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9:1-10/회개에 대한 오해
170122 주일설교 오해시리즈2
고문기술자 이근안
지난 2008년 10월 한국의 어느 교단의 목사 안수식이 세간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교단의 이 안수식에서는 일명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 씨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1985년 9월 고 김근태 의원을 당시 안기부로 끌고가 20여일간 물고문과 전기고문, 구타 등으로 잔인하게 고문하여 그 후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을 앓다가 사망케 하고 또 다른 이를 반신불수에 이르게 한 것을 비롯한 여러 건의 고문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수배를 피해 도망다니던 시절 기독교 신앙을 접하고 7년의 교도소 복역 중 신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회개했다고 하고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된 후 언론인터뷰와 간증 등을 통해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신문기술자이며, 고문은 하나의 예술이었다, 고문은 곧 애국이었다,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는 주장을 반복하였습니다. 그의 발언으로 사회적 공분이 일자 합동개혁 측은 2012년 징계위원회를 열어 ‘다른 사람들보다 수백 배 더 조심하고 낮아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함에도 지난 행위를 미화하면서 또 다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밝히며 이근안 씨의 목사직을 면직, 제명처리하였습니다. 목사직을 잃은 이근안 씨는 그러나 여전히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하며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사회로부터 큰 비난에 직면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근안 씨의 예는 한국교회의 회개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얄팍한지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초대 로마교회는 새신자가 세례를 받으려면 3년이 걸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신앙에 대해 배울 뿐 아니라 옛 삶을 청산하였다는 회개의 증거를 드러내 보여야만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예수 믿고 회개했다고 말만 하면 옛 삶의 청산과 변화는 고려하지도 않고 세례는 물론 목사 안수까지 베풀어줍니다. 그 결과 이근안 목사와 같은 예들이 쏟아져나옵니다. 한 때 한국교회에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간증강사로 인기를 끌던 대도 조세형 목사, 정치깡패 용팔이 김용남 목사, 조폭두목 조양은 목사, 개그맨 서세원 목사가 모두 과거를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지만 얼마지나지않아 절도, 폭력, 협박, 사기 등 과거의 범법행위를 반복하여 구속되는 진풍경을 연출하였습니다. 도대체 한국교회의 회개에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참된 회개의 요소
지난 주에는 한국교회가 가진 용서에 대한 오해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오해는 ‘회개 없는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그의 대표작 제자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를 전파하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제자도 없는 은혜이고 십자가 없는 은혜이다…’ 결론적으로 회개 없는 용서는 참된 용서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한국교회가 가진 회개에 대한 오해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용서에 대해 오해하고 있듯 회개에 대해서도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 오해가 무엇인지 알려면 참된 회개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삭개오의 회개는 어떤 것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의 회개에는 분명 자신이 죄인이라는 깨달음과 고백이 있었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저녁 내내 어쩌면 밤 늦게까지 예수님과 나누었을 많은 대화 중에 어찌 그런 고백이 없었겠습니까만은, 본문이 그 많은 고백들을 싣지 않으면서도 이 결단을 실어놓은 것은 이 결단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 늦게까지 나눈 대화 중에서도 이 결단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즉 이 결단이 회개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이 결단은 무엇입니까? 속여 빼앗은 것을 네 배로 갚겠다는 것은 세리장으로서의 권력을 남용하여 약자의 것을 빼앗았던 자신의 죄의 대가를 모든 힘을 다해 치르겠다는 말입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 말은 더 이상 과거의 탐욕스러운 삶을 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즉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며 더 나아가 과거의 삶을 청산하여 더 이상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회개를 들으시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9-10절입니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삭개오는 우리에게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참된 회개란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과거의 삶을 청산하는 돌이킴입니다. 이런 삶의 돌이킴이 없이 그저 감정적 뉘우침과 자학적인 말잔치만 있는 회개는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세례를 받으러 왔으나 그들은 그저 속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만 갖고 세례받으면 심판을 피할 것이라고 생각할 뿐 회개에 합당한 삶의 돌이킴이 없었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돌이킴이 회개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입니다. 유명한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회개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눅 15:17) (작은 아들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이 아들은 지금 돌이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회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회개는 삼단계로 구성됩니다.
(눅 15:17) …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첫째는 깨달음입니다. 자신이 죄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깨닫습니다. 다음으로 19절입니다.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둘째는 결단입니다. 품꾼의 하나가 되어 자신의 죄를 갚으며 살겠노라고 결단합니다. 마지막 20절입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셋째는 실천입니다. 그는 결단한 대로 행하기 위해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참된 회개는 첫째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 둘째 죄값을 갚으며 살겠다는 결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결단에 대한 실천으로 구성됩니다.
회개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
부끄럽지만 한국교회는 이 중에서 첫 번째 깨달음만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둘째, 셋째는 무시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가르쳐왔습니다. 죄를 강조하고 깨달음을 강조하고 회개의 고백을 요구합니다. 이런 깨달음과 고백이 있으면 회개했다고 인정합니다. 거기다 눈물까지 흘리며 통회자복하면 더더욱 그 회개는 진정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됩니다. 이렇게 만들기 위해 교회는 기독교 교리를 쉽게 요약하여 빠른 시간 내에 이해시키고 결단하도록 요청합니다. 그래서 단시간 내에 많은 회개자, 회심자들이 양산됩니다. 교회는 빨리 성장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개의 첫단계에 불과합니다.
둘째 단계로 죄값을 갚으려는 결단에 대해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 죄값은 그리스도가 다 치르지 않으셨나요?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죄값이 아닌 은혜에 대한 감사와 순종으로서의 봉사의 의무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웃에게 지은 죄는 여전히 우리의 책임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잘못을 갚으려는 노력 없이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는 것을 지난 주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갚지 않았으면 갚아야 합니다. 속인 것이 있으면 고백하고 갚아야 합니다. 상처를 주었으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가족에게 잘못한 것은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위안부를 잡아갔으면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나라를 말아먹었으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 없이 고백만 있는 회개는 감정적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또 셋째 단계인 돌이킴의 실천에 대해서도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회개하였다면 부정한 관계는 끊어야 하고 잘못된 습관을 버려야 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못된 성격은 고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난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네가 적응해. 이런 태도는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에 다름 아닙니다. 게으름과 싸워야 하고 이기심을 다스려야 하고 탐욕을 절제하기 위해 늘 무릎 꿇어야 합니다. 이런 회개의 증거가 없이 회개하였다는 주장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 합니다. 이 실천의 단계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내내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 셋째 단계를 위해 교회 공동체의 교제와 지도가 중요합니다. 성도들은 서로 격려를 통해 깨달음과 결단으로 시작된 회개가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습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권위는 그릇된 선택을 하는 교인들을 바르게 돌이키도록 지도하고 경계시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성도의 교제와 지도를 통해 성도들을 참된 회개의 삶을 살도록 지도하기보다 값싼 은혜를 퍼뜨려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빨리 교회에 유입시켜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더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 결과 돌이킴 없는 회개를 통해 제자도 없는 교인들로 가득찬 교회, 그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사라진 교회, 간판만 교회이며 성령의 역사가 상실된 교회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회개 없는 용서가 더 이상 용서가 아니듯 돌이킴 없는 회개도 더 이상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 뉴저지장로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은 참된 돌이킴이 있는 참된 회개로 주님의 제자로 거듭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