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7:1-11/꿈꾸는 성도
170212 주일설교
요셉
자, 오늘부터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창세기의 마지막 주인공입니다.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1-11장의 전반부와 12-50장의 후반부입니다. 전반부는 흔히 원역사로 부르는 세상의 창조부터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의 이야기 등을 다루고, 후반부는 선택받은 족장들의 역사로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인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족장사와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출현의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어떻게 이집트로 건너가서 큰 민족으로 태어나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요셉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차차 살펴보게 되겠지만 아브라함이 성도의 사명과 믿음에 대하여 가르치고 야곱은 자격없는 이들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가르친다면 요셉은 인간의 악행과 우연 너머에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
오늘 본문은 요셉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헤브론에 거주하던 시절인데요, 아버지 야곱과 아들 요셉 그리고 요셉의 꿈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오늘은 이 야곱과 요셉 그리고 꿈 이야기가 주는 교훈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야곱에 대해 살펴봅니다. 2-3절입니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야곱)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창 37: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야곱은 요셉을 편애합니다. 야곱이 거의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내인 라헬의 아들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채색옷은 대부분의 아들들이 입었을 무채색의 옷과 달리 화려할 뿐 아니라 소매길이와 옷길이가 길어서 노동에는 적합하지 않은 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옷이었습니다. 요셉에게 이런 옷을 입혔다는 것은 그에게 형들과 같은 노동을 시키지 않겠다는 것 뿐 아니라 그를 자신의 상속자로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편애는 사실 이 가문에서 뿌리깊은 것입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의 경우를 봐도 그는 큰아들 에서를,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작은아들 야곱을 각각 편애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경우도 서자인 이스마엘보다 적자인 이삭을 더 사랑함으로 형제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편애는 비극을 불러옵니다. 아브라함의 편애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다툼을 불러옵니다. 이삭의 편애는 에서와 야곱의 갈등과 살해시도를 초래합니다. 역시 야곱의 편애는 형들의 동생요셉살해시도사태까지 초래합니다.
결코 건강한 태도일수없는 편애가 초래하는 비극을 보면 오늘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가정과 자손들에게 초래할 결과에 대해 경각심을 갖지않을 수가 없습니다. 편애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잘못된 선택과 행위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까지 비극을 초래합니다. 자녀들에 대한 학대나 폭력, 무관심, 배우자에게 충실치 못하거나 부정함, 부모에 대한 불효와 거역 등은 모두 우리 자신과 후손들의 삶에 시한폭탄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터집니다. 시간의 문제일뿐입니다.
반대로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은 곧 그들을 가정과 후손들을 위한 복이 자라는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사랑과 섬김, 책임과 배려는 배우자를 축복하고 자녀와 부모와 형제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을 퍼드립니다.
흔히 나비효과라고 부르는 카오스 이론은 초기값의 미세한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는 현상을 말합니다. 북경에서 나비가 한 날개짓이 일으킨 공기의 움직임이 태평양에서 허리케인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저주도 행복도 모두 이 나비효과의 영향을 받습니다. 엄청난 악행만이 불행을 불러오는 것도 아니고 위대한 선행만이 행복을 불러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별것아닌 것 처럼 보이는 작은 선택이 불행의 태풍을 몰고 오기도 하고 행복의 동산을 건설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불행의 폭탄을 심고 계십니까, 행복의 나무를 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행복의 나무를 심는 성도들이 되시길 빕니다.
역경의 가치
두 번째로 살펴볼 대상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족장들 중에 가장 모범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성숙과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편애를 받는 것이 형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물론 몰랐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창 37:2)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17살에게 형들의 심기까지 헤아리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더해 그는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철부지의 모습이었습니다. 5절도 보십시오.
