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고난 (마가복음 6:1-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생즉고
고타마 싯타르타, 우리에게 보다 잘 알려진 이름으로는 부처라고 불리는 한 인물은 현재의 네팔인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는 궁전 안의 안락함 만을 누리고 살았던 싯다르타는 어느날 궁 밖으로 나와 밭갈이를 하는 농부를 보고 인간들이 수고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인간 사회의 고통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인간이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생로병사라는 4가지 괴로움,고통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삶을 정의내립니다. 생즉고, 삶은 즉 고통이다. 오늘은 분명히 교회에 왔는데 내가 간판을 잘못보고 절에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보고 들어오셨습니다. 제가 고타마 싯다르타의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 그가 파악한 인간의 삶의 현실, 생즉고, “삶은 고통이다.”라는 말이 비록 부분적이긴 해도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고 죄악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은 고통, 고난입니다. 고난의 연속, 어제의 고난에 이어 또 다른 오늘의 고난이 찾아옵니다. 매일의 고난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고난
오늘 설교 제목은 “매일의 고난”입니다. 매일의 고난 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을 때 생각나는 것은 아마 “우리의” 매일의 고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매일 매일 고난을 경험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주중에 하루를 골라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는 여러 다양한 종류의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귀찮음이나 하기 싫음 정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심각한 수준의 고통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매일 고난을 경험한다는 것은 변함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 자체가 고난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람이 울리는 것이 두렵습니다. 잠은 부족하고 몸은 찌뿌둥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억지로 눈을 떠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에겐 아침 출근길이 고난입니다. 춥고 졸린데 앉을 자리 없이 빽빽하게 가득찬 출근 버스를 타는 것은, 아니면 차들로 꽉 막힌 도로에 들어서는 것은 아주 괴로운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개인 비지니스를 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오늘도 뼈빠지게 일을 해보지만 렌트비와 전기세, 보험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은 얼마 안됩니다. 그래도 그나마 뼈빠지게 일 할 거리가 있을 때는 그나마 다행인데 오늘은 그 일거리조차 얼마 되지 않습니다. 경기가 점점 나빠지고 벌써 몇달째 적자라서 오늘 하루 비지니스를 여는게 하루치의 빚을 더 쌓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회사에서 일하는게 고난입니다. 해야 되는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상사는 그새 또 다른 일을 줍니다. 클라이언트의 말도 안되는 요구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오늘따라 저기압인 사장님의 기분 때문에 일하는데 하루종일 찬바람이 생생 붑니다. 일은 못하지만 약삭 빨라서 나보다 더 인정을 받거나 개인실적이 좋은 동료 때문에 자존심이 상합니다. 이 일을 하면서 나한테 어떤 개인적인 발전이 있는 지를 생각해볼 때 마음이 답답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찾아볼 용기도 시간도 없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관계로부터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아내와 남편과 크게 말다툼을 합니다. 매일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가족 가운데 갈등으로 인해서 오늘도 마음의 상처가 생기고 또 덧납니다. 오늘 따라 친구나 동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내 마음에 심하게 거슬립니다. 또한 건강으로 인해서 오는 실제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오래 앉아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허리와 목의 통증, 소화불량, 시시 때때로 찾아오는 두통, 마디마디 쑤시는 관절의 통증, 그리고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 이러한 고통이 우리의 매일에 찾아오는 고난,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느껴야 하는 고통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모두 마치고 나서도 고난은 끝나지 않습니다. 주위가 조용해진 밤은 고민과 걱정들이 찾아오는 밤 입니다. 부모님의 건강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직도 수십년이 남은 모기지 페이먼트의 문제, 은퇴 후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노후 자금의 문제, 자녀 공부의 문제… 세상 어느 것 하나도 참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결되지 않는 이 고민 저 고민에 머리가 터지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는데 어느새 늦은 밤입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날 것을 생각하니까 자기 전부터 한숨이 나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이러한 고난을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물론 지금 이야기한 것들은 삶의 고난 부분에만 집중한 것이기는 합니다. 우리의 매일 매일의 일상에는 행복한 일도 즐거운 일도 많고 아니 즐거운 일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분명히 매일의 고난이 있고 그 중에 어떤 것들은 꽤 심각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매일의 고난”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 자신의 “매일의 고난”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고난의 이유
하지만 오늘 이 설교를 통해서 나누기 원하는“매일의 고난”은 “우리의” 매일의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의” 매일의 고난” 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매일의 고난을 겪으셨을까요? 사실 예수님의 매일의 고난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우리의 매일의 고난과 매우 밀접하고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당하신 “매일의 고난”은 우리가 당하는 “매일의 고난”과 마찬가지로 인간이기 때문에 당한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매일의 고난”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인간, 한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고, 그 한계로 인해서 세상의 어떤 일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의도한대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내 마음 같지 않고,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원하는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매일의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활기가 넘쳐서 눈이 저절로 번쩍 떠진다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왜 고난이겠습니까? 출근길이 홍해처럼 갈라져서 막힘없이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고난이 아닐 것입니다. 