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2 깨끗케 하시는 예수 / 막1:40~45 / 강용승 목사

20170402 깨끗케 하시는 예수 / 막1:40~45 / 강용승 목사

깨끗케 하시는 예수

막1:40-45

 

오늘 본문은 개역성경에는 문둥병이라고 나와 있는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고침을 받은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관심이 있으시고 그 사람을 놀랍게 회복시키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건은 예수님은 도데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레위기 율법에 따르면 나병에 관한 모든 판정을 제사장이 했습니다. 발병했을 때에도 제사장이 보고 판단했고 병이 나았을 때에도 그것을 확인하고 정결예식을 행하는 것도 역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있어야 공동체 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병을 고치신 이후에 44절에 보면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나병은 지금의 나병보다 범위가 더 넓습니다.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레13:3)”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생살이 생겼으면 이는 그의 피부의 오랜 나병이라 제사장이 부정하다 할 것이요(레 13:10-11)”

정확히 말하면 성경의 나병은, 나병을 포함한 나병으로 의심받는 모든 피부병을 포함한 개념이다.

일단 제사장이 보고 부정하다고 판단하면, 그는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송두리채 잃어버렸습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레13:45-46)”

공동체 이웃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도 외면을 받았고, 성전에 출입하는 것도 금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성전에 가야되는데 갈 수도 없었고,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 은혜 구해야 하는데,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부정하다고 판결하는 사람이 제사장이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도 소외되어짐…. 그래서 그 질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죄에 대한 저주로 여겨졌다.

 

  1.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40절)

먼저 예수님께 나아온 그 병자는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병자가 예수님의 능력에 의 문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중풍병자로서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무릎쓰고 주님 앞에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것.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은 고쳐주시고 어떤 사람은 외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저분이 나를 고쳐주실 것인지 확신을 못하는 것인가?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당신께 나아온 모든 사람에게 응답하셨다.

이 나병환자의 말 “원하시면….” 이라는 말은 그 동안 이 나병환자가 겪은 시간들과 수 많은 상처들을 반영하고 있다.

왜요? 그 동안 아무도 그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함께 하던 이웃도, 심지어 율법의 하나님도…

나병은 육체적 고통과 함께 철저한 외면과 거절속에서 혼자 앓는 병이기 때문이다.

◀◀혼자 아프면 서럽다. 제가 대학 기숙사에서 수업도 못들어가고 끙끙 앓고 있을때… 죽은 커녕 약도 사다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프면 가족들이 돌봐주고… 교우들이 연락 위로 방문하고…(어떻게 알았어? 주보에 났어) 교구에서 심방와서 예배도 드리고… 기도중에 물질로 돕기도하고…

그러는 중에 말씀을 보는데…….에 주님의 은혜로 눈물도 나고..

그러는 중에 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또 나를 위해 신경쓰고 기도해주는 분들이 많이 계시구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구나 라는 것을 통해 힘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무도 없다면…. 만약 가족도 외면하고 .. 연락도하지말라고 하고… 함께 했던 이웃도 매물차게 모른체하고  “그래서 뭐” 한다면.. 오히려 무슨 죄를 그렇게 짓고 살았어라고 비난하고 정죄 한다면…

 

그가 나병을 얻은 이후에 그의 삶은 육체적 고통과 함께 외면과 거절의 시간. 아무도 자신을 원하기는 커녕 가까이 오는 사람도 없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이분이면 충분히 나를 고치실 능력이 있겠구나 라는 확신에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주님 원하시면…”

그의 낮아진 자존감, 그동안의 절망, 그리고 율법이 정한 부정한 사람이라는 정죄의식을 나타내주고 있다

주님 그동안 아무도 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저를 외면하지 않으십니까? 절 받아 주시겠습니까? 라고 묻고 있는 것.

주님이 능력이 있다고 믿지만, 그분이 나 같은 사람도 받아주실 것인가에 자신이 없었던 것.

