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입성 (마21:1-11)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종려주일입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했었고, 무리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 예수님을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이었던 북부 갈릴리에서부터 당신의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에 잡힌 자들을 자유케 하심으로 당신이 메시야 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주의 깊게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경로가 지향점 즉 목표점이 있는 것을 알게됩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은 이렇게 언급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눅9:5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눅17:1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눅18:3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눅19:28)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를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도 이다.
특별히 오늘 본문도 1절에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10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라고 해서 예루살렘이라는 주제가 본문 전체를 감싸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토록 가시기를 원하셨던 예루살렘에는 도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제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왕궁과 부귀영화가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예루살렘 입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 9:22)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16:21)
이제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말씀하신대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무리들은 이러한 주님의 생각과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이것으로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몇가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 주님은우연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감람산 벳바게라는 곳에 이르러 제자 두명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가 함게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처음 이 말씀은 들은 제자들은 조금은 당황스러웠을 것…
맞은 편 마을이라 하심은 한참을 걸어가야 할 것은 당연한거고… 거기에 무슨 짐승이 어떻게 있을지 없을지는 어떻게 알것이며…. 또 매여 있는 짐승이면 임자가 있을 것인데 그냥 가져오라는 말씀이신가…..
아마 그러한 제자들의 마음을 아셨는지 곧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즉시 순순히 보내 줄 것이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데에도 아마 상당한 믿음이 필요했었을 것 같습니다.
참고/마가와 누가는 나귀새끼라고만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는 나귀와 나귀 새끼라고 이야기하고 제자들이 그 나귀와 나귀새끼를 함께 끌고왔다고하는데… 종합해보면 마태의 기록이 가장 자세한 것 같다. 예수님이 필요한 것은 나귀새끼였는데 어미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니 그 나귀새끼를 데려오기 위해서 어미도 같이 끌고 왔던 것 같다.
그런데 암튼 참 기가 막히죠. 정말 제자들이 걸어서 옆 마을로 갔더니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 나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인 것을 풀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아마 주인이 와서 묻길래 “주님이 쓰시겠다고 합니다”라고 했더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또 얌전히 그 나귀를 보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나귀새끼는 예수님께 오게 되었고 예수님의 입성에 사용되어졌습니다.
참 기막힌 우연같습니다. 딱 그 날, 그 동네에, 그 문 앞에, 나귀새끼가, 보통 짐 싣어 나르는 장성한 나귀말고 새끼 나귀가 딱 거기 매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예수님이 시키신대로 말했더니…
예수님은 모든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보셨을까? 누구를 미리 시켰을까? (다른 제자 하나 불러서 다른 제자 몰래 시켰을까요? 입단속?)
아니죠. 주님은 다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합니다. 모든게 다 우연이었어요.
나귀도… 주인이 그날 왜 거기에 매어 놓았는지, 주께서 쓰신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자들에게도… 어떻게 말씀하신대로 그 때에 딱 나귀 새끼가 있고…
그런데 정말로 모든 것들이 우연이었을까요? 주님은 다 아셨고 다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다 우연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전에 만났던 어떤 사람은 자기 시골 동네 교회에서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6학년때까지 6년동안 크리스마스 때만 가서 과자를 얻어먹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안가는데 꼭 성탄절에만 6년 동안이나…., 나중에 너무 미안해서 예수믿었다고….. 다 우연이죠…. 사람은 우연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계획이라고 하십니다. 6년동안 지켜보신 것이죠.
여러분 다 우연이 예수님께 끌려오셨죠? 그래요 다 우연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렇게 됬어요……
친구따라, 부인따라, 예수믿는 부모님따라.. 원래 첨부터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였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지금 여기 앉아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다 우연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연은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모든게 주님의 계획이었다고 하시는 줄 믿습니다.
▶십자가 형은 그 죄수가 자가가 매달릴 삽자가를 지고가게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이미 너무 많이 채찍에 맞고 고난을 당하신 후라 그것을 지고 가지 못하시고 중간에 넘어져서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때 군병들이 그 장면을 옆에서 구경하던 구레네 시몬을 끌어다가 그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합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자기는 그냥 구경하던 중이었고 이 나사렛 사람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는데, 그냥 우연히 속된 말로 재수없게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된 것입니다.
<막15:21>”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그런데 성경에 이 구레네 시몬의 가정이 다시 등장합니다.
