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25 하나님의 손가락 / 눅2:1~20

20161225 하나님의 손가락 / 눅2:1~20

눅 2:1-20/기적의 탄생

161225 성탄주일설교

 기적

프랑스의 세계적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3부작 소설 ‘개미’를 보면 개미들이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개미들이 먹이를 찾아 일렬로 행진을 하던 중 갑자기 붉은 공이라고 불리는 전설 속의 존재가 행렬의 앞과 뒤에 등장합니다. 붉고 둥글고 거대한 공으로 개미들의 입과 입을 통해 알려져온 그 존재는 행렬의 맨 앞에 번쩍하고 나타나 순식간에 대장 개미를 데리고 사라집니다. 패닉에 빠진 개미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순식간에 뒤쪽에 나타난 그 붉은 공은 또 다른 개미를 데리고 사라져버립니다. 먹이를 구하기는커녕 혼비백산해서 개미굴로 돌아온 개미들은 공포에 질려 떨며 그 붉은 공의 존재를 보고합니다. 그 붉은 공의 정체는 소설 말미에 밝혀지는데 그것은 공원 한 쪽에서 놀다가 개미들의 행렬을 발견하고 장난을 친 꼬마아이의 손가락이었습니다. 꼬마는 흙바닥 위를 기어가는 개미떼를 보고 손가락으로 휙 그어서 몇몇 개미를 행렬로부터 몇 십 센티미터 정도 뚝 떨어뜨려 놓은 것입니다. 그 꼬마의 장난은 그러나 2차원의 세계를 앞서 가는 개미가 뿜어내는 호르몬 냄새를 맡고 이동하는 개미에게 있어서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20세기 지성인들의 사도 바울이라고 불렸던 C.S.루이스는 ‘방언과 초자연적 현상 이해’라는 글에서 기적이라는 것은 더 높은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이 낮은 차원의 존재에게 이해되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른들의 말은 제한된 단어만을 아는 아이들에게는 수수께끼처럼 들립니다. 스패니시라고는 무초그라시아밖에 모르는 한인들에게 스패니시 형제들의 말은 미스테리일 뿐입니다. 곱하기 나누기를 암산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대견스러운 수학포기자들에게 미분과 적분은 우주인의 기호처럼 보입니다. 3차원의 물리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4차원의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은 초자연적 현상으로 이해됩니다. 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육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야한다고 하신 말씀을 니고데모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최고 지성의 바리새인이었지만 육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였기에 영의 세계의 일에 대해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면서 끊임없이 비유를 사용하셨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기적의 성탄

성탄의 소식은 놀라운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천사가 소식을 전해 주고 성령으로 인해 할머니가 잉태하고 동정녀가 하나님의 아들을 품습니다. 마침내 태어난 아기로 인해 천군천사가 나타나 찬송합니다. 그 아기는 후에 물 위를 걷고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마침내 승천하실 그리스도가 됩니다. 이 믿기힘든 기적 이야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기 힘들다고 합니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초자연적인 이야기는 다 빼고 그저 그 이야기가 전달해주는 교훈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에서 기적 이야기를 다 빼고 나면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문자 그대로 ‘우러러 믿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기적을 다 빼고 이해되고 설명되는 요소만 남긴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 됩니다. 이해하는 활동은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 학문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학문을 하려고 교회에 오고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대학원을 가야지요. 성경과 교회는 우리를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고 신앙의 세계는 이해를 넘어서서 믿음으로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려면 성경에서 기적으로 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적에 더더욱 주목해야만 합니다.

둘째로 이런 태도는 우리가 사는 차원 외에 다른 차원의 세상은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관찰하는 이 물리세상 외에 영적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그토록 맹신하는 과학은 영적 세상을 부정하지 않고 그 세상에 대해 모른다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이라는 도구는 영적 세상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 셀폰의 카메라로는 빨주노초파남보의 가시광선을 찍어내지만 빨간색 밖에 있는 적외선이나 보라색 밖에 있는 자외선 같은 불가시광선을 찍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가시광선은 특수카메라를 요구합니다. 영적 세계는 이해라는 카메라 대신 믿음이라는 특수카메라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있다고 주장하고 과학은 모르겠다고 인정하는 영적 세계를 우리는 무슨 근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런 태도는 무지와 편견의 다름아닌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실제로 기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현상을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가해한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빛이 파동인지 입자인지 아니면 파동도 입자도 아닌 제 3의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비밀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생명의 기원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왜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성애의 본능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이런 예들은 끝도없이 들 수 있습니다. 영적 세계는 고사하고라도 물리세계와 생물학의 세계와 인간심리의 세계, 원자의 세계와 광대한 우주의 세계에 관해서도 우리는 밝혀내지 못 했고 증명하지도 못 했고 그래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 한 것 투성이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을 경험하는 방식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불가해한 현상과 이해하지 못 하는 지성의 거대한 간극을 믿음이라는 밴드로 묶어놓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의 삶

그러므로 성경의 기적을 인정하는 사람이든 부정하는 사람이든 사실은 매일매일 믿음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가 기적을 경험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성탄의 사건에 장면장면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천사의 출현입니다. 천사가 나타났다는 것은 영의 세계가 육의 세계에 개입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우리 삶의 행렬에 살짝만 끼어들어도 우리 삶에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한 번 원수가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의사가 안 된다고 하면 가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실패한 인생에게는 절망만 남는 세상입니다. 찢어진 가정은 결코 회복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분열된 교회는 치유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가락이 그 상한 곳과 찢긴 곳을 만지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원수가 형제가 되고 죽어가는 자가 살아나고 실패한 인생이 소망을 얻고 찢어진 가정이 천국으로 회복되고 분열된 교회는 성령으로 거듭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막에 꽃이 피고 광야에 물이 흐르고 사자와 어린 양이 뛰어노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성탄은 오늘 우리에게 그런 기적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천사의 선포가 울려퍼지고 선지자들의 노래가 들려오고 하나님의 손가락이 우리의 깨어진 삶을 만지실 때 그리스도가 탄생하듯 우리 삶에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최근에 큰 어려움을 겪던 한 교우가 제게 이런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제게도 기적이 일어나네요.” 네,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이 날 여러분의 인생에도 기적이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