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5:18-24/공의를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170226 삼일절 주일설교
분별하지 못 하는 세대
오늘은 어느 신문의 사설 일부를 읽어드리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잠깐 들어보시겠습니다.
“최근들어 불법 폭력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선량한 시민과 학생들이 불순한 일부 무리의 선동에 휘말려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다른나라의 사례를 가져와 정부를 비판하는데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한 이해없이 무조건적인 대입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평화시위가 아닌 불법 폭력시위에 정부는 다른 시민들에 대한 무고한 피해를 막기 위하여 진압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확한 진실을 알아보려는 노력도 없이 단순한 군중심리와 감정에 휩쓸려 시위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정부의 정책에 일부 불만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는 틀림없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요구는 정부에서 이미 연구중인 부분이 많으므로 불법 폭력 시위로 혼란을 조장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차라리 부단한 자기개발을 통해 더욱 윤택한 삶을 누리는데 집중하는게 더 좋을 듯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신문의 논조에 동조하시겠습니까, 반대하시겠습니까? 듣고보면 틀린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만, 문맥을 모른 채 판단하기 어려우시겠지요? 이 글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이 삼일절의 기원이 된 1919년 3월 1일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진 지 한 달 정도가 지난 4월 5일과 9일 그리고 5월 30일에 세 차례에 걸쳐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완용이 매일신보에 경고문이라는 제목으로 실은 글의 일부를 현대식으로 표현을 고쳐 읽어드린 것입니다. 이제 판단이 분명해지셨지요? 유례가 없는 평화시위였던 삼일독립만세운동을 폭력시위라고 매도한 것이고 독립운동가들을 불순한 세력이라고 매도하고 일제치하에 착취당하는 조선을 발전하고 있으며 독립 따위의 이상에 현혹되지 말고 자기계발을 통해 더욱 윤택한 삶을 구할 생각이나 하라는 것이니 이 얼마나 거짓되고 불순한 주장입니까?
문제는 지금은 이토록 분명한 판단이 그 당시에는 그리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2천 만명 정도였던 조선인들의 십분의 일인 200만이 넘는 이들이 거리로 달려나와 헌병대의 총칼 앞에 목숨을 걸고 독립을 외쳤건만 당시 조선인들 중에서는 이완용의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 눈에는 이 민중들의 처절한 외침과 독립을 향한 갈망이 그저 부질없는 짓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독립선언문의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 지도자였다는 것을 비롯한 자랑스러운 교회의 독립운동역사를 자주 들어왔습니다만, 그 반대로 친일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거나 혹은 소극적으로 방조한 어두운 역사도 없지 않았습니다. 2013년 한국의 기독교방송 CBS가 8.15특집다큐로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는 프로그램을 방송하였습니다. 그 프로그램에는 1936년 감리교를 시작으로 1938년 장로교까지 차례로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을 비롯하여 일제의 전쟁을 옹호하고 기독청년들을 전쟁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것, 일제의 전쟁자금을 헌납한 것 등의 친일행위가 낱낱이 고발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토록 분명하게 보이는 옳고 그름이 당시에는 왜 그토록 분별하기 어려웠을까요? 오늘은 이 문제를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에도 그 당시와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이런 일련의 사태를 분별하기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최근 페이스북과 카톡 등으로 뉴스의 형식으로 퍼지고 있는 온갖 조작된 거짓 뉴스에 속아넘어가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조작된 선동임에도 그것이 거짓인지 알지 못 하고 속아넘어갑니다. 조금만 분별을 가지고 살펴보면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고 얼마지나지않아 그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들인데 지금 당장 속아넘어가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옳은 것과 이익이 되는 것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옳은 것보다 이익이 되는 것을 구하며 사는 삶의 방식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젊은이들에게 10억이 생긴다면 감옥에 3년 들어가 사는 것을 택하겠느냐는 설문조사에 적지않은 이들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옳게 사는 것보다 부유하게 사는 것을 더 선호하는 세태를 반영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옳은 삶이 아닌 부유한 삶, 안락한 삶을 구하며 살면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욕심에 눈이 가려 단순하고도 분명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재작년에 개봉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에서 변절한 독립운동가 염석진(이정재 분)을 암살하러 온 안옥윤(전지현 분)이 ‘왜 동지를 팔았느냐’고 추궁합니다. 그 때 염석진은 ‘누가 독립될 줄 알았나’라고 답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독립운동이 옳은 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느 편이 이길 것이냐 였던 것입니다. 조국이 독립될 줄 알았더라면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고 영광을 누리지 왜 변절자, 친일파 소리를 듣는 길을 갔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누가 생각해도 독립은 불가능한 길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옳은 판단을 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일입니다. 옳은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판단이 간단합니다. 그런데 어느 것이 내게 유익하냐를 생각하니까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항일운동을 왜 계속하느냐는 질문에 안옥윤은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니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옳은 삶을 사는 것이지 그 결과로 얼마만한 이익을 얻을 것인가가 아니었습니다. 