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2-21/은혜의 우월함
160424 주일설교
성선설과 성악설
오늘 설교는 이 질문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은 선한 존재일까요, 악한 존재일까요? 이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300년 전 중국의 전국시대입니다. 당시 국가간의 끊이지 않는 전쟁과 권력자들의 횡포로 혼란스러운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쏟아져나온 사상가들을 제자백가라고 부르는데 그 중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는데 후천적으로 악의 영향을 받아 악한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되살려가기 위해 학문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순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본성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악한 일을 저지른다는 성악설을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제어하기 위해 법이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소위 법가라고 부르는 법치사상이 발달하는 근거가 됩니다.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논쟁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선언합니까? 성서는 인간이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선조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가르침을 원죄설이라고 부릅니다. 원죄설의 근거로 꼽는 성경구절이 구약과 신약의 각각 한 곳씩 있는데, 구약에서는 아담이 범죄하는 장면인 창세기 3장이고 신약에서는 바로 이 곳 로마서 5장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원죄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원죄란 무엇이며 은혜는 어떻게 원죄를 극복하게 합니까?
원죄
먼저 원죄에 대해 살펴봅시다. 12절입니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아담의 범죄가 가지온 결과는 죄가 처음으로 세상에 들어온 것이고 그 결과로 영적인 사망이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죄가 들어왔다는 말은 아담이 거룩과 은총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로 사망이 들어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총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아 그 영이 죽은 상태가 되어 마음이 부패하였다는 뜻입니다.
나뭇가지에 수액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으면 그 가지는 어떻게 됩니까? 말라서 죽습니다. 우리의 팔이나 다리를 끈으로 꽁꽁 묶어 피가 통하지 않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세포와 조직이 죽고 마침내 썩어갑니다. 아담에게 죄와 사망이 들어와 은총의 피가 흐르지 않게 되자 그의 영이 죽습니다. 영이 죽자 아담의 마음은 완전히 썩어 부패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에게 일어난 이 일이 그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고 전 인류에게 일어납니다. 본문 12절과 14절입니다.
(롬 5:12)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의 후손들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같이 사망의 상태를 경험합니다. 영이 죽어 있고 마음이 부패한 이 사망의 상태로 모든 인류는 태어납니다. 렘 17:9을 보십시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부패한 마음
이 마음의 부패는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먼저 생각의 부패를 보십시오. 부패한 인류의 생각은 더 이상 하나님을 알수도, 경배할 수도 그리고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롬 8:7입니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부패한 생각이 만들어내는 아이디어는 어떤 것들입니까? 거짓말, 모략, 사기, 게으름, 욕심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각들은 힘을 써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감정도 부패합니다.
(마 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것은 마땅히 기뻐할 메시지에도 기뻐하지 않고 슬퍼해야 할 죄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상태의 부패한 세대의 감정을 꾸짖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기뻐해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배가 아픕니다. 주는 것도 없이 미운 사람이 생깁니다. 감정이 부패한 것입니다.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부패한 의지는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합니다. 우리는 늘 이런 일을 경험합니다. 공부해야지 하면서 공부하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더 이상 미운 소리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미운 말을 쏟아놓는 것을 말입니다. 나를 파괴하는 줄 알기에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아야 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술과 담배와 마약에 중독된 의지는 그것을 다시 찾습니다. 의지가 부패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과 감정과 의지 즉 마음 전체가 부패한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개념이 원죄입니다.
인류의 공동운명체
이런 원죄의 개념에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 아담의 범죄 때문에 후손들이 모두 원죄를 안고 그런 영적 사망의 상태로 태어나 살아가야 합니까? 아담은 아담이고 나는 나인데 말입니다. 이런 이해는 우리가 개인주의라는 사고방식을 가지면서 가지게되는 의문입니다. 개인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극히 최근인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비로소 보편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류는 하나의 연대적 인격체로 바라봅니다. 모든 인류는 시대와 지역, 문화를 초월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이며 거대한 하나의 공동운명체입니다. 개인주의가 유용한 영역이 분명히 있지만 인류의 영적 운명은 분명히 공동체적입니다.
아주 간단한 예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년부터 오바마 캐어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바마에게 투표하지 않은 이들도 있고 오바마 캐어에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않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오바마가 만든 이 핼스캐어 시스템 아래에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바마에게 욕을 할수도 있지만 법이 바뀌기 전까지는 무관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선택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공동체의 운명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으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요, 라고 소개한다면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이해하지 못 합니다. 나는 아시안의 일원이고 코리안의 일원이고 경상도 대구에서 태어난 사람들 중 하나이고 남자 중 하나이고 목사 중 한 사람이고 남편과 아버지로 불리는 그룹의 일원입니다. 이런 공동체의 소개 없이 그저 ‘나는 나다’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 모세에게 당신을 소개할 때 ‘I am that I am-나는 나다-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린 인간은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소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도무지 누구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입니까? 우리는 공동체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와 사망의 쓰나미에 휩쓸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우리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원죄라는 개념이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은혜의 우월성
한 사람의 범죄가 온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왔다는 이 공동체 원리에 몹시 속상한 이들에게 그러나 바로 그 원리 때문에 몹시도 놀라운 기쁨의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아담이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온 바로 그 원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셨다고 합니다. 15-17절입니다.
(롬 5:15) 그러나 이 은사(하나님의 은혜)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롬 5:16) 또 이 선물(은혜)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이 단락의 메시지는 아담의 범죄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이 비교도 할 수없이 크다는 것입니다. 언뚯 생각하면 아담도 혼자의 범죄로 모두를 사망에 이르게 했고 예수님은 홀로 희생으로 모두를 생명에 이르게 했다면 똑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과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 힘의 크기에서 비교할 수 없이 차이가 큰 것입니다.
보십시오. 화단을 꽃을 꺽어 죽이는 것은 단 1초면 되지만 그 꽃을 피우는 것은 오랜 정성을 요구합니다. 아름드리 나무를 잘라 죽이는 것은 한 시간이면 되지만 그 나무를 그렇게 자라게 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립니다. 아름다운 가구를 부수어 쓰레기를 만드는 것은 몇 분이면 되지만 그 가구를 만드는 것은 장인의 오랜 수고를 요구합니다. 경건한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것은 순간이면 충분하지만 타락한 젊은이를 경건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오랜 수고와 피땀 어린 기도가 요구됩니다. 제아무리 화려한 문명이라도 몰락하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지만 아무리 보잘것없는 문명이라고 건설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자, 생명을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 어느 것이 쉽습니까? 어느 것이 더 큰 힘을 요구합니까?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모든 경우에 비교할 수 없이 큰 능력과 수고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온 아담의 능력과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이 말은 곧 그런 강력한 능력과 은혜에 의해 이루어진 우리들의 구원이 그토록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의 힘은 무섭지만 은혜의 힘은 더욱 강력합니다. 죄의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지만 은혜의 도움은 더욱 강력합니다. 죄의 결과는 치명적이지만 은혜의 결과는 더욱 놀랍습니다. 이 은혜는 마침내 우리 죄인들을 영생에 이르게 하고도 남을 줄 믿습니다. 21절입니다.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영생으로 인도함 받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