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8 믿음의 길과 율법의 길 / 롬9:30~10:4

20160918 믿음의 길과 율법의 길 / 롬9:30~10:4

롬 9:30-10:4/믿음의 길과 율법의 길

16918 주일설교

 

믿음의 길과 율법의 길

지금은 아마 거의 사라진 듯 하지만 제가 어릴 때 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보던 광경이 있습니다. 헌금시간에 목사님이 그 날의 헌금봉투를 하나하나 불러주고 축복기도를 해주던 것이었습니다. ‘어느 장로님 십일조 드리셨습니다, 어느 권사님 생일감사헌금 드리셨습니다, 어느 집사님 건축헌금 드리셨습니다…’ 이런 관행이 없어진 것은 단지 교회의 규모가 커져서 이제는 일일이 헌금한 이들의 이름을 불러줄 시간이 없어졌기 때문일까요? 거기에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단기선교와 체육대회, 바자회 등을 준비할 때 교우들이 특별한 물건이나 돈을 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행사를 준비하는 이들이 기부하신 분들을 주보에 좀 실어서 감사를 표하자는 제안을 종종 목사에게 합니다. 그런 제안을 제가 매번 정중하게 거절하는 이유도 단지 주보에 실을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거기에도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이든 도네이션이든 근본취지는 모두 하나님의 큰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과 이웃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으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 앞에 공개하는 순간부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드리는 이의 마음에 다른 생각이 끼어듭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것밖에 안 드리냐고 구두쇠로 보지 않을까? 이만큼 많이 냈으니 나를 더 경건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보겠지? 그 때부터 헌금과 기부가 하나님을 의식한 것이 아닌 사람을 의식한 것이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의 평판과 경건함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고 순수했던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전자가 믿음으로 드린 것이라면 후자는 율법적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길을 믿음의 길과 율법의 길이라고 명명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두 가지 길이 어떻게 다르며, 그래서 얼마나 놀랍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로마서 9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의 배웠습니다. 예정론은 구원받을 이와 멸망받을 이가 미리 다 정해져있어서 어떤 이는 무슨 짓을 해도 구원받고 어떤 이는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멸망받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란 죄인인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자격이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신비로운 택하심과 놀라운 긍휼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무 소용이 없다면 우리가 계명을 지키며 선하게 살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혹은 계명을 안 지키고 선하게 살지 않아도 믿음만 마음에 지니고 있다면 되는 것이 아닌가? 율법과 계명 등은 다 폐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행위의 가치 혹은 율법과 계명의 가치에 대한 의문입니다. 바울은 앞에서도 로마서의 앞부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설명을 해왔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의 길과 율법의 길을 대조시켜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

먼저 믿음의 길을 가는 이들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바로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롬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율법을 지키지 못 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율법을 지키지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얻은 의는 믿음의 의였습니다. 그들은 자격없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택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씻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었습니다.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셔서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이 얻은 의는 믿음으로 얻는 의이며, 이것을 믿음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율법의 길 

그러나 반대로 율법을 다 지키고도 의에 이르지 못 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롬 9: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 하였으니

정작 율법을 지킨 유대인들은 율법의 목적인 의에 이르지 못 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나쁜 일입니까?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뭐가 잘못입니까? 그 이유를 32절 상반절이 말합니다.

(롬 9: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유대인들이 실패한 이유는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10:1-2절이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롬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즉 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켰지만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깨닫고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즉 율법의 목적은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여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보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지, 내가 얼마나 헌금을 많이 하는지, 내가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선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 인정받기 위해’ 율법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는 자신의 노력으로 확보한 것이기에 자신처럼 노력하지 않는 타인을 멸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도 안 지키면서 어떻게 기독교인이라 한단 말인가, 저렇게 살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단 말인가.’ 형제를 향한 긍휼이 없습니다.

 

율법의 목적, 믿음의 길 

유대인들이 이렇게 율법의 길을 간 이유는 누구보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도 정작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공로가 되어 그들에게 의롭다는 자격을 주는 줄 알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그 앞에 무릎꿇는 믿음의 길로 죄인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을 4절이 이렇게 부연해 줍니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주시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셔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고 그것은 곧 율법의 마침 즉 율법의 목적을 완수하는,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목적을 완수하러 오셨고 이 말은 곧 예수님의 오신 목적과 율법의 목적은 같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도 드러납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율법이 어떻게 죄인을 믿음의 길로 인도합니까?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하나씩 살펴봅시다.

 

하나님 사랑을 가르치는 율법

첫째 율법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칠까요? 예수님은 율법 중 제일의 계명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질문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할까요? ‘그 방법을 알고 싶으면 여기 십계명이 있다. 여기 정결계명이 있다. 여기 안식일의 계명이 있다. 이것을 지키는 것이 그 방법이다. 이 때 이 계명들은 지키는 이를 의롭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아내를 위해 집안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행위는 그에게 훌륭한 남편의 자격을 주는 것입니까? ‘봐, 세상에 나 같은 남편이 어디 있어,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날 위해서 뭘 좀 해야지.’ 그게 아닙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줄 몰랐는데 바로 이렇게 하니까 아내가 기뻐하는구나. 이것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군.’ 곧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예절을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예절을 지키면 너는 훌륭한 아이가 되니까 그 때부터는 목을 꽂꽂이 세우고 다니렴, 이 예절을 못 지키는 이들을 멸시해도 되는 자격도 생긴단다.’ 아니지요.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은 있는데 어떻게 할지 몰랐지? 이렇게 예절을 지키는 것이 부모님을 행복하게 만든단다. 그리고 이런 예절을 모르는 친구가 있으면 너도 친절하게 가르쳐주렴.’ 이것이 예절의 목적이지요.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함을 가르치는 율법

둘째 율법이 어떻게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깨닫게 합니까? 율법을 지키려는 죄인의 노력을 벽에 부딪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려는 노력에 늘 실패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을 전심으로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으면 우리들의 불완전함과 죄악됨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고 택하시고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하심과 완전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집트에 노예에 불과했던 자신들을 택하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깨달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이런 목적을 오해하여 율법이 자신들을 의롭게 만들어준다고 믿어 믿음의 길이 아닌 율법의 길을 갔습니다.

 

걸림돌 예수

이렇게 율법이 스스로를 의롭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 율법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으로 거저 의를 얻는다는 것이 불쾌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32-3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9: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시온에 있는 부딪칠 돌과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는 모두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스스로 선하게 살아서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실은 절망적인 죄인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을 겸손히 받아들임으로써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불쾌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으로 걸림돌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무의미한가

율법과 계명과 선한 삶은 무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의로움을 깨닫게 하는 도구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는 이들은 이 율법을 행하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더더욱 깨닫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결코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 더욱더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반대로 그 율법이 자신들의 의롭게 해준다고 믿으며 율법을 의지하는 이들은 똑같은 율법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을 높이지 못 하고 자신들을 높이게 됩니다. 누더기 같은 자신들의 의를 율법의 행위로 포장하여 하나님의 의를 가리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길입니다.

결론적으로 율법과 계명, 순종과 선한 삶이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만들어 줍니까? 똑같은 행위이지만 믿음으로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반대로 율법적으로 행할 때 오히려 그 행위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집니다. 믿음의 길은 율법과 선행과 순종이 필요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며 율법의 목적이며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입니다. 믿음의 길을 가므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높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