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12:5-13/사랑에 대한 오해
170129 주일설교
작은 선은 큰 악을 닮았고 큰 선은 비정함을 닮았다
어제는 한국의 구정이었는데요, 새 해 인사를 좀 하십시다.
먼저 오늘은 설교 A/S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주 전 설교에서 구약을 부정하는 초대교회 이단을 에비온파라고 설명을 드렸는데요,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구약을 부정한 이단은 말시온파라는 영지주의 일파이고요, 에비온파는 신약을 부정한 율법주의적 이단이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많은 분들의 표정이 그런 내용이 있었어? 하시는군요.
최근에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다른 길이 있다’의 한 장면을 소개드립니다. 저도 보지는 못 했으나 기사로 그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수완은 마음씨가 착한 경찰입니다. 어느 날 밤 음주운전단속을 하다가 트럭운전사의 음주운전을 적발합니다. 운전사는 자신이 사업이 망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이런저런 어려움에 견디지 못 해 술을 딱 한 잔 했노라고 좀 봐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사정을 듣고보니 딱한 마음에 모질지못한 수완은 그를 그냥 보내줍니다. 그런데 그 운전사는 잠시 후 횡단보도를 건너던 보행자를 치어 중태에 빠뜨립니다. 경찰에 잡혀서 음주단속을 어떻게 통과했냐는 조사에 수완이 5만원을 받고 자신을 보내주었다고 하여 수완은 이 일로 내사과의 조사를 받고 직장도 잃게 됩니다. 수완은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 때문에 그 보행자가 사경을 헤맨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병문안을 가는데 거기서 트럭 운전사는 수완이 자신을 그냥 보내주어 사고가 났으니 합의금도 반반씩 내자고 요구합니다. 사면초가에 놓인 수완은 자살을 결심합니다. 분명히 수완은 착한 사람이고 그를 긍휼히 여겨 내린 결정인데 그 결과는 왜 걷잡을 수 없는 불행으로 치닫는 것일까요?
그 답을 일본 에도시대 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하야시 주사이가 아들에게 주었다는 교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노재현이 쓴 ‘나를 깨운 서늘한 말 한마디’라는 책에 소개된 하야시 주사이의 말입니다.
‘작은 선은 큰 악을 닮았고 큰 선은 비정함을 닮았다.’
즉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그래서 좋은 평가를 받는 선해보이는 행동이 사실은 큰 악을 초래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반대로 정말 모두에게 유익한 선한 일은 종종 당장은 비정한 행동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야시 주사이는 이 말을 하며 아들에게 사람들에게 당장 좋은 평가를 받는 일을 하려 하지 말고 당장은 비정하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원리를 우리는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경험합니다. IBM의 2대 CEO였던 토마스 왓슨 주니어는 경영자가 잊지 말아야 할 원리로 야생오리의 정신이라는 예화를 소개합니다. 어느 착한 사람이 집 주변에 모여든 야생오리들이 비쩍 마른 것을 보고 매일 나가서 먹이를 주는 친절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야생오리들이 여기저기 먹이를 구하러 다니느라 고생하고 비쩍 마른 채 살아가는 동안 그 집에 모여든 오리들은 살이 오르고 편하게 살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이사를 가고나자 그 야생오리들은 먹이를 구하는 법을 잊어버린 나머지 모두 굶어죽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들도 똑같은 것을 경험합니다. 아이들이 조르고 사정하고 재미있어 한다고 해서 혹은 아이들이 속상해 한다는 이유로 게임과 TV와 숙제를 잊는 것과 이기적인 행동을 허용하고 넘어갑니다. 결과적으로는 아이들은 올바른 원칙을 배우지 못 하고 자신을 절제하지 못 하는 사람으로 자라납니다. 그 아이의 삶을 실패로 이끄는 지름길입니다. 선인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악입니다.
스캇 팩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에는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지 못 하여 괴로워하는 젊은이와의 상담 장면이 나옵니다. 그 젊은이는 말하기를, 학창시절 어머니가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가 스쿨버스를 타고다니다 사고가 나거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차로 직접 라이드를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어머니를 무척 피곤하게 하였지만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캇 팩은 그 젊은이에게 어머니가 어떻게 느끼셨나와 상관없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며 그 결과 아들의 삶을 어머니라는 감옥에 갇혀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어야만 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오해
오늘은 사랑에 대한 오해라는 제목을 설교합니다. 용서에 대한 오해, 회개에 대한 오해에 이어 사랑에 대한 오해까지 3주째 오해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보니 김목사가 오해에 사무친건가 하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오해입니다.
사랑에 대해 오늘날 광범위한 오해가 존재합니다. 그 중 하나는 사랑은 상대를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며 상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허용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사랑이 아니라 무책임이거나 심지어 악일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유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탕을 원해도 밥을 주어야 하며 게임을 원해도 숙제부터 마치도록 해야 하며 밤늦게까지 안 자려고 해도 시간이 되면 자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은 바로 잡기 위해 꾸지람을 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무슨 잘못을 해도 괜찮다고 하고 용납하는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는 것처럼 교회도 성도들을 바르게 교훈하고 때로는 책망하고 의의 길로 교육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교훈과 책망을 듣지 않을 때는 징계를 해서라도 바로 잡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참 사랑인 징계
이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하시는 행동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무엇을 하십니까? 바로 아프고 아픈 징계를 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징계와 채찍질, 얼마나 아픕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징계가 사랑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훈련받은)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스캇 팩은 사랑의 첫째 조건을 상대를 유익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징계가 사랑인 이유는 우리가 그 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8절입니다.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우리 삶에 이런저런 예기치못한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 고난을 만날 때 우리가 갖지 말아야 할 태도와 가져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먼저 갖지 말아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히 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첫째는 그 고난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고난을 너무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고 너무 무겁게 여겨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가볍게 여기는 것은 고난을 재수가 없어 겪는 일이라 여기며 무시하고 빨리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낙심하는 것은 그 고난이 나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성급한 생각에 용기를 잃어버리고 원망과 자학으로 시간을 보내는 태도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기회를 아무 유익도 못 얻은 채 날려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럼 고난을 만날 때 가져야 하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인내입니다. 7절입니다.
(히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고난을 잘 인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울고 불고 원망하고 탓하고 자학하고 비관하는 것은 본능적 반응입니다. 그러나 유익한 것은 우리의 본능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은 본능을 거스르지만 우리에게 인내를 줍니다. 인내할 때 우리는 유익한 것을 얻습니다. 둘째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히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힘이 빠진 팔, 다리를 세워라 즉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돈이 없고 몸이 아프고 오해를 받고 갈등을 겪을 때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내 삶의 사명과 목적과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며 일어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내 삶을 고치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히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고난은 인내하고 용기를 내어 통과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통해 내 삶을 고칠 때에 가장 큰 유익을 얻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존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고쳐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사고방식, 생활태도, 습관,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일하는 습관, 예배하는 습관 등 거의 모든 것을 완전히 고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문제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이는 성화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고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난을 그 기회로 삼는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참 사랑은 우리를 아프지 않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징계까지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과 시련을 통해 징계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인내와 용기와 겸손으로 대하여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고난과 시련 가운데 계십니까? 그것을 어떤 태도로 대하시나요? 그 고난과 시련이 여러분에게 최고의 유익을 주는 기회로 삶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