우리도 기도하다가 갑자기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너무도 간절하게 기도하다가, 내가 뭐라고…., 주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응답해 주실 것인가? 아닐꺼야… 아니여도 할 수 없지뭐…. 이런 마음에 기도의 의욕을 잃어버리거나 주님 앞에 가까이 가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41절)

그런데 오늘 이 나병환자에게 보이는 주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의 감정을 묘사)….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그의 말을 듣고 주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

불쌍히여기심 (σπλαγχνίζομαι, 스플랑크니조마이)”참으로 측은이 여기는 마음, 애절한 사랑”을 나타낸다.

<성경의 예>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채주 앞에서 통사정하는 자의 모습 (마 18:27) –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줌

◀먹을게 없어서 사흘을 굶주린 자의 모습 (마 15:32) –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하나 있는 아들이 죽어 그 앞에서 울고 있는 과부의 모습 (눅7:13) -불쌍히 여기사 울지마라 “청년아 ”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왔는데 비참한 홈리스가 되어서는 이제는 아버지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꺼라 두려워하면서 이제 저를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말하는 그 아들의 모습(눅 15:20)  – 무슨 말이냐. 내 아들아 그게 무슨 말이냐……

오늘  본문은 바로 주님이 그런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넘어지고, 그래서 때로는 기도하다가도 나 같은 것이 무슨 거룩하다고, 뭐 잘한게 있다고 주님 앞에 서겠어 라마 낙심하고 주저 앉으려고 하는 우리를 주님은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마음을 기억해야… 바로 나를 향한 마음이라는 것을….

죄를 지으면 가장 먼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악한 마귀가, 우리의 어리석음이 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잘못된 하나님의 모습을 심어 준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하나님, 정죄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로 가는 우리의 길을 막아버린다.

너 죄지었잖아.. 네가 한거잖아.. . 이게 몇번째야… 스스로 그렇게 하고 떠난 거잖아…

그렇게 하나님 없이 우리의 영적인 상황은 더 악화 되간다.

그러나 주님의 그 마음은 한번도 변하신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

사도바울은….  사망이나 천사들이라도… 현재 일이나 장래 어떤 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롬8).

그 어미는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으리라..(사49:15)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면 – 기쁜 마음으로 사랑 하시고,

우리가 넘어지고 범죄하면 – 아픈 마음으로 사랑 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어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계십니까?

누가복음 15장 세가지 비유. 모두다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는 자의 비유입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동전을 찾는 여인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공통점은 잃어버렸다는 것,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동전은 주인의 실수 때문, 양은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 때문, 그러나 아들은 자신의 의지로!!

비유는 이렇게 내려갈수록 심각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그 모든 비유중에 가장 적극적으로 악하다.  그러나 그 찾는 자의 절박함은 내려갈수록 더하다 (여인, 목자, 아버지).

그런데 놀라운 것, 동전은 주인이 찾았다, 양도 주인이 직접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찾아서 어깨에 매고 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아니 찾으러 갈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올 때 아직 상거가 먼데도 불구하고 뛰어가서 그 아들을 끌어안은 아버지었지만 그 아들을 찾으러 갈 수는 없었습니다. 왜? 집은 나간 것은 아들의 의지적 선택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드라크마 동전처럼 누가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처럼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에 잃어버린 게 아니었어요. 아들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과 악한 의지로 아버지를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스스로 돌이키지 않는 이상 그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돌아오는 것이다. 죄를 짓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뜻은 그 죄인이 그 죄 안에서 괴로워하고 좌절하고 나는 안돼 라고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내 죄값을 다 치르고 나의 잘 못된 것 을 다 고치고 다시 거룩해진 다음에 뭔가를 하겠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상한 마음 그대로, 다시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다시 주여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냥 다시 아버지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멀리서 달려올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1.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41절)

또한 성경은 주님께서 그 나병환자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말해줍니다.

