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26-38/구원이 어떻게 가능한가
161211 주일설교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전에 한국에서 섬기던 청년부에서 한 형제가 제게 찾아와 고민상담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꾸준히 출석하지 못 하던 그는 더 신실한 삶을 살고 싶은데 자신의 발목을 잡는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토요일 밤이면 그 청년은 클럽을 가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데 거기서 만난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지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날은 어김없이 교회를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전날 밤을 그렇게 보내고 주일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목사님, 제가 이 죄를 끊을 수 있을까요?’ 그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제게 물었습니다.
나약하고 죄성으로 물든 인간이 과연 죄를 온전히 끊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고민은 물론 그 형제만의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사모하는 모든 성도들의 고민이기도 할 터인데요, 1,600여 년 전, 위대한 초대교회의 교부로 평가받는 성 어거스틴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백록 8권 1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좇아 사는 나의 삶의 모습이 싫었습니다. 이제 과거에 나를 사로잡았던 명예와 돈을 추구하는 욕심의 불도 사라진지라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무거운 짐이나 종살이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자의 사랑에서만은 깊이 얽혀 있어 헤어나오지 못 하였습니다… 나는 의지력이 약하여 혼돈 속에 있었습니다. 내 손과 발을 묶어놓은 동거생활 때문에 나는 내가 원치 않던 다른 일까지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나의 번민은 심해져 내 심신은 몹시 피곤하고 쇠약해졌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은 너무나 친숙하고 공감이 가지 않습니까? 과연 성도는 죄를 끊고 악으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정말 거듭날 수 있는 것일까요? 구원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고지 사건입니다. 누가복음은 지난 주에 살펴본 세례 요한의 출생고지에 이어서 예수님의 탄생고지를 소개합니다.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구원이 어디서 오며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다
먼저 구원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28절과 30절을 보십시오.
(눅 1:28) (천사가)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눅 1: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마리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혜로 인해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합니다. 이것이 왜 은혜입니까? 마리아는 자신이 동정녀가 되겠노라고 자원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특별히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표현도 없습니다. 그녀가 고귀한 혈통이라는 기록도 없습니다. 마리아가 약혼한 남자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혈통이라도 있지만 그녀는 어느 지파에 속하는지 기록도 없습니다. 그녀에게는 원숙한 지혜나 성숙한 인생경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 관습으로 보자면 그녀는 겨우 12살에서 14살 사이일 것입니다. 아마도 흔하디흔한 가난한 소작농의 딸이었을 마리아는 아무런 조건도 노력도 공로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 일은 은혜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누립니까?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을 받음으로 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도, 공로도, 노력도 보지않으시고 그저 당신의 긍휼로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은 은혜로운 선택입니다. 이 은혜가 없이는 우리의 죄도 용서받지 못 합니다. 우리는 악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욕과 탐욕의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31절 이하를 보십시오.
(눅 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눅 1: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통치하실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토록 크신 왕,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고지의 장소를 보십시오. 그 곳은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입니다. 그 왕을 섬길 선지자 세례 요한만 해도 이스라엘의 중심지 유대땅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가장 거룩한 성전의 성소를 택해 수태고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왕의 탄생고지를 받은 곳은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리에서도 가장 외딴 마을, 지도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나사렛이라는 동네입니다. 얼마나 그 곳이 소외된 지역이었는지 요한복음을 보면 나다나엘이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하였을 정도입니다. 왜 이토록 후미진 곳에서 탄생고지를 하십니까? 선지자 세례 요한의 부모만 해도 제사장입니다. 존경받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그 선지자가 섬길 왕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름도 없는 소작농의 어린 딸입니다. 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환경을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 배경으로 삼으십니까? 그것은 주님의 겸손하심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거하시며 죄인들의 눈물을 닦으시며 죄인들의 고통을 겪으시며 마침내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기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겸손함에 대해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겸손한 모습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자 하는 자들은 누구도 예외없이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성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된다면 무엇을 통해 완성될까요?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의 질문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분별이 있어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의 구원의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면 마리아보다 더 확실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우리는 죄를 끊을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습니까? 우리는 거룩하게 살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까?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선언합니다.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눅 1: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성령이 임하시면 늙은 할머니도 선지자를 잉태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동정녀인 소녀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죽은 죄인이 하늘의 생명을 잉태하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노력과 공로와 자격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합니까? 37절입니다.
(눅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성령의 살리시는 능력이 드러납니다. 죽은 땅을 생명의 땅으로 바꾸고 마른 사막에 생명나무가 자라게 하고 절망의 대지에 소망의 꽃이 피게하는 성령의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자 하는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로마서를 보십시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 없는 우리가 믿음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 뿐입니다. 그 본을 어린 소녀 마리아가 위대한 본으로 보여줍니다. 38절입니다.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천사가 떠나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믿음의 고백을 듣는 것까지가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는 것으로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순종을 요구합니다. 순종은 선포의 목적이요, 기대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가장 흥분시키는 자녀들의 공경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여 구원을 완성하여 가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 8권 12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그 죄악으로 인해 아직도 꽉 묶여 있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애처러운 목소리로 부르짖기를 ‘언제까지입니까?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왜 나의 불결함은 끝나지 않습니까?’라고 하며 마음으로부터 통회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Tolle lege, Tolle lege(들고 읽으라, 들고 읽으라.)’ …나는 사도의 책을 집어들자마자 펴서 내 첫 눈에 들어온 구절을 읽었습니다.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나는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고 또한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구절을 읽은 후 즉시 확실성의 빛이 내 마음에 들어와 의심의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역사하시면서 죄의 사슬에 묶인 수많은 어거스틴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어거스틴과 같이 또 마리아와 같이 겸손히 순종하는 자녀들은 그 능력을 경험합니다. 말씀 앞에 무릎 꿇음으로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