<롬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사도바울은 로마서 마지막에 로마교회안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 안부를 전하는데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여기 루포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는 구레네 시몬의 부인인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그냥 우연히 십자가를 진 것 때문에 이 사람이 누구인지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그의 온 가족이 구원받고 헌신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구레네 시몬의 부인은 바울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부를만큼, 그의 선교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모든게 우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을 통해서도 구레네 시몬과 그의 가정을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셨던 것입니다.
▶만약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예수님 십자가 지고가시는 그 현장에서 그 십자가 대신 질 자원자를 한 명 뽑는다고 한다면… 아마 세상 목사 장로 집사 힘좋은 청년까지 서로 지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 현장에서 잠시나마 대신 질 수 있다면…. 세상 영광 영광 이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구레네 시몬은 우연히 졌어요. 그냥 구경나왔다가…
사람은 우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우연은 없습니다. 주님의 섭리와 축복이 있을 뿐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게 된거…. 주님의 교회를 섬겨 봉사하는 거 … 다 주님이 계획과 은혜가운데 주신 선물인 줄 알고 귀히 여기시기를 축원드립니다.
- 주님은 말씀을 이루신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이렇게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증언하고 있는데, 이는 스가랴 9:9 입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즉 성경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임할 때, 나귀새끼를 타고 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루심으로 당신이 메시야 이심을 더욱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생애는 곧 약속된 예언의 말씀들을 이루는 생애였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도 (사7:14),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도 (미5:2),
그의 손과 발이 못박힐 것도(시22:16),
그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죄때문이라는 것도 (사53:6),
그의 무덤이 부자와 함께 될 것도(사53:9)…..
▶그래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과거에 예언된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님은, 또한 현재와 미래에 그분을 통해 약속된 모든 말씀들을 또한 이루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이 항상 동행 하시는 인생이 되었으며,
결국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함께, 모든 하늘의 복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계21:4>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주님은 이것들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집안에 흐르는 저주가 있을 수 있다고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가게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 라는 책.
예수를 믿어도 늘 무슨 일이 안되는 이유는 과거의 조상들의 죄가 집안에 여전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리스도 인에게도 일종의 어두운 운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운명은, 이미 정해져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길이 있다는 것이죠.
정말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런 종류의 운명이 있는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운명이 있는가? 운명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새로운 운명이 있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정해진 삶의 길…
바로 영원한 축복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의 여건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됩니다.
주님의 동행하시는 은혜 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축복의 결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때로 고난과 질병으로 슬픔과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소망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반드시 그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청교도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믿음으로 승리하고 천국에 들어오는 성도들의 얼굴에는 마귀의 손톱자국이 가득하다…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마음에 의심과 원망과 불신앙을 불어넣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더러 그런 위협과 웅덩이에 빠져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최후 승리는, 우리의 영원한 축복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반드시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은겸손하시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루신 스가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라고 했고, 오늘 본문에도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모두 메시야에 대한 호칭이면서 또한 왕에 대한 호칭입니다. .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왕인데 나귀,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는 것이죠.
당시에 존귀한 사람들, 부유한 사람들은 말을 탔고 결코 나귀를 타지 않았습니다. 나귀는 평민들이 주로 사용했는데 주로 짐을 싣어 나르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나귀가 어느정도 컸을 때 이야기입니다. 어린 새끼들은 아직 아무데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귀를 풀때에 주인이 했던 말은 <막11:5>”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즉 왜 남의 나귀를 푸느냐 라는 의미보다는, 이런 어린 나귀를 어디에 쓸데 있다고 푸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약속된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고 했고 왜 예수님은 그것을 성취하셨을까요? 그것은 일종의 왕의 대관신, 대통령 취임식의 세레모니와 같은 것이였습니다.
대관식, 취임식의 모든 순서뿐 아니라 초청인사들까지 모두 그가 앞으로 어떤 통치를 할 것이며 어떤 국정방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만약 취임식 앞자리에 가난한 자들, 고아와 과부들이 앉게 된다면 그것은 앞으로 그 왕이(대통령)이 자신의 국정방향을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것을 나타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마차나 말도 아니고, 나귀 중에서도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은 그가 얼마나 겸손하여 자신을 낮추는 왕인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낮추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자신를 낮추셔서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나아가 죽기까기 복종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일주일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시작됩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통하여 당신이 메시야 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능력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자신의 능력만 드러내고, 그 능력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만 쫓아내시고는 그냥 아버지께로 되돌아 가셨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분은 능력의 선지자도,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도 될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죄인된 우리의 구주는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분이 죄인된 우리의 자리까지 낮아지셔서 우리를 대신해 죽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은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번 한주간 자기를 죽기까지 낮추신 겸손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주님을 묵상함으로 그 주님을 따르는 한주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