41절 중간부터….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그 나병이 떠나고 그 사람은 깨끗하여졌다고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왜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도 안되고. 부득이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고 외치고 다녀야 했다. 만약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되면 누구든지 먼저 돌로쳐도 합당한 것이었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문둥병자에게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를 접촉하는 것입니다. 그를 접촉하는 그 자체 만으로 그는 그 병이 전염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율법적으로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몸에 심한 질병을 오랫동안 앓고 혼자 지내게 되면 나중에는 그 마음도 함께 병들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소리를 지르게 되고, 사소한 일에도 막 분을 냅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때로는 정상적인 대화도 자신의 마음대로 왜곡해서 이해하고 욕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병수발을 오래하면 그 수발하는 사람도 병들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 그 나병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접촉하기는커녕 가까이 오기도 꺼리는 그런 사람으로 여김을 받으면서 그 마음도 병들어 갔던 것 같습니다. 자기는 늘 거절받는 사람이었고,  다가가면 모두가 뒷걸음질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 자기를 만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치유할 수 있고 또 복음서에서 대부분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셨습니다. 여기서 “데시며”의 단어는 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연이나 실수였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주님은 일부러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의 몸 만큼이나 병든 것이 그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몸과 함께 그 마음까지도 온전히 치료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몸만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만지심으로 다른 모든 존귀한 사람처럼 너도 나에게는 그런 존귀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몸만 치료되고 마음이 치료가 안되면….

아마 지금까지 자기를 거절하고 모질게 대했던 사람들에게 가서, 원망하고, 따지고…. 앙갚음하러 다니겠죠. 마음의 치료가 없으면 결코 온전한 삶의 회복이 불가한 것입니다.

 

  1.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2절)

마지막으로 이제  예수님이 그 부정한 나병환자를 만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줍니다.

주님이 그를 만지셨을 때, 그 사람이 깨끗하여 졌습니다.

◀ 세상의 원리는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이 만나면, 부정한 것이 깨끗해 지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것이 부정해 집니다.

순종하던 아이가 불순종하는 아이들과 어울리면… 같이 불순종하는 아이가 됩니다.

정직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들 틈 바구니에서 비즈니스를 하다보면… 부정한 사람들이 정직해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정직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율법도 그렇게 말합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들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리니나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학개 2:11-13)

세상의 원리, 율법의 원리….

거룩한 것과 죄악된 것이 접촉하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접촉하면…

죄악된 것이 거룩해 지지 않습니다. 부정한 것이 정결케 되는게 아니예요..

그래서 구약의 제사장 레위인들은 자신의 거룩함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정한 것을 접촉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피했다. 그들은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부정한 것과의 접촉을 피해야만 했다.

 

세상의 원리에 따르면, 율법의 원리에 따르면….  부정한 나병환자를 누군가 만지면 그도 역시 부정해 지게 됩니다.

그런데 도데체 예수님은 누구시길래… 부정한 사람을 만졌는데 자신이 부정해 지는 것이 아니라 그 부정한 자가 깨끗게 된만 말입니까?

어떻게 그 부정이 그 거룩함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함과 거룩함이 부정을 이기고 정복하고 변화시키느냐는 말입니다.

구약 레위기에서 하나의 힌트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의 예외를 보여줍니다

구약 율법 레위기를 보면 성전에서 피의 제사를 드릴 때…

◀그 제물의 피를 단 네 뿔에 바르고 그 밑에 쏟으라…. 그 단을 거룩케하라 (레위기 8장)…

◀제사장들.. 그 피로 제사장들의 옷에 뿌려 그들을 거룩케하라 (레위기 8장)

◀또 레위기 16장에 보면 짐승의 피를 뿌려 속죄소와 그 지성소 거룩하게 한다.

무엇이든 뿌려지면 거룩해지는 그 피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 예수님만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정죄감과 영적 침체를 소망과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세상에서는 부정하게 되고 더럽혀집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누구든지… 그분이 만지는 것들은 모두 정결하게 거룩하게 됩니다.

우리안에서 있는 모든 어두운 것 더러운 것 괴로운 것들도  다 그렇게 될 것 입니다.

 

그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시고 만져주시기를 원하신줄 믿습니다.

어쩌면 오늘 나병환자의 그 피부를 만지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가장 내어놓고 싶지 않은 우리의 가장 부정한 부분, 가장 죄악된 부분, 가장 부끄러운 바로 그 부분을 만져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오늘도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그분 앞에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믿음으로 주님이라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라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 삶의 문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 주님께서 만져주시는 모든 것들이

이제 온전케 될 줄을 믿습니다/ 깨끗케 될 줄을 믿습니다/ 거룩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그 은혜에 우리 모든 성도님의 심령에 충만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