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2 광야에서 하나님은 / 민23:3~12 / 노재균 목사

20170312 광야에서 하나님은 / 민23:3~12 / 노재균 목사

광야에서 하나님은 (민수기 23:3-12)

사순절

교회력으로 사순절 둘째주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40일 전부터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또 경건을 훈련하는 시간이 바로 이 사순절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사순절을 40일이나 지켜야 하는지 궁금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화창한 봄날에 40일 동안이나 사순절 기간이라는 이유로 절제하고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려니까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40일이라는 기간을 정한데에는 성경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성경에 40이라는 숫자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위한 연단을 거치는 기간으로 40이라는 숫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금식하신 시간이 40일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옛 시대의 모든 것을 씻어내는 비가 내렸던 기간이 40주야, 40일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도망 나와 광야에서 연단을 거친 이후에 다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 다시 애굽으로 들어가기 까지 걸린 시간이 40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광야에서 연단을 받았던 시간도 40년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40이라는 숫자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위한 연단의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순절을 지킵니다. 40일 동안의 연단과 훈련을 거쳐서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기 위해서 사순절을 지킵니다. 비록 40일이라는 시간동안 절제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이 시간을 거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40일간의 훈련을 잘 마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난 주에 조유환 목사님은 예수님의 40일간의 광야에서의 금식 이후에 받으신 시험과 승리에 관한 본문을 통해서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의 광야 생활에 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광야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민수기 말씀입니다. 민수기라는 제목은 백성 민 자에 숫자를 세다 수 자를 써서 본문에 나오는 두번의 대대적인 인구조사로 인해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그런데 민수기의 히브리어 원제목은 사실 버 미드발, in the wilderness, 광야에서 라는 제목입니다. 이 민수기의 지리적 배경이 하나님께 계명과 율법을 받은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헤매던 바란 광야로 그리고 가나안 땅 맞은 편인 모압 평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사전적으로 광야는 넓은 들이라는 뜻이지만 성경에서 나오는 단어, 미드바르 라는 단어는 쉽게 말해서 풍요로운 땅과는 정반대의 땅입니다. 척박하고 황폐한 땅, 어쩌면 사막에 더 가까운 땅, 물을 찾기 어려운 땅, 그래서 제대로 된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땅, 고난과 고통의 땅,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죽음의 땅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광야가 종살이 하던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광야를 빙빙 돌면서 무려 40년 동안을 지내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쁨과 즐거움의 땅이 아니라, 풍요와 풍족함의 땅이 아니라, 안정과 평화의 땅이 아니라, 광야로, 고통과 고난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시기 원하셨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선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훈련과 연단”입니다. 40이라는 숫자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광야에서 생활을 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가나안 민족들과의 전쟁을 치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 애굽의 종이었던 그들은 이스라엘의 전사로 세워지기 위한 연단과 훈련을 반드시 거쳐야 했습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 한분만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훈련이 없이는 이 전쟁을 승리고 이끌 수 었었기 때문에 광야에서의 “훈련과 연단”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새로워지기 위해서 40년이라는 시간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보내셔서 그곳에서 40년 동안을 헤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이 맘에 안들어서 그들을 괴롭히기 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전쟁에서 승리케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광야훈련

