨이 거기 없습니다. 물을 움켜쥐려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 사라질지 몰라 불안합니다. 사람들의 인기와 환호도 언제 변할지 모릅니다. 그 영광을 누리기 위해 여러 가지 부정을 저질렀다면 죄책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참된 평화와 기쁨과 만족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짐을 그리스도께서 다 지셨기에 완전한 자유와 해방이 거기에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도 왕처럼 살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왕 노릇하면 안 됩니까? 예수님은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지 못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 여자를 진실로 사랑하면 다른 여자는 멀리 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두 나라의 영광을 다 누리겠다는 것은 연애는 이 여자와 하고 결혼은 저 여자와 하면 안 되느냐는 말처럼 위선적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나라의 영광을 구하고 소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소망하고 마침내 누리시길 축복드립니다.
고난 중의 기쁨을 누리다
세 번째 성도의 복은 고난 중에서도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고난 중에도 즐거워할 이유가 생깁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기 전의 고난은 무의미한 생고생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 고생은 피할수만 있으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좋은 불필요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누린 성도에게는 목적이 생깁니다. 그 목적을 3절 후반부부터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5:3)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고난을 견디면서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인내가 점점 커져감에 따라 우리의 속사람은 연단되어 성숙합니다. 연단이라는 헬라어 도키모스는 성숙한 인격을 의미합니다. 성숙한 인격은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누릴 자로 변화되어 간다는 소망을 점점 크게 만들어 줍니다.
비유하자면 이와 같습니다. 올림픽 마라톤을 준비하는 선수가 처음 훈련을 시작할 때는 힘들기만 할 뿐 도무지 자신이 올림픽 메달은커녕 완주도 가능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훈련을 거듭할수록 다리의 근육이 붙고 불필요한 지방은 빠져나갑니다. 폐활량이 커지며 고통을 견디는 힘도 커집니다. 어느 순간엔가 완주할 자신이 생깁니다. 기록이 점점 단축되면서 메달을 딸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생깁니다. 훈련의 고통을 통해 메달의 소망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은 마라톤선수의 훈련과 같습니다. 고통을 견디어내면서 영혼의 근육이 점점 강해지고 마음의 폐활량이 커집니다. 고통을 통해 참으로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분별력이 생깁니다. 고통을 모를 때는 아무 관심이 없던 거룩을 추구하게 됩니다. 절제하는 힘이 생깁니다. 주님을 알아가게 되고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의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는 소망이 점점 커져갑니다. 그래서 혹독한 고난을 견디어낸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 중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이 팔과 다리가 없는 사지절단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니면 여러분의 자녀가 그런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고난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고통스러운 삶을 시작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닉 부이치치입니다. 호주에서 세르비아 이민자 집안에서 사지절단증 장애를 안고 태어난 그는 외로움과 불안함, 멸시감을 견디지 못 하고 8살 이후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였던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기도로 양육받은 그는 15살 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자신에게 장애를 허락하신 목적이 있으리라 믿고 자신의 소명을 찾으려 애쓰게 됩니다. 그 소명을 찾으려는 자신의 내적 여행을 친구들과 나누기 시작한 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를 찾아오고 또 19살 쯤 되었을 때부터 그를 교회와 학교, 병원, 교도소, 고아원 등에서 초청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가 한 3백 명 쯤 되는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보니 강당을 채우고 있던 학생들과 교사들이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모두 눈물을 흘리느라 고개를 들지 못 하는 것입니다. 한 여학생이 강단 앞으로 나오더니 닉을 한 번 안아봐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나를 예쁘다거나 소중하다고 말해 준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오늘 당신이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그 순간 닉은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삶의 소망을 발견하지 못 하는 이들을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닉은 강연과 저술을 통해 사람들을 절망에서 건져주는 소망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수영과 서핑을 즐기고 드럼을 연주합니다. 결혼하고 아빠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Life without Limbs(팔다리 없는 삶)이라는 단체의 대표로 사역합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불행했던 내가, 결함이 많지만 닉 부이치치라는 인격체로서 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행복으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 나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그 분은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나를 창조하셨다라는 깨달음이 나의 행복의 비밀이다…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고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해버리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그는 형제들의 등을 토탁일 팔이 없기에 말과 글로 안아주는 일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영광의 소망을 품고 고난 중에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과 기쁨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넘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