비지니스가 어떻게 될지를 잘 예측해서 그에 따라서 효과적인 전략을 짠다고 한다면, 직장에서의 하는 일마다 많은 실적을 내고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다고 한다면, 가족, 친구, 동료들과의 모든 관계가 원만하고 남편과 아내와의 마음이 잘 맞아서 부딪히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온 몸이 건강해서 아픈 곳이 없다고 한다면, 신분, 결혼, 노후, 자녀에 대해서 모두 계획대로 진행이 되고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고난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내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내가 가진 한계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한계 때문에 누구나 매일 매일 고난을 겪습니다. 예수님 역시 이러한 인간적인 한계를 경험하셨다는 것이고 그 한계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정말?”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아니, 예수님은 하나님 아니신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무한하신 분 한계가 없으신 분인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그런 한계를 경험하실 수 있다는 것이지 라고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큰 능력을 가지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십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수님이 분명하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가지고 계셨고 인간으로써 고난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오랫동안 금식하신 이후에 배가 고프셨습니다. 예수님도 길을 오래 걸으신 후에 피곤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목이 마르셨고 예수님도 주무셨습니다. 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도 분명히 용변을 보셨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저는 예수님도, 특별히 어릴 때는, 배탈도 나고, 감기도 걸리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모든 인간과 똑같이 육신적인 한계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자신의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한계 안에 가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쓰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또한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그 능력을 제한하시고 기끼어 한계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전에 당하셨던 사단의 시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이후에 배가 고프셨습니다. 사탄이 나타나서 돌을 떡으로 만들어먹으라고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충분히 그럴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셨던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서는 돌로 떡 한덩이도 만들어 드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 속에 처한 다른 모든 인간들과 같이 배고픔을 경험하셨고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능력 없고 한계 많은 인간과 같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한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신 한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을 향해 가셨습니다. 자신의 가족들이 있는 곳, 자신의 친구들이 있는 곳,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놀라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와 권능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이라고 떠셨다거나 이상한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쫓았던 반면, 예수님의 고향이었던 나사렛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왜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듣고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났는지를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누구의 아들인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예수님의 형제가 누구인지, 예수님의 자매가 누구인지를 잘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있는 신적인 권위를 모르고 있었고 반대로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 예수님이 기꺼이 받아들이셨던 인간적인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처럼 배고파했고 예수님도 그들처럼 피곤해 했고 예수님도 그들처럼 아팠던 것을, 예수님도 보통의 인간들과 똑같이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있었던 놀라운 권위를 보았을 때 그들은 괴리감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알던 인간 예수, 인간적인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던 그 예수가 이런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가르칠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상하게 여기고 의심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했고 어떤 이들은 귀신에 쓰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어떤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달가워 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어떤 훌륭한 가르침 앞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어떤 증거 앞에서도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신과 배척을 겪으면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의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매우 인간적인 두가지 반응을 보이십니다. 그 한가지 반응은 5절에 나와 있는대로 “거기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다니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신성을 생각할 때 잘 이해가 안되는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또 다른 반응은 6절에 나와 있는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을 예상하지 못하셨던 것처럼 혹은 그들이 왜 그런 반응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들의 믿지 않는 반응에 놀라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런 반응을 보이실 수 있었던 것입니까? 