혹 목숨까지 바쳤는데 조국이 독립되지 않는다해도 그것이 옳은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경기도 용인의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는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 등 600여 명의 순교자들의 이름이 헌정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한 분으로 작은 시골교회 전도사였던 권언호 전도사가 있습니다. 그는 일제의 종교탄압이 극심했던 1941년 신차참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가 천황모독의 죄명으로.3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신사를 참배하면 풀어주겠다는 회유에 권전도사는 답하기를 “삼천리강산이 다 감옥인데 이 감옥에서 나간다고 풀려날 리도 없고 난 우상숭배를 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안락한 삶이 아닌 옳은 삶을 구하는 분이었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히 판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지러운 정국을 보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한 판단이 안 됩니까? 혹시 우리가 옳은 삶이 아니라 안락한 삶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십니까? 안락한 삶이 아니라 옳은 삶을 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바른 역사와 그릇된 역사
두 번째로 옳고 그름이 분별이 안 되는 이유는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의식이란 무엇입니까? 쉽게말해 그것은 어떤 역사가 옳은 것이냐를 판단할 줄 아는 분별력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차원의 도덕관념과 같은 것입니다. 도둑질, 거짓말, 간음이 나쁜 것이고 친절과 구제와 성실은 옳은 것임을 아는 감각을 도덕관념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지를 아는 의식, 그래서 한 민족과 문명의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옳은 것인지를 판단하는 의식을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적 교회는 개인의 도덕의식을 가르치는 데는 열심을 내어왔지만 공동체의 역사의식을 가르치는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해 왔습니다. 그래서 도둑질, 거짓말, 간음은 하면 큰 일 난다고 하면서 훨씬 더 큰 폐해를 만들어내는 독재와 부정부패, 사회적 불의에는 침묵하는 그리스도인을 양산해 왔습니다. 성경은 도덕관념을 우리에게 가르치듯 역사의식 역시 가르쳐주십니다. 구약의 선지서들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최고의 번영기에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통치자 여로보암 2세는 다윗과 솔로몬 이래 가장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북쪽으로는 지금의 시리아를, 동쪽으로는 지금의 요르단 지역을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무역로를 장악하고 중계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부강해지면 지식인들은 모두 통치자에 대해 용비어천가를 불러 마땅할 것 같지만 왕궁의 비호를 받는 대부분의 선지자들과 달리 아모스는 여로보암 2세의 통치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번영이 소수의 지배층에게만 집중된 것이었고 오히려 대부분의 민중은 더 심한 착취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부익부 빈익빈이 극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18절 이하를 보십시오.
(암 5: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 (암 5: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암 5: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열심히 안식일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종교적 헌신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입니까? 다음의 이유 때문입니다. 11-12절입니다.
(암 5:11)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암 5: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암 5: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약자를 착취하고 부당한 세금을 거두고 의인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고 성문 즉 재판정에서 돈있는 자는 풀어주고 힘없는 자는 가두는 불의한 재판을 하였습니다. 이런 불의와 빈부격차로 인하여서 이스라엘은 비록 부강한 듯 보이지만 결코 바르게 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의한 삶을 돌이키지 않으면 그들의 화려한 집과 아름다운 포도원을 누리지 못 할 것이며 결국 망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데자뷰를 보는 것 같지않습니까? 부정과 부패의 모습은 몇 천년이 지나도 어쩌면 이리도 똑같은지요. 한국이 IMF 이후, 미국은 2007년 경제위기 이후 빈부격차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사회전체의 재화는 계속 늘어나는데 그 대부분을 소수의 수퍼리치들이 독점하고 중산층이 몰락하고 빈곤층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아모스의 이 경고는 그러므로 오늘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경고대로 여로보암 2세 때의 번영은 북왕국의 마지막 호황기였습니다. 얼마지나지않아 앗수르라는 제국에 의해 북왕국은 잿더미가 되고맙니다. 살길은 무엇입니까?
(암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암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암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이스라엘의 살 길은 악을 버리고 공정한 재판을 하고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역사의식이란 이런 것입니다. 나라가 아무리 부강해도 그것이 지배층과 소수의 번영일 뿐이라면 결코 바른 것이 아니며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가 다스리는 사회가 옳은 것이며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약자를 돌아보지 않는 사회, 더불어 살지 못 하는 사회는 결국 망하고 만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의식을 가지면 오늘 벌어지고 있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태 속에서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히 분별하여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역사의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역사와 이 미주땅의 역사를 대해야 합니다.
오늘 2017년의 삼일절을 맞아 우리가 조국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분별없이 거짓에 휘둘리지 않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바른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대를 분별하고 의의 길을 가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