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6-13/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
160821 주일설교
하나님의 백성은 영으로 태어난다
지난 주 로마서 9장 초반부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바울이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서 이어지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에 구원의 복을 전하시려던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의식하며 바울은 6절 전반부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롬 9: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째서 무산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8절이 답을 줍니다.
(롬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인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으로 삼겠다고 하신 이들은 바로 이 약속의 자녀들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그 증거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예를 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모두 늙도록 자녀를 갖지 못 하자 사라는 자신의 젊은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다른 아들을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불임상태의 노인인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라면 이삭은 육신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었고 약속으로 얻은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이 약속의 자녀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영으로 난 사람이 곧 약속의 자녀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약속의 자녀이자 영으로 난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로 약속 있는 새 계명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이들 교회를 가리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세상에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받은 약속의 자녀요, 영으로 태어난 이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비로 태어난다
우리가 약속의 자녀요, 영으로 났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약속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성령도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우리의 선함과 희생과 인격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본문은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롬 9:11) 그 자식들(에서와 야곱)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이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여 이삭의 장자로 삼으셨는데 그 시점이 그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때였습니다. 그들의 인격이나 자질이 드러나지도 않고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야곱을 택하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부르시는 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은 긍휼과 자비입니다. 9:15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야곱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 자비를 누릴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그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가 약속의 자녀가 된 것도, 영으로 거듭 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 인한 것인 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 하면 우리는 기독교의 복음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로 인해 허락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는 인간이 구원 얻을 자격을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행이든 수행이든 혹은 계명준수든 한 마디로 네가 잘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이 점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가 유명한 눅 15장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은 스스로 아버지 곁을 떠나 철저히 방탕한 삶을 살다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아버지께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할 수 없었던 그는 그러나 아무 조건도 없이 전적인 아버지의 자비로 다시 자녀로 받아들여집니다. 이 둘째 아들의 모습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실체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밭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와 아버지가 동생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처럼 성실하게 봉사한 아들만이 아버지에게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항의합니다. 그는 구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 하는 모든 시대, 모든 종교에 가득 찬 율법주의자들을 대표합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아는 이들은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비로소 겸손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구원의 자격이 스스로에게 조금이라도 있는 줄 알고 이를 아는 이들은 결코 겸손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겸손하게 보이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속사람이 정말 자격없음을 깨닫는 이들만이 참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겸손이야말로 성도의 삶의 거룩한 열매를 맺는 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로 된 것인 줄 깨닫고 하나님과 이웃 앞에 겸손과 거룩의 열매를 맫으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루어진다
유대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무산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의 답을 우리는 찾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 육신의 자녀인 유대인이 아닌 약속의 자녀인 교회를 선택하심으로써 구원계획은 계속 진행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침내 완성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확고하고 강력하며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의 많은 사건들은 인간의 죄와 불신앙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가로 막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얼마나 강력한 의지로 그 장애물을 넘어 구원계획을 이루어가시는지를 여러 번 보여줍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기어코 니느웨로 보내십니다. 끌여오다시피 와서 마지못해 요나가 회개를 촉구하고 도망치듯 성을 나와버리지만 니느웨 사람들은 그 메시지에 회개를 시작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질의 유혹 앞에 무릎 꿇고 다 배교하여 바알을 섬겨서 엘리야는 자신 혼자 남았다고 괴로워하지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인을 남겨두셔서 다시금 이스라엘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부패하고 경직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하나님 나라 운동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흩어진 제자들을 모으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시작케 하셔서 오늘날 전 세계에 그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마귀와 그 수하가 된 인간들은 죄와 악의 바이러스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가로 막고 세상의 멸망시키려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교회를 통해 복음의 백신을 온 세상에 퍼뜨려 치료하고 구원하십니다. 영적 싸움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지만 세상을 치유하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세상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고집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가망없는 죄인마저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자비와 고집에 우리의 구원이 달린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싸워 이길 수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무산시킬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확신하시고 언제까지나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