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5-11/압도적인 사랑
60417 주일예배
구원파
최근 한국교회를 가장 위협하는 이단은 신천지로 손꼽힙니다만 198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구원파라는 이단이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구원파는 여러 가지 그릇된 교리를 가르쳤지만 그들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구원의 일시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성교인들에게 접근하여 ‘구원받았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교인들이 답을 잘 못 하고 머뭇거리면 구원을 못 받아서 그런 것이라며 참 교회에 와서 구원을 받으라고 전도합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 이번에는 구원받은 일시를 아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제대로 답을 못 하면 거듭 난 것이 맞다면 자기 생일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며 그건 제대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니 또 참교회에 와서 구원을 받으라고 전도합니다.
이런 질문 앞에 대부분의 교인들이 답을 제대로 못 하거나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왜 일까요? 말 그대로 구원의 확신이 부족해서입니다. 아마 모르긴해도 지금 제가 여기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해도 머뭇거리시는 분들이 적지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자, 구원 받았다고 확신하는 분들은 마음 속으로 손을 들어보십시오. 이번에는 확신이 안 서는 분들이 손을 들어보십시오. 확신이 들었다 말았다 하시는 분들이 손을 들어보십시오. 보십시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우리가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몰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배우고 깨닫지 못 하면 오래 교회를 다녀도 알지 못 합니다. 마치 중고등학교 6년을 다니며 수학을 배워도 미분, 적분을 할 줄 모르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 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확신의 근거
본문 5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롬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함은…
소망은 구원의 소망을 말합니다. 쉽게 풀어 쓰면 이런 뜻입니다. ‘자격이 없는 우리가 부끄러움 없이 감히 구원의 소망-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부끄러움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구원의 소망을 품기에 우리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는 질문에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우리들의 부끄러운 삶이 아닙니까? 이렇게 욕심많고 음란하고 허영이 가득한 내가 구원받을 거라고 하면 사람들이 웃지 않겠나? 내 양심이 걸려서도 말 못 하겠고 하나님도 어이가 없어 하실 거야. 구원의 소망을 품기에 우리는 너무나 부끄러운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소망을 우리가 감히 부끄러움 없이 품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5절 후반부입니다.
(롬 5:5) …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도저히 부끄러워서 구원 받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품지 못 하겠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성령님은 그 부끄러움의 생각을 압도해 버리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부어주셔서 감히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압도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압도적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 사랑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압도적인 사랑
6절 이하가 그 압도적인 사랑을 소개해 줍니다.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도다.
죄와 악에 대항하기에 너무나 연약하여 죄와 악의 습관에 빠져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말합니다. 기약대로 즉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때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우리들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으시다니요! 7-8절입니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여러분, 아마 대부분 노후걱정을 다 하실 줄 압니다. 누구에게나 노후자금은 많으나 적으나 귀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친한 친구나 가까운 형제가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에 빠졌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여러분 중에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은 그 사업을 되살리기 위해 여러분이 평생 모은 노후연금을 몽땅 털어서 빌려주고 연대보증까지 서주실 분이 혹시 있습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선한 분이 몇 분은 있겠지요. 그렇다면 요즘 한국과 미국에서 사람들을 공분에 빠뜨리고 있는 자녀를 가혹하게 학대하고 죽인 파렴치한 부모들이 있습니다. 다섯 살, 여섯 살 정도 되는 어린 자녀를 굶기고 때려서 뼈를 부러뜨리고 몸에 락스를 붓고 심지어 펄펄 끓는 물을 부어 죽인 이들도 있더군요. 그렇게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도 심지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변호사 비용을 대고 구명운동을 하는데 여러분의 노후연금과 전재산을 다 쏟아부으실 분이 혹 있습니까? 아니, 정신 나갔습니까, 목사님? 의로운 사람을 구하는데 그런 큰 돈을 쓰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런 죄인을 구하는데 왜 내 피같은 돈을 씁니까? 네, 이런 반응이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더더구나 그런 흉악한 죄인을 살리기 위해 여러분의 귀한 아들, 딸을 생명을 대신 내어놓을 분이 단 한 분이라도 있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 딸, 손주들을 그 흉악범 대신 사형대에 죽도록 내어준다는 말입니다. 단언컨대 없습니다! 제 정신이라면 절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이가 있다면 그는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 정신이 아니거나 정말 사랑의 화신이거나!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 정신이 아닌 분이 아니시니 하나님의 그런 결정은 무엇을 증거해 줍니까? 하나님의 놀랍고도 압도적인 사랑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로 이 압도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구원의 근거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느낌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하고 악한 행위에 달렸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단 한순간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에 달렸다면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감정 상태에 따라 쉴새없이 널뛰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과 그 사랑으로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Fact)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모든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변함이 없고 바꿀 수 없는, 일어난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넘기시고 예수님의 모든 의로움을 우리에게 넘기셨습니다. 이 일어날 이유도 없고 일어날 가능성도 없을 것 같은 일을 하나님은 압도적인 사랑으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 압도적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이 속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 여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았든 그렇지 못 했든 상관 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끊임없이 이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겸손히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구원의 소망은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구원파가 아니라도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너 같은 쓰레기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느냐’고 속삭이며 소망의 불을 꺼뜨리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담대히 외치기를 ‘하나님이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나를 구원하셨다. 나의 신실함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구원받으니, 그런 거짓말을 그치고 썩 나를 떠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 이렇게 선포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소망의 기쁨
이 구원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놀라운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9절입니다.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다면 심판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냐는 말입니다. 10절입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부활하심으로 구원받게 된 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겠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우리의 구원은 세상 그 무엇보다 확실한 사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무어라 하든 마귀가 무어라 하든, 우리 삶이 얼마나 연약하든 얼마나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든 이 확실한 소망의 바위 위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말라 말입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고 바다의 해일이 덮쳐와도 이 구원의 사실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과 예수님의 완전한 희생으로 인해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이 견고한 것입니다. 이 바위처럼 견고한 소망에서 압도적인 기쁨이 솟아나옵니다. 11절입니다.
(롬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제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은 확실해진 이 구원의 소망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압도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며 잔치를 벌이신 아버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잔치를 벌이는 여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고 잔치를 벌이는 목자의 비유가 가르쳐주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확고한 소망의 증거는 압도적인 기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이 주시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릴 복 중에 이보다 큰 복이 또 있겠습니까! 이런 압도적인 기쁨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