예수님이 신성 만을 가지신 분이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반응을 보이셨던 것은 예수님이 한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반응은 예수님의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가져야하는 한계까지 완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신적인 능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이었다면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그들이 비록 믿으려고 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기라도 눌러주기 위해서 내 능력을 보여주고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이미 마음의 색안경을 끼고서 어떤 것을 보여줘도 믿지 않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읽고 억지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 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그 상황에 처한 한 인간처럼 자신의 한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고난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실 때, 예수님이 겪으셨을 감정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 자신에게 갖는 오해, 자신을 향한 뒷말과 수근거림, 그로인한 무안과 수치, 자신을 배척하는 굴욕적인 말과 행동, 그리고 그 안에서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답답함, 그 상황에 처한 한 인간이라면 겪어야 할 모든 고난을 예수님도 동일하게 겪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인간으로써의 모든 한계를 가지고 계셨고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고난을 조금도 감하지 않고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받으셨던 매일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매일의 고난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 우리는 때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는 다른 종류의 것일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당해보지 않은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낮아지심으로 받은 고난입니다. 그러한 고난을 하나님이 아닌 우리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저주 당하시고 버림 받으셨던 고난입니다. 그 고난을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모두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고난 역시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겪는 고난과 차원이 다른 종류의 고난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동일한 종류의 고난 역시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매일 겪는 고난과 동일한 이유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경험하면서 마음 아파하고 답답해 하고 눈물 흘리게 되는 그 모든 고난, 우리의 인간적 한계로 인해서 겪게 되는 그 크고 작은 고난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동일하게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연약함으로 받는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배고프셨고, 목마르셨고, 피곤하셨고, 아프셨습니다. 관계의 어려움으로 오는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배신 당하셨고, 무시 당하셨고, 배척당하셨습니다., 경제적인 불안정으로 오는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주리셨고, 잘 곳이 없으셨고, 세금 낼 돈이 없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서는 다음과 같이 반응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1-32절)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한계로 인해서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그 고난을 예수님은 동일하게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와 떨어져서 숭고하고 거룩한 고난만 당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처절하고 지질한 고난 역시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님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연약하고 무력함을 우리의 한계를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어려움을, 아픔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서 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우리의 고난을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 때 예수님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건 별 일 아니야, 나는 너를 위해서 십자가를 졌는데, 그정도는 이겨내야지” 라고 말씀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고난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갈 때 예수님은 “정말 많이 힘들겠다. 니가 힘든 것 나도 알아. 나도 그런 어려움을 겪어 봤어, 나도 힘들었어, 나도 가슴 아팠었어, 나도 이해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와 함께 울어주시는 분이십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매일 매일 당하는 고난을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동정하고 위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고난의 자리 한 가운데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동정하기 위해서 인간의 한계, 연약함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겪는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 받고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기 위해서 기꺼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미 오래전 CF지만 아주 감동적이어서 기억에 남는 한 과자 CF가 있었습니다. 이 CF에는 항암치료로 인하여 머리가 다 빠진 한 여자 환자가 나옵니다.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이 환자는 자신의 빠진 머리가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그런 환자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한 친구가 찾아오는데 어색한 미소를 쓰면서 모자를 벗자 놀랍게도 이 친구 역시 머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레이션이 나옵니다. “친구를 위해 머리를 깎았다.” 친구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그 친구를 위로해주려고 하는 그 여학생이 마음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지 머리를 깎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동정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사순절, 예수님의 고난 묵상
사순절을 맞은 우리는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 삶이 이렇게 힘든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라니요? 일단 나부터 좀 살고 볼게요. 나도 너무 힘들어요. 내가 살아가는 매일 매일도 너무 힘들어요.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 우리는 오히려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내가 오늘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과 상관없는 고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 나를 이해하시는 예수님을 나를 동정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위로를 경험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또 이 기간동안 우리의 매일의 고난을 예수님께 가지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정말 힘들어요. 예수님도 이렇게 힘드셨죠? 예수님 너무 아파요. 예수님도 이렇게 아프셨죠? 예수님 진짜 어려워요. 예수님도 이렇게 어려우셨겠죠?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도 우리에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래 너도 내 아픔을 조금은 알겠지? 나도 너의 아픔을 이해한단다. 많이 아프지? 많이 힘들지? 그런데 괜찮을 거야. 내가 너와 함께 있을께. 너의 손을 잡아줄께. 너와 함께 울어줄께. 너를 도와줄께.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줄께. 너를 보호해줄께. 용기를 가지렴. 내가 세상을 이미 이겼단다.” 이 예수님의 위로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