(창 37: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 (창 37:8)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밀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창 37: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요셉은 또 형들과 부모가 자신에게 절하는 꿈 즉 자신이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꿈을 거침없이 입에 담음으로써 형들의 미움과 시기를 더욱 키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재수없는 인간이 누구입니까? 제 잘난 줄만 알고 다른 이는 무시하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성공한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기를 받을수밖에 없는데 다른 이들은 무시하면 더욱 미움을 받고 자기 잘난 줄만 알면 더욱 비난을 받게 됩니다. 재수없음의 3종 세트입니다. 조금이라도 성공한 사람들은, 돈을 벌거나 공부를 했거나 지위를 얻은 이들은 그러므로 더욱 겸손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겸손과 현명함의 덕목을 그러나 17살짜리에게 기대하기는 무리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정확히 밥맛없음 3종 세트를 다 가졌습니다. 아버지로부터 편애를 받는데 형들을 고자질하고 자기는 성공할 거라고 거듭 떠벌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철부지 요셉이 어떻게 족장들 중 가장 현명하고 모범적인 인물로 꼽히게 되었습니까? 후에 이집트를 구하고 그의 동족들을 모두 구해내고 위대한 용서의 본을 보이는 요셉으로 바뀌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순전히 성경의 기록으로만 보자면 그 사이에 두 가지 변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역경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살해당할 뻔 하다가 노예로 팔려가 10여 년을 견딥니다. 힘겨운 노예생활 끝에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이번에는 3년간 감옥에 갇힙니다. 인생의 황금기 13년을 노예와 죄수로 보낸 이 역경의 시간은 철부지 요셉을 위대한 정치가이자 인격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역경 그 자체만으로는 사람이 성숙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변수로 역경을 대하는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요셉은 이 역경을 신앙으로 감당하였습니다. 그 사실은 그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겨낼 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경과 신앙이 만나면 철부지를 위대한 인물로 바꾸는 신기한 화학작용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이 두 가지 원소가 있습니까? 혹시 역경만 있고 신앙은 없지 않는지요? 신앙은 있는데 역경을 피해다니는 것에만 몰두하지 않는지요? 여러분의 삶에도 요셉과 같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위대한 화학작용이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꿈꾸는 성도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꿈입니다. 흔히 요셉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창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종종 이 본문을 가르치기를,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된 것은 이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꿈을 꾸고 비전을 품으라고 설교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는 것이 성공확율을 높이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자기계발의 방법으로 목표설정은 분명 유익한 일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강조하는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첫째, 이 꿈은 요셉 자신이 품은 목표나 계획이 아닙니다. 자기가 꾸려고 해서 꾼 꿈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둘째, 이 꿈의 의미를 요셉 자신도 몰랐습니다. 이 꿈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는 이집트의 총리가 된 후 형들이 와서 자신에게 절을 할 때 비로소 요셉이 이해했습니다. 셋째, 요셉은 이 꿈의 성취를 목표로 산 것이 아닙니다. 이 꿈 때문에 주체적으로 이집트로 내려가거나 보디발의 집에 가거나 감옥에 가거나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타의에 의한 것이요, 그의 입장에서는 타인의 악행 때문이고 우연히 벌어진 일이고 그 의미를 도무지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며 이 꿈의 이야기가 가르치는 바는 무엇입니까? 첫째, 이 꿈은 요셉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꾸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 이 꿈의 의미는 단지 요셉을 총리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그 꿈대로 요셉은 총리가 되고 부모와 형제들이 다 그에게 절하는 일이 일어나지만 그 사건은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을 이루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더 큰 계획은 아브라함이 자손을 이집트로 이주시켜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일하신 분은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요셉의 삶을 이끌어 갔고 요셉은 매 순간순간 신앙으로 반응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의 꿈, 비전이라는 것은 첫째로 그 출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일정한 지위에 오르는 등 소위 성공의 꿈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반은총을 누리며 사는 모든 사람들, 신자와 비신자가 상관없이 더 유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세우는 목표입니다. 신앙을 이런 성공을 이루는 도구로 가르치고 여기는 것은 우주왕복선을 타고 마켓에 장보러 가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핵폭탄으로 노루 한 마리 잡으려는 것과 같은 바보짓입니다. 성도의 비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둘째로 우리 삶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 합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은 교회를 섬기기 위함이고 비지니스를 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고 교수가 된 것은 학문의 세계를 넓히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삶과 그 속의 사건들은 그보다 더 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시는 그 큰 그림을 우리는 못 보기 때문에 그저 눈 앞에 보이는 작은 그림의 의미만 이해할 따름인 것입니다. 마치 거대한 도시의 설계자는 도시 전체를 보고 있지만 한 명 한 명의 목수와 석공과 기계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집, 건물에서도 일부 작업만 열심히 할 뿐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인생의 목표를 이루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수없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나의 이 고난과 시련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면 분명 그 사건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뜻을 이루어가는 재료가 됩니다. 요셉의 성공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일부로 쓰임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반응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이 사실을 믿는 성도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온 세상을 덮는 꿈을 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그 나라를 가득 채운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꿈을 꾸고 계신지요? 요셉에게 꿈을 주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꿈을 주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