사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마치 광야를 헤매고 있는 것과 같은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우리를 광야로 몰고 갑니다. 경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비지니스는 계속되는 내리막길입니다. 렌트비와 모기지, 자녀의 교육비, 등록금 등 여기저기에 들어갈 돈은 점점 늘어가면서 가계 빚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건강의 문제가 우리를 광야로 몰고 갑니다. 예상치 못했던 질병으로 인해서, 삶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지속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광야가 됩니다. 관계의 문제들이 우리의 삶을 광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매일 마주쳐야 하는 사람과의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사랑했던 사람으로 부터 받은 깊은 상처가, 내 주위의 내 편은 한명도 없는 것 같은 외로움이 우리의 삶에 있는 광야 입니다. 오랜 기간 해결되지 않는 우리의 기도제목, 신분의 문제, 가족 구원의 문제, 결혼의 문제 등이 우리를 광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그런 광야를 지나며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왜 우리 삶에는 이런 어려움이 있고, 고난과 고통이 있나요?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들인데 왜 우리의 삶에 있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건가요? 아니 왜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더 힘들어지는 겁니까?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게 맞는 건가요?”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실 때,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연단과 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영적 전투를 치뤄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이라는 강력한 적과 이 영적인 전투를 싸워야 합니다. 사탄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는 수없이 많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움과 시기, 낙심과 실망, 탐욕과 정욕,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자유자재로 자기의 무기로 사용하면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는 그 사단 앞에서 아무런 준비없이 나갈 때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에 세우시고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강하게 만드십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믿음의 용사를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사라지고 우리의 모난 부분은 깎이고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게 되는 연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광야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거나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인생의 광야를 지나가고 계십니까?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바라보고 끝내 우리를 완전케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1.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그런데 사실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를 지날 때 광야가 훈련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거나, 광야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성장해야겠구나라는 마음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힘든 우리의 맘에 더 무거운 짐을 올려놓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위로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괜히 더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께 되묻고 싶어집니다. 그럼 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내가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은 어디계십니까? 하나님은 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마치 조교처럼, 우리가 이 어려운 훈련 받게 해놓고, 그냥 뒷짐지고 물러나 계시는 것입니까? 나는 이렇게 힘들고 나는 이렇게 어려운데 하나님은 도대체 무얼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동안 광야를 헤매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했습니다. 낮의 구름기둥과 밤의 불기둥을 통해서 그들이 나아갈 길을 인도받았고 만나와 매추라기를 통해서 그들이 먹을 것을 공급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40년동안이나 광야에 머물러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들에게도 이러한 물음을 묻고 싶을 마음이 있을 법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제대로 하고 계신 것 맞지요? 우리는 열심히 이 광야를 구르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릴 크게 신경 안쓰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이제 이 생활도 끝날 법도 한데 하나님 잊어버리고 계신 것은 아니죠?

오늘 우리는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 잃어버린 하나님의 행적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광야를 지나며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을 때, 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22-24장에 걸쳐 나오고 있는 한 사건의 일부입니다. 이 3장에 나오는 한 가지 사건의 중심에는 발락과 발람이라는 두 모압인이 있습니다. 이 3장의 말씀은 민수기의 말씀 중에서 좀 튀어 보이는 말씀입니다. 민수기 말씀이 이스라엘의 시점으로 진행되다가 이 22-24장에서는 갑자기 이 두 모압인의 시점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22장 1절에 나와있습니다.

(민 22:1) “이스라엘 자손이 또 길을 떠나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

이스라엘은 모압 평지, 요단 강 건너편에 진을 쳤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보고 있던 모압인들은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면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모리인들의 땅을 지나가길 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모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이로 인해 촉발된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모리에 크게 승리했다.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던 모압 사람들은 그들이 거주하던 곳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진을 친 모압평지는 매우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가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저 건드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거취를 고민하던 모압의 왕, 발락은 한 사람을 찾게 됩니다. 바로 발람이라는 하나님의 선지자엿습니다. 그는 꽤나 능력이 있는 선지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면 그대로 이뤄지는 사람, 그가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가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발락 왕은 이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불러서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주기를 부탁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신통한 능력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저주해주기만 하면 모압인들이 그들을 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어떤 선지자였습니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시라고 부르기를 기뻐하셨던 그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를 비는 것을 허락하실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몇번이고 발락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하지만 발락은 포기 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높은 관리들과 더 많은 재물을 보내어 발람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발람은 당연히 안될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물어봅니다. 하나님은 결국은 발람에게 그들과 함께 가라고 말씀하시면서 대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는 말만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발람은 발락 왕에게 가는 길에서 손에 칼을 빼들고 그 길을 막고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납니다. 그의 나귀는 그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길을 돌이키려 했지만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했던 발람은 그냥 이 나귀가 갑자기 말을 안듣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발람은 화가 나서 나귀를 때리고 하나님이 불쌍한 나귀의 입을 열어주시자 나귀는 발람에게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그제서야 눈을 뜨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한 발람은 두려움 가운데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발락에게 가서 자신이 이르는 말만을 하라고 다시 한번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결국 발락왕 앞에로 나아간 발람 선지자, 발락 왕은 발람을 기쁘게 영접하면서 그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발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대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말씀을 쏟아붓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이 발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한 말씀입니다.

(민 23:7-10)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발락왕은 깜짝 놀랍니다. 자신은 저주를 해달라고 불렀는데, 축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발락왕은 발람에게 따져보지만 발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발락은 그 이후로도 2번이나 자리를 옮겨가면서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주기를 부탁하지만 발람은 그때 마다 하나님께 받은 축복의 말로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바로 이 사건이 민수기 22-24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3장에 걸친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이 이야기는 철저히 발락과 발람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런 이야기들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그냥 광야를 지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똑같은 광야에서의 하루를 보냈을 뿐입니다. 아마 그들은 평범한 광야의 하루, 막막하고 답답하고 어려움으로 가득차 있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아마 오늘도 특별한 것 없이 힘든 하루였다가 이야기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아직도 들어가지 못한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어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우리가 광야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계시는지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광야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고 저주하려고 하는 발락의 계략,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처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이 발락 왕에게 가는 길을 막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발락왕의 회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못하도록 그 입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광야를 지나며 그것이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위태로운 상황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를 지날 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위협으로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우리의 눈에는 지금 나의 광야가 최악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그 광야는 정확히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습니다. 훨씬 더 나빠질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일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인식도 하지 못하고 넘어가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현실에 대해서만 불평과 불만을 하게 되지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로 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한 병사가 적군을 향해서 돌진하던 중에 발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그 병사는 그 총탄으로 인하여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발에 맞은 총으로 인하여 오랜 치료의 시간을 거치거나 심할경우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할 지 모릅니다. 하나님 나를 보호하시지 않고 무엇을 하고 계셨냐고 원망과 불평의 말이 나올 법 합니다. 그런데 그 병사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총에 발을 맞아서 자리에서 쓰러지고 난 후에 자신이 달려가려던 그 길에서 폭탄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총에 맞아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는 그 폭탄으로 인하여 즉사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그 병사는 그 총에 맞았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셨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광야에서 하나님을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광야라고 느꼈던 그 시간이 사실은 우리를 피난처와 같은 시간이었을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궁핍함과 같은 우리의 광야가 세상의 쾌락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피난처일 수 있습니다. 건강의 어려움과 같은 우리의 광야가 예배가 아니라 필드로 나가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피난처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다양한 문제로 인해 찾아오는 광야가 우리의 교만, 자랑, 스스로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피난처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광야에 있을 때 광야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고 계십니다.

두번째로, 광야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고 계십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발람의 입을 막아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게 한 것에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입을 열어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박람도 발락왕이 두려웠을 것이고 발락왕이 약속한 재물과 권력도 탐이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했습니다. 그를 능히 언제든 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두려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발람을 통해서 주시는 축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축복이라는 말의 의미는 복을 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고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냥 축복하시는 것, 복을 빌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광야를 지날 때 우리에게도 복을 주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광야를 통해 복을 주시고 광야의 끝에서 영원한 상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광야를 지날 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한 아이가 기타를 치기 위해서 처음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때 한손으로 기타의 코드를 잡는 연습을 시작하는데 아이의 손으로 기타 코드를 잡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쇠로 된 기타 줄을 오랫동안 잡고 있다가 보니까 손가락 끝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빨갛게 부어 오르고 거칠어지고 심지어는 갈라지기 까지했습니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날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기타를 배우려면 크든 작든 이러한 아픔은 누구나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통해서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배기기 시작하면서 그 때부터는 코드를 잡는 것이 점점 쉬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는 자기의 손가락이 아픈 것으로 불만을 갖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광야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계십니다. 어려움과 고난의 광야를 통해서 사실 하나님은 영적인 복을 주십니다. 광야를 통해서 연단을 받는 우리는 하나님께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 찾게 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 밖에 도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자아는 점점 깎이게 됩니다. 내가 잘난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도 나처럼 힘드셨겠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와 같이 느껴지는 우리의 인생의 광야 같은 시간은 우리의 영에 있어서는 놀라운 축복의 시간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모든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고 계십니다.

 

결론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한가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잊어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고통 당하고 있을 때, 내가 어려움을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회막이 이스라엘 회중 한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것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우리에게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인간의 삶이라는 광야 가운데로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광야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눈을 보여주신 증거 였습니다. 이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광야 가운데서도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 예수님을 묵상함으로써 우리 삶의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그 광야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계시고 축복하시고 계심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